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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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경력
3.
4. 어록


1. 개요


Sir Arthur Harris, 1st Baronet
'Bomber' Harris
1892년 4월 13일~1984년 4월 5일 (향년 91세)

'''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이 자리에 앉았다.'''

“The Nazis entered this war under the rather childish delusion that they were going to bomb everyone else, and nobody was going to bomb them. At Rotterdam, London, Warsaw, and half a hundred other places, they put their rather naive theory into operation. They sowed the wind, and now they are going to reap the whirlwind.”

'''“나치는 다른 모든 사람을 폭격하고 자신들은 아무도 폭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소 유치한 착각으로 이 전쟁에 뛰어 들었습니다. 로테르담, 런던, 바르샤바 및 기타 50 개 장소에서 그들은 그 순진한 이론을 적용했습니다. 그들이 바람을 심었으니 이제 그들은 광풍을 거둘 것입니다.”'''[1]

Attacks on cities are strategically justified in so far as they tend to shorten the war and so preserve the lives of allied soldiers.

도시에 대한 공격은 전쟁을 단축시키고 연합군의 생명을 보존하는 한 전략적으로 정당화됩니다.

“In spite of all that happened at Hamburg, bombing proved a relatively humane method.”

"함부르크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폭격은 상대적으로 인간적인 방법임이 입증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영국 공군 폭격기사령부의 사령관직을 재임했던 공군 원수.

2. 경력


'''영국커티스 르메이'''
로디지아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어린 시절 그곳에서 살아서 영국내에 연줄은 많이 없었다.
잘 알려진 별명이 두 개 있다. 하나는 '폭격기 해리스 (Bomber Harris)'이다. 별명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적극적인 성격의 해리스는 1942년에 폭격기 사령부 지휘관에 임명된 후 독일 본토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명령하여, 함부르크, 베를린, 쾰른, 드레스덴 등에 불벼락을 내리고 도시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또 다른 하나는 영국 공군에서 붙인 '''도살자 해리스''' (Butcher Harris)다. 이 별명은 폭격 정책 때문은 아니고 해리스가 폭격기 승무원들의 손실과 고난에 대해서 무심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라고 한다. 당시 폭격기 승무원들의 생존기간은 1차 대전 참호전에서 보병들의 생존기간보다도 짧았다고...
그 중 제일 유명한 것은 드레스덴 폭격이며 이 폭격의 위력은 2차 대전 당시 연합군이 수행한 어떤 폭격보다도 위력적이어서 독일측 공식 집계로는 2만 5천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나 이후 3만 5천여명으로 조정되었다. 다만 실제 사망자는 2~7만 정도로 추산된다. 이 작전기간 동안 독일 민간인의 피해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어서 쾰른과 함부르크에서 각각 4~5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한편으로는 영국 폭격기 승무원에게도 매우 위험하여 수만 명의 장병들이 하늘에서 목숨을 잃었다. 해리스는 1946년에 원수로 진급한 후 퇴역하였고, 1953년 준남작 작위를 받았으나 외아들이 자손없이 먼저 죽어 준남작 작위는 자신의 대에서 끝났으며, 딸도 없었으므로 그의 자손은 없다.
전쟁이 끝난후 "나치 전범들과 나의 차이는 그들은 감옥에 갔거나 교수형을 당한 반면 나는 자유롭다는 것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연합군 장성으로써 적에게 보여준 태도 때문에, 커티스 르메이와 자주 연관된다. 르메이 외에도 비슷한 성향을 가진 인물로는 루프트바페의 원수이자 그 유명한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의 사촌동생이였던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이 있다.
전쟁이 끝난 후 각종 훈장과 메달을 받았으며 1946년에는 공군 참모총장을 거치지 않고 공군 원수로 진급하였는데 영국 공군은 공군 참모총장이 아니면 원수로 진급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걸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2] 그러나 드레스덴을 포함한 도시를 공습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도 있다보니[3] 종전 직후 영국군 수뇌부 장군/제독 동상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혼자 제외되는 등 은근히 푸대접을 받기도 했고 이에 실망한 해리스는 이놈의 나라는 영웅을 대접할 줄 모른다면서 당시 대영제국·영연방의 일원으로 영국과 동군연합 국가였던 남아프리카 연방(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전신)으로 이민가 버렸으나[4] 1953년 준남작 작위를 받고 윈스턴 처칠이 다시 수상 자리를 차지하는 등 상황이 변하자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템스 강에서 배로 만든 집에서 살았다. 이후 1984년 4월 5일에 91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의 92번째 생일을 며칠 앞둔 때였다.
그리고 해리스가 죽은 지 5년후 런던의 세인트 클레멘트 교회에 해리스의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여담으로 제막식에서 어떤 독일인이 히틀러도 1시간에 10만명을 죽이진 못했다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독일인들은 대충 넘어가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드레스덴 출신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를 독일의 전후반성이 철저했다고 하기는 무리가 있는 것이 SS를 비판하면서 국방군의 깨끗함에 대한 신화를 만드는 것도 반공적 분위기의 냉전에서의 정치적 의도가 있다. 또한 저것을 당연하다거나 그냥 넘어가는 것은 일반적인 (중도, 내지 중도우파적인) 정치성향을 지닌 전후 재건기의 독일인들의 태도이고, 좌파적 성향이나 평화주의적 성향을 띈 시민이나 정치세력 중에서 저런 일을 넘어가려는 경우는 일반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입장을 가지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하여튼 그 피해에만 주목하는 친독 성향의 밀덕, 2차대전 덕후들에게는 영국히틀러로 불리며 좋은 평은 못 듣는데 주로 폭격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많이 희생되었고 그가 단행한 드레스덴 폭격은 연합군의 전략 폭격에 당한 케이스 중에도 특히 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비판이 나치의 만행을 희석하는데 악용되는 일도 종종 있어서 제대로 된 평가가 힘든 경우이다. 일단 본인은 위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누구처럼 자길 옹호하고 다니지는 않았으며 전략 폭격 자체는 전쟁 범죄가 아니기도 하다.[5] 물론 누군가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비판을 덮어버려서는 안되며 전쟁법과는 별개로 도의적인 책임이 면제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총력전 항목을 보면, 2차 대전은 누가 뭐래도 역사상 가장 최악의 총력전이었고, 쉽게 보면 이런 민간인이 곧 전쟁수행원이었다. 드레스덴이 충격적이었던건 전쟁 다 끝난 마당에 3시간에 걸친 폭격에 그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는 것과 도시가 완전히 핵폭탄 맞은 것처럼 날아갔다는 것이다.[6] 그래도 드레스덴 폭격은 결국 전략적인 이유에서 진행된 작전이었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먼저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불벼락을 맞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 시점에서야 전쟁이 다 끝나가는 판에 너무한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지만 당시 연합군은 그걸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영국군은 전쟁이 빨라도 45년 12월은 지나게 끝날것이라고 예상했고 드레스덴 공습 얼마 전에는 독일군이 대규모 역습을 실시하여 연합군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히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만간 전쟁이 끝난거니 대규모 공습은 하지 말라고 해봐야 설득력이 없다.
여기에 대해서 이 총력전을 핑계로 학살과 전범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전형적인 파시즘식 사고방식이고 국가의 모든 총력을 다해서 전체의 목적에 봉사하라는 사고방식은 나치 독일일본 제국의 사고방식과 정확히 동일하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건 연합군이 공격할 이유가 없는 도시에 민간인을 작정하고 죽일 목적으로 폭격을 가했을 때에나 적용이 가능한 주장이다. 연합군이 노린건 추축국의 산업 및 군사시설이었고 당연히 파괴해야할 대상이었기에 공격했을 뿐이다.[7] 물론 당시의 기술적 한계 등의 문제로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가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피해를 감수하고 공격했던거지 그런 피해를 발생시킬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2차 대전에 선도 악도 없다는 것도 웃기는 이야기. 연합군이 절대선인 것은 아니고 분명히 비판받아야할 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실이 추축국을 옹호할 논거가 되지는 못한다. 2차 대전의 시작은 추축국의 야욕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조직적으로 민간인과 포로를 학살하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침략전쟁을 일으킨 것은 추축국이며 이는 연합군에게 아주 강력한 명분을 준다. 더군다나 연합군의 경우에도 일선 장병들에 의한 전쟁범죄가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현장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들이고 연합군은 자체적으로 이들을 기소하고 처벌했다. 반면에 추축국은 국가 단위에서 정책적으로 학살을 일삼았고 살인공장이라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악랄한 행위까지 있었다. 이러한 차이를 무시하고 연합군도 전쟁범죄가 있었으니 그놈이 그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파시스트들의 비겁한 물타기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사기 죽이기' 폭격은 독일이 런던에 먼저 해 버렸다. 이전에도 폴란드바르샤바, 비엘룬, 프람폴 등 독일군에게 점령당한 많은 국가들이 당했으며, 네덜란드로테르담도 거의 지도에서 지워질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연합군의 전략 폭격이 유명해서 이 쪽만 부풀려진 감이 있는데, 사실 이런 폭격은 '''독일군이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 뿐만 아니라, 무장SS[8]가 지속적으로 V-1, V-2 같은 로켓을 쏘아대며 군, 민간인 할 것 없이 피해를 가중시키고 있기도 했으므로 제공권을 장악한 시점에서 같은 명목으로 폭격을 감행하는 것을 현재 우리 관점에서 욕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 두들겨 맞은 것 덕분에 영국은 현재까지도 유명한 그 복지 제도를 도입하게 될 정도였고, 맛없는 영국 음식의 원류가 이것 때문이라는 가설도 나오는 상황이다.
정 까고 싶다면 쿠르드족을 독가스로 학살하라고 명령을 내린(독가스가 부족해 이뤄지지 않았지만 결국 영국군이 쿠르드인들을 학살한 건 같았다) 처칠의 흑역사처럼 해리스도 1920년대에는 영국의 식민지인 이라크에서 비행 대대장으로 식민지 사람들을 폭격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선 전력을 끌어오자. 애초에 식민지 저항에 대한 폭격 진압으로 승진가도를 달린 사람이다.
한편 유독 해리스가 욕을 먹는데는 정치적, 인종적 이유도 다소 있다.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독일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으니 독일에 공습을 가해서 많은 피해를 입혔던 해리스와 폭격기 사령부 승무원들을 띄워줄 수 없었고 한참 뒤에나 언급될 수 있었다. 인종적으로는 어찌되었든 같은 백인끼리 이건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것으로 아시아에서 민간인 상대로도 소이탄을 잘 써먹은 커티스 르메이는 전후에도 잘 나가서 공군참모총장까지 역임하고 1965년에 퇴역했다. 리히트호펜 역시 민간인에게 신나게 소이탄을 뿌렸지만 그 공로로 원수를 달았지만 종전 직후 병으로 죽어버렸고 나치 독일이 패망해서 그런지 이야기 자체가 잘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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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동상은 영국 공군의 중앙 교회인 런던의 성 클레멘트 데인스 교회 앞에 있는데, 휴 다우딩(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전투기사령관) 공군 대장의 동상과 함께 나란히 세워져있다. 다만, 지금까지도 반달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으로 24시간 경찰에 의해 감시되고 있다.
폭격기 사령부에서 대장계급으로 사령관직을 수행한 사람이며 이후 폭격기 사령부가 전투기 사령부와 통합하여 Strike Command로 바뀌는 1968년까지 모든 사령관은 중장이었다.

3.


4chan 등지에서 독일 혹은 독빠들을 깔때 DO IT AGAIN BOMBER HARRIS(다시 해주세요 폭격기 해리스)라고 하는 것이 유행이 되어 유튜브레딧에서도 홀로코스트 부정론을 펼치는 네오나치들이 보이면 수시로 소환되어 극딜을 넣는 일종의 주문이 되었다. 커티스 르메이가 한국에서 석기시대의 아이콘이 된 것과 비슷한 . 그 외에 상기한 발언으로 인해 광풍 성애자 기믹도 있다.

4. 어록


무기를 만드는 공장을 부술 수 없다면 그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의 집을 잿더미로 만들자.

폭격의 목표는 적국의 민간인, 그 중에서도 산업 인력을 죽이는 데에 있다.

독일인들은 누구든지, 제복을 입었든지 않았던지를 가리지 않고 모두 합법적인 표적이다.

적국의 민간인도 적이다.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적을 위해 흘릴 눈물 따윈 없다.

최단시간 내에 최다수의 폭격기를 통해 단시간에 최대의 단위면적을 쥐새끼 한마리 남기지 않고 모조리 초토화시켜야 한다.

나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이 자리에 앉았다.

나치 전범들과 나의 차이는 그들은 교수형을 당했거나 감옥에 갔고 나는 자유라는 것 뿐이다.

저들이 바람을 심었으니, 이제 광풍을 거두리라


[1] 호세아 8장 7절에서 유래한 문장으로, 나치 독일이 바르샤바, 로테르담, 영국 공습으로 시작한 전략 폭격을 그들에게 혹독하게 되갚아주겠다는 취지의 발언이다. 현재도 해리스의 옹호자들에게 자주 인용된다.[2] 공군 참모총장을 거치지 않고 원수로 진급한 사례는 아서 해리스와 숄토 더글러스 2명 뿐이다.[3] 뉘른베르크 재판 판결이 나온 직후 영국의 한 제독이 '''되니츠가 10년형이면 해리스는 종신형이다.'''이라고 디스했다고 한다. 실제로 제3제국 국방군 중 그나마 페어 플레이(?)를 했던 것은 바로 독일 크릭스마리네고, 오늘날 독일 국방군이 냉전 시대와 달리 SS 못지 않은 전쟁범죄집단으로 재평가받는 와중에도 욕을 거의 안 먹고 있다. 물론 이는 크릭스마리네가 유독 깨끗한게 아니라 그 당시 전 해군이 서로에게 비교적 신사적이었던 거지만. 그러나 되니츠도 엄연히 전쟁범죄를 저지른 게 맞는데, 잠수함을 동원해 민간 상선을 격침한 것이 아니라 중립국 선박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 전시 포로에 대한 부당한 처우(영국 코만도 대원의 즉결처분 등)나 점령지 민간인 등에 대한 강제 노동에 대한 서류에 책임자로서 서명한 점 등이 유죄로 인정된 것이다.[4] 굳이 해리스만 아니라도 영국 공군의 폭격기 승무원들은 전투기 조종사들에 비해서 은근히 푸대접을 받았는데 심지어 학살자 취급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전투기 조종사와 똑같이 목숨걸고 싸웠던 폭격기 승무원들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5] 군사적인 목표물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민간인의 피해가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전쟁범죄는 아니다. 설령 그 과정에서 민간인의 피해가 발생할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라고 한다.[6] 다만 연합군의 폭격 목적지 중에서는 상당부분 파괴된 곳도 많았다.[7] 좀 안타까운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영국이 야간 공습 때 폭탄이 도심쪽으로 떨어지자 사람들이 숲으로 피난을 갔다. 그런데 다음날 주간에 공습하던 미 육군은 기상악화로 도심을 타격하면 민간인 피해가 다수 발생할 것을 우려해서 숲에 폭탄을 버렸는데 하필 거기에 다수의 민간인이 있어서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고 한다.[8] V병기는 공군과 SS가 관할권을 놓고 싸웠는데, 결국 SS가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