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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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밤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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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파되기 전 밤섬 모습. 배편이 제때마다 드나드는 번화한 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 개요
2. 역사
2.1. 밤섬 폭파와 여의도 개발
2.2. 부활
3. 기타


1. 개요


서울특별시 한강 한가운데 있는 하중도. 동쪽 상류 방향의 윗섬과 서쪽 하류 방향의 아랫섬으로 이루어져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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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윗섬은 영등포구가, 아랫섬은 마포구가 관할하고 있다. 행정구역상으로 윗섬은 영등포구 여의도동 84-8, 아랫섬은 마포구 당인동 313이다. 폭파 이전의 행정구역은 마포구 율도동이었다.

2. 역사


원래는 서울특별시와 가깝기도 하고, 표고도 꽤 있는 데다 땅 자체도 넓어서 사람이 많이 살았던 섬이었다.[1] 조선시대에는 나무를 많이 심어서 '서잠실'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오히려 지금의 여의도는 서부 지역에 동산과 벌판이 있는 걸 빼면 그저 모래톱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여의도를 개발하면서 한강의 흐름에 방해된다고 여겨진 밤섬은 1968년 2월 9일 '''폭파'''되어, 기반암 대부분이 파괴되고 말았다.(원래에 비해 약 300분의 1 크기) 이때 섬내 주민들을 모두 이주시키는데, 이 섬에 살던 사람들은 죄다 희귀 성씨[2]인 서민층이었다. 즉 조선시대 이래로 주류사회와는 약간 동떨어진 희귀 씨족의 구성원들이 자신들만의 부락을 이루며 살았던 곳이란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의 도심 재개발에서 볼 수 있는 집단이주로 인한 공동체의 해체가 일어났고, 80년대 운동권 문학이나 만화 등에서 여의도 개발과 엮어서 이 사건을 다루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폭파 당시 이주한 실향민들은 섬 근처의 마포구 창전동으로 이주하였으며, 여느 실향민이 그렇듯 지금도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종종 고향을 그리워하며 이곳을 찾기도 한다.
이때 부군당이란 마을 사당도 창전동으로 옮겼다. 밤섬 사람들이 믿던 무속 신앙의 대상인 부군신, 삼불제석, 군웅신을 모신 사당으로 대대로 굿을 해 왔는데 이 사당을 옮겨서 계속 이어간 것이다. 이 굿을 '밤섬부군당도당굿'이라고 부르는데 2005년에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하였다. 이주 당시 밤섬 실향민들은 당연히 김현옥 서울특별시장에게 원한이 커서, 김현옥이 말년에 기도폐색으로 사망하자 '부군당을 부쉈으니 신의 벌을 받은 것'이라며 조롱했다.

2.1. 밤섬 폭파와 여의도 개발


밤섬이 폭파되어 사라진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일반적으로는 윗 문단에 써 있는 것처럼 "모래톱이었던 여의도에 방죽을 쌓고 터돋움을 하니 병목 현상이 생겨버린 한강의 물흐름을 개선시키기 위해서"라고 아는 경우가 많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전후 인과관계에 살짝 차이가 있다.
당시 서울특별시장 김현옥은 불도저라는 별명에 걸맞게 서울 지도를 통째로 바꾸는 굵직한 토목공사들을 밀어붙였다. 특히 서울에 난립했던 무허가 판자촌과 도심 재개발 구획정리 때문에 이주민들이 살아야 할 공간이 필요했는데, 당시만 해도 허허벌판이었던 한강 백사장 매립을 생각하게 된다. 공유수면 매립이었기 때문에 광주대단지와 달리 토지나 입주권 분쟁도 없다시피했고, 무엇보다도 서울시 재정이 거의 바닥나기 일보직전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김현옥의 눈에 여의도가 처음부터 들어온 것도 아니었다. 1966년의 홍수 때문에 한강대교부터 영등포까지 제방을 정비하고 도로를 개설해놓고 보니 수십만 평의 택지가 새로 생겨버린 것이다. 현재의 노량진역-신길역 인근 자투리 땅이 이 때 얻어진 것이다.
초기에는 여의도 개발을 두고 2가지 안이 제시되었다. 첫째는 샛강을 완전히 없애고 여의도를 영등포에 붙여 매립하는 안으로 이 경우 새로 얻어지는 택지 면적이 무려 100만 평을 상회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현재처럼 샛강을 두고 여의도에 둑(윤중제)을 쌓아 매립하는 안이었다. 샛강의 존치 여부는 한강의 주기적인 홍수에 대한 대책 때문이었는데, 지금과 달리 한강 수계 정비계획 자체가 없었고 소양강댐도 완공되기 전이어서 홍수는 꽤나 골칫거리인 문제였다. 애초에 여의도 정비사업의 단초가 된 것이 1966년의 서울 물난리[3]였기 때문에 건설부(현 국토교통부)에서는 서울시의 계획안에 대해 "여의도를 매립할 시 한강 흐름이 나빠지며, 특히 100년 정도마다 한 번씩 오는 대홍수에는 대비할 수가 없다"며 제동을 걸고 나섰다.[4] 서울시와 건설부는 협의 끝에 대안을 마련했는데 개중 하나가 건설부의 주장대로 한강 폭을 1300m로 하여 대홍수 시의 유수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밤섬의 존재가 문제시되었다. 건설부의 한강너비 1300m 확장안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밤섬을 폭파하여 없앨 수밖에 없었던 것. 당시 서울시 당국은 이주민 문제라면 골머리를 앓을 지경이었는데 밤섬에는 아예 조선시대부터 집성촌이 득실대고 있었다. 밤섬은 폭파하고, 샛강은 매립하지 않고 살려서 홍수조절 기능을 유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당초 계획보다 좀 줄어든 현재의 여의도 면적인 87만 평의 택지가 조성되게 된 것이다.
또한 밤섬 폭파는 서울시의 바닥난 시 재정 상황에서 여의도 윤중제의 자재를 조달하기 위한 현실적 대안이기도 했다. 바위섬이었던 밤섬은 폭파하는 즉시 석재로 사용할 수 있었고 여의도와는 부교[5]로 연결되어 있었다. 밤섬의 바위들은 석재로 둔갑하여 여의도 윤중제에 쌓였고, 남은 토사도 퍼다가 매립하는 데에 부어버렸다. 김현옥 시장은 아예 여의도 공사 현장에 퀀셋 막사를 짓고 '''이동식 시장실을 설치'''하여 눌러앉았고 힘 좋은 젊은 총각들로만 이루어진 인부들이 3교대로 투입되어 '''불과 110일만에 방죽 공사가 완료'''되었다.
21세기인 지금 시점에서 보면 한강종합정비사업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어쩌면 밤섬을 없애버리지 않았어도 되었을지 모른다. 북한강남한강 수계에 홍수조절이 가능한 댐이 여럿 있어서 소양강댐, 춘천댐, 청평댐, 팔당댐 등에서 미리 수위조절이 가능하기 때문에 밤섬의 존재 여부가 수류에 영향을 덜 주기 때문이다.
또한 서울시로서는 이것이 건설부의 체면을 살려주는 타협안이기도 했는데, 관선 시장 시절에 일개 시 행정이 중앙정부의 말을 묵살하기도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현재는 여의도와 밤섬의 처지는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지금은 여의도가 번성한 반면 밤섬은 '''무인도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사람이 없어진 곳에 철새들이 오게 되어서, 현재는 철새도래지로 지정되었다. 이 때문에 밤섬을 지나는 서강대교는 야간에 조명을 제한한다.

2.2. 부활


폭파되었지만 수면 아래 있던 밤섬의 암반층에 지속적으로 퇴적물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밤섬은 모래섬으로 탈바꿈해 부활했다. 처음에는 한강 수위가 낮을 때만 모습을 드러내는 모래톱이었지만 수십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섬이 점점 커져서 이제 옛 밤섬의 면적만큼 커졌고 지금도 계속 커지고 있다. 기사 '''2021년 현재 바라보는 밤섬은 1960년대 폭파 이전의 것보다도 조금 더 크다고 한다.'''
물가에서 잘 자라는 버드나무억새 같은 식물들이 번성했고 자연스럽게 서울 한복판의 철새 도래지가 되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도 찾기 힘든 대도시 한가운데의 습지이자 철새 도래지라는 것 덕분에 람사르 협약에 등록된 습지로 보호받고 있다.

3. 기타


밤섬에 사람이 표류한다는 내용으로 김씨 표류기라는 영화가 제작되었고, 과거 밤섬 이주 당시 벌어졌던 개발독재 당시의 내용을 담은 단편만화가 발표되기도 했다. 월간 보물섬에 1985년 9월호, 제 39호에 게재되었던 금영훈 화백의 <꽃섬>이라는 단편 만화이다. 꽃섬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나와 약혼녀가 같이 약혼녀의 오빠를 만나러 간다. 동물원에서 사육사로 일하던 그녀의 오빠는 반갑게 맞이하면서 잠깐 시간을 내서 쉬면서 나와 이야기하는데, 문득 고향 이야기를 하자 무척 슬픈 얼굴을 한다. 지금은 사라진 어느 작은 섬에서 태어나고 자라왔다는 것. 그가 말하길 그 섬은 밤이 많아 보통 밤섬이라고 불렀지만 이 섬에 사는 우리들은 꽃이 아름답다고 하여 꽃섬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우리 남매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뱃사공인 아버지에게 자랐다면서 옛날 이야기를 한다. 섬을 사랑하고 아끼던 아버지. 하루는 섬에 오던 철새(백로)들을 총으로 쏘던 외부인 사냥꾼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이걸 보고 분노하여 노로 죽도록 두들겨 패줬다. 그리고 죽은 백로는 정성스럽게 섬 바닷가에 묻어주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섬이지만 갑자기 이 섬이 조류에 나쁘다느니 뭐니 억지 핑계로 닥치고 폭발시킨다는 정부의 지시가 내려졌다. 사람들은 분노했지만 맞설 힘이 없어 하나둘 떠나야 했다. 우리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남으려 했으나 개발공사 관계자가 죽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라고 압력을 가해 결국 아버지도 떠나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떠나는 날 철새들을 억지로 떠나게 하며 "다시는 오지 마라! 이 섬은 사라질 거야! 나도 떠나야 하니까...!"라고 절규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떠나지 못했다. 스스로 섬 절벽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 이런 옛날 이야기를 서글프게 착잡한 얼굴로 말해주던 오빠는 일해야 한다며 그 자리를 말없이 떠나고 나도 말없이 착잡하게 있어야 했다.
모바일 게임 도시를 품다의 2부 스토리 중에서도 밤섬을 배경으로 한 장면이 나온다.
1999년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서강대교에서 밤섬으로 내려갈 수 있는 길도 없다. 따라서 밤섬을 구경하고 싶어도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없어 한강을 헤엄쳐서 가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학자들이 연구를 위해 특별 허가를 받고 들어가는 경우는 있으나 배를 타고 가야 한다.
못해도 2000년대 극초반이나 90년대 말까지는 일반인도 입도가 가능했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가고 싶을 때 마음대로 가는 게 아니라 쓰레기 치우는 행사 차원에서 갈 수 있었다.

[1] 1960년대 중반까지 천명 가량이 살았고 폭파 직전에는 당시에 814명 정도가 주거하였다. 1984년 5월 6일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한국 103위 순교성인 시성식을 통해 성인품에 오른 성녀 김효임 골롬바-김효주 아녜스 자매도 밤섬 출신이었다.[2] 씨, 씨, 씨, 씨 등.[3] 서울 시내가 직접 잠기진 않았지만 한강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도심의 하수구가 죄다 넘치는 일이 벌어졌다.[4] 실제로 한강홍수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것은 1990년 대홍수 이후 대대적 제방정비사업을 완료한 '''21세기'''에 들어서부터였다.[5] 미군이 버리고 간 고무 보트를 연결하여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놓아 통행로로 썼다. 장마철 홍수 시에는 철거했다가 다시 놓고를 반복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