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노 히데시
日野日出志 1946.04.19~ 일본의 공포 만화가. 본명은 호시노 야스시(星野安司).
트위터도 운영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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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신년특집 방송에서 우메즈 카즈오(오른쪽)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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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너캐
일본 공포 만화계에서는 우메즈 카즈오, 모로호시 다이지로와 함께 3대 공포 만화가로 꼽힌다. 마루오 스에히로, 하나와 가즈이치, 이토 준지에게 영향을 준 1세대 괴짜 만화가로 유명하다. 미즈키 시게루는 "잉크로 피의 질감을 가장 잘 묘사하는 만화가"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실제로 표지의 귀여운 그림체를 보고 히노 히데시의 작품을 펼쳤다가 피가 난무하는 내용을 보고 식겁하는 사람들이 많다.
히노 히데시는 1946년 4월 19일 소련 점령하 만주(헤이룽장 성 치치하얼)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직후 부모님을 따라 만주에서 쫒겨나듯이 부모님의 고향인 일본으로 온 그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여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아이로 자라났다. 그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돈을 모아서 영화관을 가거나 부모님이 사다주신 연필과 종이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훗날 인터뷰에서 "학창시절 내 유일한 관심은 영화와 그림밖에 없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림과 영화에 빠져들게 된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림으로 먹고 살거라는 생각을 하진 않고 영화 감독이나 카메라맨을 지망했다고 한다. [1]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때 만화가 지망생이었던 친구의 서재에 꽂혀있던 스기우라 시게루와 츠게 요시하루의 만화를 보고 감명받아 본격적으로 만화계에 입문, 1967년 10월 데즈카 오사무의 잡지 COM에서 정식으로 데뷔한다. 이후 그는 가로에 사극이나 개그만화 등 5편의 단편만화를 연재했지만 독자들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자 만화가를 그만 두려던 찰나에 친구가 빌려준 레이 브레드버리의 소설을 읽고 충격을 받고는 당시 막 유행에 접어들던 공포 만화로 장르를 옮기기로 결심한다. 1년 동안 수정에 수정을 반복한 결과 1969년 히노 히데시로서 최초의 공포 만화 죠로쿠의 기묘한 병을 완성한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서 만화는 주로 어린이가 보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고 출판사도 주로 소년 혹은 순정 장르를 채택했기 때문에 출판사 여러 곳은 작품을 보고 '이렇게 기괴한 표현이 나오는 만화를 어린이들에게 보여줄 수 없다'라는 이유로 출판을 거절했다.(히데시는 <죠로쿠의 기묘한 병>을 잔혹동화의 일종으로 생각하고 그렸기에 그 정도 수위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고 함) 계속되는 거절로 낙담하던 차에 다행히도 전에 작품을 보냈던 한 잡지사예서 막 발족한 청년(성인) 만화부가 이 작품을 출판하고 싶다는 연락을 하여 만화가 출간되었다고 한다.
1970년에 출간된 <죠로쿠의 기묘한 병>은 기괴한 그림체와 내용으로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히데시는 이를 발판으로 독충 소승, 지옥도, 붉은 뱀, 공포 열차 등 수 많은 명작 공포만화를 발표하여 '''만화계의 지옥화공'''으로 불리게 된다. 데즈카 오사무가 블랙 잭에서 아이 환자의 모습을 통해 히노 히데시의 그림체를 패러디하기도 했다.
80년대에는 기니어피그 시리즈를 통해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기도 했지만(정확하게는 '혈육의 꽃'과 '맨홀속의 인어'를 감독함) 1989년 아동 연쇄살인마 미야자키 츠토무의 집에서 기니어피그 시리즈 중 스플레터 코미디 장르인 <피터의 악마같은 여의사>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혈육의 꽃>과 달리 정말 자신이 애착을 품으며 감독했던 <맨홀속의 인어>는 비디오 판매점에서 수거되었고 1989년에 개봉할 예정이었던 <맨홀속의 인어 극장판>도 개봉 한 달전 갑작스럽게 모든 계획이 취소되어 버린다.
미야자키 츠토무 사건의 여파는 무척 커서 사건의 여파가 잠잠해질 즈음인 1991년까지 히노 히데시의 만화들은 불량 서적 취급을 받으며 서점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결국 히노 히데시는 당대 가장 많은 발행부수를 자랑했던 소년 점프에서 연재한 <서커스 기담(1991)>이 성공한 후에 비로소 만화 커리어를 재개할 수 있었다. <서커스 기담>도 편집부의 의견에 따라 본래 구상했던 내용을 바꾸고 예전에 자신이 발표했던 작품들과 달리 표현을 순화시켜야 했다고 한다. 이후 히노 히데시는 공포만화가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린이용 학습만화, 축구 만화 등을 그렸지만 이번에는 기존의 히노 히데시의 분위기와 안 맞는다는 이유로 모두 시장에서 실패하였다.(...) 그래서 기니어피그 시리즈를 자신의 흑역사로 생각한다고 한다.
90년대에 들어서부터는 작품 활동이 뜸해지다가 2001년에 발매한 단행본 <Go Home>을 마지막으로 절필, 현재는 동료 만화가 나가이 고의 추천으로 오사카예술대학 캐릭터 조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의 만화들은 나중에 그를 존경하는 영화 감독들에 의해 히노 히데시의 괴기극장이라는 시리즈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기니어피그 시리즈의 시작은 만화가 히노 히데시에게 AV제작자이자 비디오 영화 프로듀서인 오구라 사토루가 연락을 하면서부터이다. 당초 계획은 '히노 히데시의 만화를 비디오용 영화로 만들어 상품화 시키자는 것'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히데시는 비록 영화라는 매체에 관심이 많았지만 자신의 작품을 저예산 영화로 제대로 옮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오구라 사토루가 끈질기게 연락을 청해오자 히노 히데시는 자신이 직접 영화를 만들겠다는 조건으로 그와의 동업을 수락, 본격적으로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어차피 저예산이니까 차라리 스토리나 테마를 없애고 제작 비용을 특수분장에 쏟아부어서 고어 영상물을 만들자'는 생각을 갖고 제작되었다고 한다.
악마의 실험은 오구라 사토루가 주축이 되어 제작한 작품이다. 히데시는 만화가로서는 유명하나 감독으로서는 무명이었던 자신의 영화가 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지 걱정했고 이에 오구라 사토루가 먼저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 참고로 발매는 1985년이지만 영화 자체는 1984년에 촬영했다고. 히데시는 <악마의 실험>에 쓰인 특수분장의 정교함에 놀라워 하며 기니어피그 시리즈에 확신을 갖게 되고 곧 자신의 감독 데뷔작인 <혈육의 꽃> 작업에 들어간다.
<혈육의 꽃> 원작은 히노 히데시 자신이 그린 동명의 단편 만화로, 원작 만화에서는 그림을 그리다 미쳐서 피와 시체를 미(美)의 일종으로 여기게 된 화가가 살인마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화에 나오는 살인마를 연기한 사람이 히노 히데시 자신이라는 루머가 인터넷에 퍼져있는 경우가 있는데 살인마 역은 당시 그의 술 친구이자 언더그라운드 연극 배우가 맡았으며 피해자 역을 맡은 사람은 히노 히데시의 아내가 운영하던 선술집의 아르바이트생이었다고 한다. 아르바이트생이 배우 지망생이라서 출연했다고 한다. 참고로 그녀는 <붉은 뱀>에 등장하는 주인공 누나역의 모델이기도 하다고.
<혈육의 꽃> 발매 후, 다른 사람들이 이어서 기니어피그 시리즈를 제작하였고 히노 히데시는 만화가로 계속 활동하다가 1988년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인상깊은 만화라고 자평한 작품인 <맨홀속의 인어>를 기니어피그의 새로운 시리즈로 영화화한다. 사실 히노 히데시는 <혈육의 꽃>을 스토리의 내러티브 문제로 완성 후에도 별로 좋은 평가를 하지 않았고 그저 감독이 되는 시험작 정도로 생각했다고 한다.
첫 작품 상영 21년만인 2006년, 기니어피그 시리즈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감독한 히노 히데시가 직접 나와서 설명하는 극장 상영이 일본에서 열리기도 하였다.
트위터도 운영하신다.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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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신년특집 방송에서 우메즈 카즈오(오른쪽)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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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너캐
일본 공포 만화계에서는 우메즈 카즈오, 모로호시 다이지로와 함께 3대 공포 만화가로 꼽힌다. 마루오 스에히로, 하나와 가즈이치, 이토 준지에게 영향을 준 1세대 괴짜 만화가로 유명하다. 미즈키 시게루는 "잉크로 피의 질감을 가장 잘 묘사하는 만화가"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실제로 표지의 귀여운 그림체를 보고 히노 히데시의 작품을 펼쳤다가 피가 난무하는 내용을 보고 식겁하는 사람들이 많다.
2. 행적
히노 히데시는 1946년 4월 19일 소련 점령하 만주(헤이룽장 성 치치하얼)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직후 부모님을 따라 만주에서 쫒겨나듯이 부모님의 고향인 일본으로 온 그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여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아이로 자라났다. 그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돈을 모아서 영화관을 가거나 부모님이 사다주신 연필과 종이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훗날 인터뷰에서 "학창시절 내 유일한 관심은 영화와 그림밖에 없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림과 영화에 빠져들게 된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림으로 먹고 살거라는 생각을 하진 않고 영화 감독이나 카메라맨을 지망했다고 한다. [1]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때 만화가 지망생이었던 친구의 서재에 꽂혀있던 스기우라 시게루와 츠게 요시하루의 만화를 보고 감명받아 본격적으로 만화계에 입문, 1967년 10월 데즈카 오사무의 잡지 COM에서 정식으로 데뷔한다. 이후 그는 가로에 사극이나 개그만화 등 5편의 단편만화를 연재했지만 독자들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자 만화가를 그만 두려던 찰나에 친구가 빌려준 레이 브레드버리의 소설을 읽고 충격을 받고는 당시 막 유행에 접어들던 공포 만화로 장르를 옮기기로 결심한다. 1년 동안 수정에 수정을 반복한 결과 1969년 히노 히데시로서 최초의 공포 만화 죠로쿠의 기묘한 병을 완성한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서 만화는 주로 어린이가 보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고 출판사도 주로 소년 혹은 순정 장르를 채택했기 때문에 출판사 여러 곳은 작품을 보고 '이렇게 기괴한 표현이 나오는 만화를 어린이들에게 보여줄 수 없다'라는 이유로 출판을 거절했다.(히데시는 <죠로쿠의 기묘한 병>을 잔혹동화의 일종으로 생각하고 그렸기에 그 정도 수위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고 함) 계속되는 거절로 낙담하던 차에 다행히도 전에 작품을 보냈던 한 잡지사예서 막 발족한 청년(성인) 만화부가 이 작품을 출판하고 싶다는 연락을 하여 만화가 출간되었다고 한다.
1970년에 출간된 <죠로쿠의 기묘한 병>은 기괴한 그림체와 내용으로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히데시는 이를 발판으로 독충 소승, 지옥도, 붉은 뱀, 공포 열차 등 수 많은 명작 공포만화를 발표하여 '''만화계의 지옥화공'''으로 불리게 된다. 데즈카 오사무가 블랙 잭에서 아이 환자의 모습을 통해 히노 히데시의 그림체를 패러디하기도 했다.
80년대에는 기니어피그 시리즈를 통해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기도 했지만(정확하게는 '혈육의 꽃'과 '맨홀속의 인어'를 감독함) 1989년 아동 연쇄살인마 미야자키 츠토무의 집에서 기니어피그 시리즈 중 스플레터 코미디 장르인 <피터의 악마같은 여의사>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혈육의 꽃>과 달리 정말 자신이 애착을 품으며 감독했던 <맨홀속의 인어>는 비디오 판매점에서 수거되었고 1989년에 개봉할 예정이었던 <맨홀속의 인어 극장판>도 개봉 한 달전 갑작스럽게 모든 계획이 취소되어 버린다.
미야자키 츠토무 사건의 여파는 무척 커서 사건의 여파가 잠잠해질 즈음인 1991년까지 히노 히데시의 만화들은 불량 서적 취급을 받으며 서점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결국 히노 히데시는 당대 가장 많은 발행부수를 자랑했던 소년 점프에서 연재한 <서커스 기담(1991)>이 성공한 후에 비로소 만화 커리어를 재개할 수 있었다. <서커스 기담>도 편집부의 의견에 따라 본래 구상했던 내용을 바꾸고 예전에 자신이 발표했던 작품들과 달리 표현을 순화시켜야 했다고 한다. 이후 히노 히데시는 공포만화가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린이용 학습만화, 축구 만화 등을 그렸지만 이번에는 기존의 히노 히데시의 분위기와 안 맞는다는 이유로 모두 시장에서 실패하였다.(...) 그래서 기니어피그 시리즈를 자신의 흑역사로 생각한다고 한다.
90년대에 들어서부터는 작품 활동이 뜸해지다가 2001년에 발매한 단행본 <Go Home>을 마지막으로 절필, 현재는 동료 만화가 나가이 고의 추천으로 오사카예술대학 캐릭터 조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의 만화들은 나중에 그를 존경하는 영화 감독들에 의해 히노 히데시의 괴기극장이라는 시리즈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3. 한국에 소개된 작품들
4. 히노 히데시와 기니어피그 시리즈
기니어피그 시리즈의 시작은 만화가 히노 히데시에게 AV제작자이자 비디오 영화 프로듀서인 오구라 사토루가 연락을 하면서부터이다. 당초 계획은 '히노 히데시의 만화를 비디오용 영화로 만들어 상품화 시키자는 것'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히데시는 비록 영화라는 매체에 관심이 많았지만 자신의 작품을 저예산 영화로 제대로 옮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오구라 사토루가 끈질기게 연락을 청해오자 히노 히데시는 자신이 직접 영화를 만들겠다는 조건으로 그와의 동업을 수락, 본격적으로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어차피 저예산이니까 차라리 스토리나 테마를 없애고 제작 비용을 특수분장에 쏟아부어서 고어 영상물을 만들자'는 생각을 갖고 제작되었다고 한다.
악마의 실험은 오구라 사토루가 주축이 되어 제작한 작품이다. 히데시는 만화가로서는 유명하나 감독으로서는 무명이었던 자신의 영화가 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지 걱정했고 이에 오구라 사토루가 먼저 영화를 찍었다고 한다. 참고로 발매는 1985년이지만 영화 자체는 1984년에 촬영했다고. 히데시는 <악마의 실험>에 쓰인 특수분장의 정교함에 놀라워 하며 기니어피그 시리즈에 확신을 갖게 되고 곧 자신의 감독 데뷔작인 <혈육의 꽃> 작업에 들어간다.
<혈육의 꽃> 원작은 히노 히데시 자신이 그린 동명의 단편 만화로, 원작 만화에서는 그림을 그리다 미쳐서 피와 시체를 미(美)의 일종으로 여기게 된 화가가 살인마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화에 나오는 살인마를 연기한 사람이 히노 히데시 자신이라는 루머가 인터넷에 퍼져있는 경우가 있는데 살인마 역은 당시 그의 술 친구이자 언더그라운드 연극 배우가 맡았으며 피해자 역을 맡은 사람은 히노 히데시의 아내가 운영하던 선술집의 아르바이트생이었다고 한다. 아르바이트생이 배우 지망생이라서 출연했다고 한다. 참고로 그녀는 <붉은 뱀>에 등장하는 주인공 누나역의 모델이기도 하다고.
<혈육의 꽃> 발매 후, 다른 사람들이 이어서 기니어피그 시리즈를 제작하였고 히노 히데시는 만화가로 계속 활동하다가 1988년 자신의 작품 중 가장 인상깊은 만화라고 자평한 작품인 <맨홀속의 인어>를 기니어피그의 새로운 시리즈로 영화화한다. 사실 히노 히데시는 <혈육의 꽃>을 스토리의 내러티브 문제로 완성 후에도 별로 좋은 평가를 하지 않았고 그저 감독이 되는 시험작 정도로 생각했다고 한다.
첫 작품 상영 21년만인 2006년, 기니어피그 시리즈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감독한 히노 히데시가 직접 나와서 설명하는 극장 상영이 일본에서 열리기도 하였다.
5. 이야깃거리
- 인터뷰에서 "본인은 겁이 많기 때문에 전성기 시절에는 술로 공포감을 이기며 만화를 그렸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공포 만화는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슬퍼도 다른 사람들을 웃겨야 하는 피에로 같은"라고 발언했다.
- 히노 히데시는 만화가 이현세와 친하고 한일 공동집필 앤솔로지 해협 저편에서에 참여하는 등 전반적으로 극우적인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중견 만화가 중에서는 의외로 친한파인 인물로 꼽히고 있다. 사실 80년대 중반까지도 일본의 좌파는 한국을 경원하여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일본 공산당은 오직 북한과만 교류했으며, 사회당(현 사회민주당)이 남한을 인정한 건 1990년대 이후이다. 때문에 80년대까지 일본에서 친한파 혹은 지한파라고 한다면 거의 대부분 우파 인물이었다. 히노 히데시도 젊은 시절 미시마 유키오를 개인적으로 존경했으며 《죠로쿠의 기묘한 병》 발간 당시 미시마 유키오가 할복자살 했다는 소식을 듣고 쇼크를 받아 처음으로 공식적인 연재를 하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연재를 중단하고 그를 따라 자살하려 했다고 한다.
- 아이디어 팩토리에서 개발한 사운드 노벨 액통 - 저주의 게임의 디자인을 맡기도 했다.
-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만화보다 그가 감독한 기니어피그 시리즈로 더 잘 알려져있다(정확하게는 '혈육의 꽃'과 '맨홀속의 인어'를 감독함). 시리즈 중 혈육의 꽃이 한 때 넷상에서 잔인한 영화로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에[2] 여러 네티즌이 호기심으로 혈육의 꽃을 보고 쇼크를 받아서 영화의 정보를 찾다가 알게 된 사람이 많다.
- 만화작가 활동 외에도 공포 극장 시리즈에서 나레이션 당담겸이자 해당 시리즈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호러 만담가 역으로도 출연하기도 한다.
[1] 히노 히데시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만화가 유독 단권에서 완결되거나 길어야 2권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은 이유를 한 편의 영화를 만든다는 생각을 가지고 명확한 기-승-전-결을 고려하며 만화를 그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또한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열렬한 팬이라는 점과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 특유의 롱테이크를 적절히 사용하여 작품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카메라 기법을 만화 컷 배치에 응용하는 등 영화에 큰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였다.[2] 한 때 찰리 쉰이 혈육의 꽃을 보고 스너프 필름으로 오인하여 신고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나중에 직접 히노 히데시를 만나 오해를 풀었다고. 이 글을 읽고 호기심에 영화를 접하고 싶다면 관람에 필히 주의하기 바란다. 최선의 방법은 해당 작품을 접하지 않는 것. 영화 자체가 80년대에 만들어진 영상이기 때문에 지금 보면 가짜티가 많이나는 데다가 화면 내내 피만 튀기는 고어 장르라 정신건강에도 좋지 않다. 여담으로 2002년 스포츠굿데이라는 신문에서 1면으로 이게 스너프라고 뒷북보도를 하다가 욕만 퍼먹고 영화를 알리게 했다는 비난까지 듣었다. 사실 이 당시 스포츠굿데이는 망하기 직전이었다. 김병현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