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 AFC 아시안컵 한국
1. 개요
1960년 10월 14일부터 10월 23일까지 서울특별시의 효창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축구 관련으론 한국에서 개최한 첫 국제대회). 1956년 홍콩 아시안컵에서 우승을 한 대한민국이 개최국 겸 우승국 자격으로 자동으로 본선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 대회에서 우승을 한 이후, 태극전사들은 아시안컵에서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얘깃거리는 항목 말미에 설명. 그래도 우리나라로선 드물게 디펜딩 챔피언으로서의 영광을 누렸기에 나름 값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덤으로 아시안컵으로선 개최국이 우승한 첫 번째 사례.
여담으로, 1960년 AFC 아시안컵이 열렸을 때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고 장면 총리가 뒤를 이어서 내각의 수장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물론, 윤보선이 대통령이기는 하였으나 내각제 특성상 대통령은 실권이 없어서 큰 의미는 없다.
이때도 공식명칭은 아시안 네이션스 컵 1960이었다.
2. 예선전
지난번 대회처럼 서부, 중부, 동부로 나뉘어 예선전이 치뤄졌다. 각 지역 1위만이 본선에 진출했다.
기권팀외 참가거부팀은 취소선,예선 첫출전 국가는 진한표시
- 서부지역 : 인도, 이란, 이스라엘, 파키스탄, , ,
- 중부지역 : 말라야 연방, 싱가포르, 베트남 공화국, , , ,
- 동부지역 : 홍콩, 필리핀, 중화민국,
2.1. 서부지역 예선
아프가니스탄 왕국, 영국령 실론, 네팔이 기권하면서 4팀간의 풀리그로 진행이 되었다. 기간은 1959년 12월 5일~1959년 12월 18일, 개최장소는 인도 코치의 마하라자 대학 스타디움에서 치뤄졌다. [1]
이스라엘은 첫경기에서 이란에게 3-0 패배를 당하며 불안한 출발을 했지만, 지난 대회 득점왕인 스텔마치가 건재했고, 새로운 스타 라피 레비가 두번째 시합인 인도전에서 헤트트릭을 기록하는등, 대회 총 5골을 기록하며 이스라엘의 본선진출을 이끌었다.
이란은 시작은 좋았으나, 이후 파키스탄과 인도에게 연패를 당하면서 순식간에 최하위로 떨어진상황에서 이스라엘과 무승부를 기록하고, 파키스탄과 인도를 연이어 잡았음에도, 결국 떨어졌다. 이스라엘과의 2차전이라도 잡았으면 순위가 바뀌었을테지만, 2, 3경기 연패가 너무나도 뼈아팠다.
파키스탄의 경우 경기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아. 대회 8득점을 했음에도 모든골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예선 개최국 인도는 3만명의 홈팬의 뜨거운 지원을 받았음에도 무려 4패를 당하며 본선진출에 실패했다.
2.2. 중부지역 예선
버마, 태국, 캄보디아는 기권했고, 인도네시아는 AFC 회원 분쟁으로 인해 참가가 거부되었다.
남은 세팀간의 풀리그로 진행되었고, 기간은 1959년 5월 9일~13일, 장소는 싱가포르 잘란 베사 스타디움에서 진행되었다.
지난대회 본선진출국 베트남 공화국이 첫경기부터 개최국을 4-1로 압살하였고, 개최국인 2일뒤 말라야 연방에게도 5-2로 대패를 하며 2패로 탈락. 4일을 쉰 베트남과 2일을 쉰 말라야의 대결은 전반 이른 시간에 터진 하 탐의 골로 마무리 되었다.
2.3. 동부지역 예선
일본이 기권하여, 3팀간의 풀리그로 진행되었다. 기간은 1959년 3월 29일~4월 3일, 장소는 필리핀 마닐라의 리살 기념 스타디움에서 개최되었다.
유달리 7과 연관이 있는 대회로, 3경기 모두 승자가 7득점을 했다. 필리핀은 무려 14실점을 하며 최하위로 쳐졌고, 사실상의 본선 진출국 결정전인, 중화민국과 홍콩의 대결이 22,000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열렸다.[2] 여기서 중화민국은 홍콩을 제치며 아시안컵에 첫진출을 하게 되었다.
3. 결승 리그
결승리그는 지난 대회와 동일하게 풀리그로 치뤄졌다.
3.1. 1경기 대한민국 5 - 1 베트남 공화국
1960년 10월 14일 15:15분
개최국이자 디펜딩 챔피언인 대한민국은 시작부터 조윤옥의 골로 앞서나갔고, 우상권, 최정민, 문정식이 연이어 골을 넣으며 4-0으로 크게 앞서 나갔다. 응옌 반 투의 만회골이 터졌지만, 1분뒤에 첫골의 주인공 조윤옥이 또다시 골을 터뜨리며, 지난 대회처럼 5골로 베트남 공화국을 폭격하며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3.2. 2경기 대한민국 3 - 0 이스라엘
1960년 10월 17일 15:00
지난 대회 우승팀과 준우승팀의 대결로 사실상의 결승전이 된 경기로, 첫경기 두골의 주인공 조윤옥이 두골, 우상권의 한골을 묶어, 이스라엘을 가볍게 압살하면서 한국은 사실상 우승을 거의 확정지었다.
3.3. 3경기 중화민국 2 - 0 베트남 공화국
기록이 명확하지 않은 경기로, 10월 16일인지, 10월 17일인지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이 경기가 2경기일수도 있다.
경기결과는 중화민국의 2-0 승리. 베트남은 2패로 우승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3.4. 4경기 베트남 공화국 1 - 5 이스라엘
1960년 10월 19일
경기 시작시간이 알려져있지 않다. 예선에서 5골을 넣었던 레비가 이경기에서도 골을 터뜨렸고, 지난 대회 득점왕 스텔마치도 한골추가하며 베트남 공화국을 5-1로 이겼다. 베트남의 쩐 반 누엉의 골이 이대회 유일의 PK득점이었다.
3.5. 대한민국 1 - 0 중화민국
1960년 10월 21일 15:00
1위 대한민국과 역시 1승으로 여기서 승점을 더 쌓아 1위를 노리는 중화민국의 대결. 두 팀은 지난 대회 예선에서 맞붙어서 본선진출을 겨뤘고, 중화민국은 우승도 우승이지만, 지난 대회의 복수도 생각하고 있었다. 앞선 두경기를 여유있게 이긴반면, 이경기는 좀처럼 경기가 풀리지 않았고, 후반에 터진 문정식의 골로 대한민국은 3전 전승 우승을 확정지었다.
3.6. 이스라엘 1 - 0 중화민국
1960년 10월 23일
경기 시작시간이 알려져 있지 않다. 준우승팀 결정전으로, 경기 일정상으로는 2일뒤에 바로 경기를 해야하는 중화민국이 4일을 쉰 이스라엘에 비해 압도적으로 불리 했다. 역시 경기는 팽팽하게 진행되었고, 슐로모 레비의 후반에 터진 골로 이스라엘이 두번째 준우승을 거두게 된다.
대한민국이 무패전승으로 대회 2연속 우승을 차지하였다.
4. 결과
- 득점왕 : 조윤옥(1940~2002)(대한민국) 4골
5. 이야깃거리
- 1회 아시안컵 우승, 1회 아시아청소년선수권 우승 등으로 축구 열기가 뜨거웠던데다 안방에서 대회가 개최되다 보니 관중흥행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1만6천 석 규모로 지어진 효창운동장에 무려 10만 이상의 인파가 몰려들었고, 주최측은 입석을 감안해 3만 장의 표를 팔았으나 이미 이런저런 초대권이 뿌려진 상태였고, 축구관계자, 월담자(?) 등 해서 실제 입장인원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자리를 잡지 못한 관중들이 경기장 아래 트랙에까지 빼곡히 들어찬 바람에 선수들은 하프타임에도 라커룸에 들어가지 못하고 피치 위에서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한국과 이스라엘의 경기날에는 경기장 담장 일부가 무너지면서 27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공식기록은 입석 판매로 3만명으로 기록되었다.
- 본선진출팀이 지난 대회에서 홍콩이 빠지고 중화민국으로 바뀐 구성이다. 물론 순위도 동일하게 결정되었다.
- 지역예선 개최국들인 인도, 필리핀, 싱가포르는 모두 최하위로 본선진출에 실패했다.
-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 스쿼드는 항목참조. 함흥철, 박상훈, 김홍복, 차태성, 손명섭, 우상권 선수가 지난대회에 이어 2회째 참가 하였다.
5.1. 아시안컵의 저주?
2019 AFC 아시안컵 아랍에미리트 시점 기준으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이 대회가 마지막 우승이다. 이러한 아시안컵 잔혹사는 아시아의 맹주라는 칭호를 갖고 있는 대한민국과 영 어울리지 않기에 이상하리만큼 부진한 성적을 설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설들이 있었다.
- 백범의 저주 : 효창운동장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대회는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하여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을 여러 애국지사들의 묘역이 있는 효창공원 경내에 건설된 효창운동장에서 개최되었고 이미 효창운동장 건설 당시에도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3] 이에 순국선열의 혼들이 노하여서(...) 우승을 못 하고 있다는 것.
- 우승컵의 저주 :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이 대회에서 시상받은 우승컵은 현재 분실된 상태이다. 원래 대한민국이 우승했던 1956년, 1960년 대회 우승컵이 모두 분실 상태였으나 그나마 1956년 대회 우승컵은 찾아서 다행. 그러나 정작 자국민들 앞에서 들어올린 1960년 우승컵 은 여전히 행방을 알 수 없고, 이 때문에 저주가 걸렸다는 설.
- 납메달의 저주 : 대회 우승 후 받은 금메달이 사실 납에다 금칠만 한 겹 덮은 납메달이었던 것. 대회를 주관한 AFC 또는 대한축구협회의 누군가가 빼돌린 것으로 추측된다. 대한민국 선수들은 시상식 며칠 후에야 이를 깨닫고 대한축구협회에 제대로 금메달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유야무야 시간만 흘러간 게 50년이 넘었던 것. 그 사이에 당시 우승멤버 중 대다수가 세상을 떠났고 한을 품은 원혼들이 저주를 걸었다는 설. 관련기사#1 #2 이 기사가 나온 것이 2004년인데 10년이 더 지난 2015년까지도 진짜 금메달 수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두 번째 링크에서 기자와 인터뷰를 했던 문정식 옹, 손명섭 옹 두 분도 그 사이에 작고했다. 당시 우승멤버는 2015년 현재 김선휘 옹, 이은성 옹, 박경화 옹 세 분만 살아있는 상황이다. 2019년 1월 4일, 대한축구협회가 이 때 당시의 메달을 진짜 금메달로 만들어 우승멤버 및 가족들에게 전달하는 행사를 갖기로 했다. 당시 우승멤버였던 김홍복 선수의 딸이자, 1984년 LA 올림픽 여자농구 은메달리스트인 김화순 씨가 참여한다고 한다. #
- 상금이 없어서 : AFC 아시안컵 항목에 의하면 AFC 아시안컵은 상금이 없는 순수 타이틀 매치인데, 대한민국이 그동안 AFC 아시안컵에서 성적이 부진했던 이유도 우승상금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실제로 대한축구협회에서는 본선진출만 해도 수십억원의 출전수당이 보장되는 FIFA 월드컵과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는 올림픽에 더욱 집중을 하고 있다. 그나마 2015년 대회부터는 우승팀에게 1000만 달러의 상금을 부여하는 계획이 있었지만, 상금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무함마드 빈 함맘 전 회장이 퇴출되면서 무산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2019년 대회부터 도입하기로 결정. 그러나 이 대회마저도 8강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1] 참고로 마하라자 대학 스타디움의 규모는 3만명. 본선 개최지인 대한민국의 효창운동장의 두배의 규모다.[2] 참고로, 홈팀인 필리핀의 경기는 각각 10,000명, 12,000명으로 3경기에 비해 관중수가 오히려 적다.[3] 건설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김두한이 격렬하게 반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