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마 사건

 



1. 개요
2. 사건 전개
3. 연설문
4. 사망


1. 개요


三島事件(みしまじけん)
1970년 11월 25일에 일본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헌법 개정과 자위대 궐기를 주장하며 인질극을 벌이다 할복한 사건. 다테노카이 사건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일본의 저명한 문학인이 매우 자극적인 방법으로 최후를 맞이해 큰 반향을 일으켰고 유키오의 자살이 일본의 군국주의를 부활시키는 신호탄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주제가 해외에서는 가장 많이 나왔다. 대다수 평론가들은 영향이 없을 거라고 일축하였다.

2. 사건 전개


1970년 11월 25일에 미시마 유키오다테노카이 멤버 4명과 이치가야에 있는 육상자위대 동부 방면 총감실을 방문했다. 명목은 우수 대원의 포상이었지만 그곳에서 총감인 육장 마츠다 켄리 총감과 이야기를 나누던 유키오는 자신이 가진 명검 세키노 마고로쿠를 마츠다 켄리에게 자랑하듯이 보여주었다. 마츠다 켄리가 칼집에 손을 댄 순간 다테노카이 멤버들이 그를 포박해 인질로 삼았다.
소란이 일어나자 자위대 간부 8명이 사태를 파악하려고 총감실로 들어가려하자 이들은 일본도로 맞서 쫓아냈다. 간부 중 어떤 이는 심각한 장애를 입을 정도로 손목에 부상을 입기까지 했다.
이후 유키오는 모여든 자위관들과 언론인들을 상대로 30분간 연설을 하겠다고 나서서 발코니로 나가 헌법을 개정하고 자위대가 궐기할 것을 주장하는 일장 연설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자위대 간부들과 조사들은 자위대하고 상관도 없는 일개 작가가 나대느냐라고 불만을 터트리거나 일부는 왜 점심 때 쳐들어와서 밥도 못 먹게 지랄이냐, 비겁하게 총감을 인질로 잡느냐라는 등 미시마의 연설에 온갖 비난과 야유를 터트렸다. 유키오의 연설 내용 자체에 동감하지 못하는 측면도 있어서[1] 일부에선 "머리 좀 식히쇼!"라고 한다든지 바보라고 디스하는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더군다나 헬리콥터 소리까지 겹쳐서 30분을 연설하겠다던 유키오는 결국 7분 만에 연설을 접었다.
유키오의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본 일본의 작가 노가미 야에코(野上彌生子)는 "너무 비통하다. 미시마 씨에게 마이크를 주고 싶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쇼와사"라는 만화를 그린 미즈키 시게루는 "자위관들이 미시마의 연설을 듣기 싫어한 것은 전후의 개인주의향락주의 탓"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지만…[2] 막말로 식사 시간에 일을 잠시 잊고 편히 밥 좀 먹자는 때에 갑자기 지휘관이 인질로 잡히고, 칼에 맞아 심한 부상을 입은 대원까지 나온 상황에서 소란의 원흉이 당장 쿠데타를 하자고 외쳐대면 몇 명이나 진지하게 들어주겠는가. 괜히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이 있을까.

3. 연설문


이하는 연설 전문. <>속의 글은 그가 떠드는 군중들에게 호통치는 대목이고,[]는 자위 대원들의 항의이다.

"이 상황에서 내가 자위대에 이야기해서 유감스럽다. 그러나 나는 자위대라는 존재를, 자위대를 믿었다. 일본은 경제적 번영에 몰두하여 마침내 정신적 공황에 빠지고, 정치는 모략(謀略)과 기오심(欺傲心)이………. 이것이 일본이다. 자위대만이라도 일본의 정신을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위대라는 존재에 ………."

《조용히 들어라! 조용히 들어!》

"자위대가 일본의………, 일본의 큰 뿌리(大本)를 고쳐서 나쁠 것은 없다."

"나는 이러한 현실을 느꼈다. 일본 근본이 왜곡되어 있다. 아무도 이 현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일본 근본이 왜곡되어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그래서 자위대가 일본 왜곡을 바로 고쳐야 한다. 그래서………."

《조용히 들어라! 조용히 들어!》

"그 때문에 나는 자위대를 응원했다."

《조용히 하라고 했는데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겠나? 조용히 해라!》

"그래서 말인데, 지난해 10월 21일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지난해 10월 21일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지난해 10월 21일, 신주쿠에서 반전 데모가 일어났는데 경찰력에게 완전히 제압당했다. 그 일을 목격한 날에 나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런다고 헌법이 개정되지 않을 거라고 느꼈다."

"왜냐하면 소위 자민당이라는 것이, 자민당이라는 것이 경찰 권력을 가지고 어떤 데모든 진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치안 출동은 필요 없어졌다. 치안 출동이 필요 없어졌단 말이다. 치안 출동이 필요 없어졌다는 것은 곧 헌법 개정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논리가 이해가 되는가?………."

"제군은 이미 지난 해 10월 21일 이후로 헌법을 지키는 군대가 되었다. 자위대가 지난 20년간 피와 땀으로 기다린 헌법 개정 기회는 사라졌다. 헌법 개정은 이미 정치 프로그램에서 제외되었다. 마침내 사리지고 말았다. 왜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는가?"

"나는 지난해 10월 21일부터 1년 동안 자위대가 화내기를 기다렸다. 이제는 더 이상 헌법 개정 기회는 없다! 자위대가 국군이 되는 날은 사라졌다! 건군 본의는 없다! 그것이 가장 개탄스럽다. 자위대에게 건군 본의는 무엇인가? 일본을 지키는 일. 일본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본을 지킨다는 것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와 문화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잘 들어라! 잘 들어! 조용히! 조용히 해! 얘기를 들어라! 여기 남자 한 놈이 목숨을 걸고 제군에게 외치고 있다. 알겠는가? 알겠는가?》

"지금 일본인이 일어나지 않으면, 자위대가 일어나지 않으면 헌법 개정은 없다. 제군은 영원히 미국 군대가 되고 만다."

"시빌 컨트롤(civil control)……… 시빌 컨트롤에 중독되었다. 시빌 컨트롤이란 새 헌법 아래에서 억압받는 것만이 다는 아니다."

"……… 그래서 나는 4년을 기다렸다. 4년을 기다렸단 말이다. 자위대가 일어나는 날을……… 그랬던 자위대의……… 최후의 30분, 최후의 30분을……… 기다리겠다."

"제군은 무사(武士)다. 제군은 무사(武士)다. 무사(武士)가 자기를 부정하는 헌법을 왜 지키는가? 왜 자기를 부정하는 헌법을 위해 일하고 자기를 부정하는 헌법에 순종하는가? 헌법이 존재하는 한, 제군은 영원히 구제받지 못한다."

"지금 헌법은 끝없는 정치적 모략을 통해 제군이 합헌(合憲)인 것처럼 위장했으나, 자위대는 위헌(違憲)이다. 자위대는 위헌(違憲)이다. 너희들도 위헌(違憲)이다. 마침내 자위대가 헌법을 지키는 군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왜 인식하지 못하는가! 나는 제군이 그것을 부정하는 날을 오랫동안 기다렸다. 제군은 사소한 것에 눈이 어두워 진정 일본을 위해 들고일어날 때를 놓쳐버렸다."

【그럼 왜 우리 총감(總監)님에게 부상을 입힌 건가?】

"저항했기 때문이다. 제군이 일본을 허수아비로 만든 헌법에 순종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제군 중에 한 사람이라도 나와 함께 들고 일어날 놈은 없는가?"

"…한 놈도 없군. 좋다! 무(武)는 칼이다. 자신의 사명이지………."

【그래도 무사인가! 그래도 무사인가!】

"이제 제군이 헌법 개정을 위해 들고 일어나지 않겠다는 것을 충분히 알겠다. 이것으로 자위대에게 품은 내 꿈은 사라졌다. 여기서 천황 폐하만세를 부르겠다."

"천황 폐하 만세! 천황 폐하 만세! 천황 폐하 만세!"

재밌는 건 미시마와 불과 1년 전 도쿄대학 강당에서 격한 토론을 벌였던 전공투 측에서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 미시마를 추모한다는 현수막을 걸었는데 사실 지금 극우 이미지와 다르게 미시마는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극좌 새끼'''라는 반응도 결코 적지 않았다.

4. 사망


계획한 대로 할복으로 자살을 결심한 유키오는 상의를 벗고 자신의 배에 단도를 찔러넣었다. 원래는 할복을 하고 배에서 흘러나온 자신의 피로 유서를 쓸 생각이었는데 고통이 너무 심해서 글씨를 쓰는 것은 무리였다고 한다. 그리고 할복한 유키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유키오의 목을 치기로 예정된 모리타 마사카쓰는 자신도 할복해야 된다는 사실이 두려웠는지 유키오의 목을 내리치는 데 2번이나 실패했다. 결국 검도 유단자인 고가 히로야스가 유키오의 목을 내리친다.[3] 사건 이후 경시청 검시 결과에 따르면 유키오는 칼로 배를 가른 뒤 내장을 꺼냈고 이 고통을 이기려고 혀를 깨물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구글 검색 등 통해 볼 수 있는 유키오의 시신이나 자살 현장 사진을 보면 흑백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처참함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당사자인 유키오는 그저 편안한 표정을 짓고 최후를 맞았지만 할복 현장은 완전히 피바다에다 엉망이 된 시신이 뒹구는 바람에 지옥 그 자체였다. 이후 참수된 유키오의 머리와 시신을 봉합한 뒤 장례를 치뤘다.
사건 이후 일본에서는 유키오가 할복한 이유를 두고 갖가지 분석이 제기되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이야 미시마가 외친대로 일본의 평화헌법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지만, 유키오 자신도 늙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서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유키오는 "내가 나카이 카후[4]처럼 늙는다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하겠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또는 영웅주의에 심취해서 그랬다는 분석도 있다. 어떤 글에서 미시마는 "사이고 다카모리는 50살에 영웅으로 죽었다. 지금의 나이라면 나도 영웅의 최후 연령에 도달한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라고 적었다고 한다.[5]
사건 이후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총감실 현장을 방문했다. 유키오와 절친이었던 이시하라 신타로도 현장을 찾긴 했지만 총감실까지 들어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미시마가 자살할 때 쓴 세키노 마고로쿠제2차 세계대전 참전자로 한때 미시마와 검도로 친분을 쌓았던 후나사카 히로시에게서 받은 것으로, 미시마 사건 3년 뒤인 1973년 후나사카는 '''세키노 마고로쿠-미시마 유키오, 그 죽음의 비밀(関ノ孫六―三島由紀夫、その死の秘密)'''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순박했던 미시마와의 추억을 회고하는 동시에 미시마가 어떻게 그러한 인간이 되었는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미시마 사건을 계기로, 1973년에 자위관 복무선서에 '일본국 헌법 및 법령을 준수하며'라는 문장이 들어가게 된다. 자위대 내부에서 미시마의 의견 자체에는 공감하는 자위대원들이 상당수 나왔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는 위헌의 여지가 있는 자위대의 입장상 주저하고 있었지만, 미시마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그 덕분에 자위대가 헌법 준수를 확실히 하게 된것이다.
덧붙여, 김지하 시인은 '아주까리 신풍'이라는 시를 통해 유키오의 자살을 풍자하기도 하였다.

아주까리 神風(신풍) - 三島由紀夫에게

김지하

별것 아니여

조선놈 피 먹고 피는 국화꽃이여

빼앗아 간 쇠그릇 녹여버린 일본도란 말이여

뭐가 대단해 너 몰랐더냐

비장처절하고 아암 처절하고말고 처절비장하고

처절한 神風(신풍)도 별것 아니여

조선놈 아주까리 미친 듯이 퍼먹고 미쳐버린

바람이지, 미쳐버린

네 죽음은 식민지

주리고 병들어 묶인 채 외치며 불타는 식민지

죽음들 위에 내리는 비여

역사의 죽음 부르는

군가여 별것 아니여

벌거벗은 女軍(여군)이 벌거벗은 갈보들 틈에 우뚝 서

제멋대로 불러대는 미친 미친 군가여

시오노 나나미는 수필집 <사일런트 마이너리티>에서 유키오의 죽음에 대해 어느 자리에서 듣고 "그것은 할복 자살이 아니라 단순한 공개 자살일 뿐입니다. 할복 자살은 자기 집 깊숙한 방에서 다다미라도 뒤집어놓고 천황 폐하에게 러브 레터라도 쓴 다음 조용히 자결하는 것을 말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1] 자위대는 정치적 중립에 대해 강조하고 계급명칭에서 관(官)을 사용하는 등 타국보다 좀 더 공무원스럽다.[2] 다만 미즈키 시게루는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위안부 증언 만화'''까지 그린 양심적인 인물이다.[3] 결국 히로야스는 자살 방조 등의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모범수로 가석방되었다. 1947년생으로 현재도 생존한 상태이다.[4] 일본의 대표적인 관능 소설가.[5] 참고로 사망 당시 유키오는 45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