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6 도로 살인사건
1. 개요
1961년 8월 22일에서 23일 밤에 걸쳐, 영국 런던 A6 도로에서 일어난 총격 살인 및 강도·강간 사건. 이 자체만으로는 그냥 흔한 강도 사건이었으나 경찰의 부실한 수사와 '''목격증언 위조'''가 부각되면서 증거가 '''피해자의 증언'''밖에 남지 않게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형 집행이 되었으며, 하필 이 사형 집행이 '''영국 최후의 사형 집행'''이었기에 더더욱 유명세를 떨쳤다.
2. 사건 발생
1961년 8월 22일 밤 9시경, 마이클 J. 그렉스턴(Michael John Gregsten, 남, 향년 36세)과 발레리 스토리(Valerie Storie, 여, 당시 22세)는 그렉스턴과 어머니의 공동 소유로 되어 있던 모리스 마이너(Morris Minor)[1] 1956년형 모델을 타고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둘은 랭글리 지역의 도로교통연구소에서 같이 일하는 직장동료였고, 그 과정에서 연인이 되었다. 그런데 스토리는 미혼이었지만 그렉스턴은 아내와 자녀 2명이 있었다. 즉 불륜 관계였다.
이들은 드라이브 중 잠시 차를 멈추고 밀회를 즐기는 중이었는데, 누군가가 창문을 두들겨서 문을 열었더니 검은 복면을 쓴 사내가 38구경 리볼버를 겨누며 차 안으로 들어왔다. 사내의 위협에 그렉스턴은 그의 요구대로 무작정 주행을 시작했고, 중간에 음식을 사고 주유소에 들러 주유를 했다. 그렉스턴과 스토리는 차량과 소유한 현금을 모두 줄 테니 풀어달라고 요청했으나 범인은 이를 거부한다.
날이 바뀌어 8월 23일 새벽 1시 30분경, 범인은 자신이 잠을 자고 싶다며 그렉스턴과 스토리의 손과 발을 넥타이 등으로 묶으려고 시도했고 그렉스턴이 이에 저항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두 차례 총을 쏘았다. 머리에 총을 맞은 그렉스턴은 즉사했다. 이후 범인은 스토리를 강간한 다음 다시 총을 쐈고 이후 그렉스턴의 시신과 스토리를 버리고 도주했다. 그러나 스토리는 죽지 않고 기적적으로 살아 있었으며, 새벽녁 근처 농부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옮겨져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나 총에 맞은 후유증으로 하반신 불수가 되어 남은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게 되었다.
3. 수사 및 범인 검거
신고를 받은 경찰은 즉시 수사에 착수했으나 증거도 증인도 없는 상태였다. 경찰은 주변의 모든 숙박업소 및 교통수단을 이 잡듯이 뒤졌고, 사건 발생 이틀 뒤인 8월 24일, 범행도구인 38구경 리볼버 권총이 런던 36A 시내버스 내부에서 발견되었다. 탄흔 조사를 통해 범행도구임이 확인되었지만 지문은 모두 닦여져 있는 상태였다. 경찰은 해당 버스의 노선을 중심으로 탐문수사를 개시한다.
직후, 호텔 <알렉산드라 코트>의 매니저로부터 의심스러운 투숙객의 신고가 들어온다. 해당 인물은 스스로를 프레드릭 듀런트(Frederick Durrant)라고 밝혔고, 사건 당일 밤 모친과 함께 다른 호텔 <비엔나>에 있었다고 밝혀서 곧 풀려난다.
1주일 후인 8월 29일, 사건 당일 그 근처에서 1956년형 모리스 마이너 차량을 운전하는 남자를 목격했다는 사람이 등장했고, 이를 토대로 몽타주가 작성되었다. 이는 8월 31일 스토리에게 전달되었으나 그녀는 복면 때문에 범인의 얼굴을 보지 못했기에 이를 확인하지 못했다.
9월 11일, 비엔나 호텔의 한 객실에서 38구경 리볼버용 탄창 2개가 발견되었다. 호텔 장부에는 가장 최근에 방을 이용한 사람으로 제임스 라이언(James Lyan)이라는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다. 호텔 매니저는 해당 손님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36A 버스(흉기가 발견된 그 버스)를 타는 정류장을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사건이 난해해진 것이, 제임스 라이언이 당일 밤 또 다른 손님과 방을 맞교환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해당 손님은 피터 루이스 알폰(Peter Louis Alphon)으로 8월 24일 의심신고가 들어온 프레드릭 듀런트와 동일인물이었다. 듀런트는 가명으로 알폰이 진짜 이름이었다. 이로서 유력 용의자가 2명.
경찰은 우선 신분을 숨겼던 알폰을 유력 용의자로 보고 조사를 했으나 본인이 강력히 부인했다. 뒤이어 피해자 발레리 스토리에 의한 피의자 식별 확인 절차가 이어졌다. 발레리 스토리의 증언에 따르면 범인은 범행 도중 발레리에게 '''"Be quiet, will you? I'm thinking"'''라 말한 적이 있었고, 피의자 식별 확인 절차는 피의자가 이 문장을 그대로 말하고 스토리가 이를 듣고 확인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스토리는 알폰이 범인이 아니라고 확언한다.
이후, 경찰의 수사력은 제임스 라이언으로 옮겨졌다. 수사 결과 제임스 라이언 역시 가명으로 본명은 제임스 핸래티(James Hanratty)로 자동차 절도 등 전과 4범의 이력이 있었으나 모두 절도로 살인이나 강간 이력은 없었다.
10월 11일, 핸래티는 블랙폴에서 체포되어 런던으로 이송되었고 14일, 발레리 스토리에 의한 피의자 식별 확인 절차가 시작되었다. 식별 절차는 알폰 때와 동일했고, 스토리는 '''핸래티가 범인'''이라고 단정했다. 핸래티는 그렉스턴 살인 및 스토리 상해 및 강간, 차량 절도 등의 혐의로 정식 기소되었다.
4. 재판
재판은 해를 넘긴 1962년 1월 22일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사건으로 하반신 마비로 거동이 불편하고 여전히 병원 치료 중인 발레리 스토리를 배려한 사법부에 의해 최대한 사건현장 및 병원에서 가까운 곳에서 재판이 치뤄졌다.
핸래티는 법정에서 자신의 사건 당일 동선을 오락가락하고 발언을 번복하는 등 의심을 살 행동을 하긴 했지만 그 외의 증거가 없었으며, 변호인도 이 사실을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핸래티가 기소된 이유는 피해자에 의한 피의자 식별 확인 절차 지명 딱 하나였지 그 외의 증거가 없었다. 피해자의 팬티에서 정액이 검출되긴 했으나 '''당시 기술로는 DNA 검사가 불가능'''했다. 대신 정액에서 확인된 혈액형이 O형으로 핸래티와 일치하긴 했으나 '''당시 영국민의 40%가 O형이었다.'''
동시에 변호인은 핸래티가 전과 4범이긴 하지만, '''모두 절도 전과'''로 살인은커녕 상해 전과도 없다는 점을 강조했고, 또 '''운전 실력이 미숙'''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범인은 강탈한 차량을 타고 범행현장을 빠져나갔는데, 핸래티는 차량 절도 경력과는 별개로 운전 실력이 영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법원은 핸래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알리바이 입증을 하지 못했을 뿐더러, 그 과정에서 위증까지 했고(위증은 본인도 인정했다.) 핸래티가 문제의 차량을 운전했다는 증언에, 무엇보다 법원과 검사, 경찰은 스토리에 의한 피의자 식별 확인 과정을 절대적으로 보았다.
결국 항소까지 갔음에도 판결은 뒤집어지지 않았다. 핸래티는 6주 후인 1962년 4월 4일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는데, 전 날인 4월 3일 마지막 가족 면회에서 ''''내가 죽더라도 누명을 벗겨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5. 이후: "범인은 핸래티가 아니다!"
명백한 물적 증거도 없이 오직 피해자의 증언, 그것도 피의자의 얼굴은 보지도 못하고 목소리만 들은 피해자의 증언에 의존한 유죄 판결에 영국 여론은 들끓었다.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도 핸래티의 가족을 만나 위로하기도 했다. 핸래티의 유족들과 변호인단을 중심으로, 저명한 법률가와 학자들, 유명 정치인, 인권운동가 등이 가세하여 A6 변호 위원회(A6 Defence Committee)가 출범했다.
이들은 사건 이틀째인 1961년 8월 23일 새벽녘, 핸래티가 모리스 마이너를 운전했다는 목격 증언에 대해, 목격 당시의 시야라든가, 예상되는 이동 경로, 핸래티의 운전실력과 습관 등을 종합하여 '''이 목격증언이 나올 수가 없다''', 즉 '''허구'''라는 것을 입증한다.
이들 중 일부는 나아가 조사과정에서 석방된 피터 알폰이 진범이라고 주장했는데, 몽타주 그림이 핸래티보다 알폰을 더 닮았고 알리바이는 핸래티보다 더 부실했으며, 경제력 또한 핸래티보다 더 열악하여 강도에 대한 동기여부가 더 강하다고 주장했다. 다만, 알폰 진범설도 증거가 없긴 똑같아서 A6 변호 위원회에서도 의견이 엇갈려 순수하게 핸래티 무죄 증명에 전념하는 쪽과 알폰 진범설을 입증하려는 쪽으로 갈렸다.
여기에 기름을 끼얹은 것이 사형 집행 이후 피해자 발레리 스토리의 인터뷰였다. 스토리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그렉스턴과 연인 관계임을 고백한다. 본인은 불륜이 아니라 생각했다지만 명백한 불륜이다. 엄밀히 말해서 불륜관계는 사건과 무관하지만, 여론은 불륜녀가 무언가 비밀이 있기에 엉뚱한 사람을 죄인으로 덮어씌운 거 아니냐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후 스토리는 언론과의 모든 접촉을 끊었기에 사람들은 더더욱 그녀를 비난했고, '억울하게' 죽은 핸래티만 동정하게 되었다.
스토리의 고백과 함께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1961년 8월에서 1962년 5월 사이, 또 다른 용의자인 피터 알폰의 계좌로 7,569파운드가 입금되었으며 이에 대한 출처는 불분명했다. 원래부터 부랑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던 알폰은 이 돈의 출처를 밝히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범인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을 피해 숨어 다녔으며 사람들은 돈의 출처를 밝히길 거부하는 알폰의 태도에 ''''이 돈이 청부살해의 대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청부살해의 의뢰주는 누구냐는 의혹도 제기되었는데, 피살자인 마이클 그렉스턴의 아내 재닛 그렉스턴이 남편의 불륜에 분노해 청부살인을 의뢰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더욱 충격적인 사실들이 알려진다. 경찰이 핸래티의 유죄를 확정짓기 위해 핸래티의 운전을 목격했다는 목격 증언의 허구성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무시했고, 피의자 진술 자료도 자기들 맘대로 수정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때문에 어느 변호사는 경찰이 공개하지 않은 모든 정보들이 공개되었다면 판결은 뒤집어졌을 것이라고 개탄했다.
6. 결말: 재심 결정. 그런데…
사건 36년 만인 1997년 1월, 마침내 영국 재심위원회가 해당 사건의 재심을 결정했다. 재심위원회는 결정문에서 원심에 심각한 오류가 있었다는 지적을 하며 사건의 전면 재수사를 지시했다. 핸래티의 무죄를 믿고 싸워온 변호인들과 유족들은 진범은 못 찾더라도 그의 무죄는 밝혀낼 수 있다며 기뻐했다. 그런데…
6.1. 반전
'''스토리가 범인으로 지목한 핸래티는 정말 범인이 맞았다.'''
1999년, 영국 경찰은 보관하고 있던 증거품 중 하나인 피해자 스토리의 팬티에서 추출한 범인의 정액에서 DNA를 채취, 핸래티의 유족에게서 채취한 DNA와 대조하여 250만분의 1의 확률로 두 DNA가 일치한다고 발표했다. 40여 년 동안의 과학 발전이 오랜 논쟁을 끝내는 순간이었다.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핸래티 무죄론자들은 DNA의 오염 가능성을 제기했으나, 증거품에서 추출해낸 DNA는 딱 2개, 피해자 스토리의 것과 핸래티의 것이 전부였다. 오염론을 주장하려면 DNA가 최소 1개는 더 있어야 하는데 2개에서 그쳤으니 오염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은 핸래티 유족의 DNA를 어떻게 믿냐며 강력히 반발했고, 마침내 법원은 2001년 핸래티의 묘지를 파묘하여 그의 시신에서 직접 DNA를 채취할 것을 지시했고 이에 따라 DNA 대조 검사를 하였다. 그 결과는 2002년에 나왔는데 결과는 역시 '''제임스 핸래티의 DNA와 범인의 DNA는 완벽하게 일치'''했다.
최종 결과가 나온 후 핸래티의 무죄를 믿던 수많은 사람들이 멘붕하여 일제히 할 말을 잃은 채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증거가 오염됐을 거야!'라며 여전히 인지부조화에 빠진 핸래티 지지자들의 성토가 존재하긴 했으나 이에 대해 법의학팀이 만일 증거물이 오염됐다면 총기를 싼 손수건에서 핸래티 외에 '진범'의 DNA도 나와야 하지만 거기선 오직 한 사람, 핸래티의 DNA만 검출됐으며 피해자의 속옷에선 단 두 명 - 핸래티와 그렉스텐 - 의 DNA만 나왔다고 반박하며 여론도 수그러들었다.
그제서야 수십 년만에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발레리 스토리는 '''내가 어떠한 말을 해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았을 것'''이라며 허심탄회한 소회를 밝혔다. 그동안 스토리가 억울한 사람을 범인으로 내몰았다며 비난했던 언론들은 이를 위엄 있는 침묵이라며 높이 칭송하며 급 태세전환을 했다(...).
7. 의의
'''현대 민주국가 사법체계의 근간인 무죄추정의 원칙이냐, 아니면 피해자의 진실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
이 사건은 경찰의 부실하고 형편없는 수사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사건 초기 탐문수사를 통해 증거를 확보하고 용의자를 특정한 거까진 좋았으나 그 이후는 매우 형편없었고, 피해자 발레리 스토리에 의한 피의자 확인 절차에만 의존했다. 이는 40여 년 동안 '''"불륜 중 사건을 당한 피해자가 과연 정상적인 심리 상태에서 범인을 정확히 짚어낼 수 있겠느냐?"'''는 말이 나오게 만든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불륜 운운하는 인신공격적인 부분을 빼고 보면 명백한 사실이다. 이 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냉정하고 침착하게 범인을 특정했으니 망정이지, 사건 당시 겁에 질려 혼란에 빠져있던 피해자들이 용의자의 특정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 흔하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리고 이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경찰은 추가 수사를 통해 새로운 증거를 수집하고, 이를 피해자의 목격 증언 및 피의자 확인 절차와 결합했어야 한다.
진범에게 정당한 형벌을 내렸다는 것은 결과론적인 주장일 뿐이다. 핸래티가 진짜 범인임이 밝혀졌다고 해서 이러한 잘못이 정당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처음부터 정확한 수사와 정당한 판결을 내렸다면 아래에 언급할 피해자들의 발생은 처음부터 일어나지도 않았다.
이 사건 진행 과정에서 문제점들은 다음과 같다.
- 경찰은 피해자 증언에만 의존하여 피의자를 특정하고, 다른 가능성은 생각도 하지 않으며 피의자의 유죄를 확정하는데 전념하여 새로운 증거 확보에 실패하고 오히려 위증을 묵인했다.
- 법원은 명백한 증거가 없음에도 피해자의 증언 및 피의자 확인 절차를 100% 신뢰하여,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무죄방면되어야 할 제임스 핸래티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를 집행했다.
- 발레리 스토리: 사건의 직접 피해자이자 이 사건 최대의 피해자. 안 그래도 사건으로 반신불수가 되었는데, 반 세기 가까운 세월을 다른 사람 누명 씌운 불륜녀라고 비난받아야 했다. 스토리는 이에 대해 "그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만약에 핸래티가 다시 살아돌아와서 '사실 내가 범인이 맞다'라고 자백했더라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라며 그 동안의 고초를 토로했다.
- 피터 L. 알폰: 사건 초 용의자로 지목되었던 사람. A6 변호 위원회 및 핸래티 무죄론자들에 의해 진범으로 지목되었으며, 특히 범죄 기간을 전후로 수천 파운드의 거금이 그의 계좌에 입금되었던 것 때문에 청부살인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되었다. 이후로도 일정한 주거가 없이 평생 떠돌이로 비참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 재닛 그렉스턴: 피살자 마이클 그렉스턴의 유족. 사실 사건 전부터 남편의 외도를 눈치채고 이를 추궁하기도 하였으나 자식 때문에 참았고, 오히려 남편의 이혼 요구를 한때의 외도로 생각하여 거부하는 등 엄청난 대인배였다. 그러나 사건 이후 남편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민감한 사생활이 언론에 알려지고, 또 알폰 범인설 및 청부살인설과 결부되어 불륜을 저지른 남편과 그 파트너를 청부살해하려 한 거 아니냐는 삼류 찌라시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그렉스턴 부부의 아들 앤서니 그렉스턴(사건 당시 2살)은 진실이 밝혀진 후의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평생을 자신을 범인으로 생각하는 주변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고, 심지어 집 안에서조차 자식들이 자신을 범인으로 생각할까봐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히 또 소극적이었다고 울분을 토해냈다.
- 핸래티의 유족들: 이쪽은 경찰의 부실한 수사결과가 공개되면서 내 가족은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또 핸래티가 죽기 직전 끝까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누명을 벗겨 달라\'는 도저히 범인이라 생각할 수 없는 유언을 남기는 바람에 가족들은 애초부터 있지도 않은 누명을 벗기기 위해 남은 인생과 재산, 노력을 낭비했다. 그러나 모든 진실이 밝혀진 뒤 한참 지나서까지도 지지자들과 함께 여전히 핸래티는 무죄고 증거는 오염되었다는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들을 완벽한 피해자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2] 발레리 스토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유족들은 2차 가해자인 셈이다.[3] 유족들은 어찌 보면 범죄자인 가족 구성원의 거짓말과 수사 기관의 삽질로 인해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인지부조화 혹은 사법불신에 빠져버린, 가해자가 된 피해자라고 볼 수도 있는 셈이다.
8. 후일담
- 피해자 발레리 스토리는 이후 직장에 복직했으며 상술했듯 언론을 피한 채 조용히, 하지만 직장 및 사회생활에는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남은 생을 평생 독신으로 산 인물로, 본인이 흉악범죄 피해자라서인지 사형제 옹호론을 견지하였다. 핸래티 지지자들에게 오랜 세월 거짓말쟁이로 매도당하여 시달리면서 산 데다 그 지지자들에 의해 영국에서 사형제 폐지가 이루어지면서 핸래티가 추앙을 받았음을 생각해본다면 그녀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 것이다. 동시에 장애인 보행권 개선에도 적극 나섰다. 진실이 밝혀진 다음에는 인터뷰 등으로 얻은 수입 4만 파운드를 모두 지역 공공기관에 장애인을 위해 써달라며 기부한 후 2016년 3월 6일 별세했다. 슬라우 시는 그 돈으로 장애인용 버스를 사 기부자의 이름을 따 발레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
- 진실이 밝혀지기 전에는, 제임스 핸래티가 억울하게 사형당했다는 여론이 크게 불면서 1965년 영국 본토에서 일반 범죄에 대한 사형제가 폐지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안 그래도 티모시 에반스 사건으로 사형제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어 가던 시기였는데 이 사건이 쐐기를 박았다. 기타 반역죄, 군 항명죄 등에 대한 사형은 남아 있었으나 이 역시 1998년에 정식으로 완전히 폐지된다.
- 재닛 그렉스턴을 범인이라고 주장한 저널리스트 폴 폿은 진실이 모두 밝혀진 후인 2004년에 죽었는데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핸래티는 무죄라고 믿었다고 한다. 수십 년을 핸래티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그리고 재닛이 범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발로 뛰어다니고 자료를 모았던 사람으로서 차마 DNA 감정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지부조화를 일으킨 것 같다.
- 오랜 세월이 지나 DNA 검사로 진범을 확정했다는 측면에서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과도 비슷한 의미가 있다. 다만 핸래티 사건은 피해자가 확실하게 범인의 신원을 특정하였고, 이것이 진실이었으며, 덕분에 수사기관의 잘못된 수사 방식에도 진범을 잡는데 성공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1] 미니의 아버지 알렉 이시고니스가 디자인하여 1950년대부터 영국 자동차 시장을 휩쓸던 베스트셀러 겸 밀리언셀러 '''소형차'''다. 이것에 기반한 신규 차종이 역설적이게도 '''영국 자동차산업의 수치'''로 불리는 모리스 마리나다. 피해자들이 탄 이 차종은 사건에서는, '무장강도가 굳이 돈도 안 되는 소형차를 노렸을까?'라는 동기적 측면에서 거론된다.[2] 물론 재심 청구 전에는 가족의 유언도 있거니와 수사 기관의 잘못된 수사 방식이 있었으니 객관적으로도 핸래티가 무죄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모든 진실이 밝혀지고 반박이 된 이후로도 주장을 고수한다는 것은 확실히 인지부조화라고 볼 수 있다. 최소한 유족들은 수사 방식의 문제점이라는 객관적인 요소에 의거하여 핸래티의 무죄를 민 것이 아니라, 내 가족이니까 믿고 싶다는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요소에 더 무게를 두었다고 볼 수 있다.[3] 그러나 스토리는 자신을 몇십 년 동안이나 거짓 증언으로 공격한 핸래티 지지자들과 유족들, 특히 유족들에 대해선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스토리는 유족들에 대해 "어느 살인자의 엄마도 자기 아들이 그런 인간임을 인정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