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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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중일전쟁 종료 직후 천하반분을 위해 충칭에서 만난 장제스마오쩌둥. 이 때 쌍십협정(雙十協定)이 체결되어 평화가 오는 듯 했으나, 둘 다 추스르는 시간을 벌기 위한 기만술이었을 따름이다. 물론 선빵은 전력이 유리했던 장제스가 날렸으나 결국 중공군이 승리했다.
1. 개요
2. 1차 국공합작(1924~1927)
3. 2차 국공합작(1937~1946)
4. 제3차 국공합작(?)
5. 인터넷에서의 국공합작(…)
6. 기타
7. 같이 보기


1. 개요


중화민국 당시 국민당공산당이 협조체제를 구축하여 하나의 적을 토벌하자는 취지에 이뤄진 협정.

2. 1차 국공합작(1924~1927)


위안스카이의 사후 중국의 약법과 국회는 회복되었다. 하지만 1917년 장훈복벽으로 약법과 국회가 폐지되었고 복벽을 진압한 돤치루이는 약법과 국회의 복구를 거부했다. 이에 쑨원1차 호법운동을 전개, 탕지야오, 루룽팅 등 서남군벌들과 연합하여 1917년 9월 제1차 군정부를 수립하고 호법전쟁에 참여했으나 호법을 오로지 세력확장에 이용할 뿐인 군벌들에게 필요가 없어지자 축출당했다. 1920년 광동군벌 천중밍루룽팅을 축출하고 광동의 지배자가 되자 그와 함께 2차 호법운동을 전개, 2차 군정부를 조직했지만 관계 악화와 노선 충돌로 인하여 1922년 영풍함 사건을 통해 다시 축출당했다.
한편 러시아 혁명의 성공에 자극받은 중국의 지식인들은 사회주의를 수용하여 중국 공산당을 결성한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의 프롤레타리아 운동과 피억압 민족의 민족해방 운동의 결합 가능성을 제기하며 공산주의자와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의 동맹을 강조한 레닌의 '식민지 민족 문제에 관한 테제'의 영향으로 소자본가 계급과의 연합전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또한 5.4운동으로 중국 민중의 동원력을 재고하게 된 쑨원은 비밀결사형식이던 중화혁명당을 발전시켜 1919년 10월 10일 중국 국민당을 수립한다.
쑨원은 소련의 제정 러시아와 중국 간의 불평등 협정을 폐기하는 '카라한 선언'에 대한 호의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의 수용은 거부했다. 그러나 호법전쟁영풍함 사건으로 두차례나 배반당한 경험으로 인해 군벌과 연합하는 방식으로는 혁명의 완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공산당과의 일시적 합작에 동의하게 된다. 이후 중국 공산당이 '당내 합작' 형식의 연합전선을 받아들이고, 진형명의 배반으로 근거지를 상실함에 따라, 공산당원의 입당을 허용하고, 선전을 강화하는 '개진(改進)'을 단행했다.
1924년, 쑨원랴오중카이의 주도로 양자 간의 접근은 마침내 '연소(聯蘇, 소련과 연대하고), 용공(容共, 공산주의를 인정하며), 부조공농(扶助工農, 공업과 농업에 있어 서로 도움)'으로 요약되는 (국민당) '개조(改造)'로써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원들은 국민당에 개인 자격으로만 가입이 가능했고, 집단 자격으로는 가입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소련 공산당의 지속적 지시 하에서 중국 공산당은 내부의 비밀단체를 결성하였으며, 국공합작 체제 안에서 세력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지향점이 다른 공산당과 국민당 내부의 여러 파벌은 사사건건 충돌하면서, 서로를 견제하였다. 결국 쑨원 사후 공산당이 국민당 좌파와 연계하여 조직적으로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를 장악하고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을 구실로 후한민 등 국민당 우파를 숙청하자 린썬을 비롯하여 국민당의 창립멤버들을 비롯한 우파들은 크게 분노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반발하여 공산당과의 합작을 끝낼 것을 요구하는 서산회의파가 갈라져나왔다. 그나마 서산회의파는 상하이 중심의 독자적인 당중앙을 세운 것 정도로 끝났으나 중산함 사건을 통해 성장한 장제스를 비롯한 신우파는 군사력까지 확보한 상태라서 서산회의파같은 기존우파 세력보다 위협적이었다. 이에 공산당은 장제스를 실각시키고 탕성즈로 대체하기 위해 장제스에게 정치적 공세를 퍼부었으나 공산당이 주도한 과격한 계급혁명과 혁명외교, 열강과의 충돌, 공산주의에 염증을 느낀 대다수 대중과 지식인들의 반감을 의식한 국민당 신우파 세력이 먼저 선수를 쳐서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난징 정부를 수립함에 따라 국민당은 셋으로 분열되었다.
이후 우한 정부와 공산당의 합작은 지속되었으나 경제적 위기, 공산당의 폭동에 분노한 장교들이 일으킨 마일사변 등의 악재가 겹쳤으며 코민테른에서 기존의 온건한 국공합작 노선을 폐기하고 아예 우한 정부의 중앙집행위원회를 강제적으로 장악하고 공산당 산하의 군사조직을 창설할 것을 지령함에 따라 공산당의 과격한 행동에 경계를 느끼고 있던 왕징웨이마저 공산당과 손을 끊기로 결정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은 완전히 파기되었다. 이를 국공결렬이라고 한다.

3. 2차 국공합작(1937~1946)


1차 국공합작이 붕괴되고, 공산당은 국민당 혁명위원회를 수립, 난창 폭동을 일으켰으나 제압당하고 8.7 긴급회의를 통해 취추바이를 중심으로 추수폭동, 광저우 폭동을 시도했지만 또 실패했다. 이 때문에 천두슈와 취추바이가 모두 몰락하고 이후 리리싼리리싼 노선을 전개, 1930년에 창사 폭동을 일으켰으나 망하고 말았다. 한편 마오쩌둥은 주더와 함께 정강산 투쟁을 시작으로 농촌을 중심으로 한 유격전을 전개했으며 정강산을 포기한 후에도 강서성 루이진에서 강서 소비에트를 건설했다. 이 강서 소비에트는 부전사변으로 부침을 겪기는 했으나 1930년의 제1차 초공작전을 시작으로 1931년의 제2차 초공작전까지 손쉽게 격퇴했으며 1931년 제3차 초공작전 때 위기에 처했으나 1차 양광사변만주사변의 어부지리로 극복하고 계속 영토와 무장을 확장하여 1931년 11월 중화소비에트공화국 건국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주석 마오쩌둥제4차 초공작전 직전 영도 확대회의에서 실각했고 오토 브라운이 지휘하던 홍군은 1933년 실행된 제5차 초공작전에서 패배하면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붕괴되었다. 이후 공산당은 대장정을 통해 간신히 옌안에 정착하지만, 국민당은 그곳까지 토벌군을 보낸다. 당시 산시(섬서) 성에 주둔한 홍군은 겨우 3만 명에, 통치 지역도 겨우 4개 현에 불과했다. 이에 공산당은 지방 언론을 이용해 '장제스는 일본의 침략은 무시하고 내전에만 광분한다'는 프로파간다로 초공 작전의 중단을 시도해 보지만, 장제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추격을 시작했다면 공산당도 뿌리뽑히기 일보 직전인 상태에서 공산당의 저런 프로파간다가 장쉐량에게 통했고, 그 결과가 서안 사건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도 장제스는 바로 국공합작을 하지 않았다. 국공합작은 급작스러운 상황이 되어버린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나 이루어졌다. 장개석의 의도는 그러나 알 수 없다. 합작 이후 공산당은 국민당에 충성을 맹세했으나, 실제로는 지키지 않았고 대대적인 세력 확대에 돌입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양측은 국공내전에 돌입했고, 결국 국민당은 1949년 대륙을 잃고 타이완으로 옮겨갔다.

4. 제3차 국공합작(?)


공식적인 용어는 아니고, 2005년 이후 중국 국민당과 중화인민공화국(중국 공산당) 사이의 관계 개선, 협조 관계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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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계기는 2005년 4월말 롄잔(連戰) 당시 중국 국민당 명예주석이 국공내전 이후 국민당 당수로는 처음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후진타오 당시 중국 공산당 총서기 [1][2]과 회동하고, 56년만에 국공 양측의 적대관계가 종식되었음을 공식 선언한 것을 기점으로 한다. 당시 국민당은 1년 전 총통선거에서 대만 분리독립을 지지하는 천수이볜 총통에게 패배한 바 있었고,[3]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회복할 계기를 모색하고 있었다. 중국 공산정부 역시 분리독립을 공공연히 추구하던 천수이볜 당시 천수이볜 총통과 민주진보당이 눈엣가시였고, 2005년 3월에는 "비평화적 수단(즉, 군사적 수단 포함)을 통한 대만 통일 가능성"을 명시한 <반분열국가법>을 제정하기까지 했다.
결국 군벌(제1차), 일본(제2차)에 이어 새로운 공동의 적수(대만 독립진영)의 등장으로 국공 양측이 56년만에 다시 합작을 모색하게 된 셈이었다. 중국 국민당은 민주진보당을 누르고 정권을 탈환하기 위해, 중국 공산당은 대만의 분리독립을 막기 위해. 이후 2008년 마잉주의 총통 당선으로 중국 국민당이 재집권한 후, 양안간의 우편-왕래-무역을 전면 개방하는 대삼통(通三通)이 성사되고[4], 2010년에는 양안간 자유무역협정에 해당하는 ECFA 체결로 이어졌다. 아울러 중국 국민당 주석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뇌부와 일종의 영수회담을 개최하는 일도 늘어났다. 이는 마잉주 총통이 "중국 국민당 주석이 아닌 중화민국 총통 자격을 인정받아야만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정상회담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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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회동한 주리룬 중국 국민당 주석(왼쪽)과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오른쪽). 가장 최근에 열린 국공 수뇌부회담이다. 하지만 2015년 현재 들어서는 마잉주 총통과 국민당이 주도하는 대중국 화해, 협력 정책이 도리어 중국에 대한 종속도를 높이고, 타이완의 자주성을 침해한다는 비판이 고조되어 국민당의 입지를 좁히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대만 내부의 여론은 2014년 말 홍콩 민주화 시위에서 드러난 중화인민공화국의 자기 중심적 일국양제 강요, 중화민국 지방공직인원 선거지방선거에서 국민당의 대패로 입증된 바 있다. 다만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미 적대관계 종식을 선언한 국공 양측의 공식적, 비공식적 협력 체제 자체가 무너지는 가능성은 당분간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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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양안 정상의 악수
2015년 11월 7일 마잉주 중화민국 총통과 시진핑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간에 회담이 진행되었다.기사 시진핑의 싱가포르 공식 방문 일정에 맞춰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가 시진핑과의 만찬에 마잉주 총통을 초청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일단 '중화민국 총통'과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이라는 직함 대신 서로 '선생'으로 호칭했지만, 국공내전 이후 66년만의 양안 정상간 만남이라는 점에서 세계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5. 인터넷에서의 국공합작(…)


어떤 이슈나 사건에 대해, 좌파성향 네티즌과 우파성향 네티즌이 한 목소리를 내거나 공동행동을 하는 상황을 가리키기도 한다.
예)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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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표적 진보 논객이던 진중권과 보수 논객 변희재가 올림픽 앞에서 하나가 된 모습(...).
사실 우리나라 같으면 민족 유일당 운동이나 좌우합작운동이 더 적합한 드립이겠지만, 단어가 길어서 그런지 아니면 상대적으로 덜 유명해서 그런지 국공합작 드립이 더 많이 쓰인다. 비슷한 표현인 좌우합작 항목도 같이 참조하자.

6. 기타


여담이지만 중국 근현대사에서 XX합작은 국공합작이 유명하지만 사실 그외에도 합작이 많다. 1927년 우한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가 합친 영한합작, 후한민과 장제스의 장호합작,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장왕합작 등등...
유튜브에서 중화권의 섹시한 영상이 올라오면 댓글창의 유저들이 간체자와 번체자가 뒤섞여 국공합작상태로 변한다(...).

7. 같이 보기



[1] 하나의 중국 원칙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 대 국가의 모습으로 비칠 수 있는 국가주석 명의가 아닌 당 총서기 명의로 만났다.[2] 중국은 공산국가이기 때문에 당이 국가를 지배하고 당의 총수가 당군정의 모든 권한을 쥔다. 따라서 당 총서기(당권)는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군권)을 겸하고 국가주석(정권) 직에 오른다.[3] 2000년과 2004년 선거 모두 국민당의 후보는 롄잔 명예주석이었다. [4] 이전에는 중화민국 푸젠성 지역에만 허용이 되었고 이걸 소삼통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