후지타 카즈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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藤田 和之
종합격투기 관련 인물프로레슬러
국적
일본
종합격투기 전적
29전 17승 14패

6KO, 8서브미션, 2판정

8KO, 2서브미션, 4판정
생년월일
1970년 10월 16일
신장 / 체중
183cm / 109kg
별명
이노키즘 최후의 야수
'''NEXT TIME, MY TIME'''[1]
전체급 통틀어 동양인 역사상 역대 최강의 선수이자 최강의 맷집을 지닌 사나이다.
1. 전적
2. 파이팅 스타일
3. 기타
3.1. SRC 소송사건


1. 전적


안토니오 이노키의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 활동하던 그가 MMA에 데뷔한 것은 PRIDE 2000 무차별급 그랑프리를 통해서였다. 2000년 1월 GP 개막전에서 한스 나이먼을 스카프 홀드로 가볍게 제압한 후지타 카즈유키는 2000년 5월의 그랑프리 토너먼트 8강전에서 마크 커를 상대하게 된다.
당시 커는 UFC 토너먼트 2관왕에 PRIDE에서도 무적의 행보를 이어가고 있었다. 후지타는 초반 커에게 연달아 TD를 당하며 수세에 몰렸고, 강렬한 니킥을 정통으로 얻어맞으며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이를 모두 맷집으로 버텨냈고 오히려 커의 바디킥을 캐치한 후 사이드를 빼앗고는 파운딩과 그라운드 니킥을 난사하며 커를 그로기로 몰고 갔다. 후지타의 만장일치 판정승. 마크 커는 이 경기 이후로는 완전히 쇠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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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경기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같은날 열린 토너먼트 4강전인 마크 콜먼과의 대결을 포기하게 된다. 시합시작과 동시에 시도한 태클이 막히자 코너에서 스톱을 선언하며 후지타 카즈유키의 TKO패가 선언된다. 다만 실질적으로는 콜먼의 부전승이었다.
2000년 8월 PRIDE.10에서는 UFC 슈퍼파이트 챔피언인 켄 샴락과 격돌한다. 두 선수는 일진일퇴의 대결을 펼쳤으나 1라운드 6분 46초 켄 샴락이 탈진하며 코너 스톱으로 후지타가 승리하게 된다. 켄 샴락이 클린치 공방에서 근소하게 우위를 잡고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경기가 끝나고 잡음이 일기도 했는데, 실은 이때 샴락이 심장에 이상을 느낀 것이라고 한다. 사후결과 샴락은 근육증진제 약물 과다복용으로 심장이 통증이 온 것인데, 후지타 카즈유키는 그 약물과다복용자 상대로 안면 정타를 수차레 허용해도 단 한 번의 테이크다운을 허락하지 않으며 맷집의 괴수임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줬다.
2001년 8월 K-1 앤디 훅 추모 대회에서 미르코 크로캅과 대결하는데 태클을 하다가 카운터 니킥에 정통으로 걸리며 컷에 의한 TKO패를 당한다.
2002년 8월, 안토니오 이노키가 주최한 단발성 격투이벤트 UFO-Legend에서 야스다 타다오를 꺾은 후, 2002년 12월 이노키 봄바예에서 다시 한번 크로캅과 대결한다. 경기 초반에는 연달아 태클을 성공시키며 필살 개비기로 잘 운영하고 있었으나, 2라운드부터는 스프럴에 막혀 4점 니킥을 왕창 얻어맞은 후로는 흐름을 빼앗긴다. 그 후 양측이 소강상태에 접어드는듯 싶었으나 종료를 10초 남기고 기어이 3번째 테이크다운을 성공시키며 호각의 승부를 보였다. 그라운드점수만 봐도 후지타 카즈유키의 판정승이 점쳐지는 승부였으나 심판은 모두 크로캅의 손을 들어주었고 후지타는 아쉬운 패배를 맛봐야 했다. 만약 2000년대 UFC의 채점기준이라면 후지타 카즈유키의 완승이었을 것이다.
2003년 6월에는 PRIDE.26에서 에밀리아넨코 효도르와 일전을 벌였다. 당연히 언더독 평가를 받았고 예상대로 효도르가 우세한 경기를 펼쳐나갔다. 그렇게 1라운드 2분이 가까워졌을 무렵 효도르가 갑자기 펀치러쉬를 감행했다. 여기서 사건은 터졌다. 효도르의 레프트에 후지타가 풀스윙한 라이트가 정확하게 카운터로 꽂힌 것이다. 이 한방으로 효도르는 그로기에 빠져 비틀거렸고 후지타는 다시 없을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곧바로 달려들지 못한 채 효도르에게 클린치를 허용하여 회복할 시간을 주는 실수를 범했고,[2] 결국 데미지를 회복한 효도르의 곧바로 이어진 바디킥-원투에 다운되고 그대로 리어 네이키드 초크까지 이어지며 안드로메다행 직행열차를 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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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5월에는 K-1 ROMANEX에서 밥 샙을 상대로 머리통을 날려버릴 듯한 사커킥을 보여주며 밥 샙이 탭을 치게 만들어 서브미션승을 거뒀고, 2004년 12월 K-1 Dynamite!!에서는 2004 아테네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였던 이집트의 카람 이브라힘을 원펀치 실신KO로 잡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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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에는 PRIDE 무차별급 그랑프리 1차전에서 제임스 톰슨과 격돌했다. 초반 태클이 모두 막히고 타격과 클린치 싸움에서 압도당했으나, 맷집으로 다 씹어버리며 계속 들이댔다. 1라운드 후반 톰슨의 페이스가 느슨해진 틈을 타 펀치를 적중시킨 후 피튀기는 인파이팅에서 톰슨을 침몰시키며 역전승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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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에 피가 튀었다.
2006년 7월의 2차전에서는 PRIDE 미들급 챔피언인 반달레이 실바와 대결했다. 중반까지는 본인 장기인 TD후 개비기로 어느 정도 잘 운영하다가 얼마안가 스탠딩에서 얻어맞고 다운되더니 사커킥에 난타당하며 TKO로 패하고 만다. 그런데 후지타 카즈유키가 탭을 쳤는데도 시마다 레프리가 씹어버린 탓에 시마다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일기도 했다.
2006년 12월 PRIDE 남제에서 다시 승수를 추가하지만 2007년 4월 PRIDE.34에서 제프 몬슨에게 리어 네이키드 초크로 패했다.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PRIDE가 해체됐고 후지타는 센고쿠행을 택했다. 2008년 3월 센고쿠 1진에 참가해 피터 그래엄에게 남북초크로 섭미션승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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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08년 6월 센고쿠 3진에서 트래비스 위프에게 얻어맞으면서 KO로 패했고, 이후 삼보출신의 불가리아 파이터 블라고이 이바노프에게 완전히 압도당하고 알리스타 오브레임에게 1라운드 초반 보는 사람이 다 아플 정도의 니킥을 맞고 KO패 당하면서 총 3연패를 기록한다. 오브레임 전에서 니킥에 두개골이 함몰되는 심각한 부상을 입으면서 사실상 현역에서 물러나게 된다.
2013년에 일본 유도왕 이시이를 상대로 복귀전을 했지만 현저하게 밀리면서 만장일치 판정패를 당했다.
2017년 11월 11일 Road FC에서 아오르꺼러와 무제한급 경기를 가진다. 격갤 등지에선 2013년 이후 사실상 은퇴 상황이었다가 2016년에 2전을 가지고 그나마도 무기력한 패배를 기록한지라 매값 벌러 나온 거 아니냐는 등 큰 기대는 갖지 않는 분위기였고, 역시나 일방적인 패배를 당했다.
2018년 5월 12일에 열리는 Road FC 무제한급 토너먼트의 리저브 매치로 중국의 공한동과 경기한다. 그리고 오랜만에 기권승을 따낸다. 경기 내내 공한동이 일방적으로 밀리다가 클린치 중 후지타 카즈유키의 손이 허리를 잡으러다 파울컵을 스쳤는데 공한동 선수가 갑자기 로블로 어필을 하며 경기 속행의사를 밝히지 않으며 엄살을 피운 것(...)이다. 심판진끼리 잠시 회의를 하더니 로블로 판정이 아닌 기권으로 판단했다. 솔직히 누가 봐도 로블로는 아니었다.
2018년 8월 18일에 열린 Road FC 049에도 출전한다. 19살이나 어린 미국의 저스틴 모튼을 상대로 초반 스탠딩 타격전부터 우세한 모습을 보이며, 2라운드 남북초크로 승리를 거둔다. 아오르꺼러에게 무기력하게 패배하고 공한동에게도 찜찜한 기권승을 따내서 그런지 더욱 값진 승리가 되었다. 이전과 비교했을때 몸이 전성기때처럼 굉장히 다부지게 변한데다가 펀치 속도가 빨라져 약물을 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는 팬들도 있다. 이 경기 이후 최무배를 콜한다.
2018년 11월 3일에 최무배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최무배는 뎀프시롤(?)을 하며 후지타 카즈유키에게 접근하려 했지만, 후지타의 뒷손 페이크에 걸리며 왼손 훅에 맞고 쓰러졌고, 이후 파운딩과 해머링을 맞다가 레프리 스탑을 하며 후지타의 승리가 선언되었다.

2. 파이팅 스타일


프로레슬러로 유명하지만 MMA에서는 아마추어 레슬링 베이스에 가깝다. 레슬링 커리어가 꽤 대단한데 고등학교 시절부터 자유형 선수로 활동하며 1988년 국제레슬링 연맹(FILA)의 주니어 대회에서 6위에 입상했다. 1993년에는 아시아 대회 성인부에서 5위를 차지했고 1993~1994년 사이에 월드컵 국대로 뛰기도 했다. 그레코로만에서도 일본 챔피언이었다고 한다. 1993년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입단한 뒤에도 아마추어 레슬링 대회에 나가느라 1996년에나 정식으로 데뷔할 정도였다.
MMA에서도 뛰어난 하단태클과 클린치 레슬링을 무기로 삼았다. 여기에 사기적인 맷집과 파워가 더해졌고 타격도 정교한 맛은 떨어지지만 한방의 파괴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약점은 패턴이 너무 단순하고 레슬링도 정상급에서 활약하기에는 조금 부족했다는 것이다. 일단 태클이 막히면 할 수 있는게 거의 없었고, 그렇다고 콜먼처럼 하단태클이 쩌는 것도 아니었다. 1970년생으로 데뷔 시점에서 이미 30세를 넘겼기 때문에 체력적인 한계를 보인 점도 있다.
게다가 전성기 시절 갈비뼈 골절이나 두개골 함몰 등의 큰 부상을 많이 당해서 그런지 2008년 이후부터는 기량이 거의 자버급 선수가 된다. K-1이나 프라이드 시절 상위권이었던 다른 노장 선수들 중 은퇴하지 않고 현역을 유지하는 선수들이 마이너 단체에서라도 활약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조금 안쓰럽다. 그나마 요즘은 로드 FC에서 3연승을 거두고 있으니 조금은 나아진 편이다.

3. 기타


후지타 카즈유키가 갖는 가장 큰 의의는 무엇보다도 ''''헤비급에서 통했던 일본인''''이라는 것에 있다. 일본은 1990년대부터 많은 종합격투기 선수들을 배출했지만 헤비급에서 제대로 된 활약을 보였던 선수는 없었다. 실력은 그렇다쳐도 선천적인 신체 피지컬의 한계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 중 거의 유일하게 세계 레벨에서 통했던 선수가 후지타 카즈유키였다.[3] 더 있다면 코사카 정도지만 코사카는 '''강한 선수들에게는 너무 압도적으로 패하기만해서''' 통했다고 볼 정도는 아니다. 당시 MMA 세계 2위까지 반등했던 저력을 보였던게 후지타 카즈유키였던 걸 봐도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별명으로는 "이노키즘 최후의 야수"로 유명하다. 이처럼 이노키즘의 선봉장으로 평가받으며 안토니오 이노키의 총애를 받았으나 언제부터인가 불화설이 나돌게 된다. PRIDE에 진출한 무렵도 이때를 전후해서인데, 이 때문에 후지타 카즈유키의 행보를 두고 말이 많았다. 하지만 이후 안토니오 이노키가 관여한 IGF 흥행에 2016년에도 참여하는 모습을 보인다.
IF 놀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후지타가 좀 더 빨리 제대로 된 환경에서 체계적인 MMA 훈련을 받았으면 어땠을까?'라고 말하기도 한다. 확실히 포텐셜은 대단했던 선수.
브록 레스너와는 MMA가 아닌 프로레슬링으로 경기한 적이 있다. 프로레슬링 커리어도 나름 굉장한 선수로,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최고 벨트인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보유한 적도 있다. 특히 IWGP 헤비웨이트 타이틀을 획득한 경기 중 정통 프로레슬러인 텐잔 히로요시를 2분 만에 슬리퍼 홀드로 실신시키고 승리한 것이 유명하다. 프로레슬링이라는 경기가 2분만에 무슨 재미를 느낄만한 건덕지가 생기는 게 아니기 때문에[4] 엄청난 혹평을 받았으며, 당시 신일본의 사건사고 중 하나로 길이길이 남아 있다. G1 클라이맥스 2005 시즌에 카와다 토시아키와의 경기, 2015년 11월 15일엔 세키모토 다이스케와의 태그로 스와마 & 오카바야시 유지를 상대한 경기가 데이브 멜처에게서 4성을 받았다. 또 2001년 6월 6일에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나가타 유지를 상대로 방어할 때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2001년 베스트 바웃에 선정되는 등 프로레슬러로서는 그저 그런 후지타 카즈유키가 명경기를 만들 수 있게 도와준 특급 워커들이 있었다.
신일본 프로레스가 타나하시 히로시, 오카다 카즈치카로 인해 부활하고 우리나라 레슬링 팬덤에도 인지도가 올라간 현재 후지타 카즈유키는 MMA 붐에 휘둘려지던 프로레슬링의 암흑기를 대표하는 선수로 남아있다.
한국에서는 효도르와의 대결로 유명하다. 일명 '''효도르 호랑나비 춤''' 사건. 이후 격투팬 사이에서는 타격에 맞아 다리가 풀리는 현상을 '호랑나비 춤을 췄다'라고 부르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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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SRC 소송사건


2009년 K-1 다이너마이트에서의 오브레임전에 대한 파이트머니를 두고 후지타와 SRC(센고쿠) 사이에 벌어졌던 소송. 일본 MMA 파이터들의 몸값을 추정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정확한 자료 중 하나다.
해당 시합은 K-1와 SRC의 공동개최로 연말 이벤트가 열린 것이었다. 후지타는 알리스타 오브레임과의 대결에서 1분 15초 만에 니킥에 넉아웃되어 실신했고 급히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이 결과를 두고 SRC측은 후지타가 시합에 이길 의지없이 단지 대전료를 받을 목적만으로 경기에 임했다고 판단, 의식불명이 된 선수에게 은퇴를 권고한다는 규정에 따라 후지타에게 은퇴를 권고했다.[5] 더불어 후지타의 계약금 중 일부를 미지급하겠다는 입장 또한 발표했다.
문제는 그 액수가 충격적이었다는 것. 후지타 측은 SRC로부터 840만 엔 적은 금액을 받았다고 주장했고, SRC는 그것이 후지타와 계약한 5 시합에 대한 계약금 중 오브레임전 분량은 뺀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어 밝혀진 계약서에 의하면 후지타는 계약금 4천만 엔에 시합당 파이트머니는 3천만 엔, 연말 이벤트에 출전할 경우 4천만 엔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이는 당시 미국 무대에서 최고의 몸값을 받고 있었던 척 리델이나 조르주 생 피에르와도 맞먹는 금액이었는데, 과거 DSE나 FEG의 선수들이 1 ~ 2만 달러 정도의 대전료를 받는다고 발표해 온 것을 생각한다면 굉장한 액수였다.
사건의 자세한 경위와 계약서 내용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1] PRIDE 미국 대회에서 링에 올라와서 한 말.[2] 실은 완벽하게 카운터로 들어간 게 아니고 '''같이 맞았다.''' 근데 후지타 카즈유키의 맷집이 넘사벽인데다가 이쪽은 눈감고 받아친 반면 효도르는 들어오다가 맞았다는 차이가 있다. 아주 잠깐이지만 후지타 카즈유키도 다리가 풀려 있었다.[3] 사쿠라바 카즈시, 오카미 유신 등 중량급 무대에서 활약한 선수는 더 있지만 헤비급은 후지타 카즈유키와 코사카 정도다.[4] 레슬매니아 33의 브록 레스너 대 빌 골드버그처럼 선수 본인이 가진 이미지와 신체 능력을 이용해 짧은 시간 동안 큰 기술과 범프로 몰아붙이거나, 슈퍼 J 컵 1994에서의 블랙 타이거 2세타카 미치노쿠처럼 짧은 시간에 정교하게 프로레슬링 테크닉을 채우거나, 섬머슬램 1993에서의 브렛 하트제리 롤러처럼 스토리텔링과 감정선을 모두 짧은 시간 내에 보여주는 등 매우 뛰어난 프로레슬러가 아닌 이상 5분 언저리의 경기 동안 무언가 보여주기 힘들다.[5] 2008년 이후 후지타는 1승 3패의 전적을 기록했을 정도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