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 방콕 아시안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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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0년 태국 방콕에서 개최된 제6회 하계 아시안 게임이면서 2번 연속으로 개최된 유례가 없는 대회이다.
2. 유치과정
원래 이 대회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서 개회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실론(현재의 스리랑카)도 유치 신청에 나섰지만 철회했다. 그런데 북한의 군사 도발 위협 및 경제개발 우선의 이유로 재정상의 문제가 발생하여 한국 측이 유치권을 반납하였다. 이렇게 된 이유는 김현옥이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면서 고가도로 건설이나 시민아파트 건축, 세운상가 건설, 밤섬 폭파를 통한 여의도 확장, 한강 방조제 건설 등 각종 건설사업을 벌이는 통에 재정이 아슬아슬했고 지하철 건설하기에 삽을 뜨기 힘든터에 진짜로 아시안 게임까지 유치했다가 '''서울시가 말 그대로 파산할 정도라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개최과정에서 나왔던 잡음들이 1960년대 후반에 벌써 터졌다는 얘기이다. 거기에다가 1968년 1월 김신조 사건까지 터지면서 북한의 테러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경호비용으로 상당한 돈을 써야되었기 때문에 진짜로 개최했다가 중앙정부 재정에도 상당한 부담이 될 턱이었다.
그래서 한국 측은 유치권을 반납해버렸고 따라서 이전 대회를 개최했던 태국 방콕이 '''억지로''' 떠안게 되었다. 원치도 않는데 한국의 유치권 반납으로 인해 억지로 한 도시가 아시안 게임을 두 번 개최를 하게 된 특이한 케이스. 물론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10개국에서 개최비용을 보전해주기는 했지만 너무 모자라서 태국에서는 '''막대한 재정적자를 짊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이 대회의 유치 포기로 벌금 20만불을 지불하게 된다.[2]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당시 한국과 태국의 경제적인 격차가 별로 안났고 태국이 이때부터 한국보다 1인당 국민소득에 있어서 조금씩 뒤쳐지기 시작했던 시기였고, 당시에는 태국도 어느 정도의 경제성장을 하던 시절인지라 아주 어려웠던 상황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진짜로 경제상황이 어려웠을 때 치렀던 아시안게임은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이다. 이후 이 같은 일은 1978 방콕 아시안 게임의 개최 과정에서도 다시 한 번 반복되었다.
대한민국은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 가서야 아시안 게임을 개최하게 된다. 이후로는 2002 부산 아시안 게임과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등도 유치하는 등의 행동을 하고 있지만서도..
3. 메달 순위
4. 이모저모
- 청천백일만지홍기를 걸고 삼민주의를 부를 수 있는 대만이 마지막으로 참가한 아시안 게임이다. 이후 1974 테헤란 아시안 게임에서부터는 중국이 참가하게 되어 대만은 퇴출당한다. 지못미.
- 요트가 사상 처음으로 아시안 게임 정식 종목에 채택되었다.
- 중국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이 또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우리나라는 금메달 18개, 은메달 13개, 동메달 23개로 종합 2위를 차지했다.
- 이 대회로 인해 조오련이 수영 스타로 떠올랐다. 조오련은 수영 400미터 경기에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운 뒤 남자 자유형 1500미터에서 17분 25초 7로 우승해 우리나라 최초의 수영 2관왕으로 올라섰다.
- 유치 과정의 문제때문에 태국에서는 대한민국 선수단이 들어올 때부터, 경기를 할 때마다 계속 야유를 해댔다.
- 한국인들 특히 서울시민들의 입장에서는 원래 우리 땅에서 치뤘을 대회였는데라며 아쉬워하는 입장이 많았다. 그러나 16년 후인 1986년에 가서야 이러한 아쉬움은 풀어졌다. 이후 1988년에는 방콕도 치루지 못한 올림픽까지 치루면서 역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