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점령하 만주

 


'''소련 점령하 만주'''
'''Маньчжурия под оккупацией СССР'''
'''苏联占领下的满洲'''

'''소련의 군정'''
[image]
'''국기'''
[image]
'''1945년 ~ 1946년'''
'''위치'''
만주
'''수도'''
선양
'''정치체제'''
군정체제
'''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언어'''
러시아어, 중국어
'''문자'''
키릴 문자, 한자
'''민족'''
러시아인, 한족
'''통화'''
소련군 사령부 위안
'''성립 이전'''
만주국 | 몽강국 | 관동주
'''해체 이후'''
중화민국(반환 → 중국 공산당의 점령)
내몽골 인민 공화국
소련령 뤼순[1]
1. 개요
2. 역사
3. 소련의 전쟁범죄
4.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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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주 작전으로 소련이 만주를 점령한 1945년 8월 15일부터 국민정부에게 반환하는 1946년 5월 3일까지 만주소련군이 다스리던 시기이다.

2. 역사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연합국은 소련의 대일 참전을 허용했다.
8월 9일, 소련은 소련-일본 중립 조약을 깨고 대일선전포고를 때렸다. 곧이어 대대적으로 만주침공했다. 당시 관동군의 정예 부대가 동남아시아에 주둔해 있던 탓에 머릿수만 유지하던 관동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무장해제하고 일본의 괴뢰 정권만주국몽강국은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그 결과 소련군은 만주, 내몽골,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게 되었다.
소련은 점령기간동안 일본인들이 만주에 설치한 공장 등 이득이 되는 시설을 해체시켜 자국으로 가져갔다. 이 때문에 이후 만주 지방의 경제가 한동안 정체되었다. 또 중국의 공산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홍군관동군의 무기로 무장하는것을 도왔으며, 중국 공산당이 만주에서 세력을 확대하도록 도와주었다.
중국의 국민정부는 1946년 5월 3일 소련으로부터 만주를 반환 받았으나, 국공내전 중이였기 때문에 반환되자마자 중국 공산당이 만주를 빠르게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국민정부는 만주를 차지할 수 없었다.

3. 소련의 전쟁범죄


소련군만주에 들어오자 마자 일본인들을 전범으로 분류하고 일본인 탄압 정책을 실시했다. 불과 1주일 전만 해도 사회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던 일본인들은 전쟁 후 얼마 되지 않아 그 지위를 잃고 탄압을 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식민지배의 피해자인 조선인과 중국인들도 같이 탄압을 받았다.[2]

"갈근묘 사건"=1945년 8월 14일 오전 11시경 싱안에서 갈근묘로 달아나는 무장하지 않은 부녀자와 노인들 1천 수백명에게 소련군 전차대가 1시간 반 동안 포격, 총격을 계속해 학살했다.

(츠치야 타카유키"스톱, 편향평화기원관") 번역: granit(kgs5773)(군사 마이너 갤러리)

*"두 아이를 업고, 낮에는 저격을 피하고 밤새도록 계속 걸어갔습니다. 늙은 사람들은 걸리적거리면 스스로 탁류에 몸을 던졌고, 어린 아이를 목졸라 죽인 부인도 적지 않았습니다"(5세와 3세 아이를 둔 주부)

*고립되고 늑대의 먹이가 된 것으로 보이는 아이들도 있었다. 영양실조로 죽는 아이가 속출했다.

*"그동안 친하게 지내던 만주인 친구도 비적이 되어 찾아왔다"

*"일본인은 소멸이란 소리를 듣고, 아기까지 중국어로 말하라고 강요당했다"

*"어느새 만주 농민에게 둘러싸였다. 잦은 약탈로 짐은 모조리 털린 우리에게 아이를 팔라고 요구했다. 남자가 300엔, 여자가 500엔이라고 한다. 나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 부탁합니다, 이아이는 내 목숨과도 같아요, 제 목숨과도 같다고요. 』라고 (중국어로) 외쳤다"(배우, 아시다 신스케)

*"호박 1개와 아이를 교환한 어머니도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이었다"(배우·타카라다 아키라)

《요네다 켄조, 정론 2005/11월호)번역: granit(kgs5773)(군사 마이너 갤러리)

"소련군에 만주인과 중공군까지 일본 여자를 요구했다. 집단을 지키기 위해서 몸을 희생한 딸도 있었다. 자식을 기르기 때문에 몸을 팔아야 했던 어머니도 있었다. 한 딸은 이런 더럽혀진 몸으로 조국에 돌아갈 수 없다고 부모의 권고조차 거절하고 만주 땅에 남아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미부테루 준"진리" 제11권 제5호 쇼와 21년 12월)번역: granit(kgs5773)(군사 마이너 갤러리)

*"북한에 들어온 소련군은 대낮에 아내는 남편 앞에서 범하고, 울부짖는 여학생은 트럭으로 집단으로 납치해 갔다. 반항하는 자, 폭행을 제지하는 자들은 가차없이 사살됐다"(와카츠키 야스오"한국과 일본인")만주도 북선(조선(한반도)의 동북부(함경남도·함경북도)도 상황은 다를 바 없었다.

*"북만주의 어느 개척촌에서는 패전 소식 전달과 동시에 인근 촌락에서 수백의 폭도가 봉기해, 남김없이 약탈당하고 남녀 모두 알몸이 되었다.

...산 속을 행군(부상 후 군복을 벗고 피난해온 병사)하면 곳곳에 아무것도 모르는 일본인의 아이가 버려져 있었다. 길에는 알몸이 된 일본 여성의 시체가 굴러다녔다. 처음에는 일일이 길가에 멈춰 차로 데려갔지만 너무나 수가 많았기 때문에 마침내는 불가피하게 버리고 갔다. 나무에 묶어 참살된 부인도 적잖게 있었다고 한다"(와카바야시 마츠타로"세계국가"창간호 쇼와 22년 1월)번역: granit(kgs5773)(군사 마이너 갤러리)

*그래 일본은 만주 땅에서 아시아의 공산화를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그 일선을 돌파당하고 만주가 적화되었을 때, 비극이 일본인에게 일어났다.

《카츠오카 칸지〃)번역: granit(kgs5773)(군사 마이너 갤러리)

소련군 점령지에서 소련 병사가 행하는 무법행위에 대해서 소련군의 헌병은 전혀 단속하려 하지 않았고 장교도 앞장서서 악행을 거듭했다.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소련 점령군 당국도 일본인에게 현금·귀금속 등 금품의 공출을 강요했고, 일본인 회사 건물·개인 주택을 접수했다.

*점령군은 또 필요에 따라선 일본인을 강제 노역에 동원하고 시설 철거, 토목 공사에 혹사시켰다. 시설 철거는 공장의 기계는 물론 사무실 책상·의자, 공업 원료나 저장한 식량을 소련으로 운반하는 것이다. 병원에서는 자고 있는 환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침대에서 담요까지 뺏어갔다.

*체류 일본인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것은 만주의 한촌으로 이주했던 개척단이었다. 젊은 남자들은 군대에 소집되었고, 노인과 여자, 아이들은 짐을 메고 오로지 남쪽으로 계속 걸어갔다.

소련군과 폭도들은 이에 달려들어 또 약탈 폭행, 강간 살육을 자행했다. 일시에 200명 이상이 살해당한 개척단만 21개고, 거의 전멸한 개척단도 7개나 있었다.

*다행히 일본 거류민이 많은 대도시에 온 집단은 수하물이 없는 것은 물론 문자 그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깡마른 몸을 드러내고 있는 남자, 맨발로 마대에 구멍을 뚫고 목과 손만 벌리고 신문지에 아기를 끌어안고 있는 부인, 그것은 흡사 "망령의 행렬"을 보는 것 같았다.

*이들 난민수용소에서는 매일같이 수십명의 사람이 죽어, 결국은 시체를 치울 힘이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수용소 주변에는 중국인이 떼로 몰려들었다. 일본인의 아이를 사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부모를 어떻게 탓하겠는가? 만약 아이를 주지 않으면 며칠 내로 그 아이가 굶어죽는 것은 뻔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주에서는 20만여명, 북한은 2만 6천명이 살해·자살·아사와 동사·등으로 죽었다.

이것은 도대체 누구의 책임인가. 일본군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이 많지만, 일본군은 이미 항복하고 무장해제당했다. 이 책임은 점령군인 소련군에 있다. 헤이그 조약에는 점령군은 "공공의 질서 유지""점령지 주민의 보호""그 명예, 권리의 존중""약탈의 금지"등을 상세히 정했다.

《와카츠키 야스오"매문업자들의 전후 책임")

(같은 인물의 저서"『 주중2세 』가 본 중일전쟁")번역: granit(kgs5773)(군사 마이너 갤러리)

미군이 점령한 국내(일본 본토)는 좋았지만[3]

[4], 소련이 점령했던 만주는 비참했다.

그들은 다투듯 일본인에게 달려들어 살인, 강간, 약탈, 폭행을 행했다. 일본인의 집만 노리고 소총을 겨누고는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조만간 다시 데리러 오겠다"라고 해서 아이를 맡기는 부모가 많았다. 그들이 아이를 죽이는 것보다 맡기는 편이 나았다.

*만주에서는 개척단 단위로 집단자결한 곳이 수두룩했다.(음독자살·권총을 서로 쏘는 것 등)

《한도 가즈토시"소련이 만주에 침공한 여름")번역: granit(kgs5773)(군사 마이너 갤러리)

*1945년 8월 15일 2시경, 지인이 "힘들어, 힘들어"라고 하니 개척단 본부(사무소)에 갔는데,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고 졌다". 그 가운데 밖에서 총성이 들렸다."저것은 동신경(만주국의 수도였던 신경의 일부, 현 창춘 시)의 만주 철도농장 근처에서 폭동이 일어난 것 같다, 그 총소리다"라고 했다.

*개척단은 모두"휴대한 물건을 들고 사무실에 집합하라"고 연락이 왔다. 모이면 "여기는 위험하니까, 노숙하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마을 남동쪽 1km쯤 떨어진 큰 봉우리, 토야마라는 조그만 산기슭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하룻밤이 지나 텅 빈 사무실에 돌아와 보니 수백 명의 원주민이 몰려들었다. 그러자 권총을 찬 만주군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늘을 향하여 권총을 발사하는 소리를 들자마자 함성이 오르고 폭동이 일어났다.

*가장 먼저 축사의 말을 방생하고, 집안에 밀려들었는데, 그들은 다투어 옷, 의류가 가장 고귀한 것인 마냥 그것들은 모아서 꺼냈다. 몽둥이로 우리의 엉덩이를 때렸다. 참지 못할 굴욕을 당하고 그대로 쫓겨났다. 토야마 기슭으로 다시 달아났지만 곤봉을 가진 원주민이 쫓아왔고, 겉옷이나 신발 등을 뺐겼다. 당시 68세던 단장은 심하게 맞아, 하반신을 쓰지 못할 정도였다.

*단장이 죽고 난 뒤에는 여자와 어린이만 남았다. 교장 선생의 부인, 부단장 사모님들이 결의해, 자결하기로 했다."여기서 우리가 중국인의 장난감이 되면 일본 여성의 수치다. 그보다는 깨끗하게 목숨을 끊자"라고 말했다. 그런 와중에 먼저 아기를 비롯한 아이들의 목을 졸라 죽이기 시작했다. 다른 개척단에서는 청년이 총으로 아이들을 죽였다고 하지만 우리는 총이 없어서 아줌마들의 몸뻬 끈으로 목을 조르는 수밖에 없었다.

*남은 아줌마들끼리 졸라 죽이고, 마지막에 남은 자들이 독신 여성이었다. 마지막으로 나와 친구인 나카가와가 남았다. 주위는 옥수수 밭이어서 목을 매달 나무가 없었다. 미간을 때리면 죽는다고 들었으므로, 돌을 발견하고 서로 미간을 때렸다. 그러면 뜨뜻미지근한 피가 걸쭉하게 나오고 의식을 잃었다. 오키나와 같은 군의 강요는 없었다.

*결국 8월 16일 밤부터 17일 새벽까지 개척단원과 가족 73명이 집단으로 자결했다. 기절한 나와 나카가와는 해가 밝아 오면서 의식을 되찾았다. 주위를 둘러보면 자녀와 부인의 시신은 대부분 알몸이 됐다. 현지 주민이 입고 있던 옷을 약탈한 것 같았다.

《쿠보타 간"쇼와의 기억을 파내다")번역: granit(kgs5773)(군사 마이너 갤러리)

....붉은 군대의 약탈로 만주의 도시들이 처참하게 유린당했던 것이다. 소련에 점령된 뒤로 처음 묵던에 들어간 사업가 중 한명인 제임스 맥휴의 증언에 따르면 붉은군대는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3일 내내 강간과 약탈을 저질렀다.그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훔쳤고,망치로 욕조와 변기를 부수었으며,회반죽 벽에 매립된 전선을 파헤쳤고,마룻바닥에 불을 질러 집 전체를 태우거나 적어도 바닥에 큰 구멍을 남겼다.여성들은 강간을 당하지 않으려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남자처럼 옷을 입었다.묵던에서는 기계가 모조리 사라진 공장들이 앙상한 해골같은 모습으로 방치되었다.한 기자의 글에 따르면 묵던은 이전의 거대한 산업도시에서 대련으로 가는 러시아 소유의 철도 노선에 포함된 비참하고 혼잡한 중간역 신세로 전락했다.만주의 산업기반 시설에 행해진 이 조직적인 약탈의 규모는 나중에 20억 달러에 상당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해방의 비극 43~44쪽


4. 이후


1946년 5월 3일 소련은 만주 지역을 중화민국에 반환하였고, 1949년 중국 공산당의 국공내전 승리 이후부터는 중화인민공화국이 통치하고 있다.

[1] 뤼순 지역은 소련이 1955년까지 해군기지로 사용하다가 1955년에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한다.[2] 그래도 평균적으로 일본인에 대한 처우보다는 조금 나았다.[3] 그러나 일본 본토에서도 일본인 여성들을 상대로한 미군 병사들의 강간 문제는 꽤나 심각했다. 트럭을 타고 지나가는 미군 병사들이 일본인 여자를 보면, 즉시 달려들어 트럭 위로 끌고 가서 마구 강간을 하다가 다 끝나면 트럭 아래로 내려놓고 그대로 달아나 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일본인 여자 한 명을 상대로 미군 병사 27명이 달려들어 집단 강간을 한 사건조차 있었으며, 미군들이 아예 일본인 소학교에 쳐들어가서까지 강간을 저지른 사건조차 있었다. 다만 당시 일본은 미군한테 완전히 점령당한 상태라서 미군이 자국민들한테 무슨 짓을 저지르든 간에, 전혀 항의할 형편이 못되었다. 심지어 일본 정부가 직접 나서서 미군들을 상대로 일본인 여자들을 매춘부로 내어주는 일까지 있었으니... 참고로 이런 사정은 미군이 2차 대전 말엽에 점령했던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미군의 프랑스 여성들 강간 2차대전 독일 진주 미군 현지여성 19만명 강간[4] 그래서 일본이 패망한 직후인 1945년부터 1950년대를 다룬 일본 소설, 만화, 영화 등에서는 일본인 주인공들이 주일미군들과 맞서 싸우거나 길거리에 세워진 미국산 자동차를 두들겨 부수는 식의 반미감정을 부추기는 내용들이 굉장히 많이 등장했다. 한 예로 일본 만화 인간흉기에서 주인공 강의천(미카게 요시토)이 처음 소년원에 들어간 동기도 바로 주일미군 병사를 두들겨 팬 이유 때문이었다. 이는 앞서 말한대로 주일미군들이 일본인들을 상대로 부리는 횡포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