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

 



1. 요약
2. 사건 경위
2.1. 7일 저녁: 해병대의 시비로 인한 사건 발단
2.2. 7일 저녁: 공군의 추격과 1차 반격
2.3. 8일 새벽: 보복을 위한 비행학교 새벽 기습
2.4. 8일 아침: 공군의 반격을 통한 2차 반격
2.5. 8일 아침: 해병대의 도주
3. 피해
4. 결말
5. 과거세탁으로 쪽팔림을 덜기 위한 왜곡
6. 관련 기사
7. 관련 문서


1. 요약


1966년 8월 8일 월요일, 대한민국 해병대 장교들이 새벽대한민국 공군의 舊 공군비행학교[1]를 기습했다가 반격을 당해서 오히려 해병대가 역관광 당했던 실제 사건이다. 군대에서 카더라 풍문으로 나도는 근거없는 허구썰들이나 괴담들과는 달리 정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며 '''해병대측에서 사망자'''까지 나왔던 큰 사건이었다.
언뜻 보면 공군 vs 해병대의 자존심을 건 한판대결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희대의 병림픽이자, 해병대가 새벽에 자고 있는 무방비 상태의 공군에게 비겁한 기습을 하고도 오히려 반격을 받고 쳐발리는 굴욕을 당한데다가, 심지어 해병대쪽에서 사망자까지 발생한 사건이다. '''대한민국 해병대 최악의 흑역사 중 하나가 된 사건'''이다.
한마디로 '''해병대 잡는 공군''' 사건.
술취한 해병대 장교 8명이 공군 장교 3명을 집단폭행했다가 그 상황을 알고 달려온 공군 장교 16명에게 해병 장교들이 얻어 터지고 돌아오자, 이에 보복하려고 해병대 장교 129명이 집단으로 근무지를 이탈하여 공군 비행학교를 새벽에 기습하였다가 공군장병 300명에게 역으로 반격 당하고 도망간다.
여기까지만 봐도 현역 군인의 집단 근무지 이탈에, 집단 패싸움 유발에, 아군 비행학교를 새벽에 무단 침입한 작지 않은 사건임을 알 수 있다. 더 가관인 건,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 등 전군에서 '가장 신사적이고 부드럽다는 공군[2]의 '비전투병'인 비행학교 장병들[3]이 반격하자, 명색이 전투부대라는 해병대 장교들이 얻어 터지고 뿔뿔이 흩어져 오합지졸처럼 무질서하게 우왕좌왕 도망치는 와중에 '''익사'''하는 해병장교까지 생겼던 것.

2. 사건 경위



2.1. 7일 저녁: 해병대의 시비로 인한 사건 발단


사건의 발단은 사소한 시비에서 시작되었다.
1966년 8월 7일 일요일 오후 7시 20분쯤, 부산진해행 마지막 버스인 경남 영228호가 공군비행학교 후문 입구 근처인 덕두 정유소 정류장에 정차하자 공군 장교 3명이 뒷문으로 승차하려고 했다. 그런데 버스에 타고 있던 술 취한 해병대 장교 8명이 공군 장교들이 승차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이 해병대 장교들은 해병대 장교로 임관된 뒤 해병학교 35기 기초군사반 과정에서 보수 교육을 받던 중 1박 2일 외박을 나와 있던 해병대 소위들이었고, 공군 장교들은 비행학교에서 조종교육을 받고 있던 피교육 학생 신분의 공군 소위들이었다.
이에 다시 공군 장교들은 앞문으로 타서 차 안에 들어왔으나, 해병대는 차 안에서 시비를 걸었고, 공군 장교들이 이들을 묵묵부답으로 상대하지 않자 해병대 장교들은 발끈하여 한 공군 장교의 작업모를 빼앗아 서로 던지며 희롱했다. 이에 참지 못한 공군 장교가 해병대 장교의 몸을 밀쳐 자신의 작업모를 되찾으면서 몸싸움이 벌어졌지만, 공군 장교들이 수적 열세로 집단 폭행을 당한 후에 차 밖으로 쫓겨났다.

2.2. 7일 저녁: 공군의 추격과 1차 반격


이 광경을 본 허도창 공군 상병이 해당 사건을 비행학교에 바로 알렸다. 이에 분개한 조종피교육생 정성규 소위 등 공군 동료 장교 16명이 동교 309호 트럭을 타고 앞서간 해병대가 탄 버스를 추격했다. 결국 이들은 웅천에서 해병 장교들을 붙잡아 집단구타하고 되돌아 왔다.

2.3. 8일 새벽: 보복을 위한 비행학교 새벽 기습


그리고 사건은 말도 안 되게 커지기 시작했다.
공군 장교들에게 폭행당한 해병 장교들은 해병학교에 돌아가자 곧 이 사실을 동료 해병들에게 알렸다. 이번엔 해병 장교들이 분개하여, 치밀한 사전 계획을 세우고 8일 새벽 당직 교육생 몇 명을 제외한 장교 129명이 각기 통근열차편으로 진영역에 집결했다. 대체 맞았던 놈들이 뭔 소리를 했길래 맞을 짓 했는데 화를 낸 건지 상상도 안 간다.
게다가 이 때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무임승차'''를 했다. 건장한 남자, 그것도 해병대 근무복 차림의 장교 129명이 우르르 몰려왔는데 힘 없는 역무원이 당장 돈부터 달라고 하기에는 힘들었고 결국 무임승차를 했다. 무임승차 금액은 1인당 75원으로 총 10,125원. 이 돈은 45년 뒤인 2011년 8월 해간 35기 동기회가 코레일에 당시 가격을 지금으로 환산하여 1백만 원으로 지불했다고 한다. 기사
그렇게 무임승차로 민간인 트럭과 버스에 나눠 타고 김해 공군비행학교 입구인 평강(平康) 마을에 도착했다. 129명의 해병 장교는 전원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논밭을 포복으로 이동하여, 마치 잠복전투훈련이라도 하듯이 비행학교 정문을 기습했다. '''보초근무를 서고 있던 군사경찰 김용만 병장을 납치하여 권총을 빼앗고, 조종학생 내무반으로 안내하라고 위협'''했다. 실제로 '''초병을 폭행하거나 무기를 빼앗으려고 하는 행위에 대한 대응은 즉각 발포'''로 규정되어있어서 이 때 김용만 병장이 이들을 사살했다고 해도 아무런 책임이 없다. 이 소위들도 월남전 직전이라는 상황만 아니었더라도 곱게 넘어가긴 힘들었을 것이다.
김 병장의 안내로 새벽 5시 50분 쯤에 조종학생 내무반에 도착했고, 해병 장교 129명은 4개 내무반에 분산 침입, 아령 등 운동기구와 , 주먹 등으로 새벽에 잠들어 있던 조종학생들을 난타했다.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잠이 깬 조종학생들이 내무반 밖으로 도망치자 돌을 던지면서 추격했다.
이같은 난투극이 한창일 때 해병대 일부 병력은 주번 사령실에 침입하여, 근무사병을 추방하거나 감금한 다음 주번사령 당직자인 비행학교 작전과장 최석만 중령에게 학교장과 전날 사고자를 불러 공개 사과하도록 강요했다.

2.4. 8일 아침: 공군의 반격을 통한 2차 반격


그러나 비행학교 측은 이에 응하지 않고, 오전 6시 20분 비상소집을 걸었다. 이에 비행학교 장병 약 300여 명이 뛰어나와 연병장에서 해병 장교 129명에게 덤벼들었다.
해병 장교들은 연병장에 집결하기 전에, 잠자던 조종학생 10여 명을 폭행하여 이미 무력화 했고, 3개소 내무반의 유리창 31장 등 기물을 마구 부쉈었다.
쌍방 400여명이 얽힌 패싸움은 10여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전세가 불리해져서 '''공군 장병들에게 밀리다가 결국 쫓기게 된 해병 장교들은''' 도망치다가 공군 장병들에게 '''"더 추격해오면 비행기를 부숴버린다."고 위협'''하고, 그래도 쫓아오자 실제로 돌을 마구 던져 T-6G형 노스 아메리칸 T-6 텍산 복좌 훈련기 TA-858호 좌측 날개 전면 3개소, 우측 프랙 1개소와 날개 끝을 깨뜨리는가 하면, TA-886호의 엔진 하우징 좌측 전면 1개소 및 프로펠러의 베어링 등을 부쉈다.[4]
'''즉 명색이 해병대 장교인 사람이, 국가의 재산이자 소중한 국방전력인 항공자산[5][6]을 고의로 파손시킨 것'''이다. 자기를 헌신해서 국가의 중요재산을 지키려 하긴 커녕, 오히려 중요한 국방 자산을 담보로 자기들의 안전을 꾀하는 일은 참군인이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다. 이는 당시의 해병대 장교들이 얼마나 제정신이 아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2.5. 8일 아침: 해병대의 도주


공군 장병들에게 얻어맞고 도망가던 해병 장교들은 오전 7시쯤 철조망 밖으로 빠져나가 제각기 뿔뿔이 흩어져 황급히 달아나는 가운데 이의일 해병 소위가 철조망 밖 에 빠졌다.[7] 늪에서 건져낸 후 비행학교 내의 의무중대로 운반되었으나 그를 검안한 군의관에 의해 사망이 확인되었다. 차후 시행된 부검에서 사인이 익사(...)인 것으로 밝혀졌다.

3. 피해


이 사건으로 노스 아메리칸 T-6 텍산 2대가 파손되었고, 사망 1명, 부상 39명의 인명 피해가 났다.
사망한 해병대 이의일 소위는 1966년 경희대학교를 졸업하고 해병대 간부후보생으로 입대하였으며, 홀어머니 우경학 씨의 아들 3형제 중 막내라고 한다. 부검 결과 익사로 판정되었다.

4. 결말


장지량 공군참모총장강기천 해병대사령관이 현지에 달려갔고, 국방부[8]에서는 합동수사반을 구성하여 현지조사에 나서게 하였으며, 해병 20명과 공군 14명을 연행하여 조사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많이 잊히고 해병대 출신의 회고글 혹은 해병대의 각종 야사 썰들을 모아 놓은 해병대 출신들의 블로그 등에서나 언급되는 정도이지만, 사건이 발생한 당시에는 주요 일간지에 관련 기사가 도배가 될 정도로 엄청나게 큰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정부와 군 상층부에선 처음에 관련자 전원을 군사재판에 회부한다고도 했으나, 당시에는 베트남 전쟁 상황이라 장교들이 많이 필요한데 관련자가 너무 많아서인지 핵심 주동자들만 군사 재판에 회부하고 나머지는 처벌을 면하게 된다. 전도봉을 비롯한 주동자급 해병장교 10여명은 6개월 간 진해 해군헌병(현 군사경찰)대 영창에 구속된 상태로 재판을 받았는데, 결국 제일 '''핵심주동자였던 전도봉 소위만 현역부적합 조기전역을 당했고''' 나머지는 현역 장교로 복귀하게 된다.[9]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 전도봉에게 현역 대한민국 육군 병 입영통지서가 발부되었고[10] 이에 전도봉은 장교로 군복무했던 사람이 뭔 현역병이냐!고 반발하여 병 입대 대신 해병대 장교로 재입대하였고 결국 해병대 간부후보생(해간) 38기 소위로 다시 임관하게 된다. 즉 '''두 번이나 임관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첫 임관 때의 동기들(해간 35기)보다 후배(해간 38기)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전도봉에겐 두 개의 해간 기수가 있는 셈인데 그 중에서 38기가 정식 기수이다[11]. 그러나 '''언론 공개 이력 등엔 첫번째 기수인 해간 35기만을 내세우고 있다.'''[12]
해병대 측의 주동자였던 전도봉 소위와 당시 공군비행학교 당직사관이었던 이양호 대위는 30년 후 각각 해병대사령관과 국방부장관으로 해후(?)하게 되며, 공교롭게도 둘 다 임기를 채 못 마치고 재직 중 비리 및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된다(…). 근데 여러 해병 출신들이 전도봉 장군은 뇌물혐의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여기저기에 우겨대서 정말 무죄 판결을 받은줄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것 역시 구라다.
전도봉 장군도 엄연히 대법원 최종심에서 뇌물혐의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그런데도 아직도 많은 해병 예비역들은 전도봉 장군을 진정한 해병, 위대한 사령관 중 한 분으로 추앙한다. 근데 추앙받는다는 분이 대한민국 해병대사령관 이취임식엔 초대받지 못하는 기수열외를 당하고 있다.[13]
전도봉의 회고록에 따르면, 위 사건을 주도한 깡을 인정받아, 월남전에서 해병대 수인(囚人, 죄를 지어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로 구성된 해병대 수인소대(...)의 소대장을 맡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수인소대는 깡패 출신들은 깡다구와 용기 하나는 강할거라고 생각해서 위험한 임무를 맡기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해병대 수인소대원들이 하도 말을 안들어 수인소대의 깡패 두목을 영창에 보내자 소대원들이 우리 두목 다시 데려 오라고 전도봉 장군 앞에서 집단으로 안전핀 뽑은 수류탄 들고 설쳤다는데 말빨로 제압했다고 한다. 그리고 깡패 출신들은 깡 하나는 좋아서 전투시에 용감할거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전투가 벌어지면 해병대 수인소대원들은 제일 겁쟁이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반면 실제 전투시에 가장 용감하게 잘 싸우는 병사는 모범적이고 평범한 부류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전도봉의 회고록엔 의심 가는 점들이 많다. 당시 사회의 "문제아"(운동권 대학생, 사회불량배, 병역기피자)들을 "군대 갈래, 깜방 갈래?"라며 사실상 반강제로 군대로 입영시켰던건 사실이고 그런 부류들 중에서 해병대로 징집된 사람들도 꽤 많다. 게다가, 당시 해병대에는 징집기수도 존재했다. 다만 군인들 중에서 월남으로 파병가는 여부는 전원 자율적인 자기 의사에 따른 지원에 의해서였다. 오히려 전도봉이 소대장이던 시절에는 파병 보낼 해병대 장교는 모자랐어도 파병을 원하는 병들은 넘쳐났었다. 해병대 뿐만이 아니라 육해공군에서도 해외 파병은 사회 진출시 경력을 인정받기 좋은 기회고 월급도 꽤 나왔기에 가고 싶어도 못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 후진국이었던 대한민국은 전과가 그렇게 심하지 않을 경우 쉬쉬하는 경향이 많고 전과자를 크게 차별하지도 않았기에 해병대 뿐만이 아니라 육군에도 전과가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로만 구성한 "수인소대"가 있었다는건 심히 의심해야할 상황이다. 상식적으로 수인들로만 소대를 만들만큼 많은 전과자들이 파병되었는지도 의심스럽다. 실제로 같은 시기 해병대 제2여단(청룡부대) 출신 참전용사도 수인소대는 처음 들어본다는 말을 한다. 청룡부대는 당시엔 여단규모라 그리 크지 않았으니 수인소대같은 파격적인 게 있었다면 모를 리가 없다.
더군다나 수인부대를 해외파병 보낼 경우 '''집단 군무이탈이나 집단 반란 확률이 매우 높아서''' 수인부대가 실제로 존재한다 하더라도 절대 해외로 파병보낼 수 없다. 파병보내는 것 자체가 파병국 정부에게 민폐를 저지르는 짓이기도 하고.
그러므로 이 내용은 과장되었거나 전도봉이 지어낸 허구소설일 가능성이 높다. 몇몇 전과자 출신 파월장병이 존재했다는 것을 "수인소대" 혹은 "형벌소대"로 과장시켰다면 오히려 자신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해병대, 그리고 특히 국가 유공자들인 해병대 파월장병들의 위상을 깎아먹는 비겁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깡"으로 인정받아서 운좋게 파병가는 걸로 끝났다는 식으로 적혀있는데, 워낙 파병 인원이 많았던 육군의 경우는 장교가 부족해서인지 밀수나 비교적 가벼운 범죄로 걸린 장교들 중 일부가 징계나 재판을 받는 대신 파월로 형을 때우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밀수도 심각한 범죄다. [14]
즉 병 출신이든 장교 출신이든 '''골수 군인들의 허풍과 이빨은 믿을 게 못된다. 워낙 허풍 구라 소설들을 잘 지어내기 때문'''이다.

5. 과거세탁으로 쪽팔림을 덜기 위한 왜곡


사건 자체만으로만 보아도 일단 명백하게 '''해병대 소속 여러 장교들이 군법적으로 심각한 범죄 행위를 저지른 것'''인데다가, 수적으로 열세였다 하나 '''해병대가 자고 있던 공군에게 비겁한 기습을 했음에도 결국 공군에게 쳐발린''', 해병대로서는 참으로 치욕적인 흑역사 수준의 사건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황당한 사실은 21세기인 지금에 와서도 어처구니없게도 이 사건을 정반대로 왜곡하여 마치 해병대가 이긴 무용담인 것처럼, 그리고 해병대가 그렇게 한 게 정당한 것처럼 날조한 여러 버전의 구라 소설들이 일부 예비역 해병들의 블로그 등을 통해서 퍼져 있다는 것이다.
사실 왜곡 소재 대부분이 당사자인 전도봉 사령관의 일대기에서 나왔으니 당연하다. 인터뷰를 보면 자신이 소시적에 조폭을 때려잡았다고 주장하거나 월남에서 있었던 황당한 일 등, 해병대 시절의 믿거나 말거나 식의 허풍스러운 무용담 일대기 중 한 일화로 끼워서 말하였다. 이런 구전 이빨에서 흔히 나오기 마련인 허풍, 왜곡과 변명을 토대로 후대의 해병들이 거기에다 더 보태고 조작하여 쓴 해병대의 정신승리성 소설들인 것이다.
예를 들면, 아래과 같이 왜곡시키는 식인데… 인원 숫자 조작하기 등 사실 조작과 역사 왜곡은 기본이요, 군범죄 정당화, 상급 지휘관에 대한 하극상, 전우의 죽음에 대한 박대까지 어우러져서 헛웃음이 나오는 훌륭한 블랙 유머가 되어 버렸다(…). 자신들은 자랑이라고 이빨까고 있는데, 읽는 입장에서는 너무 빈틈이 많아 오히려 웃기는 글이다. 즉 아래에 나오는 일부 해병들 주장은 온통 구라와 팩트 왜곡 투성이라서 신뢰도가 완전 엉터리 수준이다.
'''35기 소위들의 김해공군기지 습격사건'''

66년 8월 8일에 발생했던 이른바 해병학교 사관 35기 기초반 장교들의 김해 공군기지 습격사건의 진상을 공개한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즉 주말인 8월 6일 부산에서 외박을 한 전도봉(全道奉) 소위를 비롯한 7명의 해병학교(35기) 기초반 소위들[15]이 승차한 부산발 진해행 시외버스가 구포다리 건너 첫 번째 정류장에 정차했을 때 승객이 많아 버스의 앞문으로 승차하기가 어렵게 된 빨간 마후라를 두른 10여 명의 공군소위들[16]이 주먹으로 버스의 후문을 두들기며 문을 열라고 소리쳤는데, 그 때 그 후문쪽 좌석에 윗저고리를 벗은채 앉아 있던[17] 35기 소위 하나가 앞문으로 타 하고 소리치자 공군소위들 중의 하나가 이 새끼들…하며 앞문으로 갔고, 또 차안에서 누군가가 저 새끼가…하며 뒷문을 열어 제치고 뛰쳐 나간 것이 도화선이 되어 결국 그 10여 명의 공군소위들[18]은 윗저고리를 벗고 앉아 있던 7인의 해병소위들에 의해 묵사발이 되어 길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전광석화와도 같은 솜씨를 발휘했던 그 7인의 소위들은 '황우'라는 두목을 굴복시켜 부산바닥의 주먹계를 평정한 패기만만한 투사들로 알려지고 있었다[19]. 그런데 공군소위들을 길바닥에 뉘여 놓고 버스에 올라타고 졸면서 가고 있던 그 7인의 소위들은 한참을 달리고 있던 버스가 갑자기 급정거를 하는 순간 진퇴양난의 위기에 직면하고 말았다.
버스를 앞뒤에서 가로막은 2대의 공군 닷지차에서 뛰어 내린[20] 수 십 명의 공군장교들[21]이 손에 든 몽둥이로[22] 소위들이 앉아 있는 뒤쪽 창문을 박살을 내며 문을 열라고 소리쳤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와중에 35기 소위 2명은 머리를 다쳤고, 승객들 중 진해여고 학생 1명[23]과 해군소위 1명[24]도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도 냉정을 잃지 않았던 해병소위들은 운전기사로 하여금 군용트럭 옆을 아슬아슬하게 빠져 나가게 함으로써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공군장교들도 그 이상의 보복은 하지 않았다.
한편 귀교후 머리에 중상을 입은 1명의 동료장교를 진해병원으로 실어 보낸 35기 기초반 장교학생회에서는 취침시간을 이용하여 중대장학생 김도삼 소위와 부중대장학생 김무일 소위, 군기부장 전도봉 소위 등 3인의 간부와 각 근무자들과 소대장 등 13인이 참석한 비상대책회의를 개최하여 자존심에[25] 관한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의한 끝에 다음과 같은 행동계획으로 그 다음날 이른 아침 김해 공군기지를 습격하되 일절 무장은 하지 않고 복장은 정모와 카키 근무복을 착용키로 결정했다.
즉 전체인원 142명 중 입원환자와 당직자 등 13명을 제외한 129명이 8일(월) 새벽 2시에 기상하여 은밀히 철조망을 타넘고 경화역에 집결, 04시에 출발하는 열차에 승차하여[26] 진영역에서 하차, 역전 도로변에서 3개 제대로 나누어 시계나 돈을 주고 화물트럭이나 버스를 타고 공군기지 정문 앞에 집결하기로 했는데, 결국 화물트럭을 타고 6시 10분 전에 공군기지 정문앞에 도착했던 1.2제대는 서둘러 제대별로 대오[27]를 정비하여 정문으로 진입을 했으나 낌새를 챈 2명의 공군 헌병이 당직실 보고 운운하며 제지를 하는 바람에 지체할 겨를이 없었던 한 장교가 이 새끼 말이 많아하며 아구창을 일격을 가한 다음 그들의 무장을 해제시켜 그들을 앞세우고[28] 비행학교 조종반중대의 막사가 있는 곳[29]까지 기상나팔 소리를 들어가며 질서정연하게 구보를 해 갔다.[30]
그리하여 6시에 기상하여[31]막사 안팎에서 내무정돈과 세수를 하고 있는약 50명의 조종반 장교들을 닥치는 대로 주먹과 내무실에 있는 운동기구 등으로 가격하여 일방적인 완승을 거두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32] 그 현장에 버스를 타고 왔던 약 40명의 3제대 장교들이 도착했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각에 갑자기 터진 연막탄을 신호로 전 기지의 장사병은 즉시 상의를 벗고 중앙연병장에 집합하라는 방송이 사방에서 들리자 긴장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기초반 장교들은 몇몇 간부장교들의 의견에 따라 즉시 비행학교 당직실이 있는 학교본부로 가서 정열을 했다.
그런 다음 당직실로 들어간 간부장교들이 당직사관 이양호 대위에게 양측 학교장[33]에게 사태 수습을 건의하도록 하자는 제안을 하자 이양호 대위[34]는 학교장이 7시에 출근하니 그 때 가서 이야기하자고 하기에 기초반 장교들은 당직실밖에 정열하여 왼쪽 손을 왼쪽 허리춤에 갖다대고 오른손을 흔들며 '나가자 해병대'가와 '청룡은 간다'등의 군가를 부르고 있었는데, 어느 새 구름떼처럼 연병장에 모인 갈고리와 쇠스랑 같은 소방기구와 돌멩이를 손에 쥔 약 2000명[35][36]의 병력이 일제히 돌멩이를 던지며 접근해 오는 바람에 누군가의 제의로 격납고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연습기의 날개 밑에 피신을 했으나 새까맣게 날아온 돌멩이가 격납고 속으로도 날아드는 바람에[37] 어쩔 수 없이 철수를 단행, 활주로 끝에있는 철조망 지대까지 공군들의 추격을 받는 가운데 약 2키로를 구보하여 견고하게 가설돼 있는 철조망을 부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타 넘었으나 철조만 바깥쪽에 있는 70~80 야드[38] 너비의 수초가 우거진 천연늪을 헤엄을 쳐서 건너는 과정에서 이 소위가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맨 뒤쪽에 쳐져 맥없이 껍북거리고 있는 이 소위를 발견하여 늪 밖으로 끌어낸 사람은 김무일 소위와 이무수 소위였고, 이강오 소위를 비롯한 3~4명이 그를 살리기 위해 인공호흡을 시도해 보았으나 이미 입과 항문이 열려 있는 그를 되살릴 수는 없었다. 결국 공군기지 내의 의무중대로 운반이 된 이 소위는 7시 50분 그를 검안한 군의관에 의해 사망이 확인되었는데, 그 때 그 의무중대 병실에는 부상을 당한 20여 명의 비행종대 피교육 장교들과 12~13명의 해병학교 기초반 장교들이 엠불란스에 실려 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음은 이 사건이 남긴 사법적인 처리문제와 관련된 비화이다. 진해교육기지사령부에서는 전도봉 소위를 비롯한 6명의 주동자를 구속하는 한편 35기 기초반중대의 중대장 송모 대위와 구대장 3명도 구속하여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그런데 그러한 조치와는 달리 약 한 달 전[39]에 제7대 사령관으로 취임했던 해병대사령관 장기천 장군은 엄벌에 처할 경우 특히 35기 장교들과 그 후배 장교들의 사기에 미칠 영향이 클 것으로 판단하여 사고를 낸 35기 장교들과 비행학교 피교육 장교들 간에 자매결연을 맺게 하는 방안을 구상하여 공군참모총장이던 장지량 장군의 동의를 얻은 다음 그러한 수습방안을 장 총장과 함께 김성은 국방부 장관과 박정희 대통령에게 제시하여 쾌히 승인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거쳐 강기천 사령관은 장지량 총장과 함께 김해 공군기지와 진해 해병교육기지사령부를 차례로 방문하여 유감표명을 했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쌍방 간의 자매 결연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군법회의에 회부된 그 10명의 장교들[40]에 대해서는 강기천 장군이 군법회의의 설치권자인 교육기지사령관 박성철[41] 준장에게 선고유예를 하도록 지시를 했으나 박성철 장군은 자신이 임명한 재판장[42]에게 2년을 선고해주면[43] 자기도 생색을 좀 내고 강기천 장군도 감형을 할것이라고 했으나 처음부터 형을 선고할 생각을 갖지 않고 있던 강복구 대령은 군법회의의 사회자가 "재판장의 선고가 있겠습니다!"라고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회전의자를 뒤로 돌려 면벽(面壁)을 한 채 침묵을 지키고 있는 바람에 여러 차례의 선고공판이 유회되는 별 희한한 해프닝이 벌어지곤 했다.[44]
일이 그렇게 되자 해병대사령부 법무감 이양우 해군 법무대령[45]은 사건의 마무리를 짓기 위해 직접 진해로 내려가 핵심 주동자로 지목되고 있던 전도봉 소위에게 병역을 필하게 해 주는 조건을 제시하면서 책임을 지고 군복을 벗을 것을 권고하기에 이르렀고, 그러한 권고를 받은 전도봉 소위는 함께 기소된 자기 이외의 모든 장교들을 석방시켜 준다면 기꺼이 군복을 벗겠다고 말함으로써 6개월 간 진해 해군군사경찰대 영창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아왔던 10명의 장교들은 전원 풀려나게 되었고, 그들 중 모든 책임을 지고 군복을 벗었던 전도봉 소위만은 민간인의 신분이 되어 실의 낙향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20일 후 전도봉씨는 육군훈련소에 입소하라는 병무청의 입영통지서를 받고 깜짝 놀랐으나 그 입영통지서를 들고 해병대사령부 법무감을 찾아갔던 그는, 잘못 처리된 것을 사과한 이양우 제독의 권고로 국방부 소청심사위원회에 솟장을 낸 것이 기사회생(起死回生)의 전기(轉機)가 되어 월남전선으로 가는 조건 부로 소위의 계급을 되찾는 충격적인 홍복을 누렸다.[46]
그리고 그런 운을 타고 났던 전도봉 소위는 그로부터 30년 후[47] 제 22대 해병대사령관이되어 합참의장을 거쳐 국방부장관으로 취임한 왕년의 김해비행학교 당직사관 이양호 대위와 숙명적인 재회를 했다. 전해지고 있는 바에 따르면 구속 기소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던 이양호 대위도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고 했다고 하니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써 남긴 '必死卽生'이란 글귀를 새삼 되씹어 보게 한다.
한편 그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군복을 벗게 된 김해공군기지 당직사령 최 모 중령은 그 후 대한항공에 취업했으나 69년 12월 11일, 그가 조종한 강릉발 서울행 KAL기가 승객 47명 및 승무원 4명을 태운 채로 납북되는 바람에 그를 악운을 타고난 사람으로 기억되게 했다.[48]
차리리 공군이 전투기 몰고 기습했는데 해병들이 전투기를 맨손으로 격추했다고 하는 게 더 낫다. 사실 해병대의 중범죄행위에 대한 정당한 재판을 방해한 당시 강복구 대령의 행태를 보면, 그가 강병육성과 모국의 발전을 위해 기여했다는 평가를 의심할 수 밖에 없다. 그저 자기 소속군의 편을 들기 위해서 국가의 엄정한 법집행을 방해한 인간이 대체 어떻게 강병을 육성하고 모국의 발전에 기여한단 말인가? 해병대 장교들이 '해병대 자체'가 아니라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라는 의식이 눈꼽만큼이라도 있었다면, 자국 군 비행학교를 습격해서 주요 군사장비인 항공기를 파손한 행위를 비호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본래 골수 해병대 출신들은 자기 모군에 대한 애정이 지나친 나머지, 이런 식으로 해병대를 되도록 높고 강하게 보이기 위한 각종 사실왜곡, 구라이빨, 허풍치기 이런 전통이 심하다.''' 게다가 야간에 자고 있는 아군을 상대로 기습했다는 건 제대로 상식이 박힌 사람[49]이라면 마땅히 부끄러워 해야 할 비겁한 범죄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멀쩡한 진실까지 왜곡하여 해병대 특유의 이빨까기용 소설로 승화시켜서 후대의 해병들에게 왜곡된 역사를 전파하려는 것도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예전엔 공군 기훈단에서 몇몇 나이 든 간부들로부터 '''해병대 놈들이 감히 값비싼 파일럿 훈련학생들에게 덤비다가 두들겨 맞고 그거 복수하려고 새벽에 비행장에 쳐들어왔다가 몰려나온 공군사병들에게 또다시 두들겨 맞고 쫒겨났던 적이 있었다.'''라는 짤막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 공군에서는 어쨌든 국군끼리 패싸움을 벌인 국군의 흑역사인 이 사건에 대해 그냥 '이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 말할 뿐이지 그걸 굳이 자랑스러워 하거나 많이 언급하진 않는다. 왜냐면 공군은 입대하는 장병들의 대부분이 개념이 박혀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쪽엔 별로 관심이 없거나 부끄러운 행위라는 것을 안다. 더구나 최근에 입대한 장병들이나 간부들의 경우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아예 잘 모르는 경우도 많다. 하긴 수십년 전 사건이니 시간이 갈수록 잊혀져서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게 당연하다. 오히려 해병대 출신이 공군 조종장교로 재입대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면서, "조국수호를 위한 일전불퇴의 정신은 공군과 해병대 모두 똑같다", "해병대의 빨간명찰과 공군의 빨간 마후라 정신은 같다"고 주장하는 등 서로를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기사
하지만 대략 2010년대 이후로 이 사건이 다시 재조명받으면서 요즘 세대의 공군에서도 다시 알려지기 시작했고, 공군 인트라넷 내 병사 게시판에서 군대 악폐습 행위를 비판하는 예로서 이 '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이 사례로 인용되기도 한다. 참고로 이 사건은 게시판이 터지고 새로 생길 때마다 지식게시판에 꾸준히 올라온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정작 대다수의 공군 병사들은 싸움 쪽엔 별 관심이 없다는 거다. 왜냐하면 현재 공군은 마초 문화와는 거리가 먼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1960년대 당시엔 유명했지만, 그 이후 세대들에게는 세부내용이 잘 안 알려지고 잊혀져간 것을 악용해서 일부 해병대 출신들은 꾸준히 이 사건을 마치 해병대가 이기기라도 한 '무용담'처럼 정반대로 왜곡해서 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을 이용하여 옛날 당시 기사와 재판기록 등 과거 자료들을 열람하기가 쉬워진 2010년대에는 그간 해병대 출신들의 허풍과 이빨까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네이버 뉴스아카이브 등을 사용하여 그동안 해병들이 일방적으로 주장해오던 구전 무용담 이빨과는 전혀 다른 진실을 발굴해내는데 성공하였다. 그래서 이 사건의 실제 실체가 드러나면서 '''해병대의 굴욕 역사이자 엽기 코미디 사건'''으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어버렸다. 일부 해병대 출신들의 사실왜곡과 거짓된 카더라, 허풍이빨이 없었다면 워낙 옛날 사건이라서 차차 잊혀지고 묻혔을 옛날 사건이 이렇게 재조명 받을 리도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자업자득.
그리고 저런 식으로 해병들이 사실을 왜곡시키며 거짓 소설을 꾸며내 퍼트리는 것도 문제지만, 엄연히 같은 국가의 군대도 소속군이 다르다고 해서 타군을 그렇게 적대시 하려고 하는 해병들의 근본적인 태도 자체도 문제다. 그런 태도는 '''옛 일본군의 안 좋은 행동을 계승'''한 것은 물론이고, 저런 식으로 사실왜곡까지 하면서 정신승리를 하려고 하는 건 심각한 병크 중의 병크이자 역사적 인식 부족이다. 또한 이런 행동은 양아치,조직폭력배들이나 하는 짓이지, 나라를 지키는 군인의 정신이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도 타군 장교끼리 패싸움을 벌인 정도라면 그나마 자존심 싸움이라고 봐 줄 수 있었겠지만… 조종사를 양성시키는 국가안보 기간시설인 비행학교를 공격해서 최중요 군사장비인 항공기를 파괴하는 것과 같은 행위는 장교 포함해서 가담한 전원을 이등병으로 강등시켜버려도 할 말이 없는 매국이적행위급이다. 공군비행단 근방을 왜 육군부대들이 둘러싸고 있는지 상기해 보자. 그만큼 공군 항공기는 국방에 있어 군의 최중요 자산이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이것은 후진국 수준 삼류 군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행동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심지어 다른 부대에서 최우선적으로 지켜야 하는 공군 조종사가 될 귀한 인적자원들인데도 불구하고, 이들의 불행을 언급하며 조롱하고 있으니 정말 답이 없다.
1960년대 해병대들이 "옛날에는~" 어쩌구 하면서 똥군기를 들먹일 때 들이대주면 좋다. '''아무리 군기가 빠져도 해병대가 공군비행학교 습격했다가 반격받고 쳐 발렸던 때보다 빠졌겠느냐'''고... [50] 요즘 해병대가 옛날 해병대보다 군기가 빠졌다는 일부 꼰대 해병들의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이 없는지 증명해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6. 관련 기사


  • 당시 기사
  • 또 다른 당시 기사
  • 관련정보 블로그
  • 당시 사건에 참가했던 전도봉 해병대사령관 인터뷰 : 저 인터뷰에서 전도봉 전 사령관은 이 사건을 해병대측에 유리하도록 왜곡시키고, 책임도 오히려 공군에게 전가시키며, 뻔뻔한 자기 미화에 열올리는 등 어이없는 거짓과 아전인수격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후대의 해병들에게 끼친 악영향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다. 전도봉 전직 사령관의 일대기가 후대까지 해병대원들의 군인정신을 왜곡시키는 소재 중의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한 국가의 전직 지휘관으로서 마땅히 반성하고 진실을 밝혔어야 할 일이다. 게다가, 결국 자기의 객기 때문에 죽은 해병 전우에 대한 언급도 없다. 하지만 전도봉 전 사령관의 이런 뻔뻔한 성깔과 허풍스러운 이빨 성향이 해병들의 코드와 딱 맞기 때문에, 많은 해병대 장성들 중에서도 유독 전도봉 전 사령관이 해병들에게 그토록 인기가 많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7. 관련 문서


[1] 사건 당시 경상남도 김해군 대저읍, 즉 現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동에 있었는데, 현재는 그 자리에 해운대구에 있던 부산공항이 이전해서 개항한 김해국제공항이 있다. 한편 공군의 초창기 조종사 교육기관이었던 이 공군비행학교라는 명칭의 기관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사천시에 위치한 공군 제3훈련비행단이 그 역사성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2] 1960-70년대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공군이 가장 신사적인 편이다. 장병들의 평균 학력도 제일 높으며, 그렇지 않은 인원들도 기술 등에 있어 상당한 재능을 보이는 인원들이 공군으로 입대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고학력자는 아니지만 기술에 상당한 재능을 보이는 장병들은 대부분 정비특기에 많이 가있다. 부사관도 마찬가지라 정비특기 쪽에서 진급이 잘 되고 있으며,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과거에는 단기부사관들의 전역일에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등의 항공사 셔틀버스가 정비사들을 항공사에 데려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는 풍문도 있었다.[3] 행정, 기타 관리 등을 맡고 있던 비전투병과 인원들. 지금도 공군 병들 중에는 행정, 관리, 정비 등을 담당하는 기행병과 (군사경찰 포함) 병들이 다수이며, 전투특기는 방공포병과 관제병만 존재한다. 그 중 관제병은 전투특기임에도 컴퓨터 앞에 앉아서 업무를 보거나, 아니면 버드 스트라이크 예방을 위해 활주로로 나가서 새 쫓는 일을 한다.[4] 그리고 두 기체는 완전히 수리를 마치기까지 3개월 이상 걸렸다. 예산에서 수리비를 추려내고 미국에서 기술자와 부품을 공수해와야했기 때문이다.[5] 더구나 한국이 몹시 가난했던 1960년대 중반은 항공 자산이 정말 귀하고 한 대 새로 사는 것도 어려운 시기였다. 저 기종도 국민성금을 모아서 힘들게 겨우 사온, 당시 10대 밖에 없는 연습기였다.[6] 1966년이면 한창 박정희 정권이 미국으로부터 경제 원조와 군사 원조를 추가로 받아내기 위해 국민들 피를 협상 카드 삼고 있던 시기였다. 당장 아직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는 한일기본조약이 1년 전인 1965년에 체결되었고, 파병을 담보로 군원이관 문제를 연기하고 추가 차관을 제공해주겠다는 브라운 각서가 이때 작성되었다.[7] 지금도 김해공항 철조망 옆은 수로가 있는데, 이 수로의 물은 농업용수가 아니고 군 공항 침입을 막기위한 수로와 동시에 오수가 이쪽으로 흐르면서 고여버려 늪과같은 수질을 자랑한다.[8] 김성은 당시 국방장관해군사관학교 1기로 임관하고 해병대 창설에 기여하여 해병대사령관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유일한 해병대 출신 국방장관'''일 정도로 골수 해병대이다.[9]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장교인원 부족 때문에 편법으로 용서해준 것이다.[10] 실제 복무 기간이 짧아서 군역을 필한 것으로 인정할 만큼의 기준을 못채웠기 때문에 병역의무가 여전히 남아있게 된 것이다.[11] 35기로서의 군생활은 조기에 끝나버렸으므로[12] 35기생들도 전도봉을 동기로 인정하고는 있다. 당초에 전도봉이 35기 중에서도 제일 리더격이었기 때문이다.[13] 물론 전과자이므로 장교 자격이 박탈되어서 어쩔 수 없다.[14] 그런데 전도봉이 주도한 비행학교 기습은 단순한 사고 정도가 아니라 군기강을 심각하게 훼손세킨 중범죄 스케일이어서, 감옥에 안 보내고 월남 파병으로 때운 게 놀랍기는 하다.[15] 사건 당시 기사에는 8인[16] 실제로는 10여명이 아니라 3명. 즉 해병들 숫자는 줄이고 공군 숫자는 몇 배로 늘리는 구라를 쳤다. 이런 식으로 해병대에 유리하도록 치졸하게 조작하는 인원 구라는 이후 내용에도 계속된다.[17] 재미있는 점은 뭣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대목은 항상 나온다는 거다(…). 복장불량인 걸 자랑하고 싶은가 보다.[18] 위 전말에서 나오듯 실제로는 3명의 공군을 8명의 해병대원이 다구리친거다.[19] 이건 훗날 전도봉이 스스로 떠벌렸던 전도봉 자신의 무용담 썰에서 유래된 얘긴데, 워낙에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얘기고, 본인의 주장하는 허풍 외엔 물론 아무런 근거도 없다. 황우란 자는 그 당시에 부산에서 유명했던 깡패였기 때문에 그런 일이 정말 있었다면 그 사건이 안 알려져 있을 리가 없다. 마치 어느 허풍쟁이가 자기가 왕년에 종로의 김두한을 굴복시켰다며 확인불가능한 이빨까는거나 다를게 전혀 없다.[20] 1대였던 공군 트럭을 2대로 늘리고, 해병들이 구타당한 사실은 스리슬쩍 빼버렸다.[21] 실제로는 16명. 대개 수십명이라는 표현은 최소한 2~30명 이상은 될 때나 쓰는 표현이다. 10~19명일 때는 십 수 명 혹은 십여 명이 맞다.[22] 몽둥이 역시 당시 기사엔 안 나오는 걸 보아 지어낸 것일 가능성이 있다. 버스 폭행 목격자로부터 얘기를 듣자마자 바로 뛰어나와 뒤쫓아 그 버스를 따라잡은건데 그 틈에 어디서 몽둥이를 챙겨 갔을지 의문.[23] 당시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은 민간인 피해를 공군 소위들에게 덮어씌우는 등, 같은 국군의 명예를 실추시키려고 안달이 난듯[24] 이 해군 장교의 부상 사실도 왜곡이다. 사실 해병대의 구전에 따라서 언급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25] 본인들이 먼저 시비 걸었다가 중상을 입고선 자존심 소리를 하고 있다.[26] 역장에게는 독도법 훈련을 위해 진영역까지 간다고 했고, 차비 대신 손목시계 30개를 맡겨 두었다고 한다.[27] 3열종대[28] 여기서 권총을 강탈했다. 게다가 이런 짓거리는 군사재판이 열리면 최대 사형이고, 현장에서 사살당해도 할 말이 없다.[29] 정문에서 약 2km.[30] 이렇게 갔으면 기습이 이루어질 수가 없으므로 구라다. 실제로는 포복으로 접근하여 초병을 제압했지만, 일부 골수 해병들은 3열 종대로 대오를 정렬한 뒤, 정문으로 쳐들어 가서 초병과 사관을 때려 눕히고, 2km씩 구보를 하며 달렸다는 구라를 친다.[31] 실제로는 해병들이 조종교육생 장교 내무반에 도착하여 한창 자고 있던 공군을 폭행하기 시작한 게 새벽 5시 50분경이었다.[32] 무방비의 상대방을 둔기로 때린 비겁한 행위 가지고 완승이라며 자랑하고 있다. 게다가 해병들이 올린 다른 글에서는 당시 해병들이 정정당당하게 맨손만 썼다고 이빨을 까는데, 여기서는 엄연히 무기를 쓰고 있다.[33] 비행학교장과 해병학교장.[34] 후일 국방장관 역임.[35] 실제 사건에는 300명이다.[36] 심지어 현재의 기준으로도, 게다가 간부들은 아직 출근도 하지 않은 새벽이라 당시 비행학교에서 취침하던 전 병력을 모아도 2,000명이 절대 나올 수가 없는데, 더구나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전투기와 조종사 규모가 적어서 그만큼 양성학교 인원도 훨씬 작은 규모였던 1960년대 당시로는 더더욱 말도 안 되는 뻥튀기 구라다. 뻥을 쳐도 너무 지나치게 쳤다. 무엇보다 당시의 언론기사에나 재판기록에나 300명으로 나오는데도 지들 맘대로 수천명이라고 조작을 해버리다니 참 뻔뻔하다.[37] 해병대 장교들이 도망가다가 더 쫓아오면 비행기를 부수겠다고 협박한 뒤 그래도 쫓아오자 돌 던져서 파괴한 거라고 당시 기사와 재판기록에도 나오는데도 공군학교 장병들이 던진 거라고 정반대로 날조하고 있다. 공군에서 비행기 파손이 얼마나 중죄인 줄 알면 참으로 말도 안 되는 개소리가 아닐 수 없다.[38]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 70m 정도(70yd = 64.008m, 80yd = 73.152m).[39] 7월 1일.[40] 35기 교육생 6명, 중대장 1명, 구대장 3명.[41] 훗날 김대중 대통령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때 경호실장으로 활동하였다.[42] 훈련소장 강복구 대령. 6.25 참전용사. 훗날 해병대 전우회 중앙회 총재를 역임한다.[43] 검찰관의 구형은 5년형.[44] 군법과 처벌 과정조차도 이빨까기용으로 바꾸어 버렸다. 전후 관계는 밑을 참조. 사실 이런 마초 소설 내용 자체가 '''인터넷 일진 소설의 해병대 버전''' 정도이기에 그런 거지만… 단순한 왜곡을 넘어서 오그리토그리한 건 덤(…).[45] 최종 계급 준장. 후일 국회 사무총장 서리와 전두환 대통령의 법률고문 역임.[46] 이것도 사실과 전혀 다르다. 소위로 복직된 게 아니라, 재입대해서 해간 38기 소위로 재임관한 것이다. 처음 임관한 것은 해간 35기였다. 재판처리과정 중간 시점에 불필요하게 썰을 드라마틱하게 만드려고 지어낸 낙향·입영통지서·국방부 소청심사위원회 이 삼단콤보는 어느 글이든 빼놓지 않는다(…). [47] 96년 6월.[48] 공군 출신 전역자의 불행을, 그것도 지들 때문에 잘린 사람을 실명 옆에 언급하는 식으로 조롱하고 있다. 이거 진짜 같은 나라의 군인 맞나? 심지어 군복무 중에 일어난 일도 아니고, 전역 후 민간인이 되어서 적국에 납치된 사건을 조롱하고 있다. 같은 군인을 시기하는 것도 이 정도면 제정신이 아니다. 그나마 이 소설은 대우가 나은 편에 속한다(…).[49] 심지어 군인.[50] 만약 현재에 저런 유사한 사건이 벌어진다면 저렇게 관련자들이 실형을 받지 않고 군복무까지 무사히 마칠 정도로 어영부영 넘어가는 건 불가능하다. 아무리 대한민국 군대가 간부의 병크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을 한다지만 저건 그냥 엄연히 소요, 내란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