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 대전 엑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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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포남문광장(엑스포시민광장) 방향으로 바라본 행사 당시의 풍경. 1993년 8월 7일(개장 당일)의 모습이다.[1]
대전 엑스포 공식 기록 영화 《한빛은 세계로》
대전엑스포 '93
1993년 대전 세계 박람회
The Taejon International Exposition, Korea, 1993[2]
1. 개요
2. 설명
3. 유치 과정
4. 역대 조직위원장
5. 전시관
5.1. 도약관
5.2. 롯데환타지월드
5.3. 미래항공관
5.4. 번영관
5.5. 북한물산관
5.6. 소재관
5.7. 시도관
5.8. 우주탐험관
5.9. 이매지네이션관
5.10. 인간과 과학관
5.11. 자기부상열차관
5.12. 자동차관
5.13. 자연생명관
5.14. 자원활용관
5.15. 재생조형관
5.16. 전기에너지관
5.17. 정보통신관
5.18. 정부관
5.19. 조폐문화관
5.20. 주거환경관
5.21. 지구관
5.22. 테크노피아관
5.23. 한국IBM관
5.24. 한국후지쯔관
5.25. 대전관
5.26. 한빛탑
6. 대전 엑스포 참가국 및 국제전시관(1993년 철거 및 철수)
6.1. 참가국 및 전시출품국(1993년 당시 기준, 가나다 순)
7. 그 외
8. 축제 이후
9. 관련 문서
1. 개요
대전직할시(현 대전광역시) 유성구 대덕연구단지에서 열린 엑스포. 주제는 "새로운 도약으로의 길"이고, 부제는 "전통기술과 현대과학의 조화"와 "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재활용"이다. 헌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실질적 주제는 부제 쪽인 것 같다.[3] 1993년 8월 7일부터 11월 7일까지 정확히 93일 동안 개최되었다.
2. 설명
공식 캐릭터는 꿈돌이. 공식주제가는 코리아나의 그날은으로 정해졌다. 그리고 '도우미'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계기가 되는 행사다.
개최 당시엔 개발도상국[4] 에서 두번째로 열린 세계박람회기구 공인 엑스포이며,[5] 1893 시카고 엑스포에 8칸 규모의 기와집[6] 으로 참가한지 100년 만에 스스로 주최국이 된 엑스포이기도 하다. 또한 이 엑스포는 '''성숙된 민주주의 정권하에서 개최되어 대한민국의 새로운 이미지를 알렸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대한민국은 이 엑스포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의 개최로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일약 선진국으로 도약하게 된다.
세계 108개국과 33개 국제 기구, 대한민국의 200여 개 기업이 참가했다. 정부와 민간을 합쳐 1조 8천억 원을 들였고 1450만 명이 관람했다. 그야말로 '''대박'''. 말이 필요없다. 덧붙여 대기업들이 주요 전시장을 스폰서했다(럭키금성그룹의 테크노피아라든가, 삼성그룹의 우주탐험관 등). 이 엑스포 하나 한다고 조차장인 대전조차장역에 '''엑스포역'''이라는 임시승강장까지 놓았는데도 사람이 꽉 찼을 정도였다고 한다.
행사 당시에는 밤이 되면 밤마다 레이저 기둥을 쏘아 올리는 건 기본이었다. '''화려하다'''는 말은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게다가 당시 12시 넘어서는 심야영업규제가 전국적으로 실시되던 중이었으나 엑스포와 유성온천을 두고 있는 대전 유성구는 관광특구로 지정되어서 그런 규정에 해당되지 않았으므로, 12시 쯤 되면 전국 방방곡곡에서 노는 사람들까지 몰려와 유성구 지역은 다음 날 새벽까지 말 그대로 난장판을 이뤘다. 당연하지만 '''엑스포 기간 동안 내내.''' 이들은 당시 유성의 궁동 지역을 '''압구궁동'''으로 부르기도 했다.
엑스포 기간이 끝나고 나서, 엑스포과학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이름만 바뀐 채 운영해왔으며, 심지어 6차 과정 교과서에 표지 사진으로 들어가기까지 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참 기이한 일인데, 더 골 때리는건 개막하기도 전인 1993년 5월 발매된 사이버 포뮬러 비디오판에서 후지오카 서키트가 '''대전 서키트'''로 번역된 것. 그만큼 대전 엑스포 자체가 당시 얼마나 큰 관심사였는지 엿볼 수 있다.
또한 1990년대에 지리적으로 대전에 가까운 지역을 넘어 전국의 국민학교[7] 를 다닌 사람들은 많이들 가봤다.
또한 이 해에 졸업반인 나이층[8] 은 여기에서 졸업앨범을 촬영하기도 했다.
특히 개최지인 대전은 정도가 너무 심했는데, 특히 엑스포 회장에서 바로 걸어서 10분, 5분 거리에 위치한 대덕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대덕중학교, 대덕고등학교는 소풍장소 50% 이상을 이 엑스포 과학공원과 근처 국립중앙과학관으로 배정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엑스포가 열린 1993년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약 7년 동안 엑스포 주변으로 소풍만 8번을 간 경우도 있을 정도. 바로 앞에 있는 대덕중학교의 경우 소풍을 가면 꼭 엑스포장으로 갔는데, 당시 소풍을 가면 사복을 함께 지참하였고, 아침에 엑스포장에 들어가면 가지고 간 사복을 갈아입은 후 둔산동으로 가서 놀다가 귀가 전에 다시 들어와서 교복으로 갈아입고 귀가하는 식이었다. 물론 다시 들어오는 시간이 늦어 다음날 엉덩이에 불나는 학생도 있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국내 최초로 서울특별시가 아닌 지역에서 개최된 세계구급 행사로서, 방송 3사에서 전야제를 생중계하고 그밖에도 지상파 뉴스에서 꾸준하게 소식을 다루었다.[9] 특히 당시는 평일 낮방송 정파시간이 있어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반까지 방송이 나가지 않았는데, 엑스포 기간에는 방송시간이 앞뒤로 30분 연장되어[10] 해당 시간에는 지상파 3사가 모두 엑스포 관련 뉴스와 콘텐츠 등을 방송했다.
엑스포가 개최되던 때와 동시에 놀이동산인 꿈돌이랜드를 런칭했다. 그러나 본관과 마찬가지로 리뉴얼이 드물어서 낙후되어 보이는건 어쩔 수 없는 듯. 게다가 2009년 대전동물원이 대전 오월드라는 이름으로 리뉴얼이 되어서 꿈돌이랜드의 입지가 좀 위태해졌었는데 2012년 6월에 결국 운영 적자를 버티지 못하고 폐장되었다.
대전시에서 폐부지를 개발사업관련으로 118억에 매입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고 18억에 남은 부대시설을 매각했다고 한다.
당시 '''꿈돌이안내'''에서 운영되던 키오스크는 Windows 3.1 기반이었으며, 터치스크린을 장착하고 있었다.[11] 이를 통해 개별 전시관 방문을 예약할 수 있었다.[12] 그리고 그 예약을 하기 위해 개장하자마자 사람들은 꿈돌이안내소로 우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물론 관람객의 근성을 길러주기 위해 예약제도를 실시하지 않는 전시관들도 있었다.
엑스포 재창조 사업으로 2014년 11월 부터 철거를 시작하여 지금은 철거를 완료하였다. 철거한 부지에는 스튜디오 큐브가 건설 완료되었고, 신세계컨소시엄의 사이언스콤플렉스, 기초과학연구원 본원(2021년 마무리 예정)이 들어설 예정이다.
3. 유치 과정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노태우 정부는 바로 그 해 말 새로운 업적거리를 찾는 과정에서 박람회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올림픽을 개최한 개발도상국이 대규모 박람회 개최를 통해 선진국에 진입하는 테크트리를 타기로 한 것이다. 이웃나라 일본에서 1964년 도쿄 올림픽을 개최한 후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서 명실상부한 선진국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을 벤치마크 한 것. 중국도 한국의 사례를 다시 벤치마킹(...)해서 2008 베이징 올림픽과 2010 상하이 엑스포로 비슷한 테크를 탔다.
그래서 정부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국제무역산업박람회'를 1991년 개최하려고 하지만, 유례없는 대규모 행사를 위한 예산 배정에 대해 야당은 물론 정부 내에서도 반대가 심했다. 결국 개최를 반대하던 측에서 내놓은 조건이 국제박람회기구의 공인을 받으라는 것. 당연히, '''"공인을 받을 리가 없지"'''라는 생각에 그러한 조건을 내놓은 것이다. 그리고 과정에서 개최 년도가 2년 뒤인 1993년으로 늦추어졌다.
문제는, 당시 국제박람회기구는 엑스포 개최와 관련하여 1999년까지 엑스포 개최를 공인하지 않겠다는 모라토리움을 선언해놓은 상태였다. 즉, 각 국가에서 경쟁적으로 엑스포를 개최하면서 그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회원국들을 압박[13] 하는 한편으로 행사의 부실화를 초래할 위험성을 우려한 것이다.
그러나 조직위원회는, 당시 국제박람회기구가 저예산의 신개념 엑스포[14] 를 구상하고 있었다는 점에 착안하였다. 즉, 앞으로 시행될 저예산 엑스포인 인정박람회의 원형으로서의 대전 엑스포를 어필한 것이다.
물론, 모라토리움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반대 의견도 많았다. 특히 당시 국가 재정이 어렵던 미국[15] 이 대표적인 국가였으며, 그러한 점을 각 국 대표들에게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다녔다. 오명 대전엑스포조직위원장의 회고에 따르면 이전에 유럽에서 열린 몇 번의 엑스포들에서 미국관이 큰 호응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미국은 엑스포를 '''"미국을 알아주지 않는 행사"'''라고 바라봤다고 한다. 결국 미국은 1993년이 되어서야 대전엑스포 참가를 결정하게 되는데, 단기간에 쓸만한 전시관을 만들었다(!). #당시 SBS 뉴스보도(10초~26초 구간)를 보면 왜 저런 단신 같은 뉴스가 헤드라인에 올라왔는지 의아해할 수도 있는데, 이런 속사정이 있었던 것. 반면, 당시 한국으로부터 금전적으로 많은 신세를 졌던 소련은 한국의 엑스포 개최를 반대하는 쿠바 대표를 조용히 구석(...)으로 데려가 찬성하기 싫으면 기권하도록 설득했다고 한다. 결국 기권한 국가를 빼고는 모두 찬성하여 국제박람회기구의 공인을 받는데에 성공했다.
당초 개최장소로는 안산시가 유력했으나, 지방균형발전 차원에서도 그렇고 이왕이면 전국에서 1시간 내[16] 에 당도할 수 있는 곳에서 박람회를 개최하는 것이 좋겠다는 점, 그리고 마침 ''''대전에는 다른 곳으로 이전한 공군 기지의 활주로가 있으니 그 활주로에 천막을 치고 전시회를 열면 예산이 절약될 것''' 이라는 생각으로 대전이 선택되었다고 한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알다시피 활주로에 천막치고 박람회를 개최하지는 않았다. 덧붙여 그 공군 기지는 지금 대전의 중심인 둔산신도시 지역으로 개발되었고, 엑스포 개최 기간에는 한참 공사중이었다. 참고로 그곳에 있었던 공군 기지는 다름 아닌 공군기본군사훈련단으로 1988년에 경남 진주로 이전.
저예산 신개념 엑스포의 원형이 될 것을 천명하여 국제박람회기구를 설득했지만, 결국 종합 엑스포의 규모를 가진 전문 박람회[17] 가 되어버렸다. 즉 오늘날 인정박람회의 최대 전시규모인 25만㎡의 두 배에 해당하는 50만㎡의 전시공간 규모[18] 로 완성된 것이다. 대전 엑스포가 인정박람회가 된 것은 소규모 엑스포를 개최하고자 해서라기보다는 국제박람회기구의 공인을 받기 위한 측면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속아서(?) 한국 유치를 지지해준 인사들은 건설현장을 방문해서는 전시관의 반은 걷어버려야 한다거나 하면서 분노했다는 듯.
북한은 결국 불참했는데 이는 엑스포 개최 1년 전 제기된 미국의 북한 핵개발 문제제기, 1993년 팀 스피릿 한미합동훈련 재개 및 북한 NPT 탈퇴로 인해 남북관계가 급격히 나빠진 것이 크게 한몫했다고 한다.
4. 역대 조직위원장
5. 전시관
편집은 가나다순. 2020년 기준 한빛탑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되었다. 전기에너지관은 리모델링, 번영관은 대전국제전시컨벤션센터로 재건축 예정이며, 미래항공관은 제주도로 해체 이전하였다.
5.1. 도약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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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5개 참가사가 공동으로 사용했던 전시관으로 당시 금강제화, 동아오츠카, 유한킴벌리, 데이콤 등이 있었다. 금강제화는 금강제화 전시관을, 유한킴벌리는 숲속의 극장을, 동아오츠카는 포카리수족관을, 데이콤은 데이콤관, 유호 I.B.E.는 파이워터시스템관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철거되어 사라졌으며 폐막 이후 옛 정부관 건물로 자리를 이전하였다.
5.2. 롯데환타지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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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롯데 월드사업부가 제공한 전시관으로 국제전시구역 안에 위치해 있었다. 물과 불을 이용한 공연인 '환상의 오딧세이'가 공연되었다.[19] 특이하게도 롯데월드 캐릭터인 로티와 로리를 사용하였다.[20]
5.3. 미래항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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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이 제공하였다. 격납고처럼 생겼다. 입구에는 '창공-91'이라는 지금은 반쯤 흑역사가 되어버린 자체개발 항공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민항기 시뮬레이터를 체험해 볼 수 있었으나, 단 두 명만 탈 수 있는 구조상 선택받은(!) 어린이들만 조종사 시트에 앉아볼 수 있었고, 메인쇼로는 360도 원통형으로 생긴 슬라이드 영상물이 상영되었는데, SK그룹의 이매지네이션관 프리쇼(메인쇼 전에 보여주는 일종의 전채요리)와 비슷했지만 이매지네이션관의 경우 이음새가 없는 스크린이고 이곳의 스크린은 이음새가 있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상설관으로 건립되지 않았으나, 대한항공 측에서 건물을 버리긴 아까웠는지 폐막 후 제주도의 정석비행장에 해체 이전(!)하여 정석항공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대한항공은 도우미들의 교육 및 운영도 맡았다.
5.4. 번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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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서 제공한 전시관으로 국제전시구역 입구에 있었던 무역전시관이었다. 현재는 KOTREX(대전무역전시관)로 개조되어 현재까지 현 위치에 그대로 있다. 이 건물에서 감동의 골마(...)로 유명한 EVER 스타리그 2004의 결승전이 열렸다.
현재는 철거되어 대전국제전시컨벤션센터로 재건축될 예정이다.
5.5. 북한물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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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약관 옆에 위치해있는 전시관으로 북한의 물자 및 물품들을 한 곳에 전시하였던 곳이며 대전엑스포조직위원회가 특별히 개설한 전시관이었다. 당연히 북한은 대전엑스포에는 불참하였고[21] , 위원회 측에서 꾸민 곳이다.
5.6. 소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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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종합제철(現 포스코)이 제공하였다. 당시 기술로는 상당히 잘 만든 3D효과 홍보영화[22] 가 주요 볼거리로, 삼성그룹의 우주탐험관이나 LG의 테크노피아관만큼은 아니지만 입소문이 나서 상당히 인기가 높았다. 폐관되기 전까지는 과학공원 행사가 있을 때만 행사장으로 이용되었다.
5.7. 시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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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15개 시·도[23] 에서 제공하였다. 각 시도별로 부스를 만들고 홍보했다. 상설관이 아니므로 폐막 후 바로 철거.
5.8. 우주탐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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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물산이 제공한 전시관이다. 공간을 도약('트위스터 점프'라 명명했었다.)해서 우주여행을 하는 체험형 영상물[24] 이 큰 인기를 끌었다. 전시관 주변에는 태양계의 행성들을 조각해둔 유성공원이 있었는데, 명왕성도 어엿히 태양계 행성의 일원으로 함께 하고 있었다.[25] 신기전의 복원에 삼성그룹의 지원이 있었는데, 우주탐험관 건립을 비롯한 삼성그룹의 엑스포 지원사업의 일환이었다. 거기에 미래형 주거공간인 '휴먼테크'의 장에서는 이불과 시트 없이도 따뜻한 침실이 있었다.
물론 출구에는 삼성전자답게 HD TV라든가가 전시되어 있었다. 많은 관람객이 몰려들었지만[26] 전시관 내부를 효과적으로 배치하여 인원의 흐름을 조절하는 등 나름대로 운영을 잘했다는 평가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크노피아관과 함께 쌍벽을 이루던 곳이라 한창때던 8월달엔 4-5시간씩은 줄을 서서 봐야 했다. 당시 우주탐험관의 선장 로봇 '스타파인더'의 목소리는 성우 장정진이었다.
그러나 엑스포 이후에도 테크노피아관 등처럼 한동안 같은 영상물을 우려먹기 식으로 상영하고 시설물 관리가 제대로 안 돼 있는 바람에 관람객들의 원성이 잦았다고 한다. 2003년경 폐관 이후 철거 이전까지 천장 구조물이 떨어지고 녹이 슬고 지하에 물이 차는 등 거의 흉가를 방불케 했다.
옆에 있던 자동차관도 같이 폐관하자 자동차관 전시물로 쓰던 차를 우주탐험관 건물 안에 배치했다. 거의 창고 수준. 대표적으로 세피아 EV, 시발자동차[27] , 세피아 컨버터블, 스포티지 랠리카 등이 알려져있다.
5.9. 이매지네이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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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경그룹(現 SK그룹)이 제공하였다. 대한항공관의 메인쇼와 비슷하지만 이음새 없는 스크린(...)의 슬라이드쇼가 프리쇼로 제공되었고, 메인쇼로는 제트추진연구소의 협조로 만들어진 옴니맥스 애니메이션 '''행성으로의 여행'''이 상영되었다. 선물코너에서는 SKC가 배급하던 패키지 게임을 판매했다.
폐관되기 전까지는 '''돔 영상관'''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한국 최초이자 유일한 돔 아이맥스관이었다. '''행성으로의 여행'''이 그대로 상영되고 있었다. [28]
5.10. 인간과 과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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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그룹((주)대우)이 제공하였다. 인간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입체 아이맥스 영화를 상영하였으며 대우전자가 개발한 HDTV 등 당대 최첨단 가전제품들을 전시했다. 1999년 대우그룹이 부도난 후 휴관되었으며, 2018년이 돼서야 철거되었다.
5.11. 자기부상열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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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현대정공[29] )이 제공하였다. 현대정공(현재의 현대로템)이 개발한 자기부상열차를 타고 약 3㎞에 이르는 궤도를 이동하는 것이었다. 자기부상열차가 40인승이었던 관계로 많은 관람객을 수용할 수는 없었지만, 순수 국내 기술로 개발된 자기부상열차가 한국의 여름 날씨(장마 등 호우)에도 불구하고 무사고 운행하였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전시관 안에는 현대자동차가 개발한 컨셉트카 HCD-2(은색)가 전시되어 있었다.
엑스포 폐막 이후 관리비 부담을 이유로 한동안 운행을 중단하였으나 2011년 신형 열차로 교체되어 국립중앙과학관표를 소지한 예약자에 한해 탑승할 수 있었으며, 엑스포 과학공원이 철거됨과 동시에 엑스포역이 폐쇄되자 거리가 단축되어 현재는 국립중앙과학관에서만 탑승할 수 있다... 국립중앙과학관 자기부상열차 이용 안내
5.12. 자동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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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자동차가 제공하였다. 시뮬레이터 시설을 통해 서울 하늘을 시속 400㎞로 날아다니는 미래의 자동차 '멘트로스'를 체험할 수 있었다. 가장 특징적인 전시물은 로봇 카였는데 세피아가 로봇으로 변신하면서 '''지구는 후손으로부터 여러분들이 빌린 것입니다'''라고 설 명을 했다. 변신이라고 해서 오늘날의 트랜스포머 같은 것을 생각하면 심히 곤란하다. 엑스포 이후에도 영구적으로 운영될 예정으로 건설되었으나 모기업인 기아그룹이 1997년에 부도나면서 한동안 닫혔다가 2004년경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대전교통문화연수원이 들어섰다. 자동차관과 별도로 서문에서 관람객들 대상으로 자동차 정비 서비스도 제공하였다.
그러나 자동차관 철거 이후 전시했던 차량들은 우주탐험관 창고에 방치해 놓았다가 우주탐험관 철거 이후 소재관에 있었던 상태 좋은 프라이드와 함께 엑스포공원 구석에 방치되어 있으며, 해당 사실은 2015년 한 보배드림 유저가 최초로 폭로했다. 현대기아차에 따르면 대전마케팅공사와 협의하여 기증한 것을 회수하여 사내에서 별도로 보존할 것이라 하였다. 2016년 현재 차량들은 '''스포티지 생산 2호차 제외하고''' 전부 회수하고 없다. 반면 같이 전시된 봉고나인, 삼륜차 T-2000, 브리사, 포텐샤는 대전교통문화연수원으로 옮겨졌다.[30][31]
5.13. 자연생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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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담배인삼공사(現 KT&G)가 제공하였다. 관람객들은 '''동물'''에 관한 담은 영상물을 상영하는 극장과 '''식물'''에 관한 담은 영상물을 상영하는 극장으로 각각 나누어서 입장하였는데, 각각의 영화가 끝나면 전동장치에 의해 객석이 반 바퀴 돌아서 두 극장의 객석이 하나의 극장에서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하나의 극장에서는 '''생명'''에 관한 주제를 담은 영상물을 대형 스크린에서 관람하게 된다.
5.14. 자원활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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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공자원부에서 제공하였다. 대전엑스포의 주무부서인 상공자원부에서 직접 납시어 건립한 전시관으로, 타 전시관의 모범이 되기 위한 규모(그래봤자 정보통신관의 1/2 정도)와 전시물을 갖추었다. 가장 인상적인 전시물은 태양에너지가 지구에 도달하여 풍력 등 각종 에너지가 되는 것을 형상화한 로봇 조형물인 '''에너지 코스모스'''이다. 수력을 상징하는 부분에서는 물도 쏟아지고, 태양 부분은 빙빙 돌고, 태양전지판이 들렸다 내려갔다 했다.
에너지 절약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기기라든가, 에너지 퀴즈 등 풍부한 전시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특히 헨들을 돌리거나 페달을 밟는 인력 발전기 종류가 이름만 달리한 채 곳곳에 산재해 있었는데, 에너지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몸소 체험해 볼 수 있었다.
엑스포 재창조 사업 이전에는 에너지관리공단으로 이관되어, '''에너지관'''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무료로 개방되고 있었다. 전시물들도 대체로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나 위에서 언급한 에너지 코스모스가 빙빙 돌거나 물을 쏟아내거나 하지는 않는다. 자전거 페달을 밟아서 만든 전기로 철도모형을 움직이는 전시물이 있는데, 매우 힘들다. 기초과학연구원 공사로 인해 철거되었다.
5.15. 재생조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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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재활용"이라는 엑스포의 부제를 살린 전시관. 4만여 개의 폐유리병으로 만든 지름 30m, 높이 15m의 원뿔형 구조물로, 내부에는 백남준 등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미술작품을 전시했다.
5.16. 전기에너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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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력공사가 제공했고, 시공은 계룡건설이 맡았다. 3D 아이맥스 영화가 상영되었고, 전시물들도 매우 충실하게 갖추어져 있었다.[32][33] 전시물만으로도 관람객이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던 관계로 상영물을 보지 않을 관객들은 길게 대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유연성있는 운영을 하였다.
공기업인데다 규모도 있는 만큼 폐관되기 전까지 비교적 꾸준히 관리되어 왔으며 이름도 예전 그대로 유지되어 왔었다. 덕분에 최근 중앙정부가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인 원전 수출 사업에 대한 전시물도 업데이트되어 있고, 내부 전시관에 흐르도록 되어 있는 물이 아직도 흐르고 있다. 그리고, 엑스포가 폐회된지 15년이 지난 2008년, 300만번째 관람객 기념행사까지 열었다(!). 다만 관람객 수가 적은 것은 사실이고, 행사가 끝난지 오래 된 것도 사실이라 시설이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지는 않아 낡은 느낌이 있다. 2011년 8월, 영상관에서는 국내 창작 3D 애니메이션인 '''SEED LIGHT'''를 3D 아이맥스 영화로 상영하고 있었다. 내용은 에너지와 관련이 있다면 있지만.
현재에도 철거되지 않고 남아있으며 미래에니지움이라는 이름의 전시관으로 리모델링 되었으며 한국에너지공단 대전충남지역본부 사옥 겸 홍보관으로 사용중이다.
5.17. 정보통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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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기통신공사가 공기업[34] 의 본때(!)를 보여주고자 만든 당시 최대의 전시관.
두 개의 관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주된 전시관은 정보통신주제관, 보조 전시관으로서 첨단통신전시관이 있었는데 첨단통신전시관에는 당시로서는 정보통신의 최첨단이라 할 수 있는 하이텔(...)의 체험시설이 있었다.
정보통신주제관은 총길이 405m에 이르는 순환궤도에 설치된 155대의 궤도차가 무한루프식으로 돌아가고, 관람객들은 궤도차를 타고 통신발전의 역사를 관람하게 되어있었다. 궤도차는 무한히 계속 들어오고, 느리나마 끊김 없이 연속적으로 관람객을 소화하는 구조로 최단기간 100만 관객 돌파는 물론 362만명의 관람객을 기록하여 최다관람 전시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멀티미디어 극장에서는 여러 개의 슬라이드와 영사기를 이용해 여러 개의 화면으로 나누어 상영했다.
당시 한국전기통신공사가 공기업이었던지라 폐막 후에도 전시관의 운영을 지원해왔으나 IMF 외환위기 사태 이후 적자가 누적된 채 시설물 리모델링이 안 됐고, 2000년에 폐쇄가 검토되기도 했으며 문을 닫는 날도 있었다. 결국 2010년 엑스포 과학공원 재창조 사업의 일환으로 철거되고 잔디가 심어져 야영장 부지가 되었다가, 그마저도 재창조 사업 때 사라졌다. 그 부지에 게시된 대전시 측의 철거의 변을 들어보자면, 이미 당시 정보통신관에 설치된 전시물들은 현실이 되어버렸기 때문에(...)라고 하다. 사실, 카카오톡은커녕 올레톡 같은 것도 전시되어 있지 않은데다, 하이텔은 인터넷의 등장으로 얼마 안 가서 과거가 되어 버렸고, 그나마 하이텔 서비스의 명맥을 잇던 파란 마저도 사라져버렸으니...
5.18. 정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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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총리비서실이 주관하여 중앙정부가 제공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의 전시관으로서 대전엑스포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주제관'''이었다. 길다란 복도 양편에 전시되어 있는 전시물들은 대한민국이 폐허더미 속에서 당시의 번영을 이루기까지의 과정과 미래의 비전을 관람객에게 보여주었다.
후에는 '''첨단과학관'''으로 바뀌었으며, 정부출연 연구기관들의 홍보관으로서 각 연구기관의 연구성과나 소개 내용 등이 전시되어 있다가, 2015년 10월에 폐관되었다. 다만 철거되지는 않았으며 2019년 지방 e스포츠 상설경기장 건립사업을 유치함에 따라 500석 규모의 상설 e스포츠 경기장으로 리모델링할 예정이다. 개관 이후 2019년 대통령배 아마추어 e스포츠 대회 결선을 치를 계획이다. #
5.19. 조폐문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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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조폐공사가 운영했던 화폐전문전시관으로 당시 존재해 있을 때는 500원, 100원, 50원 순의 동전들을 쌓은 모습을 본땄던 전시관이었다. 국제전시장 구역에 있었기 때문에 박람회 폐막 후 철거되었다.
5.20. 주거환경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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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제공한 주택 및 주거관련 전시관이며 전시장 모습도 새둥지에 있는 알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주거공간임을 알리기도 하였다. 국제전시장 구역에 있었기 때문에 박람회 폐막 후 철거되었다.
5.21. 지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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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그룹이 제공하였다. 입구와 실내를 정글처럼 꾸며놓은 것이 인상적. 새 소리도 들리고 벼락도 치고 그랬다. 당시 세계 최대 크기의 아이맥스 영화 '''초록 약속'''이 상영되었는데, 쌍용그룹에서는 엑스포 기간이 끝난 뒤 이 영상물을 세계 각지에 판매해서 수익을 얻을 계획이었다. 2000년에 모기업 쌍용양회가 일본 다이헤이요시멘트에 지분매각되면서 쌍용그룹이 사실상 해체되었고, 내부 장비의 임대기간이 지나버려서 영화를 상영하거나 할 수는 없어서 행사가 있을 때만 개방하고 나머지 기간에는 휴관하다가, 2015년 10월 기준으로 철거되었다.
5.22. 테크노피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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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금성그룹이 제공하였다. 우주탐험관이나 자동차관과 마찬가지로 체험형 영상물(테크노피아로의 여행)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500년 후의 평화로운 미래인 테크노피아를 관찰하다보니 느닷없이 악의 세력이 그곳을 침입하기에 쌍둥이 비행체 트윈스호(!)에 탑승하고 적을 무찌르는 내용이다. 그 외에도 사물놀이 로봇이나 기술의 상징 금성사(...)답게 HD TV, 반도체 속 한반도, 가상현실 체험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프리쇼 구역에는 PC의 내부를 표현한 오브제들이 있었는데, GS80586(!) 이라고 씌여 있는 칩도 있었다. 지못미 LG반도체...
당시 삼성그룹의 우주탐험관과 함께 가장 인기있는[35] 전시관 중 하나였는데, 지금으로 치면 4DX 어트랙션이다. 한국에서 4DX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른 게 이보다 15년 후인 2008년 아바타가 상영되면서부터니 그 당시에는 최첨단 유흥시설이었던 셈. 다만 유원지 어트랙션 타입이었던 삼성 우주탐험관에 비해 테크노피아관은 현재의 극장형 4DX에 가까운 형태였는지라 상대적으로 1회 수용인원이 적으면서도[36] , 한빛탑 근처의 바로 눈에 띄는 곳에 있는 관계로 관람객들이 붐벼 테크노피아관의 대기는 악명이 높았다. 시골의 할머니도 알 정도였고, '''반드시 테크노피아관은 보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진 관람객이 많았다. 덕분에 개장 초기인 8월달엔 오후 1시~2시 정도에 행사요원이 와서 줄을 짤랐다. 더 이상 줄 서봤자 폐장시간 전까지 못보니 포기하고 다른 거 보러 가라고(...).[37] 우주탐험관은 그래도 근성으로 줄을 서면 1회 수용인원이 좀 더 많기 때문에 한창 때에도 5시간 정도(...) 기다리면 관람할 수 있었지만... 그저 안습. 작지만 알찼던 전시관. 물론 우주탐험관 등에 비해서 작다는 것이지 실제로 보면 매우 크다!
폐관 전까지는 '''시뮬레이션관'''으로 운영되었으며, 영상물은 가끔씩 교체되어 왔다. 물론 테크노피아와는 별 관계가 없는 영상물들이다.
"테크노피아로의 여행" 전체영상[38]
5.23. 한국IBM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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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IBM이 제공하였다. 국제전시구역 내 전시관으로서 폐막 직후 철거되었다. 컴퓨터에 관한 내용보다는 자연보호에 관한 내용이 주였다. 참가형 전시 공간인 '싱크 파티'에서는 터치스크린 소프트웨어 <갈락티파스>, 교육용 소프트웨어 <재미있는 가나다라>와 같은 당대 미발표 소프트웨어들을 체험해 볼 수 있었다.
VIP들에게는 동서게임채널 패키지 게임 할인권을 제공하기도 하였고, 전시관 내부에 동서게임채널이 배급하는 게임(브레인 박사의 성)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구역이 있었다.
5.24. 한국후지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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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업인 후지쯔의 한국법인 한국후지쯔가 제공한 전시관. 당시 후지쯔가 개발한 뉴로 컴퓨터를 이용한 뉴로 저글러라는 로봇이 저글링을 하는 모습을 본 다음, 3D 입체영화를 관람하고 나오게 되어 있었다. 국제전시장 구역에 있었던 관계로 폐막 후에 철거되었다.
5.25. 대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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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직할시(현 대전광역시)가 세운 전시관. 이곳에서는 대전의 역사와 미래를 알려주는 곳이었다. 그러나 엑스포 당시 다른 전시관에 비하면 공기 취급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건물 외형은 동부네거리에 있었던 대전탑[39] 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을 가지고 있으며, 시공은 계룡건설이 맡았다.
이후 자동차관과 동시에 철거되었다.
5.26. 한빛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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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그룹[40] 이 제공하였다. 경주 첨성대의 모양을 기초로 한 엑스포의 중심건물로서 93m 높이. 사실 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뾰족 고깔에 도넛을 끼워둔 모양(...)으로 첨성대와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외벽을 잘 보면 첨성대의 계단식 회색 벽돌을 모방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별 거 없지만, 당시에는 미래를 향하는 상징 같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투명 강화유리 바닥으로 된 고공전망대 같은 건 그 당시엔 정말 희귀한 경험이기도 했고...[41] 이런 상징성 때문에 은근히 인기를 누렸던 곳 중 하나였다. 원래는 60m 높이의 건축물이 될 예정이었으나, 지역에서는 최소 200m(!)를 요구하였고 그 절충안이 93m. 디자인과 관련해서도 말이 있었는데, '''감히 백제의 땅인 대전에 신라 유물인 첨성대라니!''' 하는 반대의견이 있었으나 조직위원장의 설득으로 어찌어찌 해결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지금은 명실공히 대전의 상징. 전망대에 올라갈 때 여전히 입장료를 받으며, 2020년 6월 현재 성인 기준 2,500원이다.
'엑스포 과학공원 특구개발계획'에 따라 2014년 3월 말부터 기존의 전시관들이 대부분 철거가 진행 중이다. # 2016년 7월, 꿈돌이랜드의 시설물 및 과학공원의 시설물은 모두 철거되었고, 테크노피아관은 철거가 진행 중이었으며, 카페테리아(중앙대식당)는 덩그러니 남아 있지만 철거될 것처럼 보였고, 한빛탑 및 첨단과학관, 통일관만 남아 있었다. 과학공원 부지에는 스튜디오 큐브가 들어서있고(대규모 세트 촬영장, 건설당시 'HD 드라마타운'이라는 가칭으로 통용됨)과 향후 기초과학연구원이 들어설 예정이다.
6. 대전 엑스포 참가국 및 국제전시관(1993년 철거 및 철수)
대전 엑스포에는 1993년 개최 당시 주최국 대한민국을 포함하여 108개국이 참가하였고 이외 UN, IOC 등의 국제기구가 참가하였다.
대전 엑스포 국제관은 1993년 8월 7일 공식 개장하여 엑스포 폐막일인 11월 7일까지 운영했고 행사가 끝난 후에는 전시관이 모두 철거 및 철수하였으며 전시물들도 모두 본국으로 보내졌다.
국가별로 독립된 전시관이 있으며 이 중 일부 국가는 대륙별 공동관을 통해 공동 참가를 했다.
6.1. 참가국 및 전시출품국(1993년 당시 기준, 가나다 순)
6.1.1. 독립 전시관
- 나이지리아
- 네덜란드
- 뉴질랜드
- 덴마크
- 독일
- 러시아: 우주정거장 '미르' 모형제작 등은 고합그룹이 후원했다.
- 루마니아
- 말레이시아
- 모로코
- 몽골
- 미국
- 바티칸 교황청
- 베트남
- 벨기에
- 불가리아
- 브라질
- 브루나이
- 사우디아라비아
- 스리랑카
- 스웨덴
- 스위스
- 스페인
- 슬로바키아
- 영국
- 오스트리아
- 이란
- 이집트
- 이탈리아
- 인도
- 인도네시아
- 일본
- 자메이카
- 중국
- 체코
- 칠레
- 캐나다
- 콜롬비아
- 태국
- 파나마
- 파키스탄
- 페루
- 포르투갈
- 폴란드
- 프랑스
- 핀란드
- 헝가리
- 호주
6.1.2. 아시아 공동관
6.1.3. 아프리카 공동관
6.1.4. 중동 공동관
6.1.5. 중남미 공동관
6.1.6. 카리브 공동관
6.1.7. 남태평양 공동관
6.1.8. 독립국가연합 공동관
6.1.9. 발트 공동관
6.1.10. 국제기구
7. 그 외
- 엑스포 개최 시기를 포함한 1993년 여름은 1980년과 함께 한반도 기상관측 역사상 가장 서늘했던 여름으로 기억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여름에 이상 저온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게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그리고 이듬해에는 그야말로 열지옥이 펼쳐졌다.
- 당시 상설전시구역은 월트 디즈니 월드의 EPCOT Center를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체험형 영상물들도 그 업그레이드형들이 많았고, 각 대기업들이 경쟁심에 서로 첨단 어트랙션을 도입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EPCOT Center보다도 더 많은 첨단기술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 각 전시관의 내용물에 광고기획사들이 깊이 관여하였다. 이전에는 그와 같은 전시관을 만들어 본 적이 없었기에, 각 전시관 건설을 맡게 된 기업들은 결국 광고기획사를 찾아갔던 것이다. 대전엑스포를 통해 축적된 이들의 경험치는 백화점 기타 상점의 상품 디스플레이의 고급화에 기여하였다. 즉, 오늘날 여러 상점들의 내부 인터리어/디스플레이는 대전 엑스포의 결과물이라는 것.
- 당시 연예계에 첫 발을 들였던 씨름선수 출신 강호동이 대전 엑스포 개막일 다음날인 1993년 8월 8일 행사장 내 놀이마당에서 8시간 동안 악수 많이 하기 부문으로 기네스북 기록에 도전하기도 했다. 당시 엑스포 행사장의 하루 입장객이 20만 명일 정도로 인파가 엄청나서 기록 도전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데다, 중간 휴식없이 거의 1초에 한 번씩 악수를 해야 기록 경신이 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체력도 요구되었는데, 강호동이 이미 5회씩이나 천하장사로 등극하는 등 씨름선수로서 체력은 어느 정도 검증이 되었기 때문에 기네스북 기록 경신이 예측되었다. 결국 강호동은 무사히 제한시간 8시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28233명과 악수하여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기사 링크
- 1993년 8월 10일에 한총련 국토순례단 소속 대학생 1백여명이 김영삼 정부에 남북기본합의서를 이행토록 하라고 촉구하는 대국민 서명을 벌이기 위해 서문과 남문을 통해 행사장으로 들어가려다 경찰에 의해 57명이 연행되었다. 참고.
- 엑스포전시장 내부를 돌아다닌 전기자동차는 한국전기연구소가 개발한 6인승 승합차 5대와, 기아자동차가 시설 참가한 기아 프라이드(물론 전기로 움직인다.) 4대, 기아 베스타(이것도 전기!)[43] 6인승 오픈카 3대였다.
- 한빛탑을 포함하여 볼거리가 풍부했던 몇몇 전시관들은 엑스포 당시에 관람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개장 후 30분만 늦게 가도 2시간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었다. 우주탐험관 같이 인기가 매우 좋았던 체험관의 경우 7시간 이상을 기다리기도 했다.
- 각 전시관의 어트랙션들의 경우 외국의 기술을 수입해 온 것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다만, 그렇게 해서라도 국민 교육의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건설 경기가 활성화되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일단 엑스포라는 행사 자체가 한국 자랑이 아니라 세계의 문명을 전시한다는 취지로 개최되는 것이므로 처음부터 번지수 잘못 잡은 비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 각 전시관을 건설하는 데 기업별로 200억~300억을 투자하였다. 폐막 후 신문 기사에 의하면 삼성그룹의 경우 우주탐험관 방문자 1인당 3만 원의 투자(라고 쓰고 손실이라고 읽는다.)를 한 셈이라고 한다.
- 전시관을 따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SK텔레콤의 전신인 한국이동통신도 버스 한 대에 전시품을 채워서 참가하였다. 사실 이 때의 한국이동통신은 한국통신(현 KT)의 자회사였다. 모회사의 전시관이 이미 있었고 그 전시관에는 이동통신과 관련된 것도 있었으니 따로 전시관을 낼 필요까지는 없었던 듯하다.
- 이때는 경부고속철도 차량 최종 선정 직전이었기 때문에 최종 후보였던 TGV와 ICE의 홍보활동이 치열했다. 대전엑스포도 예외는 아니었고, 프랑스관에 가면 TGV의 목업과 홍보전시물을, 독일관에 가면 ICE의 목업과 홍보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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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엑스포 기간에 추석이 끼는 바람에 귀성길 + 엑스포 관람 차량이 겹쳐서 역대 최악의 교통 체증이 발생했다. 당시 서울-대전이 무려 17시간이 소요되었다. 오전 10시에 서울에서 출발하면 다음날 새벽 3시에 대전에 도착하는 것. 이후에 고속도로가 많이 생기고, 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이런 모습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 엄청난 숫자의 엑스포 도우미를 선발하여 전시장 곳곳에 배치했었다. 비록 의미는 다소 변질되었으나, 오늘날 흔히 쓰는 도우미라는 단어의 시초가 이것이다. 도우미라는 단어로 인해 드라마 수상한 삼형제에서 둘째며느리의 배역명 도우미(김희정분)이 탄생했다. 배우 채시라가 명예 도우미로 대전 엑스포 홍보대사로 활약했다. 도우미 선발기준은 키 160cm 이상, 나이 만 18세 이상(1975년 이전 출생자) ~ 만 30세 이하(1963년 이후 출생자)의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한 여성이 해당되며 선발 방식은 스튜어디스에 준한 규정을 적용해 선발했다.
- 행사장에서 북동쪽으로 약 3~4km 떨어져있는 전민동에 '엑스포타운'이라는 아파트 단지를 만들어 엑스포 당시 행사요원 숙소 겸 국내외 대전 엑스포 방문객의 숙박시설로 쓰였다. 또한 엑스포타운은 '첨단 아파트'[44] 라고 내세웠던 대전 엑스포 출품작이다. 엑스포타운은 외국 기업이 설계하고, 국내 유명 건설사(대우(대우건설), 롯데건설, 삼성종합건설(현 삼성물산 건설부문), 선경건설(현 SK건설))들이 시공하였다. 엑스포가 끝난 이후에는 1994년 2월에 '엑스포아파트'라는 이름으로 미리 분양을 받아둔 일반인들이 입주를 시작하여 엑스포타운은 현재 평범한 아파트 단지이다.
- 당시의 고속도로는 톨게이트 진입시 자신의 목적 톨게이트를 직접 말하여 표를 받는 시스템이였다. 엑스포 당시 톨게이트가 신설되어 각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대전 엑스포 한 장 주세요~" 하면 대전 엑스포 톨게이트 티켓을 검표원이 직접 주었다. 이후에는 통행권으로 바뀌었고, 하이패스가 도입됨에 따라 요금소를 무정차하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
- 전시장을 도는 모노레일과 곤돌라가 있었다. 곤돌라는 위에 있는 사진들에서도 보이는 대로이고, 모노레일은 전시장을 빙 도는 순환선이었다. 역들 중 은하수역이 세계관 구역에 있었는데, 폐막 이후에는 다 철수한 세계관 구역만 휑뎅그렁하니 빈땅이어서 은하수역에 정차하면 꽤 을씨년스러웠다. 그러다가 적자로 운행이 중지되어 2000년 경에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 서울 청계천 말고도 대전 엑스포에도 독일에서 기증한 베를린 장벽 장벽 조각이 있었는데[45] 2018년 서울 베를린 장벽 훼손 사건에 파묻혔을 뿐이지 여기 베를린 장벽 조각도 무개념한 사람들의 낙서로 인한 훼손이 심하다. 결국 해당 조각은 설계되었다.
- 당시 일반 입장권이 7000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싸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당시 과자 가격이 100원대인 것을 생각하면 비싼 편이었다. 이 당시 식당에서 파는 백반 1인분이 1500원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2020년 현재 물가로 환산하자면 3만원쯤 된다.
- 개최기간 동안 KBS에서 소출력 방송인 '엑스포 FM 방송'을 운영했었다. 주파수 90.5MHz로 방송되었으며 하루 15시간 방송되어 KBS 2FM 프로그램 8시간 자체프로그램 7시간을 편성했다. 엑스포 FM 방송은 엑스포가 폐막된 뒤 폐국되었으며 이후 이 주파수는 대전국악방송이 쓰고 있다.
8. 축제 이후
엑스포 폐회 이후에도 IMF 외환위기 이전까지는 휴가철 때 종종 찾는 사람들이 꽤 있었으나 IMF 외환위기 이후로 거의 망했다. 국제전시장 재개발 계획도 지금과는 다른 형태가 되거나 지지부진하고, 간간이 몇 안되는 방문자가 있지만 대부분이 와서는 실망하는게 다반사. 화려했던 1993년 당시를 기억하던 사람이라면 폐허에 가까운 지금 모습을 보고 더더욱 슬퍼진다.
그야 2016년이 넘어간 시점으로는 '''20년'''이 넘은 낡은 시설이니... 현재는 아예 폐쇄하고 철거한 시설도 몇 된다. 그리고 테크노피아관의 프리쇼 구역으로 가면 전시 당시 쓰였던 몇몇 오브제나 전시시설(거대한 키보드 등)이 수년째(?) 짱박혀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래도 과학공원 안의 랜드마크인 한빛탑은 전망대 기능으로서 근근히 돌아가는 모양. 약간의 입장료를 낸 뒤 엘리베이터 위의 전망대로 올라갈 수 있다.
개최 당시 한빛탑을 중심으로 동쪽의 국제전시구역만은 엑스포 폐막 후 철거하고 상설전시구역의 전시관들은 정비를 거친 후 계속하여 운영함으로서 국민 과학교육의 장으로 사용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역대 엑스포의 경우 폐막 후 대부분의 시설물을 철거하는 것이 보통이었기에, 주요 전시관들을 모두 영구시설물로 건축하는 이와 같은 시도는 나름대로 참신한 시도였다.[46] 이에 따라 주무부처인 상공자원부는 행사 폐회 후 상설전시구역 위탁운영권을 대교그룹 계열 (주)엑스피아월드(현 대교D&S)에 넘겼고, 관리기관 '대전엑스포기념재단'도 신설했다.
구 국제전시구역은 원래 재단 측이 국제교류 센터로 개발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민간 상업시설로 바꾸고 한국토지공사에 파는 바람에 결국 대전컨벤션센터와 대전MBC, TJB, 골프존 조미마루, 오피스텔, 스마트시티, 초등학교 분교장 등이 입지하여 엑스포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조직위 추산 1,400만명의 관람객이 엑스포 기간동안 다녀갔으니, 대한민국 인구의 1/3은 이미 이 전시장들을 관람해버렸고 엑스포 폐회에 따라 당연히 엑스포의 열기는 식어갈 수 밖에 없다. 이에 불구하고 수익성을 가지려면 전시물의 지속적인 업데이트가 필요하지만, 엑스포 회장의 전시물들은 한통을 비롯해 한전, 주공, 조폐공, 코트라 등 공기업은 물론 삼성이나 대우, 현대 등의 당시 유수의 기업들이 당시 돈으로 200~300억원을 투자하여 전시관 하나씩을 겨우 지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전체를 중견재벌 대교그룹이 민간기업임에도 재단의 규제만 받은 채[47] 위탁운영하게 되었으니 애로사항이 꽃피게 되었다. 물론 엑스피아월드 측도 많은 노력을 했다. 번지점프 시설을 국내 최초로 공원 내에 설치한다든가...
그러나 엑스포 과학공원의 관리를 맡아야 할 대전엑스포기념재단이 공원 운영과 상관없는 인사들을 채용하며 이들에게 봉급을 거하게 주는가 하면, 주무부처인 통상산업부가 공원 관리와 재단 감독에 신경을 안 쓴 탓에 전시관이건 각종 부대시설이건 서서히 낙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KT(정보통신관)나 한전(전기에너지관), 정부부처(정부관, 자원활용관)는 그 특성상 지속적으로 시설 유지에 노력을 기울여왔지만, 이미 200~300억의 비용을 지출한 민간기업들에게... 그것도 외환 위기 사태로 공적자금으로 연명하거나 공중분해된 그들로부터 전시관 유지 관리와 관련한 지원을 기대하기는 요원한 노릇이었고, 이 때문인지 엑스포 시절 상영물/전시물을 사골마냥 우려먹거나 문을 닫는 전시관들도 점차 늘었다.
어쨌든 격감하는 관람객 수에 1997년 외환위기 사태가 겹쳐 경영은 더욱 어려워지고 노사분규까지 발생한 끝에, 결국 엑스피아월드는 엑스포 과학공원의 운영권을 반납하였고, 엑스포 과학공원의 소유권은 1999년 1월 대전광역시청으로 이전되었고 대전엑스포기념재단은 해체되었다.
대전광역시청에서는 엑스포과학공원을 관리하기 위해 1999년 9월 지방공사 엑스포과학공원을 법인으로 설립하게 되는데... '''대전의 보물단지'''[48] 로서 대전광역시청이 인수하긴 했지만, 중앙정부에 비해 재정상태가 상대적으로 열악할 수밖에 없던 대전으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어서 1년에 50여억원의 적자를 내면서 결국 2008년 행정안전부의 청산명령을 받기에 이른다.
안타까운 사실은 대교같은 중견기업이 아닌 삼성에버랜드와 호텔롯데 월드사업부(롯데월드) 같은 대기업 계열사라든가, 서울랜드 같은 테마파크 운영경험이 있는 회사에서 개발을 모색했으면 어쨌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대교그룹 계열 엑스피아월드에 위탁한 후 그냥 그 시설 그대로 운영을 했으니 잘 될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일개 기업에 책임을 묻기 어려운 게, 위탁운영사에 쓸데없는 규제를 걸며 운영에 일일이 간섭한 대전엑스포기념재단과 이 재단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산업자원부도 똑같이 책임이 있다.
엑스포 과학공원이 청산명령을 받기는 했으나, 해당 공사는 대전마케팅공사로서 계승되었고 2020년 7월 현재 엑스포과학공원은 계속하여 운영되고 있다. 다만, 엑스포 재창조사업이라는 이름의 구조조정으로 인해 현재 운영되고 있는 전시관은 다음과 같다.
- 엑스포기념관
- 대전통일관
- 첨단과학관(구 정부관,현 대전 드림 아레나)
- 전기에너지관(현 미래에너지움)
- 한빛탑
- 이매지네이션관(현 돔영상관)
- 테크노피아관(현 시뮬레이션관)
- 우주탐험관
- 자원활용관(현 에너지관)
- 인간과 과학관
- 지구관
- 자동차관
- 바디월드
- 꿈돌이토방
- 꿈돌이동산
- (제주도로 이전.정석항공관으로 운영 중이다.)
- 자연생명관
- 정보통신관
- 재생조형관
- 자기부상열차관
- 번영관(현 대전무역전시관)
- 음악분수,한빛광장
- 소재관
- 대전관
- 꿈돌이동산 사계절썰매장/수영장
- 정문광장 지구본 조형물
2013년 6월에는 엑스포 부지에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사업의 핵심인 기초과학연구원 및 부속 중이온가속기 건립이 결정되었다. 관련 기사 롯데월드는 토지 형질 변경에 막혀 진행이 흐지부지되는 듯. 재개발 계획중 과학산업진흥시설외의 유락시설은 없나 싶었는데, 스튜디오 큐브는 꺾이지 않은채로 재개발 부지에 세워지는 걸로 확정되었다. 그런데 2015년 1월 공사과정에서 조선시대 유물이 출토되어서 건설에 차질이 생겼으나 유적의 중요성이 높지 않다는 판단아래 공사가 속개되었다.
어찌되었든 최종적으로 영구 보존하기로 한 엑스포 당시의 건물은 다음과 같다.
- 한빛탑
- 첨단과학관(옛 정부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진행하는 지방 e스포츠 상설경기장 건립사업에 활용)
- 전기에너지관(한국에너지공단 대전충남지역본부 사옥 겸 홍보관으로 활용)
- 미래항공관(제주 대한항공 정석비행장으로 해체 이전)
이제 한빛탑 정도만 빼면 한 시대로 저물어간 엑스포장이지만, 대전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이다보니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SBS 개표방송에서 대전광역시의 랜드마크로 선정되어 방영되었다. 2012 여수 엑스포는 전라남도의 랜드마크로 선정.
엑스포 남문주차장의 경우 200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충남, 대전 지역의 전의경 훈련에 사용되기도 했다. 흔히 볼 수 없는 크고 아름다운 주차장 부지에서 주민들의 민원걱정 없이 훈련할 수 있는 곳은 엑스포밖에 없었다고...(그만큼 오는 사람이 드물었다) 근데 대전에는 기동중대 1개, 방범순찰대 5곳뿐이라(기동중대 2개, 방범대 1개가 더있지만 대전이 아닌 기타 지역에 배치돼 있어) 타 중대는 진압검열 때 빼고는 거의 못 온다... 크고 넓고 인적이 드물어 훈련에는 최적의 장소였지만 날이 더워질수록 엄청나게 힘들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넓은 부지가 모두 아스팔트로 포장되어있어 여름에는 극도로 뜨거워지고 그늘 자체가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설을 밀어버리고 만든 국내 최대의 영화/드라마 세트장인 스튜디오 큐브가 개장되었다. 첫 대관 타자는 1987. 이후 블랙 등 연이어 이 시설에서 촬영할 작품들이 이어지면서 스튜디오 큐브가 영상업계에서 어떤 반응을 끌어모을지 기대할수 있게 되었다. 영화 세트장인만큼 일반인들에게는 통상 개방을 하지 않는다고 하며, 견학 예약을 하면 촬영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만 관람할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스튜디오 큐브는 세운지 6개월만에 물이 새서 방수공사를 했다거나[49] 운영이 지역친화적이지 않아서 빈축을 산 모양. TJB 보도
9. 관련 문서
- 둔산신도시
- 2012 여수 엑스포
- 스튜디오 큐브
- 꿈돌이
- 꿈돌이랜드
[1] 지금은 엑스포다리가 자전거, 보행자 전용 교량이지만 과거에는 차량 통행이 가능했다.[2] 1993년 당시 대전의 영문표기는 Taejŏn이었지만, 이 행사의 공식 영문명칭에서는 반달표기가 생략되었다. 이후 2000년 7월 로마자표기법이 바뀌어 오늘날과 같은 Daejeon이 된 것. 여기에서는 공식명칭을 따라 Taejon으로 적는다.[3] 하지만 후술하듯 개발도상국에서 최초로 열린 공인 엑스포이며, 서울 올림픽에 이어 대한민국의 발전상과 미래상을 보여주는 자리였기에 새로운 도약이라는 주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4] 한국은 실질적으로 1990년대까지는 개도국 및 신흥국으로 인식이 되었으나 2000년대 이후로는 대개 선진국으로 분류된다. 물론 2020년 현재는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고있다.[5] 첫번째는 1949 포르토프랭스 엑스포이다.[6] 기와집이래봤자, 당시 사진을 보면 오늘날 엑스포에 공동관의 일원으로 참가한 아프리카 소국 같은 느낌이다. 물론 구한말이었던 당시 우리나라의 국력이나 국제적 위상은 지금의 아프리카 소국보다 별반 나을 것이 없었다.[7] 이 당시는 아직 초등학교로 바뀌기 전이었다. 초등학교로 바뀐건 1996년의 일이다.[8] 1981년 생: 초등학교 6학년
1978년 생: 중학교 3학년
1975년 생: 고등학교 3학년[9] 영화배우 소피 마르소가 방한하여 국제관 프랑스 부스에 방문한 뉴스가 보도되기도 했다.[10] 평일 오전 10:00~10:30, 오후 5:00~5:30[11] 아직 멀티터치나 제스처까지는 아니었지만, 당시로서는 터치스크린이라는 기술 자체가 일반인에게 사실상 처음으로 소개되는 것이었기에 그야말로 '''오버 테크놀러지'''였다.[12] 2000년대에 등장한 여러 테마파크에서 개별 어트랙션에 대해 실시하는 예약제도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13] 엑스포에 참가하는 각국은 자신들의 전시관을 자신들의 돈으로 만들어야 한다. 예컨대, 프랑스에서 열리는 엑스포에 한국이 참가한다면 한국관은 한국 정부 예산으로 짓는다. 모든 경기장을 개최국의 예산으로 건설하는 올림픽 등과는 다르다.[14] 1988년 개정 규약에 규정되고, 1996년부터 시행된 인정박람회다. 2012년 대한민국에서 개최된 여수 엑스포는 인정박람회다.[15] 당시 미국 의회가 미국의 대전 엑스포 참가 예산을 배정하는 데에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돈이 없어서 세계박람회기구에서도 탈퇴했다(...).[16] 말은 1시간 내인데 도서지방을 제외해도 경기 김포, 강원 속초, 전남 해남, 부산에서는 2010년대에도 1시간 내 도달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고속도로로 서울~대전까지 걸린 시간이 약 2시간이다.[17] 일정 주제에 한정되는 전문 엑스포가 종합 엑스포보다 규모가 작은 것이 일반적이다. 현재는 5년 주기의 World Expo와 그 사이의 International Expo로 나뉘어진다.[18] 여수 엑스포의 두 배.[19] 행사 폐막 후에는 건물이 철거되었으며 '환상의 오딧세이' 공연은 서울 잠실 롯데월드 어드벤처에서 재개장되었다. 그러나 시설 노후화 및 '''여수엑스포'''의 롯데관 시설 유치를 위해 2012년 11월 11일 운영 종료. 현재 롯데월드의 이 자리에 로티의 열기구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운영중이다.[20] 1993년 당시의 롯데월드는 엄청난 전성기를 누렸다. 150억원을 들여서 수준급 다크라이드 어트렉션인 환타지 드림을 파격적으로 오픈해 대박을 쳤으며 함께 개장한 회전바구니와 고공파도타기(지금은 철거되고 자이로 스핀이 오픈) 등도 엄청 인기가 많았다.[21] 그나마도 북한이 처음 참가한 엑스포는 17년이 지난 2010 상하이 엑스포이다. 북한은 원래부터 엑스포에 잘 참가하지 않는다.[22] 나중에 대전MBC에서 과학다큐멘터리만 만들었다 하면 주야장천 자료화면으로 우려먹었다. 또한 지금 영화관에서 3D화하여 틀어주는 2D영화와는 다르게 초장부터 3D효과를 노리고 만든 것이라 쇳물이 공중에서 눈앞으로 떨어지거나 벌겋게 달궈진 철도 레일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장면에서는 기절하는 관객까지 나올 정도였다.[23]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경기, 강원, 경남, 경북, 전남, 전북, 충남, 충북, 제주. 울산이 경남에서 분리된 시기는 1997년이며, 세종시가 출범한 시기는 2012년이다.[24] 현재의 4DX보다는 유원지에 있는 어트랙션형 영상기기였다.[25] 지금은 엑스포 과학공원 정문으로 이전.[26] 8분마다 240명이 입장했다.[27] 물론 진품은 아니고 모조품[28] 이런 구조물은 은근 많아서 서울랜드에도 있다.[29] 현재는 현대로템과 현대모비스로 분리되어 있으며, 모두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이다.[30] 다만 스포티지의 경우 대전 어느 한 골목에 주차되어 있다. 거기에 시발도 있다. 세피아는 폐차 얘기가 도는데 아직 정확하지 않다.[31] 부식 때문에 폐차되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아직 확실하진 않다.[32] 보통 영상물이 메인쇼인 곳은 전시물이 많이 준비되어 있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부실하지는 않았지만.[33] 이 곳도 기절 관객(...)이 발생한 곳 하나다. 사실 3D효과는 소재관보다 전반적으로 떨어졌지만, 영화 극초반에 등장하는 원시인이 횃불을 관객에게 들이대며 위협하는 장면이 있어서, 입체안경을 쓰고 있으면 불막대기가 자기 얼굴 앞으로 휙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는 연출이 있다.[34] 당시는 공기업이었지만 2002년 민영화와 함께 사명을 KT로 바꾸고, 2009년 자회사인 케이티프리텔(KTF)을 합병하여 오늘날의 KT가 된다.[35] 총 관람객 수가 아니라 대기시간.[36] 1일 7,000명 수용이 가능했고 관람소요시간은 최대 45분. 우주탐험관의 경우 1일 1만 6,000명. 관람소요시간은 30분.[37] 그 짜르는 곳이 테크노피아관 근처가 아닌 까마득한 한빛탑 근처(...)[38] 3D 그래픽은 우리나라가 아니라 당시 미국의 Boss Film에서 만들어 준 것이다. 이 회사는 에일리언 3, 배트맨 리턴즈 등의 영화들의 특수효과를 담당하기도 했다. 해외 90년대 그래픽 데모릴에서도 자주 보이는 걸 보면 어느정도 CG 발전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영상인 듯.[39] 1970년대부터 있었으나, 엑스포가 열리기 전인 1990년에 철거되었다.[40] 당시 계열사 제일화재도 대회 기간 중 'EXPO 보상 서비스센터'를 운영했다.[41] 개장 초기 서울타워에 외부전망대가 있긴 했지만 투명바닥은 아니었다.[42] 당시에는 'EC(유럽공동체)'로 표기.[43] 이미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선보인 전적이 있다.[44] 그 당시 파격적이었던 비디오폰, 홈 오토메이션 등을 각 세대별로 설치하였기에 첨단 아파트라고 했다.[45] 엑스포 당시 독일관에 전시되어 있었다.[46] 실질적으로는, 당시 개발도상국이었던 대한민국에서 3개월만 쓰고 무너뜨릴 시설물에 200억을 투자한다고 하면 누가 납득했겠는가 하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47] 위탁운영 조건으로 이익 재투자와 연간 70억 신규투자 의무, 신규시설 재단 기부 등이 끼어 있다.[48] 당시 대전직할시청 부시장을 하던 박성효가 그러한 말을 했다고 한다. 나중에 한나라당 후보로서 대전광역시장에 당선되지만 결국 2010년 제5회 지방선거에서 낙선.[49] 단순한 건물하자가 아니라 부실공사가 의심될 정도라고 한다.
1978년 생: 중학교 3학년
1975년 생: 고등학교 3학년[9] 영화배우 소피 마르소가 방한하여 국제관 프랑스 부스에 방문한 뉴스가 보도되기도 했다.[10] 평일 오전 10:00~10:30, 오후 5:00~5:30[11] 아직 멀티터치나 제스처까지는 아니었지만, 당시로서는 터치스크린이라는 기술 자체가 일반인에게 사실상 처음으로 소개되는 것이었기에 그야말로 '''오버 테크놀러지'''였다.[12] 2000년대에 등장한 여러 테마파크에서 개별 어트랙션에 대해 실시하는 예약제도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13] 엑스포에 참가하는 각국은 자신들의 전시관을 자신들의 돈으로 만들어야 한다. 예컨대, 프랑스에서 열리는 엑스포에 한국이 참가한다면 한국관은 한국 정부 예산으로 짓는다. 모든 경기장을 개최국의 예산으로 건설하는 올림픽 등과는 다르다.[14] 1988년 개정 규약에 규정되고, 1996년부터 시행된 인정박람회다. 2012년 대한민국에서 개최된 여수 엑스포는 인정박람회다.[15] 당시 미국 의회가 미국의 대전 엑스포 참가 예산을 배정하는 데에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돈이 없어서 세계박람회기구에서도 탈퇴했다(...).[16] 말은 1시간 내인데 도서지방을 제외해도 경기 김포, 강원 속초, 전남 해남, 부산에서는 2010년대에도 1시간 내 도달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고속도로로 서울~대전까지 걸린 시간이 약 2시간이다.[17] 일정 주제에 한정되는 전문 엑스포가 종합 엑스포보다 규모가 작은 것이 일반적이다. 현재는 5년 주기의 World Expo와 그 사이의 International Expo로 나뉘어진다.[18] 여수 엑스포의 두 배.[19] 행사 폐막 후에는 건물이 철거되었으며 '환상의 오딧세이' 공연은 서울 잠실 롯데월드 어드벤처에서 재개장되었다. 그러나 시설 노후화 및 '''여수엑스포'''의 롯데관 시설 유치를 위해 2012년 11월 11일 운영 종료. 현재 롯데월드의 이 자리에 로티의 열기구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운영중이다.[20] 1993년 당시의 롯데월드는 엄청난 전성기를 누렸다. 150억원을 들여서 수준급 다크라이드 어트렉션인 환타지 드림을 파격적으로 오픈해 대박을 쳤으며 함께 개장한 회전바구니와 고공파도타기(지금은 철거되고 자이로 스핀이 오픈) 등도 엄청 인기가 많았다.[21] 그나마도 북한이 처음 참가한 엑스포는 17년이 지난 2010 상하이 엑스포이다. 북한은 원래부터 엑스포에 잘 참가하지 않는다.[22] 나중에 대전MBC에서 과학다큐멘터리만 만들었다 하면 주야장천 자료화면으로 우려먹었다. 또한 지금 영화관에서 3D화하여 틀어주는 2D영화와는 다르게 초장부터 3D효과를 노리고 만든 것이라 쇳물이 공중에서 눈앞으로 떨어지거나 벌겋게 달궈진 철도 레일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장면에서는 기절하는 관객까지 나올 정도였다.[23]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경기, 강원, 경남, 경북, 전남, 전북, 충남, 충북, 제주. 울산이 경남에서 분리된 시기는 1997년이며, 세종시가 출범한 시기는 2012년이다.[24] 현재의 4DX보다는 유원지에 있는 어트랙션형 영상기기였다.[25] 지금은 엑스포 과학공원 정문으로 이전.[26] 8분마다 240명이 입장했다.[27] 물론 진품은 아니고 모조품[28] 이런 구조물은 은근 많아서 서울랜드에도 있다.[29] 현재는 현대로템과 현대모비스로 분리되어 있으며, 모두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이다.[30] 다만 스포티지의 경우 대전 어느 한 골목에 주차되어 있다. 거기에 시발도 있다. 세피아는 폐차 얘기가 도는데 아직 정확하지 않다.[31] 부식 때문에 폐차되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아직 확실하진 않다.[32] 보통 영상물이 메인쇼인 곳은 전시물이 많이 준비되어 있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부실하지는 않았지만.[33] 이 곳도 기절 관객(...)이 발생한 곳 하나다. 사실 3D효과는 소재관보다 전반적으로 떨어졌지만, 영화 극초반에 등장하는 원시인이 횃불을 관객에게 들이대며 위협하는 장면이 있어서, 입체안경을 쓰고 있으면 불막대기가 자기 얼굴 앞으로 휙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는 연출이 있다.[34] 당시는 공기업이었지만 2002년 민영화와 함께 사명을 KT로 바꾸고, 2009년 자회사인 케이티프리텔(KTF)을 합병하여 오늘날의 KT가 된다.[35] 총 관람객 수가 아니라 대기시간.[36] 1일 7,000명 수용이 가능했고 관람소요시간은 최대 45분. 우주탐험관의 경우 1일 1만 6,000명. 관람소요시간은 30분.[37] 그 짜르는 곳이 테크노피아관 근처가 아닌 까마득한 한빛탑 근처(...)[38] 3D 그래픽은 우리나라가 아니라 당시 미국의 Boss Film에서 만들어 준 것이다. 이 회사는 에일리언 3, 배트맨 리턴즈 등의 영화들의 특수효과를 담당하기도 했다. 해외 90년대 그래픽 데모릴에서도 자주 보이는 걸 보면 어느정도 CG 발전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영상인 듯.[39] 1970년대부터 있었으나, 엑스포가 열리기 전인 1990년에 철거되었다.[40] 당시 계열사 제일화재도 대회 기간 중 'EXPO 보상 서비스센터'를 운영했다.[41] 개장 초기 서울타워에 외부전망대가 있긴 했지만 투명바닥은 아니었다.[42] 당시에는 'EC(유럽공동체)'로 표기.[43] 이미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선보인 전적이 있다.[44] 그 당시 파격적이었던 비디오폰, 홈 오토메이션 등을 각 세대별로 설치하였기에 첨단 아파트라고 했다.[45] 엑스포 당시 독일관에 전시되어 있었다.[46] 실질적으로는, 당시 개발도상국이었던 대한민국에서 3개월만 쓰고 무너뜨릴 시설물에 200억을 투자한다고 하면 누가 납득했겠는가 하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47] 위탁운영 조건으로 이익 재투자와 연간 70억 신규투자 의무, 신규시설 재단 기부 등이 끼어 있다.[48] 당시 대전직할시청 부시장을 하던 박성효가 그러한 말을 했다고 한다. 나중에 한나라당 후보로서 대전광역시장에 당선되지만 결국 2010년 제5회 지방선거에서 낙선.[49] 단순한 건물하자가 아니라 부실공사가 의심될 정도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