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 하노버 엑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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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0년 6월 1일부터 2000년 10월 31일까지 개최된 등록박람회. 독일 하노버에서 개최하였다.
2. 유치
'''새천년의 시작인 2000년에 개최하는 엑스포라는 점''' 때문에 매우 경쟁이 치열했다. 1988년에 접수를 받았다. 당연히 국제박람회기구(BIE)의 심사도 매우 빡세게 진행되었다. 그래서 BIE의 후보 심사 과정에서 유력 후보였던 미국 로스앤젤레스, 일본 나고야, 스웨덴 스톡홀름 등이 줄줄이 탈락했다. 결국 남은 것은 독일 하노버와 캐나다 토론토. 후보 등록 당시는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 정책때문에 내부적으로 혼란이 있어서 엑스포 상징성을 알면서도 출마하지 못했다.
하여튼 하노버와 토론토와 남은 엑스포 유치전 '''본선'''은 매우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세계 3대 행사라 불리는 올림픽, 월드컵, 엑스포 중에서 '''1표차'''로 당락이 갈린 '''초접전'''이었다. 유치 투표는 1990년 6월 14일 '''대전광역시에서''' 했다. 당시 1993 대전 엑스포를 유치했기에 BIE 총회를 대전에서 진행하고 있었다. 1990년에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인해 동서독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시점이었다. 동서독 통일에 반대하는 영국, 프랑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1] 등이 스크럼을 짜서 토론토에 표를 던졌다는 추정이 많다. 대한민국은 BIE 총회를 대전에서 한 거 때문에 투표권이 없었다. BIE 총회는 후보자 국가와 총회 개최국가는 개최지 투표 시에 투표권이 없기 때문이다.
3. 전개
독일에서는 엑스포를 유치하고 박람회 부지인 하노버 박람회장이라는 전시장을 대대적으로 확장하며, 동서독 통일에 따른 독일의 새 모습을 보여주려 필사적이었다. 게다가 '''1표차'''로 아슬아슬하게 유치전에서 승리한 입장이라 더욱 성공한 엑스포를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1996년 국제박람회기구(BIE)의 헌장이 개정되면서, 하노버 엑스포는 개정된 헌장이 적용되는 첫 엑스포가 되었다. 1996년 개정된 BIE 헌장에 따라 하노버 엑스포는 6개월을 할 수 있었지만 하노버는 적용이 좀 애매해서 5개월만 시행하는 것으로 적용되었다. 다만 등록박람회라서 규모를 무제한으로 할 수 있다는 점은 유지했다. 덕분에 2000 하노버 엑스포는 실내전시면적 무려 '''496,000㎡''' 짜리 하노버 박람회장 외에도 하노버 시내 곳곳에 회장을 건설하였다. '''그런데...'''
2000년 6월 1일 엑스포를 시작하자 문제가 생겼다. 6월 1일 오프닝 성적이 목표치에 미달한 것이다. 독일 하노버 엑스포는 박람회 방문객 목표치를 '''4,000만 명'''으로 설정했다. 오프닝 성적 목표치는 '''50만 명'''. 그런데 6월 1일 오프닝 성적은 37만 명에 불과했다. 이 날은 평일인 목요일이었기에 목표치를 낮게 잡았는데 그것도 미달하자 독일 정부는 비상이 걸렸다. 결국 하노버 엑스포는 목표치 4,000만 명을 크게 하회하는 '''2,521만 명'''으로 마감하여 '''새천년의 첫 시작'''이라는 2000년, '''1851 런던 엑스포로부터 시작된 엑스포 역사에 먹칠을 하고 말았다.(...)'''
4. 기타
하노버 출신이자 독일을 대표하는 록밴드 스콜피온즈가 하노버 엑스포의 주제곡인 'Moment of Glory'와 동명 제목의 앨범을 발표했다. 이 앨범에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크로스오버 작업을 했는데, 당대 대중음악 평론가들에게 찬사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