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마 유키오
[clearfix]
1. 개요
미시마 유키오는 일본의 소설가 및 극작가, 사상가/이론가로 세간에는 극우 작가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설국》으로 196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호평을 받고 등단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스승처럼 대했고, 가와바타 역시 미시마를 아꼈다.[1] 그 때문인지 미시마 유키오가 자위대를 선동하려다가 실패하고 할복 자살한 미시마 사건이 일어난지 2년 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다.[2]
2. 개인사
2.1. 유년기 및 학창시절
[image]
▲ 고등학생 시절
미시마 유키오의 집안은 조부 시절부터 관료집안으로 조부인 히라오카 사다타로(平岡定太郎, 1863 ~ 1942)는 제국대학(現 도쿄대학) 법학부를 거쳐 관료가 되었다. 참고로 증조부는 에도막부 시절 히메지번에 속한 하리마국(現 효고현)의 농민이였으나 아들 둘이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뛰어난 머리로 단숨에 상류층으로 신분상승하게 되었다. 참고로 미시마 유키오의 큰 할아버지인 히라오카 만지로(平岡萬次郎)도 변호사 겸 정치인으로 제국의회 중의원(평민원) 4선을 했었다.
할아버지는 내무성 관료로 후에 17대 후쿠시마현 지사와 가라후토청(樺太庁)[3] 장관까지 지낼 정도로 고위 관료가 되었다. 또한, 부친인 히라오카 아즈사(平岡 梓, 1894 ~ 1976)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거쳐 고등문관시험에 수석을 했음에도 대장성에 가지 못하고 농림성(우리식으로 농림수산부)에 입청해 수산국장까지 올라간 고위관료였다. 또한, 변호사 자격증도 가지고 있던 엘리트였다. 할머니인 나가이 나쓰(永井なつ)는 무가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대심원판사(大審院判事), 어머니는 아나호번(宍戸藩)의 번주인 마쓰다이라 요리타카(松平頼位)의 서녀였기에 상당한 귀족집안 출신이였다.[4] 이런 할머니 덕분에 미시마 유키오는 어릴때 할머니의 엄격한 과보호로 키워졌다. 어머니인 시즈에는 한학자이자 개성중학교(開成中学校)[5] 의 교장을 지낸 하시 겐조(橋 健三)의 둘째딸로 문학적인 재능이 뛰어난 여성이였다. 미시마의 아버지인 히라오카 아즈사가 개성중학교를 거쳐 구제제일고등학교(現 도쿄대학 교양학부)를 거쳐서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했던 인연으로 혼인하게 되었다.
미시마 유키오는 어릴때부터 몸이 병약했는데 또래 친구들이 한창 뛰어놀 나이에도 몸이 약해서 아침조회를 하다가 살짝 어지러워 쓰러진 적도 몇번 있었다. 결국 병원에 찾아가자 의사가 직사광선을 웬만하면 피하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원래 당시에도 고위관료였던 할아버지빨로 학교에서도 교장이나 평교사 할 것 없이 신경쓰던 학생이 기미타케였는데, 이 의사의 진단 이후로 할머니가 학교에 직접 찾아가 교장선생에게 "몸이 약한 우리 기미타케에게 태양볕을 맞아야되는 아침 운동장 조회같은 것은 앞으로 절대 시키지 말라"고 면전에서 강하게 요구했고, 당연히 그때부터 미시마 유키오는 모든 선생님들의 보호를 받으며 운동장 조회를 공식적으로 다 빠지게 되었다.
가뜩이나 왜소한 데다가 건강도 안 좋은데 의무적으로 햇빛도 자주 피하고 살다보니 얼굴색이 항상 새하얗다 못해 창백한 걸로 유명해서 미시마를 안 좋아하던 아이들 사이에서 별명이 "창백"이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명문가 집안의 가오를 잃지 않겠다는 신념이 있었는지, 당시 유키오의 동창들이 훗날 증언한 바로는 못된 아이들과 시비가 붙어도[6] 기세에 밀린 적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덩치크고 짓궂은 반 애가 방과 후 집에 가려고 하던 미시마 유키오에게 "야 창백이, 넌 불알도 창백하지?"라고 놀렸다고 한다. 그러자 화가 난 유키오는 기세 좋게 바지 단추를 풀어 그것들을 꺼내 "봐라! 봐!"라고 하면서 당당히 공개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황한 그 아이가 뻘쭘해져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어버버하다가 집에 갔다고 한다.[7]
2.2. 도쿄제국대학 입학 이후
앞에서도 상술했지만 조부때부터 3대가 누구나 선망하는 최고학부인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엘리트 출신이였다. 우리로 치면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행정고시에 합격한 셈이다.[8] 미시마 유키오 역시 조부와 부친처럼 어릴 때부터 공부 잘하는 걸로 유명해서[9] 고등학교를 전교 1등으로 졸업하고[10]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들어갔다. 참고로 학창시절 중에 패망했기에 도쿄제국대학으로 입학해서 도쿄대학으로 졸업했다.[11]
그러나 문학에 더욱 심취하여 아들이 관료가 되기를 원한 아버지와 마찰이 일어나게 되었다. 아버지는 미시마 유키오의 방에 들어가 써놓은 원고를 찢어놓을 정도였고 이를 위로한 것은 어머니인 시즈에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대학생 신분으로 여러 단편 소설로 여러 잡지에 출판하고 문학인들과 여전히 어울렸다. 그러나, 고위관료였던 할아버지는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장관직에서 잘리고[12]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13] 집안 사정이 나빠졌다. 거기에 패망 이후 고위관료는 공직에서 추방되었고 재벌은 해체되었고 군인은 전부 군에서 나가야 했다. 이에 따라 부모의 요구로 취업을 준비하게 되어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47년 여름에 유명한 은행 두 곳의 시험을 봤으나 탈락했다.[14]
결국 아버지처럼 고등문관시험을 응시하여 졸업 직후인 겨울에 합격한 뒤 대장성[15] 에 입청해 관료가 된다. 그러나 문학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고 공무원 생활 중에도 계속 글을 써 보내고 잡지사 등에서 출판하는 것을 병행했고 원래 선천적으로 약했던 건강이 더 나빠지기까지 했다. 여기에 문인들이 고위공무원으로 잘 살 수 있는 자기 아들을 부추긴다는 생각에 성질이 난 아버지는 1948년에 그전부터 미시마의 글을 실어주었던 출판사(가마쿠라 문고)[16] 를 찾아가, 출판사 편집자에게 "아니 지금 당신들이 24살(만23세) 된 어린 내 아들 기미타케(미시마 유키오)가 남들보다 글 조금 더 능숙하게 쓴다고 기생(게이샤)처럼 귀여워하는 거 아니오? 너무 부추기는 거 아니요? 뭐 걔가 나중에 시이나 린조[17] 라도 될 거 같소?"라고 항의했다. 이에 편집자 기무라 토쿠조가 "아사히 신문에 소설 연재할 실력은 될 겁니다. 화려한 (스타) 작가가 되고 말고 하는 거야 운에 달린 거긴 합니다만, 최소한 일류작가가 될 역량은 충분합니다"라고 하자 못마땅한 채 우울한 얼굴로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2.3. 작가로 등단 이후
그 후에도 미시마는 계속 문학 활동과 공무원 생활을 병행하며 몸이 약해졌는데, 하루는 출근길에 기차역에서 과로로 쓰러져 플랫폼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죽을 뻔했고[18] , 이 일에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미시마가 공무원을 그만두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하여 1948년 9월, 10개월 만에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게 되고,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들어가 1949년 '가면의 고백'으로 화려한 데뷔를 하게 된다.
이후 전후문학의 총아로 왕성하게 활동, 소설과 극본 외에도 방송이나 잡지, 영화 등에도 자주 출연하고 대중적 주목을 받게 된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라 해외에서도 큰 주목을 받는다. 미시마는 노벨문학상 후보자로 입에 오르내리던 1960년대에 오에 겐자부로를 가리켜 "내가 상을 받은 다음에 노벨문학상을 받을 사람은 오에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정작 본인은 1970년 자살한 탓에 수상하지 못했지만, 오에가 199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예언은 절반 정도 들어맞았다.
정치적으로는 극단적인 천황주의자여서 좌파 학생운동의 전성기에도 언론을 통해 학생들을 마구 질타 하기도 했으며, 기존의 우익 정치세력에도 가차없는 비판을 퍼부었다.[19] 60년대 중반부터 일본에서 국군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자위대의 젊은 장교단, 정부 신진관료들과도 어울렸고, 자위대에 체험입대하여 공수부대 훈련을 받거나, F-104 전투기를 타는 등의 기행을 벌였다. 한국에도 수차례 비공식적으로 와서 휴전선을 시찰하거나 무장간첩들의 침투 루트 등을 탐방했으며, 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중엔 예비군의 공비 수색 작전을 참관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한 경위로 나중에는 그와 뜻을 같이 둔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사설 부대를 만들기도 했다. 이름은 '''다테노카이'''(楯の會, 방패회). 천황의 방패란 의미다. 참고로 이웃나라 한국의 5.16 군사정변을 모델로 한 정변을 계획한 적도 있지만 무산되었다.
이후 자위대의 국군화, 즉 일본군화를 주장하며 육상자위대 동부방면대 총감[20] 을 인질로 잡고 농성하면서 '나와 함께 천하를 바꾸자. 궐기하라 자위대'라고 외친 일명 미시마 사건을 일으켰으나 오히려 자위대원들의 야유와 비난을 받고나서 "난 실망했다."면서 할복 자살하였다.
[image]
1969년 도쿄대 야스다 강당을 점거한 전공투들과 만나 1000여명의 청중 앞에서 2시간 반 가량 대담을 진행했다. 몇 백명의 전공투 학생들을 상대로 혼자 설전을 펼쳤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실제로 대담에 참여한 것은 전공투 측의 패널 3-4명과 청중 중에서 발언한 몇 명 정도로, 대담집에 실린 전공투 측 발언자는 도합 8명인 것으로 나온다. 그는 "천황만 인정하면 너희와 함께 가겠다."라고 자신의 입장에서는 나름의 넓은 배포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전공투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리가 있나.
애초에 전공투가 지향했던 사회주의의 계급 타파와 일본식 전체주의 및 기존 일본 사회의 상징인 천황제는 공존할 수 없는 목표이다. 그런데 "당신들 속에 있는 절대적인 것에 천황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잖아?"라고 말하며 천황제 인정을 양보랍시고 제안했다는 점에서 그의 극우 이념이라는 것이 사상적인 깊은 통찰을 거치지 않은, '알맹이가 뭐가 됐건 천황제만 지키면 된다'는 비논리적 사고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도 할 수 있다. 때문에 설전에서 전공투 학생들은 미시마에게 '그건 궤변이다'를 반복해서 외쳤다.[21]
당시 전공투들과 벌인 대담은 일본의 극좌 vs 극우를 비교하는 자료로 등장할 때가 잦다. 특이한 건 서로가 일본의 현체재를 부정한다는 데에 견해를 같이 하면서 묘한 공감대를 보인다는 것. 미시마 본인도 이 대담이 매우 즐거웠다고 대담 후기에서 언급하고있고, 패널로 참가했던 전공투도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뭔가 본인 구미에 맞는 만족감을 얻고 간 모양이다. 이 대담은 이후 TBS 테레비에서 방영되었고 책으로도 출판되었다. 현재에도 당시 영상은 남아있지만 TBS의 저작권 침해 신고로 유튜브에서는 찾기가 어렵다. 전공투의 증언으로는 대담집 출판은 미시마가 혼자 결정하고 진행한 일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도 <미시마 유키오 對 전공투 1969-2000>라는 책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전공투의 해당 문단을 참고할 것.
이런 인간이면서도, 군대는 안 갔다. 2차대전 때 징병 소집장을 받고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젊은 군의관이 청진을 할 때 폐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결핵으로 오진을 하고 군 입대에 부적합 판정을 내렸다. 문제는 그걸 알고서도 묵인했다는 것. 병역비리의 대표적인 예이다. 집안 빽을 이용해 병역을 회피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2.4. 미시마 사건
자위대원들에게 연설을 하는 장면
'''그리고 대담(을 빙자한 서로 간의 회유전) 1년 후 1970년 11월 25일, 그는 스스로 배를 갈랐다.'''
미시마가 자살한 사실이 알려지자 당시 일본 천황이었던 히로히토 역시 미시마가 사건을 일으킨 것에 대해서 불쾌해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이 과거 막 나가던 시절처럼 나간다면 전 세계가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권력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땅바닥에 떨어지고 지위를 간신히 지킨 상태가 된 지 오래되었기 때문. 다만 평소 자신을 찬양해 왔던 사실을 인지하여 장례 비용을 지원하며 장례식만은 잘 치르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미시마에 대한 반감은 상당했기 때문에, 그의 유골함이 도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3. 성향과 평가
3.1. 작가로서의 평가
문학적 능력은 뛰어나 일본문학사에서 손에 꼽는 천재 작가로서 작품들 역시 굉장한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유명한 작품들은 병약했던 시절에 썼던 탐미주의적인 작품들이다. 가장 유명한 게 금각사이다.[22] 그 외에도 '가면의 고백'과 '파도소리', '우국'이 있는데 가면의 고백은 등단작인 동시에 작가로서의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며 우국은 자기가 직접 영화로도 만들었다. 우국의 배경은 일본 2.26 쿠데타이다.
그는 일본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질 정도로 유명한, 일본에서 한 손에 꼽을 정도의 대문호이며 일본뿐만이 아니라 한국을 포함한 해외 문학계에서도 많이 언급될 만큼 주목받는 엄청난 작품들을 쓴 사람이다. 그가 정치적 성향을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지고 영향을 줬던 것도 그의 작품들이 워낙 유명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정치활동을 한 것이지, 원래 정치활동으로 유명해진 작가가 아니다. 단순히 정치활동으로 책 팔아먹는 사람이었다면 '''노벨문학상 후보에 감히 이름을 올리는 것 조차 불가능하다.''' 사실 노벨상은 후보따위가 없어서 이리 뽕에차서 거창하게 말할 건 없긴 하다. 언어, 민족을 초월하여 미시마만큼 인간의 오묘하고 세세한 감성을 혼란스레 표현하지 않고 담백하면서도 흐리지 않게 제대로 표현한 작가가 드물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탐미주의 문학에서 독보적으로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주며 50~60년대의 일본문학을 대표하였던 작가이다.
과격한 정치적 행보와는 달리 '파도소리'처럼 '''연애소설'''도 있다. 한국에서도 일본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 및 일본 문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그의 작품은 좋아하고 높은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많다. 사실 평범한 독자 입장에서도 동시대의 오에 겐자부로와 비교하면 미시마의 책이 더 쉽게 읽힌다. 갓 스물을 넘긴 작가가 묘사하는 중년 여성, 노년 남성의 심리와 그 심리를 상징하는 온갖 은유들을 읽으면, 문학에 천재가 있긴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
이 때문에 할복 자살만 아니었다면 아마 노벨문학상을 탈수 있었을지 않았을까? 하는 반응이 있을 정도로 명필이다.
3.2. 극우 사상가
미시마 유키오의 독특한 정치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시마라는 인물의 내면에 대해 살펴봐야할 필요가 있다. 미시마는 전쟁 당시에도 천황을 위해 죽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스러운 감정을 평생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그의 죽음을 앞당기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미시마 유키오한테 천황은...결국 자기 작품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야!
ー1969년 5월 13일 도쿄대, 미시마 유키오와의 토론 도중 한 전공투의 발언.
미시마가 보기에 전쟁이 끝난 뒤 고속성장 시기에 접어든 일본은 과거의 전통적인 가치보다는 소시민적 행복을 중요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고 전쟁 당시의 상황을 아름답게 추억하고 있던 미시마로서는 그러한 분위기에 대해 불만을 품고 천황을 위해 명예롭게 죽을 수 있던 일본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23] 미시마가 꿈꾸던 일본은 천황이 군대의 통수권을 지니고 공화제도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라고 한다.[24]
미시마는 '무사도'의 관점에서 군국주의을 비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무사도란 '개개인이 대등한 관계에서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대일로 대결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그의 관점에서 파시즘은 그렇지 못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비판을 했다.[25]
이런 사상을 가졌기에 사실 당시의 미시마는 대중적으로나 주류 우익세력들에게 오히려 극좌라고 까이기도 했으나, 정작 학계에서는 극우파, 급진적 보수주의자로 보는 시각이 많다.
3.3. 2명의 미시마
미시마 유키오의 인생은 2가지로 양분할 수 있다. 헬스로 건강해진 중년의 미시마와, 헬스를 하기 전 병약했던 젊은 히라오카 키미타케가 그것이다. 픽픽 쓰러지던 병약 체질을 지속적이고 열정적인 관리로 몸을 단련해서 근육질 몸매를 만들었다.
병약한 몸으로 금각사를 쓸 때만 해도 정치적인 성향은커녕 인간의 내면 자체에만 관심을 두었고, 권력이나 집단은 인간의 섬세한 가치를 단순화, 사물화하여 훼손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다. 이랬던 사람이, 극도로 자기 신념에 몰입하고 정치적으로 변해버렸으니...미시마의 표변이 어찌나 심했던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도대체 어떤 게 미시마의 진짜 모습인지 몹시 혼란스러워했다.
건강해진 뒤에는 헬스 운동의 효과를 만병통치약처럼 찬양했는데, 다자이 오사무의 자살 때 미시마가 "우울증은 체조만 해도 낫는다"고 코웃음친 것도 이런 이유다.[26] 미시마가 자살할 때 쓴 세키노 마고로쿠라고 불리는 칼은 미시마와 검도로 친분을 쌓았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자 후나사카 히로시에게서 받은 것으로, 미시마 사건 3년 뒤인 1973년 후나사카 히로시는 『세키노 마고로쿠-미시마 유키오, 그 죽음의 비밀』(関ノ孫六―三島由紀夫、その死の秘密)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순박했던 시절 미시마 유키오와의 추억을 회고하며 미시마가 어떻게 그러한 인간이 되었는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4. 일화
- 어릴 적에는 할머니 나츠코의 극심한 과보호 속에서 자랐다. 겨우 생후 49일 정도 되었을 때 부모의 방이 아닌 조모의 방으로 옮겨져 자랐으며, 미시마의 어머니는 모유 수유를 할 때도 시어머니가 정해놓은 시간 동안만 안을 수 있었다고 한다. 총이나 자동차 같은 장난감은 일절 금지였으며, 밖에서 또래와 노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할머니의 지도 아래 귀족적인 문화를 배우며 자랐다고 한다. 중등과 진학으로 부모와 함께 이사하기 전까지 이런 조모의 영향 아래서 지냈다.
- 천성적으로 겁이 많았던 미시마는 (주변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전쟁 중에 공습경보가 울리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방공호로 도망쳤다고 한다. 또한 정치 관료인 집안에서 태어났는데도 정치에 관심이 없어 11살 때 2.26 사건이 터지자 오카다 게이스케 총리가 암살당했다는 소문[27] 을 친구로부터 전해듣고 '총리대신이 뭐하는 사람이냐'고 되물을 정도였다.
- 그는 토론에는 언제나 일본도를 지참했는데, 토론 중 형세가 불리하게 되면 창백한 안색을 하고 상대의 두상에 칼날을 휘두르는 인간이었다고 한다.
- 극단적인 마마보이였던 그는 젊은 시절 2명의 여성에게 고백을 했다가 차인 가슴 아픈 경험이 있는데, 그 이유가 가관인 게, 그토록 농밀한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에 차마 비집고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였다고 한다.
- 하루는 미시마의 친구가 그의 집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미시마의 어머니가 다리가 아프다고 하자 "어머니, 뭐? 어디? 어디?"라고 호들갑을 떨며 남의 눈치도 보지 않고 열심히 다리를 주물렀다고.
- 젊은 시절, 쇼다 미치코라는 여성과 맞선을 본 적이 있었다. 미치코는 당시 가톨릭계 명문 여자대학교인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인 미모의 여대생이었고, 그녀의 친가인 쇼다 가문은 닛신(日淸) 제분이라는 대기업을 운영하는 재벌가, 외가인 소에지마(副島) 가문은 옛 화족(백작)이었다. 그러나 유키오와 미치코는 결혼까지 이어지지 못했고, 유키오는 나중에 일본화가 스기야마 야스시(衫山寧)의 장녀 스기야마 요코(衫山瑤子, 1937 ~ 1995)와 결혼[29] 했다. 그리고 훗날 쇼다 미치코는 무엇이 되었냐면…
- 슬하에 1남 1녀를 낳았는데, 자녀들을 상당히 아꼈다고 한다. 사건 당일 목적지로 가던 중 가쿠슈인 초등과 건물을 지나갈 때 "잠시 멈춰달라"고 부탁한 다음 건물을 바라보면서 "지금 딸이 저기에서 공부하고 있겠지"라고 말했다는 일화[30] 나, 장남 이이치로가 초등학생 때 수업참관 후 교장과의 대화에서 돌연 "아들이 귀엽다"고 3번이나 말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 자녀들은 성인이 된 이후 아버지의 작품을 배경으로 활동하면서[31] 어머니 사후 아버지의 저작권을 두 사람이 담당하고 있다.
- NHK 방송에 나가서 더글러스 맥아더가 "현대문명 기준으로 보면 일본은 12살짜리 소년들의 나라다."라고 비웃은 것에 대해 "나는 일본이 너무 늙어서 지팡이를 써야 할 줄 알았는데 12살짜리라고 지적하니 너무 기뻤다. 오히려 일본을 칭찬한 게 아니냐? 그 말대로라면 2차대전은 12살짜리 애들끼리 전쟁놀이를 한 것일 뿐이라서 당시 군부 지도자들을 전범으로 처벌한 것은 형사법상 부당하다!"라고 코멘트했다.
- 당시 일본의 대중문화에도 많은 관심이 두고 있던 미시마는, 내일의 죠의 열렬한 애독자이기도 했다. 하루는 영화 촬영 때문에 잡지를 구매하지 못해 주간 소년 매거진의 본사에 방문, 무료로 잡지를 받고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막상 내일의 죠가 후세에 전공투의 상징이 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또한 아이러니한데, 실제로 작중 초기 주인공 야부키 죠가 잠시 보여준 정치적 성향은 매우 진보적이고 분배주의적이다. 물론 내용상 그냥 배운 것 없는 소년원 출신 불량배 고아 소년이 제대로 깽판 한번 치는 김에 한번 질러본 말들이라는 작중 설정이지만, 중학생 나이 소년 정도가 말하기에는 현실성 있는 진보성향의 내용들이다. 또 한번은 문예춘추에서 가장 즐겨보는 TV 프로그램에 대해 질문하자 "울트라맨을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 SF에도 흥미를 가지고 있어 1956년에는 일본 UFO 연구회에 가입, 실제로 아내 요코와 함께 UFO를 목격했다고 증언한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첫 SF소설인 <아름다운 별>을 집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4.1. 애인?
[image]
미와 아키히로와 연인 관계였다는 설로 유명하다. 다만 정확히는 미시마가 일방적으로 미와 아키히로에게 대시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미시마 유키오는 일명 미시마 사건으로 극우 소설가로 유명했던 인물인데, 미와 아키히로는 극우를 넘어 정치적인 행보를 보인 적은 없다. 다만 미시마 유키오가 그의 뒤를 봐준 것은 확실하다.
미와와 관련된 일화에는 재밌는 것이 많은데, 미시마가 "마루야마(미와 아키히로의 본명)군. 당신에게는 한 가지 결점이 있다. 그것은 나에게 반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미시마는 후카사쿠 킨지 감독의 영화 《검은 도마뱀》에 출연한 적도 있는데, 출연 동기가 '검은 도마뱀' 역으로 출연한 미와 아키히로와 키스하고 싶어서라는 이야기도 있다.
더불어 미시마는 육체와 관련된 콤플렉스가 많았기 때문에 미와 아키히로가 이를 놀릴 때마다 화를 냈었는데, 미와와 무도장에서 춤을 추다가 미와가 미시마의 어깨, 팔뚝을 만지며 "패드, 패드밖에 없네, 미시마 씨 어디 있나요??"라고 웃으며 농담을 던지자 미시마는 버락 소리치며 "파트너 교체다, 나는 가겠다." 하곤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난 후 헬스클럽에서 육체미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링크
5. 여담
2000년 아사히 신문에서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은 누군가?'라는 설문조사에서 10위를 기록했다. 1위는 나쓰메 소세키였다. 2위는 무라사키 시키부, 3위 시바 료타로, 4위 미야자와 겐지, 5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7위 다자이 오사무, 8위 마쓰모토 세이초, 9위 가와바타 야스나리였다.#
미시마 유키오는 영어 실력이 좋기로도 유명했는데, 그 때문에 외신기자들과 여러 차례 영어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당시 영어공부를 위한 매체가 부족했던 시절인지라, 그는 매일 어학 LP판을 들으며 독학으로 회화실력을 쌓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남은 인터뷰를 들어보면, 20세기 초중반 보수적 용인발음에 가까운 억양의 영어를 구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영어 인터뷰 영상 하지만, 1958년에 스스로 "저는 영어회화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인간의 가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항상 역설하고 있습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영어 이외에도 중국어와 독일어, 프랑스어도 구사할 수 있었다.
그는 몸을 헬스를 통해 근육질로 만든 후 사진집까지 만들었다. 그것도 대부분 훈도시를 입고 일본도를 들거나 나무에 매달려 화살을 맞는 사진이 대부분이다. 화살을 맞으며 하늘을 바라보는 포즈를 취하는 사진은 서양에서 수없이 변주된 성 세바스찬 성화의 오마주다. 그런데 성 세바스찬은 일종의 BDSM 게이 클리셰로 쓰이는지라, 많은 이들이 그가 게이임을 주장한다. 게이바를 실제로 드나들었는데다가 자신이 연인이었다는 일본 중견 소설가의 증언도 있었다. 그의 자전적인 소설이라 여겨지는 가면의 고백에서도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성화를 보고 정신, 육체적인 최초의 사정을 경험한 걸로 묘사된다. 결혼한 것을 들어 양성애자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으나 사회적 압박[32] 등의 이유로 결혼하는 성소수자도 있으므로 그것만으로는 단정하기 힘들다. 가면의 고백이 그의 동성애적 정체성을 고백한 소설이라는 의견도 있다.
대영박물관에도 일부 사진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당대 미시마 유키오의 신체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던 듯. 키도 170cm를 넘지 못하는 단신에다가[33] 본격적으로 헬스를 하기 전까지는 깡마르고 병약한 허약체질이었다. 언젠가 일본 여성들에게 인기 설문조사를 한 적 있었는데, 그 결과가 굉장히 나빴다고 한다. 게다가 운동신경도 몹시 안 좋은 편이라서 아무리 운동을 잘 해보려고 열심히 노력해도 여전히 뻣뻣하고 어색했다고 한다. 늘 건강미를 동경했던 그에겐 이런 사실이 큰 컴플렉스로 작용했다고 한다.## 거합도 시범 영상인데 오랫동안 수련했는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뻣뻣하다. 참고로 보통 1단의 모습이다.# 최종적으로는 검도 5단에 거합도 1단이었다.[34]
영화배우로도 활동해서, 도쿄대 법학부 선배였던 마스무라 야스조가 연출한 《카라카제 야로》에서는 찌질이 야쿠자 역으로 출연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고, 자신의 소설 《우국》을 영화화 할 때에는 본인이 출연은 물론 직접 연출까지 했다. 1969년작. 《히토키리》라는 사무라이 영화에서는 이시하라 유지로와 함께 출연했다.
1998년 3월 17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의하면, 미시마 유키오는 작가인 후쿠시마 지로(福島次郞)와 1951년에 처음 만나, 동성애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후쿠시마 지로는 문예지인 문학계에 실명 소설 <미시마 유키오>를 발표해서, 자신이 미시마와 주고 받은 편지와 동성애에 탐닉했던 일을 고백했다. 1964년 2월, 미시마가 후쿠시마 지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좌익에는 '''남자의 매력이 없다'''"라는 후덜덜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에도가와 란포의 '검은 도마뱀'을 각본화하고, '''박제로 출연한다.'''(1968년)
한동안 일본에서는 언급조차 하면 위험한 인물이'''었'''다. 앞서 쓴 것과 같이 정부 관료, 자위대 간부들과의 관계와 그의 주장 탓에 한동안 자위대내 쿠데타설이 불거질때마다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고 그때마다 일본 정치인들은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다.
하지만 2005년경, 즉 그의 탄생 80주년(그는 45세에 자결했다.)부터 다시 주목받았으나, 결국 별탈없이 넘어갔다.
그는 다자이 오사무 생존시부터 비판하는 입장에 섰고 그가 자살하자 정면에서 깠다. 그는 다자이를 향해 그의 우울증은 매일 라디오 체조만 해도 낫는 병이라고 비웃었다. 그런데 정작 자기도 할복. 다자이 사후 그의 제자가 따라 자살했는데 미시마의 사후에는 스승이 자살했다는 것도 묘한 대조를 이룬다.[35] 물론 그 의도와 차원이 다르게 '''할복'''이었기에 세계적으로 엄청난 뉴스가 되었다. 미시마는 다자이를 유약하고 목표 없는, 마치 온실 화초 같은 쓸모 없는 부르주아라며 조롱하곤 했는데 본인도 딱히 다를 바 없이 살아 왔고 또 같은 방법으로 삶을 마감했다는 건 참 재미있는 일이다.
특히 그들의 소설 《인간실격》과 《우국》은 각자의 자살의 동기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데, 자전적인 소설 《인간실격》이 다자이의 자살동기, 즉 스스로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을 그대로 드러내보이고 있는 데 반해, 《우국》은 미시마의 컴플렉스, 즉 젊은 시절의 병역기피와 동성애성향을 극복하는 (그의 생각에는) 이상적인 죽음, 주인공인 젊은 장교는 사랑하는 아내와 검열삭제한 후 할복자살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해외에서는 노벨문학상에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다고 하던 젊은 문인이 정치적 이유로 할복자살한다는 게 상당한 문화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쟈포네스크랄까. 그래서 나중에 폴 슈레더 감독이 미국 자본과 함께 "MISHIMA(미시마)"(1985년작)라는 그의 전기 영화도 만들기도 했다.[36]
그의 작품 대부분이 주요 외국어로 번역되었고 그의 드라마틱하고 쇼킹한 생애와는 별개로 그의 작품들은 해외(주로 영국, 프랑스, 독일등의 유럽국가)에서 꾸준히 읽히며 좋은 평가를 얻어 오고 있다.
생전에 미국의 SF 및 판타지 소설가인 A. E. 밴보트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밴보트가 '전미 과학소설 및 판타지 작가 협회'로부터 <거장 상>을 받을 당시에 후배 SF 작가 리처드 체딕이 지은 헌정시에도 미시마 유키오가 언급되고 있다.[37] 이 시는 황금가지에서 2004년에 출판한 <오늘의 SF 걸작선>에 실려있다.
대체역사소설인 《비명을 찾아서》에서는 환갑까지 살아 1986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모 격투게임의 막장 콩가루 패밀리의 성은 여기서 따왔으며, 특히 이놈은 좀 더 직접적으로 미시마 유키오를 모티브로 했다.
고두익의 "숲속수학" 시리즈에서는 마신 같은 존재로 등장한다. 5편에서는 선생님이 미시마의 날을 맞아 축구선수를 꿈꾸는 철수를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가 나오고, 8편에서는 두통을 겪던 태훈이의 대가리를 쪼개 경주빵을 꺼냈더니 태훈이가 미시마가 되었다. 부활한 미시마는 집단자위권에 기뻐하며 다시 배를 갈랐다. 그 외, 고두익의 작품 중 KATANA(감상주의) 및 중촌 산악회에서도 등장했다.
스페인의 미니어쳐게임인 인피니티에서 유징 제국이 일본을 세계 2차 대전 수준으로 비참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양반의 사상을 받아들인 극우 테러 조직들이 유징 제국에 대항한 테러를 일으켜서였다. 그 결과 유징 제국은 현재의 중국과 다를 게 없거나 더 심한 수준의 경찰 국가로 변했다. 그리고 어찌어찌 독립은 했으나 유징 제국은 이에 인정을 안 하고 있고, 사회상은 영락없는 중세 잽랜드다.
쓰레기와 안경과 문학소녀(가짜)라는 만화에서도 언급되었는 오리카와가 동성애에 관한 소설을 찾는다면서 모리야가 가면의 고백을 추천해줬다.
2019년 12월 부임한 주한 일본대사 도미타 고지의 장인이다.
6. 한국에서의 평가
구세대에게는 방패회 사건 때문에 '''또라이 우익'''으로 각인되어 있다. 김지하는 그의 죽음에 대한 시 '아주까리 신풍-미시마 유키오에 대하여'를 쓰며
하고 평가절하 하였다. 거기다 그의 장모인 박경리는 미시마 유키오를 예를 삼아 '''얄팍한 로맨티시즘이 한계에 도달하면 결국 죽을수 밖에 없는 일본적 미학의 얄팍함의 표상'''이라며 신랄하게 비난한 적 있다.별것아니여 / 조선놈 피 먹고 피는 국화꽃이여 /
빼앗아 간 쇠그릇 녹여 벼린 일본도란 말이여 /
뭐가 대단해 너 몰랐더냐
인터넷이 활성화된 이후에도 그의 엽기적인 할복 행위가 강조되어 그냥 '''배째고 죽은 또라이 우익'''으로만 유명해졌지만, 그의 작품 '금각사'와 '파도소리'의 문학적 능력때문에 '어쩌다 이리 주화입마 했을꼬'라고 안타깝게 여기는 한국인도 많다.
당연하지만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우익사상에 찬동하는 건 아니다. 실제로 ‘금각사’의 주인공의 마지막에 자살을 택하지 않은 행동과 그의 최후가 위반되어 청년시절의 그와 흑화한 내셔널리즘의 중년 미시마는 다른 사람이라는 문학적 분석이 많다. 오히려 찬양받던 청년시절의 그가 쓴 ‘금각사’의 주인공과 반대되는 활동을 한 것이다. 기득권 세력과 결탁한 기존의 우익 세력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좌익 학생들과 단신으로 토론을 벌이는 등의 기개나 논리의 치밀함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한편 한국의 작가 이문열이 자신이 좋아하는 단편소설들을 몇몇 주제로 묶어 '세계 명작산책'이라는 이름으로 단편집을 내놓았었는데, 그 중 죽음을 주제로 한 소설집, '죽음의 미학'에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포함시키기도 했었지만 2020년에 나온 개정판에는 '우국'이 빠졌다
소설가 신경숙이 '우국'을 표절했다는 논란이 있다. 이 표절논란이 크게 문제가 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일본의 극우작가인 미시마 유키오의 글을 표절(적어도 신경숙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함으로써 그의 사상을 그대로 배껴왔다는 점에 있다. 또한, 문학계는 이 논란에 적절한 비판이나 제재를 가하지 않고 제 식구 감싸기에만 혈안이 되어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신경숙이 현대 한국 문단에서 차지하던 위치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문학계 내부에서 일어난 논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문학계의 위상을 크게 실추시켰다. 더군다나 한국 문단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사회 문제에 많은 비판을 가하는데, 자신의 문제는 등한시하며 어찌 사회에 제대로 된 비판을 가할 수 있느냐는 의견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신경숙 문서 참조.
한국어 번역본 중에서 가장 탁월하다고 평가받는 것은 신경숙이 표절한 시인 김후란의 역본이다. 시인 특유의 격조 있는 문장이 원문이 가진 힘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는 탁월한 번역인데다 인지도가 낮아 다른 역본들이 번역하지 않은 단편 <연회는 끝나고>가 포함되어 있어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는다. 문제는 이 역본이 80년대 후반에 학원사의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되어 출간된게 마지막으로 이후 재간이 이뤄지지 않아 가격이 어마어마하게 높다. 어느 사이트, 어느 판매자건 기본 30만원부터 시작한다.
7. 작품 목록
7.1. 소설
- 금각사(1956)
- 파도소리(1954)
- 우국(1961)
- 황야에서
- 가면의 고백
- 교코의 집(鏡子の家, 1959)
- 풍요의 바다[39] (1965-1970)
- 봄눈(春の雪, 1969)
- 달아난 말(奔馬, 1969)
- 새벽의 절(暁の寺, 1970)
- 천인오쇠[38] (天人五衰, 1971)
- 사랑의 목마름(1950)
- 향연이 끝난 후(1960)
- 영령의 소리[40] (英霊の声; The Voices of the Heroic Dead, 1966)
7.2. 비문학
- 문화방위론(文化防衛論) : 미시마 유키오의 정치논문들 및 학생들과의 대담 등을 엮었다. 알라딘 링크
- 미시마 유키오 對 도쿄대 전공투 1969~2000 : 미시마 유키오와 도쿄대 전공투와의 대담 및 참석했던 전공투들의 후일담을 엮었다. 알라딘 링크
[1] 자신도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였다. 살아있었더라면 유력한 노벨상 수상자였다.[2] 가스중독으로 죽었다. 현재는 미시마 사건에 의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자살설이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있고 유력한 견해다. 다른 이유에서의 자살이라는 의견 역시 제시된 바 있다. 하지만 과실에 의한 사고사라는 주장 역시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3] 現 러시아 사할린 지방을 다스리던 일본의 관청이다.[4] 이런 집안배경 때문에 남편인 사다타로를 은근히 무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5] 현재는 일본최고의 진학교로 불리는 開成中学校・高等学校의 전신이다. 예전에는 중학교가 현재의 고등학교 비슷했다.[6] 물론 권세있는 가문의 아이를 폭행했을 리는 없으니, 물리적 충돌은 없었던 것이고 그저 기싸움 개념으로 말로만 시비를 자주 걸었던 걸로 보인다. 그와 관련된 많은 기록에 초등학생 시절에 주먹다짐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7] 미시마 유키오의 어릴 때부터 친구이자 화가인 미타니 마코토가 훗날 미시마 유키오에 대해 쓴 회고록인 "급우(친구), 미시마 유키오"에 나오는 내용이다. 미타니 마코토가 당시 옆에서 그 사건을 보면서 느꼈던 회고의 글은 "남색 교복 배경에 튀어나온 그것이 체격에 비해 생각보다 커서 놀랐다."[8] 과거 일본의 고등문관시험은 이 정도의 지위를 보장하는 시험이었다.[9] 초등학교 때 같은 반에 별로 친하지 않던 친구가, 반에 새로 부임한 교사가 왔을때 "히라오카상(미시마 유키오)은 태어날 때 일도 기억해요!"라고 말한 적도 있을 정도로 머리가 좋은 걸로 전교에 유명했다고 한다. 한 일화로 미시마 유키오의 자서전격 소설로 유명한 가면의 고백에 주인공의 언급으로, 자신이 아기였을때 머리를 씻기려고 물을 담아놓은 대야에 머리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고 써져 있다. 물론 자서전격 소설이 완전한 자서전은 아니니 진짜인지 알 수야 없지만.[10] 당시는 전교 1등이 졸업식 연사를 했었고, 미시마 유키오가 졸업식 연사를 했던 사진이 남아 있다. 천황으로부터 금시계를 받았다.[11] 1947년 9월에 도쿄대학으로 개칭되었는데 미시마 유키오는 1947년 11월 28일 법학부 법률학과를 졸업했다.[12] 후에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나왔다.[13] 당시 일본 내부경제는 전쟁자금 부족으로 2차대전 말기에 공무원 월급도 밀리거나 안 주고, 멀쩡한 회사 공장을 군부가 빼앗아서 군수물자 공장으로 바꾸는 등 엉망진창 개판이었고 종전 후에도 수습하느라 나라가 거지꼴이었다. 일본 상류층 고위공무원 집안인 미시마의 집안도 어려워졌을 정도면 서민들은...[14] 필기시험은 다 합격했으나 최종면접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도쿄대 법학부 출신도 그만큼 일자리가 어려웠다는 방증도 된다.[15] 이미 문학활동을 병행하던 관계로 합격자 중에서 성적은 좋지 않았다고 한다. 합격자 167명 중 138등으로 합격했다. 물론 졸업 직후 바로 합격을 했다는 것, 게다가 계속 글을 써서 출판하는 것과 고등문관시험 공부를 병행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16] 유키오는 여기에 1945년부터 글을 기고하였다.[17] 일본의 소설가.[18] 기차가 올 시간보다 한참 전에 쓰러진 거라 기차에 치일 일은 없었고, 기어 올라와서 살았다고 한다.[19] 좌파성향 학생들이 그들과 대립했음에도 그에게 관대했던 이유이기도 하다.[20] 말하자면 간토지역 사령관[21] 물론 사회주의도 그 범주가 다양하고 공산독재국가처럼 개인 숭배로 이어진 경우도 많다. 일본 적군파 역시 전체주의적인 폭력집단으로 변질되며 그 투쟁의 끝을 맞이했다. 그러나 당시 미시마가 주창한 천황주의는 '전쟁국가로 회귀'였으며, 당시의 천황 역시 과거 전범국의 최고통치자였던 점을 생각해 보면 그가 적군파에게 양보랍시고 얼마나 황당한 제안을 했던 것인지 알 수 있다.[22] 말더듬이인 데다 외모도 추한 절집 소년이 가진 기묘한 심미안과 이상심리, 그리고 그의 눈에 비친 비틀린 세상을 아름다우면서도 논리적인 문장으로 묘파해 낸 탁월한 소설이다. 물론 읽기는 좀 힘들다.[23] 아베 신조와 미시마 유키오를 비교하며 미시마를 아베의 '정신적 스승' 운운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게 바로 이것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통하는 부분이 있을 망정, 근본적으로 아베가 고속성장 시기의 일본을 '아름다운 나라'로 그렸던 것과는 정 반대되는 게 미시마의 사상이다. 아베와 미시마 모두 우익 민족주의자이지만 아베는 전후 형성된 보수 빅텐트 정당인 자민당의 정치인으로써 민족주의 못지 않게 유산 계급의 경제적 이득도 대표하고, 미시마는 바로 그 자민당도 유약하다고 비난했으며, 그의 우익 사상은 위의 전공투의 말처럼 미학적 세계관의 일부에 가깝다.[24] 하지만 천황이 절대권력을 지닌 사회와 진정한 공화제도와 언론의 자유는 양립하기 어렵다. 미시마의 세계관은 이러한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25] 정작 사무라이들, 특히 센코쿠 시대의 사무라이들은 유키오의 낭만적인 부시도나 30년대 군국주의자들의 파시즘과 전혀 상관없는 합리적인 행동을 우선시했다.[26] 그러나 다자이 오사무 자살 때는 미시마 유키오가 근육질일 때가 아니었던 데가가 정식 등단도 안 했던 공무원 시절이다. 그해 미시마 유키오가 우울증은 아니었어도 건강이 나빠져서, 공무원 생활과 작가 생활을 병행하다가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가고 주변의 걱정을 받던 시절이다. 실질적으로는 몇 년간 문학적 교류로 어울리던 다자이 오사무와 문학 성향적으로 대립해서 감정이 안 좋던 시기라 무시하는 말을 쓴 것으로 보인다.[27] 실제로는 미수에 그쳤다. 진짜 죽은 사람은 사이토 마코토 내대신(내무대신과 무관한 궁중 직책.)과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이다. 이 두 사람이 다 실제로 총리를 지냈었던 적이 있어서 와전된 건이다.[28] 일설에는 게의 실물이 아니라 게를 의미하는 '蟹'라는 글자를 두려워했다고도 한다.[29] 딸 노리코(1959년생, 65세)와 아들 이이치로(1962년생, 62세)가 태어남.[30] 참고로 딸 노리코의 가쿠슈인 유치원/초등과 동기 중 한 명이, 젊은 시절 맞선을 봤던 미치코의 장남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장남은 2019년 5월 1일부로...[31] 다만 딸 노리코는 외교관인 남편을 따라 외국에 갔기에, 결혼 후에는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다고 한다.[32] 특히 미시마 유키오의 집안은 (2차 대전 후 가세가 기울기는 했으나) 일본내에서 엘리트 상류층 집안이었고 그의 부모와 조부모는 어릴때부터 그를 철저히 관리했었다. 커서 작가가 되는 (그의 부모와 어른들 입장에서) 일탈은 있었으나 엄연히 그의 천재성으로 인한 성공 가능성을 본 부모의 허락을 얻어낸 뒤에 한 것이고, 성공만 한다면 작가라는 직업 자체가 상류층에서 그렇게 크게 무시당할 직업은 아니었다. 유년기부터 청년기까지는 항상 부모의 관리 하에 있던 사람이었기에, 결혼의 압박이 없었을 리 없다.[33] 영국 BBC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미시마 괴사건(Strange case of Mishima)'에서는 5피트 1인치(156cm)라고 소개한 바 있고 구글 프로필에서는 163cm로 나왔다.[34] 다만 현행 검도 체계는 아닌 듯 하다. 66년 4단을 따고 68년에 5단을 땄는데 현행 체제에서는 4단을 따고 4년이 지나야 5단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35] 그리고, 미시마가 다자이의 자살을 비웃은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미시마의 자살을 비웃은 사람이 또 나왔으니...시오노 나나미다.[36] 그해 칸 영화제 최우수 예술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 영화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동성애 의혹은 특히 강하게 제시되고 있는데 때문에 유족들의 강력한 반대로 지금도 일본내 상영 금지, DVD/비디오 출시 금지로 묶여있다. 다만 게이 바 장면을 자른 버전이 TV에서 몇 차례 방영 됐다고 한다. 개봉이 예정됐을 당시 '미시마 11월 25일, 쾌청'라고 번역제가 붙었다.[37] 밴보트는 이 상을 받은 직후인 2000년에 알츠하이머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실 상 자체가 밴보트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게 알려진 후에 부랴부랴 수여한 것이다.[38] 천인이 죽을 때쯤 나타나는 다섯 가지 쇠하여지는 모양(模樣)을 말한다. 1. 몸빛이 흐려지고, 2. 나쁜 냄새가 나며, 3. 겨드랑이에 땀이 나고, 4. 화만이 마르며, 5. 제 자리가 즐겁지 않게 됨을 일컫는 것.[39] 총 4부작으로 이루어진 미시마 유키오의 마지막 작품이며, 이 중 1부인 봄의 눈이 영화로 제작된 바 있다.[40] 현재 한국어판은 출판되어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