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춘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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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말의 관료, 중화민국의 정객.
2. 생애
2.1. 청의 대쪽대신
1861년 광서성 서림의 장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잠육영은 운귀총독을 지냈고 어렸을 때는 불량배 노릇을 했으나 1879년 관직에 나가 1885년 거인이 되어 낭중에 임명되었다. 1898년 광동포정사에 임명되었으나 광동총독 담종린과 싸우고 감숙안찰사로 옮겼다. 1900년 의화단 운동으로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공격하자 황제를 호위하여 서안으로 몽진하여 서태후의 총애를 받았다. 이후 섬서순무로 승진하여 엄격한 정치를 펴서 휘하에 법이나 규율을 어긴 부하들을 엄히 징벌하고 관리들을 마구 죽여 '관도'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한 조정에 충실하고 언제나 쓴소리를 거침없이 뱉어 '간 큰 총독'으로 불렸다. 이 때문에 권력자인 총리대신 경친왕 아이신기오로 이쾅과 위안스카이는 천춘쉬안을 미워했다. 산서순무를 거쳐 1902년 사천총독에 임명되었으며 1903년부터 2년 동안 양광총독으로 부임하여 루룽팅 등과 인연을 맺었다.[1] 1905년 8월 31일 위안스카이, 조이손, 장지동, 주복, 단방과 함께 상소를 올려 과거제를 폐지하고 학교를 보급할 것을 청하여 병오과거부터 모든 과거를 폐지한다는 결정을 받아냈다.
그러던 중 1907년 베이징에서 서태후와 광서제를 알현했는데 서태후와 광서제는 천춘쉬안을 무려 사흘이나 접견하며 극진히 대접하다. 이에 천춘쉬안은 눈물을 흘리며 황제의 측근들이 권력을 남용하고 뇌물을 받아먹어 국가의 기강이 무너졌는데 이는 모두 총리대신 경친왕의 잘못이라고 비판하며 경친왕과 위안스카이 등 20여명의 고관을 비판했다.
이에 감동한 서태후는 1907년 3월 21일, 천춘쉬안에게 우전부 상서 자리를 내리고 이날 천춘쉬안은 경친왕의 측근 우전부 시랑 주보규를 탄핵하여 베이징의 관리들은 모두 천춘쉬안을 두려워하며 살아있는 폭탄으로 불렀다. 이후로도 천춘쉬안은 경친왕과 위안스카이의 사람을 많이 탄핵하여 위안스카이는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였다. 이에 경친왕과 위안스카이는 천춘쉬안을 경계하여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천춘쉬안은 위안스카이의 세력이 커서 단번에 무너뜨릴 수 없음을 알고 톈진에 사람을 보내 위안스카이를 예방하였는데 위안스카이 역시 폭탄같은 그의 성격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 베이징에 사람을 보내 답방하고 4월 30일 농공상부 우참의에 임명된 아들 위안커딩을 보내 천춘쉬안에게 베이징에 있는 북양사무실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후로 잘 지내는 듯 했지만 둘은 서로 이를 갈며 반복하고 있었다."신은 견마가 주인을 그리는 듯한 정에 못 이겨 베이징에 남아 황태후와 황제를 위해 집을 지키는 개가 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2.2. 위안스카이를 탄핵하다
1907년 4월 9일, 경친왕의 칠순 생일에 위안스카이의 심복 돤즈구이가 톈진 상무총회 회장 왕죽림에게 10만원을 꾸어 선물로 바쳤다. 4월 20일, 서태후는 위안스카이의 뇌물을 듬뿍 받은 경친왕의 제안에 따라 위안스카이의 심복 쉬스창을 동북삼성 총독으로, 탕사오이를 봉천순무로, 주가보를 길림순무로, 돤즈구이를 흑룡강순무로 삼았다. 이에 구홍기가 동북삼성의 인선이 모두 위안스카이의 도당이 차지했는데 특히 돤즈구이의 승진은 지나치게 파격적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서태후는 이를 듣지 않았는데 이때 나선 것이 천춘쉬안이었다.
1907년 5월 7일, 천춘쉬안의 사람인 어사 조계림이 천춘쉬안의 비밀정보를 바탕으로 상소를 올려 돤즈구이가 아이신기오로 짜이전에게 기생을 바치고 경친왕에게 뇌물 10만원을 바친 사실을 폭로했으며 위안스카이가 돤즈구이에게 속아 그를 승진시켰다고 밝혔다. 서태후는 격노하여 단지귀를 해임하고 정덕전으로 교체하고 순친왕 재풍과 대학사 손가내에게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경친왕을 불러 매섭게 꾸짖었다.
놀란 경친왕은 땅에 엎드려 절하며 진상을 밝혀달라고 애원했다. 사태가 심각함을 안 짜이전이 톈진의 위안스카이에게 달려가 대책을 물었지만 위안스카이에게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위안스카이는 짜이전에게 돤즈구이가 바친 기생 양취희를 몰래 돌려보내 증거를 없애라고 조언했고 짜이전은 어쩔 수 없이 탐방국 총관 양이덕과 함께 양취희를 빼돌리고 양무존, 농공상부 낭중 왕익손, 텐진 상무총회 회장 왕죽림 등에게 손을 써서 양취희가 사실 하녀로 고용된 것이었다고 거짓 계약서를 쓰게 했다. 이에 텐진의 언론들이 양취희 관련 보도가 잘못되었다는 정정보도를 내기 시작했다."이렇게 조정을 기만하느니 차라리 밧줄로 우리 모자의 목을 졸라매지 그러느냐!"
어사 강춘림은 변화하는 정황에 위안스카이가 신문사에 압력을 넣었으니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상소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어 재풍과 군기대신 세속은 어차피 천춘쉬안이 위안스카이를 죽일 수도 없고, 설령 죽인다 하더라도 그가 광서제와 서태후 사이를 회복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차라리 위안스카이가 있는 것이 낫다고 여겨 5월 16일 조계림의 상소는 무고였다는 보고를 올렸다. 이에 서태후는 노하여 조계림을 처벌하려 했으나 임소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2.3. 정미정조
위안스카이와 경친왕은 겨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지만 천춘쉬안을 내버려두었다간 큰일이 날 수 있다고 여겨 천춘쉬안을 제거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서태후가 그를 깊게 신임하니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베이징에서 몰아내기로 하고 공친왕 혁흔의 장녀 영수고륜 공주에게 많은 뇌물을 주어 천춘쉬안과 서태후 사이를 이간질시키게 했다. 위안스카이의 뇌물을 받은 영수고륜 공주가 서태후에게 이렇게 간했다.
이어 광동성 흠주에서 작은 변란이 일어나자 위안스카이는 변란의 규모를 부풀려 보고했고 경친왕은 천춘쉬안을 양광총독으로 임명해 변란을 진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때마침 영수고륜 공주의 참소도 있고 천춘쉬안의 끝없이 이어지는 상소에 지치기도 했던 서태후는 경친왕의 주장에 동의해 천춘쉬안을 양광총독에 임명했다. 군기대신 구홍기나 임소년은 대쪽같은 천춘쉬안이 베이징을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서태후의 뜻이 확고하여 어쩔 수 없었고 1907년 5월 28일, 천춘쉬안은 우전부 상서에서 해임되어 양광총독에 임명되었다. 천춘쉬안은 병을 이유로 휴가를 요청했고 서태후는 천춘쉬안을 위로하며 10일의 휴가를 주었다."천춘쉬안이 이야기하는 정치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려는 데 뜻이 있고 방법도 좋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기는 어렵습니다. 그가 매일 상소를 올리는데 춘추가 높으신 태후께서 어찌 그 수고를 감당하시겠습니까? 그에게는 변경을 맡겨 국방을 강화하게 하고, 혁광 등에게 조용히 정사를 돌보게 하는 것이 태후마마가 조금이라도 편안해지실 수 있는 방법입니다."
6월 12일, 천춘쉬안은 베이징을 떠나며 경친왕을 탄핵했고 서태후가 다시 경친왕의 파면을 고려하게 되자 구홍기가 이를 아내에게 누설했는데 경친왕 파면설이 영국 신문에 실리면서 국제적인 이슈가 되자 서태후는 경친왕 파면을 번복하였고 구홍기가 고의적으로 기밀을 누설했다 여겨 미워하게 되었다. 6월 17일 구홍기의 측근 여조강이 파면되고 구홍기에게는 후임을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으나 임소년이 다시 반대했다. 6월 19일 경친왕이 군기대신에서 사직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서태후는 반려했고 순친왕 재풍에게 경친왕을 보좌하게 했다. 이후 손가내와 철량이 구홍기 탄핵안에 근거가 없다는 조사 결과를 올렸으나 서태후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이후 위안스카이는 천춘쉬안을 제거하기 위해 서태후가 제일 미워하는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를 이용하기로 하고 천춘쉬안이 유신파 단체인 보국회에 가입했으니 캉유웨이와 량치차오의 도당이라고 비난했다. 서태후는 이를 믿지 않았으나 높은 벼슬을 얻고 싶었던 채내황이란 자가 캉유웨이와 천춘쉬안이 같이 있는 것을 합성한 사진을 바쳐 바쳤다. 이때 천춘쉬안은 상하이에서 병을 치료하며 아직 양광총독에 부임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8월 10일, 위안스카이의 뇌물을 받은 운육정이 천춘쉬안이 조정의 명을 받들지 않고 상하이에 머물며 캉유웨이, 량치차오와 결탁하여 일본의 세력을 빌어 조정을 전복하려 한다고 탄핵했다. 이에 서태후는 7월 4일 천춘쉬안을 파직했으니 이것이 바로 정미정조 사건이다.
2.4. 중화민국 건국과 토원운동
1912년 중화민국이 건국된 이후 쑹자오런 암살 사건, 선후대차관 사건을 거쳐 계축전쟁이 일어날 위기에 처하자 오정방과 함께 위안스카이에게 대표를 보내 국민당과 화해할 것을 청했지만 위안스카이는 듣지 않고 1913년 국민당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1915년 호국전쟁이 일어나자 과거에 자신이 키워준 용제광, 루룽팅으로부터 양광호국군도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1916년 5월 1일 량치차오로부터 양광도사 도사령으로 추대되었고 5월 8일 광저우에서 성립된 군무원 부무군장에 추대되어 무군장 탕지야오의 직권을 대행하는 등 위안스카이 타도 운동에 나섰다.
1916년 6월 위안스카이가 죽고 부총통 리위안훙이 계임하자 쑨원, 탕지야오 등과 함께 민국 원년의 약법을 회복하고 구국회를 도로 소집하며 제제파를 처벌하고 군사대책회의를 소집하라는 4개 항을 요구했다. 6월 29일 국무총리 돤치루이가 국무원을 소집해 구약법 회복과 구국회 소집을 발표하면서 7월 14일 군무원은 해체되고 호국전쟁은 끝났다. 8월 1일에 국회가 다시 열렸다. 이후 구 국민당 계열의 헌정상각회에서 떨어져 나온 보수세력인 객려파를 중심으로 정학회를 조직하여 루룽팅 등 계계군벌의 지지를 받았다.
이후 호법운동이 벌어지자 정학회는 서남 각성을 중심으로 연성자치론을 주장하며 쑨원의 무력통일론을 비판하였다.
2.5. 호법운동
1917년 부원지쟁 끝에 장훈복벽이 일어났다. 복벽을 진압한 돤치루이가 구 국회 회복을 거부하자 쑨원이 광저우로 남하하여 호법정부를 수립하고 국회의원들의 남하를 촉구하였는데 이때 천춘쉬안과 정학회도 비상국회에 참석했다. 하지만 정학회는 쑨원의 무력통일론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북양군벌과 끝까지 싸울 생각이 없던 전계군벌 탕지야오, 계계군벌 루룽팅과 연합하여 1918년 5월 호법정부를 대원수제에서 7인 총재제도로 대체하고 그 자신이 정무총재로 선출되었는데 이어 6월 5일에 2차 개조를 단행, 6월 19일에 수석총재에 뽑혔다. 이에 쑨원은 실망하여 광저우를 떠나 상하이로 가버렸고 호법운동은 흐지부지해졌다. 천춘쉬안은 린썬을 참의원 의장, 왕정팅을 부의장으로 선출하고 저보성을 중의원 부의장에, 중의원 의장에 우징롄을 선출한 후 8월 19일 베이징 정부의 모든 행위를 승인하지 않겠다고 발표하며 안복국회와 신임 대총통 쉬스창이 정통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1918년 11월 호법전쟁이 끝난 이후 량스이 등에 의해 부총통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돤치루이가 차오쿤을 부총통으로 천거했으며 금전 투표가 관행이었던 당시 중화민국에서 북양군벌이 굳이 돈을 써가면서 남방인사를 부총통으로 뽑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흐지부지되었다. 호법정부를 장악한 천춘쉬안은 북양정부와의 화의를 주장하며 1919년부터 상하이에서 선후회의라 불리는 남북화평회의를 개최했으나 남북의 입장 차이가 커서 8월에 결렬되었다. 이때 호법국회 안에서 민우사와 익우사가 화의에 반대하며 천춘쉬안이 헌법을 졸속으로 제정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천춘쉬안과 정학회는 헌법 제정이 화의에 영향을 줄까 우려하여 반대하고 있었고 군경을 풀어 국회의원을 억류하고 양원의 비서처를 포위수색하면서 헌법 제정을 방해하려 했다. 이 때문에 익우사와 민우사 국회의원들도 천춘쉬안이 북양군벌과 결탁하여 구법통을 취소하려 한다고 비난하며 광저우를 떠나버렸다.
1920년, 2차 호법운동이 벌어져 월계군벌 천중밍이 월인치월의 구호를 내걸고 루룽팅을 공격하여 광동에서 축출할 때 같이 축출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안직전쟁의 결과로 안복국회가 해산되자 정학회는 구 국회 회복에 기대를 걸고 베이징으로 이동하여 구 국회 회복운동을 벌였다. 1차 직봉전쟁 이후 직예군벌이 구 국회를 회복하면서 기대가 이루어지긴 했다. 이후 직예군벌이 리위안훙 대총통을 핍박하여 내쫓고 1923년에 벌인 회선 사건에서 대총통 후보로 8표를 얻어 4위를 기록했다.
2.6. 말년
광저우에서 축출된 이후 정치적인 은퇴를 선언하고 상하이에 은거했다. 1922년 1차 직봉전쟁이 끝난 후 국회회복의 의사를 묻는 우페이푸의 통전에 대해 국회 회복에 찬성한다고 표명하여 법통중광이 행해졌다.
1924년 2차 직봉전쟁 이후 돤치루이 임시 집정 정부가 1925년 2월에 개최한 선후회의에 참가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1933년 4월, 상하이에서 사망했다.
3.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원세개 평전, 허우이제, 지호.
- 손문평전, 해롤드 시프린, 지식산업사.
- 중국 근현대사 2권 근대국가의 모색(1894~1925), 가와시마 신, 삼천리.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4. 관련문서
- 양무운동
- 변법자강운동
- 무술정변
- 의화단 운동
- 신해혁명
- 계축전쟁
- 홍헌제제
- 호국전쟁
- 장훈복벽
- 부원지쟁
- 1차 호법운동
- 호법전쟁
- 안직전쟁
- 2차 호법운동
- 1차 직봉전쟁
- 회선 사건
- 강절전쟁
- 2차 직봉전쟁
- 북경정변
- 핍궁사건
- 제노전쟁
- 선후회의
- 국민혁명
- 제1차 상하이 사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