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역사/목록/군사

 




1. 개요
2. 등재 기준
3. 육군
4. 해군
5. 공군


1. 개요


흑역사 중, 군사 분야에 대한 자료들을 분류해 정리한 문서다.

2. 등재 기준



토론 합의에 따른 정리 작업 진행중입니다. 삭제된 내용을 복구할 경우 위 등재 기준에 맞다는 출처를 첨부하십시오.

3. 육군


  • 국민방위군 사건: 한국전쟁 중 제1공화국 정부가 징집한 수만 명의 국민방위군이 보급을 받지 못해 후방에서 얼어서, 또는 굶거나 병에 걸려서 죽었다. 보급을 받지 못한 이유는 고위층의 횡령 및 뇌물이 가장 큰 이유였고, 당시 정부의 무능함 때문이기도 했다. 이 참사는 정확한 피해자 규모를 추산하기도 어려운데, 행군 중 발생한 사망자들을 장례를 치뤄준 게 아니라 그냥 땅에 묻어버렸고, 전후 재판에서조차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삼청교육대: 전두환의 반란군 정권이 주도한 것이긴 하지만 주 무대(?)는 육군 부대였으므로…하여튼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 17사단 종교시설 무단폐쇄 사건: 1992년 12월, 육군 제17보병사단에서 일어난 종교탄압 및 항명 사건. 개신교 광신자인 사단 직할 전차대대장이 개신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의 시설들을 폐쇄하고 종교 상징물을 훼손하였으며, 부하 장병들에게 개신교를 강요했다. 이를 인지한 사단장 서경석 소장은 종교시설을 즉시 원상복구 하고 부대 내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보장하라는 명령을 하였으나 묵살했다. 사건이 밝혀진 이후 종교계는 당연히 폭발했고, 서경석 장군은 해당 대대장을 해임시키고 구속, 징계처리 했으며 직접 불교계 인사들을 찾아가서 공식 사과하였다. 이어서 국방부 장관까지 사과 및 대책 마련을 약속하였으며, 당시 개신교 장로이기도 했던 김영삼 대통령이 불교계 인사들을 청와대로 초빙, 유감의 뜻을 밝혔다.
  • 논산 육군훈련소 인분 사건: 2005년 1월, 훈련소 중대장이 야간 점호 준비 중 화장실 변기의 대변이 청소되지 않는 모습을 발견하고 훈련병들에게 인분을 먹게 강요한 사건이다. 사건 발생 후 훈련병의 편지로 세간에 밝혀졌으며, 전 국민들이 충격 받은 사건[1] 해당 중대장은 징역형을 선고 받았으며, 국방부 장관이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육군 훈련소장에게 경고조치를 내리고 관련 간부들 14명을 징계위원회에 회부 했으며, 이를 인지하지 못한 헌병대 인원들을 교체했다. 이 사건을 비롯하여 비슷한 시기에 국군에 사건 사고들이 계속 발생하여 병영 문화의 개선이 시작되었다.[2] 예를 들어 이 사건을 기점으로 전군의 훈련소들에서 훈련병들을 다루는 방식이 크게 변하게 된다.
  •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 통칭 임병장 사건. 전역을 얼마 안둔 병장 계급의 병이 터트린 사건이라는 점이 여타의 사건들과 비교되는 사건으로, 임도빈 병장이 총기로 난사 후 도주, 추격 끝에 붙잡혔다. 원인은 집단따돌림 및 내무부조리. 그러나 더 따지고 들어가면, A급 관심병사를 무리하게 GOP에, 그것도 실탄을 다루는 부대에 배치한 부대의 관리 부실이 크다. 내무부조리도 단순히 간부 몰래 병들간에 있었던게 아니라 이를 저지 했어야할 간부들이 동조하거나 방조한 정황이 있었고, 군의 사건 대응에 원인을 외부로 돌리려거나 사건을 축소하려는 듯한 행세가 뻔히 보였으며, 임병장을 추격하는 추격조들의 미숙한 추격 과정[3] 등 군에 대한 신뢰는 더더욱 추락했다..이 사건으로 5명의 사망자와 7명의 부상자, 추격 중 2명의 부상자가 발생 했으며, 임병장은 사형을 선고 받았다.
  • 530GP 사건: 2005년 6월 육군 제28보병사단 530GP에서 김동민 육군 일병이 내무실에 수류탄을 던지고 총기를 난사하여 8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당한 사건. 이른바 '김일병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사건의 원인은 병영 부조리. 범인 김동민 일병은 사형이 확정되어 국군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 제28보병사단 의무병 살인사건: 위에 서술된 530GP 사건과 같은 사단이었다. 이른바 윤 일병 사건. 2014년, 쌍팔년도에도 보기 힘들었을 극심한 선임병들의 가혹행위 끝에 후임 병사가 사망했다. 윤일병이 자살을 한게 아니라, 선임들에게 집단 구타 당해 죽었다.
  • M60 패튼 탱크 탈취 사건: 군인도 아닌 일반인에게 군사장비를 탈취당한 사건이다.
  • K11 복합소총: 최첨단 기술과 카탈로그 상의 보여지는 성능 에만 목을 메는 한국의 미숙한 방위산업 수준[4]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 일본 육상자위대의 처참한 가성비의 아파치 도입: 일본 자위대 무기는 자위대가 군대가 아니기 때문에 비축 수량에 한계가 있고, 세계 무기 산업 시장의 점유율도 낮아 대량 양산이 어렵다. 따라서 규모의 경제 효과가 낮아 높은 단가로 밀리터리 분야에서 악명 높다.[5] 그러나 이 사업은 그런 부분들과 별 관련없이 여러가지 사정이 꼬여서 폭망 테크[6]를 탔다. 대당 가격이 216억 엔 까지 올라갔는데, 전투헬기가 첨단 전투기와 맞먹거나 보다 비싼 가격까지 오르게 된 것.[7] 후에 한국이 아파치 가디언을 45억 엔 가량에 구매했고 대만마저도 아파치를 일본보다 많이 가지게 된 상황이 나와버렸다.
  •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과거 일본 제국의 육군과 해군은 완전히 따로 노는 걸로 부족해 자존심 및 파벌 싸움이나 해댔다. 그것이 비전시라도 문제인데 자기들이 전쟁을 일으켜놓고서도 대립을 해대는 걸 멈추지 않아 결국 외부에는 미국이라는 강적, 내부로는 알력 싸움을 반복하여 스스로 자멸해버렸다.

4. 해군


  • 팬시 호: 17세기 스페인 해군 최대의 흑역사, 다른 함선이면 몰라도 맨 오브 워 급 함선이 일개 해적에게 뺏긴 사건.
  • 림팩 표적 오사 사건: 1996년 림팩 당시 일본 해상자위대 호위함 아사기리급 3번함 DD-153 유우기리가 미해군의 표적예인기인 A-6 인트루더를 격추시키며 출중한 사격실력(…)을 널리 알렸다.
  • 칠천량 해전: 한국 역사상 유례 없을 정도의 졸전. 세계사로 범위를 넓혀 찾아봐도 이 정도의 졸전은 손에 꼽는다.[8]
  • 통영 YTL 침몰 사건: 1974년 2월 22일, 해군 훈련병들이 통영의 충렬사에 참배를 하기 위해 항만예인선을 타고 가다가 배가 전복, 159명의 꽃다운 나이의 장병들이 숨진 사건이다. 전투 중도 아니고 평시에 명백한 인재로 인해 많은 수의 군인을 잃었던 사고이다. 한국 해군 사상 최악의 수치스러운 사고이며, 전세계로 따져도 평시에 해상에서 군인이 이렇게 많이 죽은 일은 거의 없다. 이게 인재인 이유는 그 당시 통영 바다에는 폭풍주의보가 내려졌었고, 항만예인정의 정원을 2배 이상 초과했으며, 순직한 정장의 조함이 미숙했고, 훈련병들은 전투화[9]를 신고 있었으며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아 체력이 부족했었다. 이 사건 이후 한국 해군은 충렬사 참배를 훈련병 양성 과정에서 폐지했고, 해상으로 출항한 배에서 전투화 등 무거운 신발을 신고 다니는 것을 금지하게 된다.[10]
  • 음란물을 공유하다가 군사 기밀을 유출: 2007년 일본 해상자위대 하타카제 급 방공구축함에서 일어난 일. 자위대원들이 군함의 컴퓨터를 이용해 음란물을 공유하다가 군사 기밀이 유출되었다…….
  • 이지스 함과 민간선박 충돌: 2017년 한 해 동안 미국의 이지스 함은 4차례나 민간선박과 충돌 사건을 일으켰으며, 이 중에는 유조선이나 컨테이너 선 처럼 체급이 큰 선박도 포함되어 있다. #
    • 헬게 잉스타드 - 솔라 티에스 충돌 사고: 노르웨이의 이지스 호위함 헬게 잉스타드가 11만톤 대형 유조선인 솔라 티에스와 충돌하여 선체의 95% 정도가 침몰해버린 사고.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값비싼 이지스 함을 비전투 상황에서 해군 측의 과실[11] 로 날려버렸으니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노르웨이 당국이 받은 타격은 매우 컸다.
  • 강화도 해병대 동료 총격 사건: 2011년 7월 4일, 해병대 2사단의 선두초소에서 범인 김민찬이 아군에게 총격을 가해 4명을 사살한 사건이다. 사건 자체의 원인인 기수 열외, 실탄 관리 소홀, 영내 음주 등, 사건 결과인 아군 살해도 충분히 흑역사라 칭할 만 하지만, 사건 당시 해병대원 여러 명이 사격 소리에 놀라 속옷 차림으로 소초에서 뛰어나와 해안도로나 민간 쪽으로 도망쳤다는 점은 쇼킹 그 자체. 법적으로도 근무 이탈 및 탈영의 중범죄이고, 평소 타군에 비해 훨씬 정예군이라 자처하는 해병대에서 총소리에 놀라 속옷 차림으로 도망쳤으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무장 공비 한 명이 초소에 몰래 들어와서 총만 발사해도 초소 하나를 점령한다는 의미 아닌가. 거기에 더해서 범인에게 용감하게 대들었던 게 신병인 권혁 해병이었으며, 범인과 권혁 해병이 서로 무기를 빼잇으려고 몸싸움하는 동안 뒤에 있던 선임들은 눈치만 보며 아무도 돕지 않았다. 이로 인해 권혁 해병은 손에 화상을 입고 고환에 총알을 맞았다. 이런 혈투 끝에 범인을 생활관 밖으로 밀어내고 주변 선임 대원들에게 응급대처를 부탁했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아 결국 혼자 스스로 지혈했다. 평소 선임이랍시고 군기만 잡던 인원들은 실전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고 신병 홀로 처절히 사투를 했으니 이뭐병…….
  • 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 1966년 8월 8일, 해병대 장교들이 공군비행학교를 기습했다가 역으로 참교육당한 사건이다. 관련된 모든 교육생들이 큰 벌을 면할수 없을 정도의 군사범죄를 여러차례 저질렀으나, 베트남 전쟁 상황이라 장교가 부족해 주동자 몇 명만 재판에 회부된다.[12] 인명 피해로는 1명의 사망자와 39명의 부상자가 나왔고, 비행기 2대를 비롯한 공군학교의 시설들이 일부 파손되었다.
  • 카발레세 케이블카 추락 사고: 1998년 2월 3일 이탈리아 카발레세에서 미 해병대 비행기가 저공 비행 연습 중 케이블 카의 와이어를 끊어 버려 발생한 참사. 해당 비행기는 날개가 찢어졌으나 무사히 비상 착륙했다. 그러나 와이어가 끊긴 케이블 카는 추락하고 탑승자 전원 사망했다. 파일럿의 안전불감증이 부른 민간인 20명의 사망사건이다.
  • 테일후크 스캔들
  •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육군 항목에도 적혀있지만 서로 알력 싸움을 해대며 내부적인 자멸을 이끈 명백한 흑역사. 현대 일본의 자위대에도 악영향을 주고 있는데, 일본 제국 육군과 해군이 각자 육상자위대와 해상자위대로 계보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술 더 떠 항공자위대와 해상보안청까지 대립에 끼어드는 사파전으로 확장됐다.

5. 공군


  • 제1전투비행단 가혹행위 은폐 사건
  • 김지훈 일병 자살 사건
  • 황제복무: 병사 개인에게 부대에서 도를 넘는 편의를 봐줬다. 내부고발자에 의해 국민청원으로 폭로되었는데, 해당 청원의 내용을 보면 병사가 부사관에게 개인 심부름을 시키고, 어지간한 장교들도 받지 못하는 개인실을 차지하였으며, 절차를 지키지 않은 외부로의 이동 즉 탈영에 대한 의혹 등 이 폭로 되었다. 소식을 접한 예비역들은 뒤집어졌고, 공군 본부가 직접 조사를 시작하였다.

[1] 당연스럽게도 당시 군은 사건을 묻으려 했으나 .다행 스럽게도 언론이 이를 무시하고 대서특필 했다.[2] 물론 완전히 개선되지 않아 2010년대에 윤일병 사건, 임병장 사건이 터지고 한 차례 더 개선이 진행되었다.[3] 임병장은 수차례 추격조와 조우 했으나 암구호를 까먹었다, 피아식별띠를 실수로 나두고 왔다 같은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으며, 임병장의 얼굴과 이름 등의 정보를 간부들 끼리만 공유했다. 그리고 그 간부도 임병장과 조우 했으나 속아서 놓쳤다. 무장공비였으면 큰 일 아니었냐며 좌우를 막론하고 까였다.[4] 미국등의 선진국이 이미 광학장비 보급이라는 더 현실적인 대안을 찾았음에도 한국은 광학장비 보급도 제대로 하지 못한 주제에 세계 최초로 성공시키겠다며 무리한 개발을 지속하였고, 그 결과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열악한 보병 장비는 그대로였고, 천문학적인 수준의 예산만 낭비하는 2차 대전 독일군이나 할 법한 실책을 방치하는 촌극이 벌어진 것.[5] 사실 악질적인 정경유착도 크게 한 몫 한다.[6] 63기를 생산할 예정으로 후지중공업이 라이센스를 획득하고 생산설비를 깔았는데, 육상자위대가 도입 중단을 때려버리고 13기만 획득하도록 결정하면서 설비 투자비용과 라이센스 비용이 소수의 헬기 가격에 몰려서 합산되었다.[7] 전투헬리곱터라는 무기체계 자체가 대잠전이나 대전차전, 대보병전을 주로 하기 때문에 굳이 최고 성능의 기체를 최고가격에 할 필요 없이 적당히 가성비에서 타협해도 되는 무기체계…[8] 수 년 간 국가 단위의 대규모 전쟁에서 실전으로 갈고 닦았으며 군함과 무장마저 적국에 비해 우세인 대규모 정예 해군이 지휘관 1명의 병크로 모랄빵 나고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한다.[9] 전투화는 발목이 길어서 빠르게 벗기 불편하며, 그 무게는 바다에 빠진 사람에게 크게 방해된다.[10] 금지를 넘어서 대부분의 수병에게 전투화를 보급하지 않을 정도[11] 당시 함장은 함교에서 벗어나 개인실에서 자고 있었으며, 견시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숙련되지 않은 군인의 비율이 높았다고 한다.[12] 다만 이 때 해병대 측의 주동자 였던 전도봉 소위는 불명예 전역 후 다시 해병대 장교로 입대하였고, 후에 해병대 사령관 까지 올라갔으나 비리로 불명예 퇴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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