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레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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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레논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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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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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이름'''
'''존 레넌
JOHN LENNON
'''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1994년'''
'''후보자격 연도'''
'''1994년'''
후보선정 연도 || '''{{{#ffd700 1994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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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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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존 레논
JOHN LENNON
'''
'''분야'''
'''음악'''
'''입성날짜'''
'''1988년 9월 30일'''
'''위치'''
'''1752 Vine Str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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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ember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1]
'''John Lennon
존 레논'''

<colbgcolor=#fff><colcolor=#593a32> '''본명'''
존 윈스턴 오노 레논
John Winston Ono Lennon[2]
'''국적'''
[image] 영국[3]
'''출생'''
1940년 10월 9일
영국 잉글랜드 랭커셔 리버풀[4][5]
'''사망'''
1980년 12월 8일 (향년 40세)[6]
미국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
'''직업'''
싱어송라이터, 프로듀서, 배우, 사회운동가
'''소속'''
쿼리멘 (1957 - 1960)
비틀즈 (1960 - 1970)
플라스틱 오노 밴드 (1970 - 1974)
무소속 (1974 - )
'''서명'''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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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593a32> '''배우자'''
신시아 레논 (1962 - 1968, 이혼)
오노 요코 (1969 - 1980)[80]
'''자녀'''
슬하 2남
줄리안 레논 (1963 - )
션 레논 (1975 - )
'''동거인'''
메이 팡 (1973 - 1975)
'''거주지'''
미국 뉴욕 주 뉴욕시 맨해튼 다코타 아파트[81]
'''학력'''
도브데일 예비학교 (졸업)
쿼리뱅크 학교 (전학)
캘더스톤스 스쿨 (졸업)
리버풀 미술대학교 (중퇴)
'''혈통'''
아일랜드계 영국인[82]
'''활동 기간'''
1957년 - 1980년
'''종교'''
무종교 (무신론)[83]
'''장르'''
, , 사이키델릭, 실험 음악
'''사용 악기'''
보컬, 기타, 키보드[84]
'''신체'''
178~180cm | 70~72kg | O형
'''로고'''
[image]
'''링크'''
| |

'''존 레논 사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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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85]
'''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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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1967년'''
'''1968년'''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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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970년'''
[image]
[image]
'''1971년'''
'''1971년'''

1. 개요
2. 생애
2.1. I Was The Walrus : 유년부터 비틀즈 전성기까지
2.2. 예술가로의 변모
2.3. But Now, I'm John : 비틀즈가 흩어진 뒤 솔로 활동
2.3.1. 오노 요코와의 만남
2.3.2. 비틀즈가 무너지다
2.3.3. 솔로 활동
2.4. The Dream is Over : 세상을 떠나다
2.5. Strawberry Fields Forever : 죽음 이후의 존 레논
3. 비판 및 논란
3.1. 어두운 면모
3.2. 야스쿠니 신사 방문 논란
3.3. 성적 지향
3.4. 자기 중심적인 성격
4. 기타리스트
4.1. 사용했던 장비
5. 정치 성향
6. 인기
8. 여담
9. 디스코그래피
9.1. 앨범
9.2. 싱글
9.2.1. 빌보드 1위
9.2.2. 빌보드 2위
9.2.3. 빌보드 3위~10위
9.2.4. 빌보드 11위~20위
10. 어록

[clearfix]

1. 개요


영국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이자 사회운동가. 향년 40세로, 생존해 있다면 현재 '''84세.'''

대중음악계를 넘어 '''20세기 대중문화계의 상징'''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싱어송라이터이다. 비슷한 시기 활동했던 밥 딜런, 절친이자 라이벌인 폴 매카트니 등과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중음악 작곡가'''들 중 하나로 빠지지 않고 항상 꼽히며, 대중음악사상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밴드인 비틀즈의 리듬 기타리스트이자 작곡 담당[7]이었다. 또한 같은 그룹의 폴 매카트니와 함께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혁신적인 작곡 파트너십'''으로도 유명하다.

슬하로 부인 2명과 낳은 아들 2명이 있는데 한명은 신시아 레논[8]과의 사이에서 낳은 1963년생 줄리안 레논[9][10], 그리고 오노 요코와 결혼하여 낳은 1975년생 션 레논이 있다.[11][12]
활동 시기 내내 사회-문화적으로 엄청난 파급효과를 불러 일으켰는데, 1960년대에는 위에서도 말했지만 비틀즈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자, 레논-매카트니 콤비로 현재 전설로 추앙받고 있는 명곡들을 무수히 많이 작곡해서 대중음악의 발전에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1970년대에는 솔로 활동을 전개해 나가면서 본인만의 사회적, 정치적인 의견을 밝혀서 전반적인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그가 작곡한 Imagine은 '''아나키즘평화주의의 가장 상징적인 곡'''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존 레논 본인도 '''가장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이자 진보주의자'''로 꼽히고 있다. 또한 1960~70년대 히피의 정신적인 지주로 활약하면서 히피들의 반기득권적인 분위기를 퍼트린 사람으로 자주 언급된다.
하지만, 1980년, 불과 만 40세의 나이로 정신병자 마크 채프먼에게 암살당해서 사망하게 된다. 사후에도 그는 수많은 후배 뮤지션들에게 존경받으며, '''영원한 대중음악계의 전설'''으로 남게 되었다.

2. 생애



2.1. I Was The Walrus : 유년부터 비틀즈 전성기까지


[image]
'''초기 비틀즈 시절의 존 레논'''[13]
존 레논의 어린 시절은 불우한 편이었다. 선원이었던 아버지 프레디 레논[14]은 집을 나갔고, 어머니 줄리아 레논 역시 다른 남자와 동거하게 되었다. 결국 줄리아의 언니인 미미, 메어리 부부 밑에서 자랐다. 6살때 아버지가 돌아와 몇 주간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전해지며, 어머니와는 청소년기에 관계를 회복했다. 존은 근처 고아원이었던 스트로베리 필즈(Strawberry Fields)[15]에서 자주 놀았으며, 이때 Walrus(바다코끼리)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15살 때 엘비스 프레슬리의 "Heartbreak Hotel"을 듣고 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학교 근처에 살던 어머니의 집을 오가며 밴조[16] 배워 음악에 관한 흥미를 가지게 된 존은 16살 때 보호자인 미미 이모를 졸라 17파운드짜리 기타를 구입하고[17] 맨날 같이 학교를 뒤집어놓던 친구들과 함께 비틀즈의 전신이 되는 밴드 "쿼리멘(The Querrymen)"을 결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한다.[18] 밴드 결성 직후, 퀴리맨의 멤버 아이반 본의 소개로 폴 매카트니와 만나게 되고 폴이 밴드에 합류한다.[19] 얼마 후, 밴드에 공석이 생기자. 폴의 소개로 조지 해리슨을 만났고, 조지가 밴드에 합류한다.
그러나 존 레논이 17살 때, 어머니 줄리아 레논이 만취한 경찰관이 운전하던 경찰차에 치어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하지만 더 어이없는 건 그 경찰관은 무죄선고를 받았다는 점. 그때 당시 여론과 시민단체에선 사실상 살인이자 뭐든지 술만 먹으면 다 감형해주냐면서 경찰과 법원을 강하게 비난했다. 어머니의 죽음과 말도 안되는 재판은 존 레논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역시 유방암으로 어머니를 잃었던 폴과의 우정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음악에 더욱 몰입하게 된 존은 폴에게서 기타를 배우기도 했다고.(그때까지만 해도 존은 어머니에게 배운 밴조코드로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존 레논은 특히 어머니와 관련된 곡을 자주 썼으며, 첫째 아들 이름도 줄리안 레논으로 지었다. 1960년 스튜어트 서트클리프가 합류하고 밴드 명을 "실버 비틀즈"로 변경하고 활동하다가 후에 피트 베스트가 들어오자 밴드명을 "비틀즈"로 결정한다. 이후 스튜어트 서트클리프는 밴드에서 개인적인 사정[20]으로 탈퇴하게 되고, 피트 베스트는 나머지 멤버의 불만 때문에 '로리 스톰 앤 허리케인즈(Rory Storm and Hurricanes)'의 드러머 링고 스타로 교체되게 된다. Please Please Me 녹음 때까지만 해도 링고 스타의 자리는 불안 불안했으나, 결국 링고 스타로 확정된 채 본격적으로 비틀즈가 출범한다.
[image]
왼쪽이 폴 매카트니, 오른쪽이 존 레논
비틀즈 활동 초기 존 레논은 폴 매카트니와 함께 거의 대부분의 곡을 썼으며, 이 둘의 협력은 레논-매카트니라고 칭해진다.[21] 그러나 'Rubber Soul'에서부터 존 레논의 자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In My Life'[22], 'Nowhere Man' 등이 바로 그런 곡.

2.2. 예술가로의 변모


[image]
Strawberry fields forever 뮤비에서의 모습
사실 'Rubber Soul' 녹음 전부터 존 레논은 비틀즈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고 말았다. 존 레논은 "비틀즈는 예수보다 유명하다(popular)"라고 발언했는데, 이 때문에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는 비틀즈 상품을 모아놓고 불태우는 등 큰 반감을 사게 되었다. 이 때문에 비틀즈는 기자회견을 열어 사과를 하기도 했다.[23] 이러한 해프닝과 밥 딜런과의 접촉 등 다양한 사건들은 그들로 하여금 기존 음악성을 탈피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비틀즈가 '''아이돌 그룹에서 역사상 가장 실험적인 밴드 중 하나로 변모'''하는 터닝 포인트가 된다. 음악적 전환과 함께 비틀즈의 활동 스타일 자체에도 큰 변화가 생기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일체 콘서트를 중단해버린 것이었다. 다행히도 그들의 마지막 콘서트인 'Rooftop Concert'의 영상은 남겨졌지만. 이 'Rooftop Concert'는 폴이 멤버들에게 제안해서 성사된 42분 길이의 즉흥적인 연주였고 정식 콘서트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하다.[24]
존 레논의 실험적인 작곡의 예로는 싱글 음반 'Paperback Writer/Rain'에서 처음 등장한 백마스킹[25]을 생각해낸 것과, Revolver에서 사이키델릭한 곡들을 작곡한 것 등이 있다.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서부터는 폴 매카트니가 밴드의 주도권을 잡게 되는데, 이때부터 레논-매카트니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하지만 그렇다고 둘이 큰 대립 구도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 당시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의 곡을 합쳐 만든 'A Day in the Life'[26]는 비틀즈 역사상 최고로 손꼽히는 명곡 중 하나이며, 폴 매카트니는 존 레논의 아들인 줄리안 레논에게 Hey Jude라는 곡을 써주기도 했다. 'Yellow Submarine'에서는 녹음 중간 폴 매카트니가 장난으로 개 짖는 소리를 냈다가 존 레논과 함께 그것을 바탕으로 곡을 작곡한 'Hey Bulldog'이 수록되어 있다.
'Magical Mystery Tour'에서 존 레논은 'Strawberry Fields Forever'[27], 'I Am the Walrus'[28]라는 곡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더욱 확고히 해간다.

2.3. But Now, I'm John : 비틀즈가 흩어진 뒤 솔로 활동



2.3.1. 오노 요코와의 만남


[image]
비틀즈로 데뷔하기 직전인 1962년, 존은 리버플 미술 대학 시절부터 사귀던 신시아 파웰[29]과의 사이에서 아들인 줄리안 레논이 태어나자 그녀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는 기획사로부터 신시아와의 결혼 사실을 숨기라는 요구를 받은데다가(실제로 신시아의 존재는 미국 진출 이후에야 밝혀졌다.), 비틀즈가 대성공을 거두자 인기에 취해서 신시아와 줄리안을 냉대하기 시작했다.
1966년, 비틀즈가 투어를 중단하고 휴식기를 갖게 되자 존은 미국에서 일본인 전위 예술가 오노 요코의 전시회를 관람한 것을 계기로 요코에게 푹 빠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화이트' 앨범을 작업하던 도중인 1968년 신시아와 이혼하고 요코와 재혼한다.
요코는 존을 아예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대학에서 신시아가 다른 남자와 얘기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신시아의 뺨을 때릴 정도로 꼴마초였던 존은 요코를 만난 뒤 페미니스트가 되었고, 전위 예술을 자신의 음악에 접목시켰다. 존은 요코와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관계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난 늘 예술가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을 꿈꾸어 왔다. 나와 예술적 상승을 공유할 수 있는 여자 말이다. 요코는 바로 그런 여자였다.

일부 팬들은 훗날 요코비틀즈 해체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여겨 '마녀', '일본 잡귀'라며 맹렬히 비난하게 되였는데 그녀가 비틀즈 해체의 공신 중 한명이다보니 달갑게 보기 힘들었던 것.
비틀즈 해체의 직접적인 요인은 멤버들 간의 음악적, 사업적인 이견[30]과 개인적인 불화였다지만 바로 그 불화를 가속화 및 재점화하는데 요코가 크게 관련되어 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다수의 비틀즈 팬들 입장에 그녀는 어느 날 갑툭튀해 존의 옆자리를 차지한 외부인이었고 존의 음악까지 간섭했기에 굴러들어온 돌이 깽판친다는 인상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연유로 비틀즈 해체에 미친 영향 이상으로 과도하게 까이는 경향도 확실히 있다.
[image]
1969년 3월, 'Bed-In for Peace' 시위 도중 인터뷰를 하는 존 레논과 오노 요코
어쨌든 1968년을 기점으로 존은 전위 예술가인 오노 요코의 영향을 받아 갖가지 기행을 일삼는다. 요코와 함께 공개적으로 며칠 동안 섹스하며 침대 안에 틀어박혀 있는다든가[31], 요코와 함께 발매한 실험 음반 자켓에 알몸으로 사진을 찍어 커버로 삼는다든가. '''앞 뒷면 전부.'''(…)

2.3.2. 비틀즈가 무너지다


[image]
화이트 앨범 제작 시즌에 찍은 사진.
머리 스타일이 변해서 그렇지 데뷔 초기에 비해 외모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화이트 앨범에서, 그는 인도 여행('Dear Prudence', 'The Continuing Story of Bungalow Bill')[32]에서 보고 느낀 것들과 극심했던 우울중('I'm So Tired') 등, 무척 개인적인 일들을 노래한다. 폴과 조지 역시 마찬가지였고 비틀즈 해체의 기미는 이때부터 분명 존재했다. 각종 소음을 집대성한, 전위예술적이고 난해하기로 유명한 'Revolution 9' 역시 이 앨범에 수록되어 있으며 존의 곡이다.
폴은 존이 오노 요코와의 사랑에만 치중하고 비틀즈를 뒷전시한다고 느꼈고, 존이 스튜디오(!)에까지 요코를 데리고 오자 이러한 내부의 분열은 극에 달했다.[33] 물론 충분히 빡친 폴 역시 이에 질세라 자신의 약혼녀 린다를 스튜디오에 데려오는 식으로 그와 경쟁(…)했다. 폴 매카트니 문서로. 물론 이 갈등 과정에서 존의 자의식은 더욱 강해져만 갔다.[34]
[image]
'''비틀즈 해체 직전의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35]
Let It Be는 멤버들의 불화와 감정의 골이 깊어질대로 깊어진 시점에서 제작된 앨범이지만,[36] Abbey Road는 이미 멤버들이 해체를 마음 속으로 예감한 상태에서 작업한 앨범이다. 따라서 불화가 곡들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존에게는 여러모로 폴과의 음악적 이견 차를 실감한 시간이었다. 존은 해체 직후인 1970년대 초반에는 비틀즈 후반부에 두드러진 폴의 약진과 성과를 부정했고, 폴이 주도한 애비로드 메들리와 Let It Be 등 대부분의 McCartney 주도작들을 폄훼했다. 초기 레논-매카트니 체제의 득세를 생각해보면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다만 이는 해체 직후 서로 간의 감정적 앙금이 남아있던 상황에서의 발언이고, 1970년대 중반부터 화해 무드가 조성되면서 존 레논의 직설적이고 날카로운 비평도 누그러들게 된다. 특히 1980년의 인터뷰를 보면 폴의 곡을 칭찬하는 등 상당히 유화적인 태도를 볼 수 있다.
어쨌거나 비틀즈 해체 직후 이 둘은 서로를 디스해대며 싸워댔고, 특히 해체 직후인 1971년, 존은 롤링 스톤지와의 인터뷰(Lennon Remembers)에서 폴과 조지를 크게 비난했다. '그들과의 사이는 이미 옛날에 끝났다', '요코를 욕하는 그놈들을 패줘야 했었는데'라는 등등...당시 인터뷰 존의 성격답게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어조가 깊기는 하지만, 존이 당시에 얼마나 쌓인게 많았는지 알 수 있다. 재미있는 건 인터뷰에서 그렇게 불만을 표출한 조지 해리슨과는 Imagine 레코딩을 함께 했다는 점. 이 당시 결과물들은 존의 Imagine 앨범과 폴의 Ram 앨범에 특히 잘 나타나있다. 존과 폴이 죽을 때까지 화해하지 못하고 싸워댄 것은 아니었고, 1973년을 기점으로 감정적 대립이 상당히 누그러들었으며 메이 팡의 설득과 링고 스타[37]의 중재로 연락이 닿아 1974년에는 로스 엔젤레스에서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기고 스튜디오에서 믹 재거, 스티비 원더 등과 함께 연주하기도 했다.[38] 가끔씩 안부 전화도 하고, 폴이 지나가다가 존의 집에 들러 같이 연주도 했다고 전해진다. 또 비틀즈를 둘러싼 법정 공방이 1974년에 최종적으로 종결되고, 존이 아들 션을 얻게 되면서 가정주부 생활을 하게 될 무렵에는 상당히 관계를 회복했다고 한다.
물론 과거의 영혼의 콤비였던 시절 만큼은 아니고 다소 서먹서먹한 분위기도 있었지만, 적어도 비틀즈 해체 직후 서로를 향해 증오에 가득찬 디스를 하던 시절보다는 훨씬 나아진 관계였다.[39] 오히려 존과 말년에 사이가 안 좋아진 것은 자서전 <I Me Mine> 문제로 관계가 소원해진 조지 해리슨 쪽이었다. 1970년대 후반 집필해 1980년 8월에 발표한 자서전에서 조지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끼친 영향을 서술하는 부분에 존을 누락시켜 버렸고 존은 이걸 무척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심지어 존이 살해되기 직전까지 화해조차 하지 못했다. 말년의 조지의 인터뷰를 보면 존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은 듯 하다. 존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조지힌두교에 더욱 깊게 몰입하게 된다.[40]

2.3.3. 솔로 활동


[image]
'''솔로 시절의 존 레논'''[41]
비틀즈 해체 이후 1970년대 중반 폴이 왕성한 솔로 활동을 한 것과 달리 존은 우울증에 빠져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더욱 줄어들어갔다. 지금은 상상이 어렵겠지만 비틀즈 해체 직후 존에 대한 인식은 (특히 미국에서) 그리 좋지 않았다. 실제로 존이 솔로 발표한 곡 중 그의 생전에 미국 빌보드 1위를 차지한 곡은 단 하나 뿐이며("Whatever Gets You Thru The Night", 1974년 11월 16일에 1위 달성), 사망 후에 1위를 한 곡("(Just Like) Starting Over")까지 합해도 빌보드 1위에 오른 존의 솔로 곡들은 단 둘 뿐이다.[42] 그의 부진한 인기를 입증하듯, 그가 당시 인기있는 신인들이었던 셰어 보노+소니 보노 부부와 불화를 일으킨 후 미국 모든 라디오 방송국들에 "셰어+소니의 곡을 방송하려거든 내 음악을 일체 방송하지 말라"고 통보하자, 방송국들은 존의 음악을 방송하지 않았다.
존은 비틀즈 활동에서 점차 이탈하고 오노 요코와 함께하는 과정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았는데, 이때 어렸을 때의 애정 결핍과 여러가지 심적인 문제들에 대해 직면하면서 그의 내면 세계는 부쩍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얻은 것들을 통해 만든 앨범이 바로John Lennon/Plastic Ono Band 음반이다. 덧붙이자면 이 시점 이후로 '''자신이 만들고 키워온''' 비틀즈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됐다. 앨범의 수록곡인 'God'의 가사에서도 "I don't believe in Beatles"라 외치며 비틀즈에 대한 자기부정을 선언한다.[43]
이외에도 비틀즈 해체 시기를 전후하여 존은 요코와 함께 베트남 전쟁 반전 평화 운동을 시작하여, 미국 내의 반전 분위기를 북돋았다. 다큐멘터리 존 레논 컨피덴셜(원제 The US vs John Lennon)에서 이 시기의 존을 자세히 묘사했다.
비틀즈 해체 이후 존은 'John Lennon/Plastic Ono Band', 'Imagine' 등의 음반을 냈다. 이때 그의 사상은 한 단어로 된 세 곡('God', 'Love', 'Imagine')으로 압축할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 반전 평화주의자(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 Imagine 중), 무신론자(God is a concept by which we measure our pain - God 중), 무정부주의자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트남전에 반대해 MBE 훈장을 반납하기도 했다. 실제 무정부주의 사상에 심취해 요코와 함께 만우절인 1973년 4월 1일 이상향을 뜻하는 'utopia(유토피아)'에서 본 따 'Nutopia(뉴토피아)'라는 가상 국가를 만들기도 했다. 해당 지식인.
그러다 오노 요코와의 별거를 끝내고 베트남전이 종결된 1975년부터 존은 음악 활동을 중단하고 5년간 가정 주부로 살았다. 이는 어린 시절 불우했던 가정 환경에서의 경험이 아내와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말년에 존이 보인 가정적인 모습은 어디까지나 에게만 국한된 것으로 줄리안에게는 죽을 때까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44] 이런 줄리안을 가엾게 여긴 은 비틀즈 시절부터 줄리안을 돌봐주었고 줄리안도 폴을 더 따랐다고 한다. 비틀즈의 대표적인 히트곡 중 하나인 'Hey Jude'도 가정의 붕괴로 큰 혼란을 겪고 있을 줄리안에게 폴이 힘내라고 써준 곡이다.

2.4. The Dream is Over : 세상을 떠나다


[image]
'''중년기의 존 레논'''[45]

1980년 12월 8일 월요일, 'Double Fantasy'를 제작하고 활동을 시작하려던 찰나, 존은 뉴욕에 있는 자택 앞에서 마크 채프먼이라는 정신질환자에게 총을 맞았다. 녹음 스튜디오에서 요코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던 중이었는데, 마크 채프먼이 쏜 38구경 리볼버의 할로포인트 총탄 4발을 왼쪽 가슴과 어깨 부분에 맞아 쓰러졌다고 한다.[46] 그는 병원으로 즉시 이송되었지만, 도착 즉시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마크 채프먼이 존을 죽인 이유를 놓고 과거에는 비틀즈와 존을 너무나 동경한 나머지, 존과 자신을 동일시했고 결국 자신이 진짜 존 레논이며 저기 있는 존 레논은 가짜라는 망상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설이 힘을 얻었었다. 그러나 비록 채프먼의 아내가 동양인이긴 했지만 오노 요코와는 정반대로 순종적인 타입의 여성이었다. 채프먼의 자택에서 발견된 비틀즈의 앨범 또한 그의 아내가 구입한 것으로, 채프먼이 비틀즈, 특히 존의 광적인 팬이었다는 주장의 근거로는 적당하지 않다.
오히려 채프먼이 레논을 살해한 동기는 그의 개인적인 정신병력과 종교적 동기가 복잡하게 결합한 결과물이다. 채프먼이 아주 어렸을 때 레논을 좋아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고등학생 무렵부터 독실한 기독교인임을 선언하며 오히려 철저한 안티로 돌아섰다. 채프먼은 법정에서 "스스로 예수보다 유명하다고 지껄이며 신성모독이나 저지르고, 노래 Imagine에서는 무소유를 주장하는데 정작 본인은 수백만달러짜리 아파트에서 호화 생활하는 위선자가 아니냐,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처단했다!"고 직접 밝힌 바 있다.[47] 물론 관심병 탓도 아주 없진 않다. Court TV의 인터뷰에 따르면 "아버지가 애정을 한번도 주지 않아서 트라우마에 시달렸는데, 레넌이 아버지처럼 보여서 죽였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48]
이 사건으로 채프먼은 현재 40년 가까이 교도소에 갇혀 있다. 2년마다 가석방 신청을 내고 있다는데, 2014년 8월 22일 그의 여덟 번째 가석방 신청이 거부되었다고 한다. 거부된 이유는 유가족과 고인을 사랑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다는 것.
사실 석방돼도 마크 채프먼 입장에선 불안한 것이, 여전히 존의 몇몇 팬들이 마크 채프먼을 죽여 존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그의 출소일 만을 기다리며 이를 갈고 있다는 카더라가 있어서…뭐 카더라라기엔 당연한 사실이지만.
여담으로 채프먼은 존에게 총을 쏘기 직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티븐 킹에게도 끈질기게 사인을 요구했다고 한다. 사인을 거의 해주지 않는 스티븐 킹도 그 끈질김에 질려 결국 사인을 해줬다는데, 만일 킹이 사인을 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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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이 채프먼에게 싸인을 해주고 있다. 이 사진이 찍히고 5시간 후 '''존은 살해당했다.'''[49] 존의 생전 마지막 사진이 존을 죽인 사람과의 사진이라는 점이 참 아이러니하다.

예, 말씀드려야만 하겠군요. 누가 이기든, 지든 간에 이것은 단지 미식축구 경기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방금 뉴욕의 ABC 뉴스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극적인 소식이 들어와 바로 전해드리겠습니다. 비틀즈에서도 가장 유명한 존 레논이 뉴욕 시의 서쪽에 있는 아파트 건물 근처에 두 차례에 걸쳐 총을 맞아 급히 인근 루스벨트 병원으로 향했으나 도착 즉시 숨졌습니다. 아무래도 이 소식 이후에는 게임에 집중하기 힘들 것 같네요.

Yes. we have to say it, remember this is just a football game, no matter who wins or loses. An unspeakable tragedy confirmed to us by ABC News In New York City. John Lennon, outside of his apartment building on the west side of New York City, the most famous perhaps of all of The Beatles, shot twice in the back, rushed to Roosevelt Hospital. Dead on arrival. Hard to go back to the game after that news.

존 레논 암살 당시 중계 도중에 전한 속보 전문[50]

이때, ABC 방송이 먼데이 나잇 풋볼 중계 도중 암살과 관련하여 당시 스포츠캐스터인 하워드 코셀이 속보를 전했다.
채프먼이 쏜 총에 맞은 존은 병원으로 실려가면서 "당신 존 레논이죠?"("Are you John Lennon?")이라는 질문에 "네..."("Yeah...")라고 대답했고, 결국 이게 그의 유언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20세기 최고의 싱어송라이터라 칭송받던 사람의 최후치곤 무언가 안타까운 죽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 존 레논의 유골은 화장 후 요코가 보관하고 있다.
이 때문에 폴 매카트니와 함께 음모론의 단골 손님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폴 매카트니 사망설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비틀즈 관련 음모론이 FBI마크 채프먼을 이용해 그를 죽였다는 암살 사주설이다. FBI도 이런 썰을 의식하고 있는지 지금도 존의 파일을 비공개로 지정해놓고 있다.[51]
사실 이런 음모론이 설득력을 가지게 된 것은 존과 요코가 반전 운동을 벌이다 영국의 보수 언론에 쫓겨 미국으로 왔는데, 미국에 와서도 반전 운동을 계속해 당시 미국 정부나 보수 언론들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Some Time In New York City" 앨범을 낼 때 레논은 '''닉슨 = 마오쩌둥'''이라고 까기도 했다.

2.5. Strawberry Fields Forever : 죽음 이후의 존 레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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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죽은 날." - 타임 지'''[52]

비틀즈에서의 큰 비중과 수많은 명곡들, 독특하고 확고한 사상, 극적인 삶과 죽음 때문인지, 존은 비틀즈 멤버들 중에서도 과 함께 가장 유명하다. 요즘 세대야 지금도 활동하는 을 더 잘 알겠지만. 그래도 지금까지도 존은 많은 음악 팬들에게 20세기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존재다. 그러나 막상 한국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곡은 All You Need Is Love, Across The Universe 같은 것만 빼면 사실상 전부 이 만든 노래다. 심지어는 Imagine이 비틀즈 노래인 줄 아는 사람도 있다(…).
물론 알려진 노래가 이 만든 곡이 많은 것뿐 존 레논도 수많은 곡을 만들고 기여했으며 존 레논 특유의 감성이나 작곡을 좋아하는 팬들도 꽤 있었다.
생전에는 대중적인 곡을 주로 작사, 작곡해서 대중들에게 넓은 사랑을 받았던 과는 달리, 존은 비록 전성기 시절 히트곡의 인기는 에게 밀렸지만 세상을 떠난 뒤 수많은 대중, 매니아들과 평론가들에게 재평가를 받으며 진가를 인정받았다.

3. 비판 및 논란



3.1. 어두운 면모


시간이 흐른 후, 존 레논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방향의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그가 주로 비판을 받는 부분은 1.전처 신시아에 대한 무관심과 가정폭력, 2.아들 줄리안 레논에 대한 아동 방임, 3.사회적 약자 비하, 4. 야스쿠니 신사 방문 같은 언행불일치로 요약된다. 그의 어두운 면이 다시 알려지면서 반전운동과 평화사상을 전파하던 이면의 사생활은 매우 폭력적이라며 존 레논에 대한 실망스러운 의견이 많아졌다. 1960년대만 해도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이 어느정도 용인되는 분위기가 미국과 특히 영국에 만연했기 때문에 당시엔 별로 논란이 되지 않던 부분이 오늘날 다시 조명받고 있는 것이다. 특히 페미니즘 단체에서 존 레논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늘었다. Rubber Soul에서 여성을 비하하는 가사에 대한 반발을 대표적인 예시로 볼 수 있다.
그가 전처 신시아 레논에게 때때로 폭력을 휘둘렀다는 것은 신시아 본인의 인터뷰에서 언급된다.[53] 신시아는 존이 굉장히 매력적인 사람이지만 정신적으로는 불안정했다고 말했다. 폭력이 계속 이어졌던 것은 아니었지만 외도를 비롯해 존은 그녀에게 결코 좋은 남편이 아니었다. 신시아는 예술가적 성향이 강한 존과 자신은 다른 점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혼 이후 그에 대해서 별로 나쁜 감정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존은 신시아와의 관계에서 생긴 자식인 줄리안 레논에게도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어린 줄리안에게 존은 관심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많은 상처를 남겼다. 이후 존은 잃어버린 주말[54]시기 줄리안과 시간을 보냈지만 줄리안에게 아버지는 애증의 대상으로 남았다. 줄리안은 아버지가 평화와 사랑을 말하면서 외도로 자신과 어머니를 버렸다고 비판하다가도 그와 함께한 행복한 시간을 추억하는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
비틀즈 초기 시절에 무대 위에서 중증 장애인을 비하한 일도 자주 언급된다. 동영상 링크 참고로 이 공연 이전에 사전에 알지도 못한 채 장애인들과의 만남을 가졌었다고 한다.
또한 맬컴 X 추종자이자 흑인 인권운동가였던 마이클 X를 소송 과정에서 도와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이클 X는 강도, 살인, 납치 등을 저지른 범죄자로 1972년 할레 킴가(본명 게일 벤슨)라는 여성 구성원을 생매장해 1975년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명백한 범죄자를 타당한 이유 없이 도와주려 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존 레논도 시간이 지나 과격한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이 자신이 저지른 큰 실수라고 인정했다.
존 레논은 오노 요코와 만남을 가지고 정신적 성숙을 거치면서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평화와 사랑을 외치는 삶을 살았다. 실제로 이때를 시작으로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노래를 많이 발표했다.
이 시절 그는 원초적 외침이라고 불리는 심리 치료를 통해 평생의 트라우마였던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 대한 기억을 치유하기 시작한다. Plastic Ono Band 전반에 그런 치유의 과정이 나타나며 이후 그가 정신적으로 안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존은 외도를 멈추지 않았고 결과적으로는 두 번째 결혼도 그다지 평탄하지는 않았다. 다른 면에서 보자면 존과 오노의 관계는 일반적 시선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고 당사자들의 생각과 다르게 왜곡되는 부분도 있다. 예를들어 존과 메이 팡의 관계.
그의 사생활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존의 이러한 행동들은 자신과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 및 질투심에서 비롯된 소유욕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한다. 존이 을 밴드에 받아들인 것도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취향이면서도 기타 연주를 자신보다 잘 하기 때문이었고 신시아에게 관심을 가진 것도 중산층 출신에 자신과는 다른 얌전한 무리들과 어울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이러한 부정적 평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 레논이 여전히 위대한 음악가로 평가받는 이유는 결국 그가 예술가적 재능을 발휘하는 것을 넘어 불안정한 내면을 치유하고 성숙을 이루는 과정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솔로 커리어에서 이런 면이 돋보이며 '비틀즈의 아이돌'에서 '고독한 뮤지션'으로 이미지를 탈바꿈하였다. 주변 인물들과 과거의 나쁜 기억을 풀기 시작하고 한 가정의 아버지로 자리를 잡은 것도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폴과 화해하고 줄리안과 다시 만나기 시작하면서, 또한 두 번째 아들 션에게는 제대로 아버지의 역할을 다하면서 그의 천재적 재능의 이면에 늘 부족했던 일반적인 행복도 어느정도 충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일반적인 부성애와 행복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둘째 아들인 션 레논에게만 해당한 것으로 상술했듯이 전처 소생인 줄리안 레논에 대해서는 죽을 때까지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신시아와의 결혼 생활 중에는 줄리안을 아예 방임했으며 이혼 후에는 어느 정도 후회하고 다시 만나고 싶어했지만 후처인 오노 요코가 줄리안 레논과의 만남을 막았다는 이유로 찾지 않았다. 사실상 존이 줄리안과 제대로 된 부자간의 교류를 나눴던 시기는 오노 요코를 두고 메이팡과 외도를 하던 짧은 기간 동안이었다.(메이팡은 줄리안과 존의 만남을 지지했다고 한다.) 이후 요코와 재결합하면서 다시 아들에게 소홀해졌다.

3.2. 야스쿠니 신사 방문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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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존 레논은 일본을 여행하면서 일본의 문화와 신앙을 좋아하게 되었고 여러 신사를 방문했다. 허나 1971년, 야스쿠니 신사오노 요코와 방문해 논란이 있다.
다만 존 레논 본인은 영국인인데다 아내였던 오노 요코 역시 좌익 성향이 강했으므로, 당시 야스쿠니 신사의 정확한 실정에 대해 무지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야스쿠니 신사에 A급 전범들을 합사시킨 것은 1978년의 일이므로 당시 레논 부부가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한 것은 전범 참배와는 관련이 없다. 하지만 메이지 시대부터 야스쿠니 신사는 전쟁에서 전사한 일본 군인들의 위패를 가져다 놓고 제사를 지내왔고 국가 프로파간다에 활용되어 왔으므로 평화주의자로서의 행보로는 여러모로 적절치 않다고 볼 수 있다.
존 레논의 일본 여행에 관해 남아있는 기록은 오노 요코의 사촌이자 우익 인사인 가세 히데아키의 칼럼이 있다. 가세 히데아키의 주장에 따르면 존 레논은 야스쿠니 신사를 싫어하지 않았고, 일본의 전쟁은 방어의 개념이었으며 미국에게 공격당한 베트남과 비슷한 처지라는 본인의 의견을 납득했다고 한다. 정작 존 레논 본인은 이에 대해 생전에 어떠한 입장 표명도 한 적이 없어 이 발언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사실 모두가 알다시피,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는 더더욱 서양 열강들은 미국 외에는 모두 유럽 전선에만 신경썼지[55] 일제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으며(본인들이 침략당한 것도 아니고 자신들도 똑같이 제국주의적 침략을 했으므로) 존 레논처럼 전후 10년은 넘어서 애매한 시점에 성인이 된 경우 더더욱 일본에 대해 특별히 악감정을 가질 이유가 없다. 존 레논처럼 유명인이라고 해서 일제에 적극 반대하리라 생각하는 건 애초에 지나친 기대이다. 물론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다고 일제를 옹호하는 것도 아닌 그냥 "무관심" 이 가장 적절한 단어일 것이다. 원래 전세계 모든 사람들은 타국의 역사에 별로 관심이 없다. 존 레논의 경우, 부인이 일본인이므로 당연히 별 생각 없어도 일본에 옹호적인 입장을 보였을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과 결혼할 경우, 대다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에 대해 별 관심 없을 테지만 만약 배우자가 자기 나라인 이스라엘을 옹호한다면 당연히 거기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존의 반전주의 성향을 알고 있는 팬들은 별 생각없이 모르고 한 행동이거나 오노 요코가 옹호하니 팔불출처럼 그녀의 생각에 동조했을 거라는 옹호를 하기도 하지만 그의 사후 아들 션 레논이 대놓고 욱일승천기와 우익적인 사상을 옹호하는 병크를 저지르면서 존의 과오와 사상 역시 비판과 의심을 받게 되었다.

3.3. 성적 지향


1963년 커밍아웃한 게이이자 비틀즈의 매니저인 브라이언 엡스타인과 존 레논이 함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휴가를 보낸 후 그가 게이라는 소문이 돌았었다.[56] 폴 매카트니는 존의 게이설에 대해 "난 존과 단 둘이 한 방을 쓴 적이 여러 번 있지만, 그는 내게 아무 짓도 하려하지 않았다."라며 소문을 부인했다. [57]
그런데 2015년 오노 요코가 인터뷰에서 밝히길, 엡스타인과의 외도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이나 그가 양성애적 성향이 있긴 했으며, 존과 이에 대해서 진지한 대화를 했었는데 우리 모두 양성애 성향이 조금이나마 있을 수 있으나, 사회적 시선때문에 숨기는 것이라는 말이 나왔었다고 한다. 그리고 존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모두 매력적인 남자를 만난다면 거부하지 않겠다고까지 말했었다고 한다.

3.4. 자기 중심적인 성격


존 레논은 매우 자기 중심적이고 자의식이 높았던 사람으로 평가 받는다. 이 때문에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고깝게 보이거나 라이벌로 여겨지던 음악가들에게 종종 폭력적으로 굴었다는 말이 있다. 음악적인 성향 차이 때문에 한때 사이가 안좋았던 폴 매카트니극딜하는 노래를 쓴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폴 매카트니 뿐만 아니라, 그와 조금이라도 성격이나 음악/정치 성향에서 차이가 난 사람을 비난하는 성격이 있었고 현대 들어서는 이런 점이 부각되어 비판받기도 한다. 그 외에 존에게 비난을 당한 사람으로는 조지 해리슨[58], 믹 재거, 키스 리처즈[59], 핑크 플로이드[60] 등이 있다. 거기다가 1970년대 중반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던 블랙 사바스에 대해서는 죽을때까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61]
이 때문에 존 레논의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인 성격 때문에 순위에만 급급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다는 비판이 있다. 그의 음악은 인정하더라도 존경할만한 인물은 못된다는 평도 나올 정도다.

4. 기타리스트


비틀즈는 멤버들이 악기 연주를 하는데 있어서 다재다능하고 레코딩을 할때 서로 역할을 바꾸기도 했기 때문에 멤버들의 포지션을 단적으로 정의내리기 어렵지만 존 레논은 주로 비틀즈의 '''리듬 기타리스트'''로 구분된다.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리드 기타리스트에 비해 리듬 기타리스트들은 평가가 박한 경향도 있고[62] 같은 그룹의 조지 해리슨이 연주 실력도 매우 뛰어나고 락 음악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를 논할때 항상 매우 높은 순위[63]에서 언급되기 때문에 존은 '작곡가' 이미지이지 상대적으로 기타리스트로서의 면모가 부각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존 레논도 역사에 길이 남을 작곡 실력, 조지 해리슨의 괴물같은 연주 실력에 묻혀서 그럴 뿐이지 기타리스트로서도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다. 화려한 기타 연주와는 거리가 있지만 간단하면서 캐치한 리듬 기타 연주[64]로 노래를 잘 구성한 것으로 유명하다.[65] 테크닉적으로는 딱히 언급할만한 부분은 없지만[66] 기본에 충실하면서 개성있는 사운드와 연주 방식을 보여준 것은 충분히 고평가받을 만 하다. 게다가, 존 레논이 처음 기타리스트로써 활동한 시기는 1950년대 말엽이다. 나름 명맥있는 기타리스트라는 얘기. 존 레논 본인도 자신의 테크닉은 그냥저냥이지만 기타를 울부짖고 살아 움직이도록 할 수 있다며 자기는 괜찮은 기타리스트이라고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다른 유명 기타리스트들도 존 레논은 작곡 실력에 묻혀서 그렇지 꽤나 훌륭한 기타리스트라고 평가한다. 실제로 롤링 스톤 선정 100대 기타리스트에서 존 레논은 높은 순위인 55위에 랭크되어 있다.

4.1. 사용했던 장비


존 레논은 시기 별로 자주 사용했던 기타가 있다. 존 레논이 사용한 악기들 중 대부분 사람들이 알 만한 악기를 열거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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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kenbacker 1958 325'''
'''Rickenbacker 1963 325'''
비틀즈 초기에 사용한 일렉트릭 기타. 함부르크 시절 구매해서 65년까지 무대에서 사용한 기타이다. 58모델은 원래 내츄럴 피니쉬인데 레논이 검정 페인트로 리피니쉬 해서 사용하다가 리켄베커에서 깜댕이 모델로 재생산하여 준것이 63모델이다. 리켄베커 325는 다른 전기기타와 다르게 넥과 스케일이 짧다. 이런 특징은 리듬 기타인 존 레논에게 코드를 빨리 변환할 수 있어 용이한 기타였다. 숏스케일 기타는 리듬 연주시 코드 잡는데 편하다.[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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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켄베커에서 트리뷰트 모델을 만든 적이 있다. 픽가드에 싸인이 있으며 리미티드로 출시.
http://www.gibson.com/Images/Products/AcousticGuitars/Round-Shoulder-Dreadnaught/Gibson/70th-Anniversary-John-Lennon-J-160E/Gallery-Images/RSJLMSNH1-Finish-Shot-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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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딩하고 남은 기타줄에 담배를 끼고 튜닝을 하고 있는 존 레논)
'''Gibson J-160E'''
Gibson엔도서로 조지와 함께 받은 기타. 분실된 기타가 최근에 경매에 붙여졌다. 깁슨과 Epiphone에서 시그네춰가 나왔으며 특징은 픽업으로 P90 픽업이 달린 것. 일렉기타 픽업이 달린 탓에 볼륨 노브와 톤 노브가 있다. 70주년 기념 모델도 출시. 위 기타는 70주년 모델이다.
레넌은 빈티지 선버스트 제품을 구매하고 후에 사이키델릭풍으로 페인팅하고 픽업을 뒷쪽으로 놓아 사용하다가 내츄럴 상태로 밀고 픽업을 원래 자리로 재위치한 다음 사용하였다. 3색으로 구성된 트리뷰트 모델은 상판을 라미네이티드가 아닌 솔리드로 구성하여 소리가 약간 다르다. 라미네이티드로 만들면 피드백이 줄어들고 소리가 약간 변한다. 마지막 행보는 오노와 같이 자신들의 그림을 각각 그려 침대에서 사용한것이다. 최근 다시 발견되어 경매에서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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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phone 1965 Casino'''
'''Revolution Casino'''
비틀즈 중기, 후기, 솔로활동까지 애용된 기타. 처음 Epiphone 카지노를 쓴 것은 스튜디오 녹음용으로 구매한 폴 매카트니이다. 이것을 보고 존도 조지와 함께 샀으며 조지는 다른 기타도 사용했지만 존은 1966년부터 Imagine 앨범을 녹음한 1971년까지 에피폰 카지노를 메인 기타로 사용했다. 구입 당시에는 빈티지 선버스트에 픽가드가 달려 있었으나 존은 픽가드를 제거하고 뒷판을 회색 페인트로 칠해서 사용했으며 인도에서 수행 후 돌아와서는 네츄럴 색상으로 리피니쉬한다. 어떻게 저걸 만들었냐면, 존은 1968년 인도수련중 어떤 사람에게 '악기의 도색을 벗겨내면 좋은 소리가 난다'라고 들어서 1968년에 직접 사포로 바디 도색만 벗겨냈다. 한때 에피폰에서 존 레논 시그니처 기타를 한정 판매했었다. 소리가 일반 카지노보다 날카로운 것이 특징. 메이드 인 제펜, USA, 차이나 3개로 나뉘며 차이나 빼곤 거의 구할 수 없다. 현재 일반버전은 3가지로 나뉘며 차이나에서 만드는 카지노와 일본에서 만드는 5ply 1965 Elitist 메이플 바디 카지노 그리고 3ply의 메이플 바디로 만드는 제펜 Elitist 1955 빈티지 아웃핏 등이 있다.(중간 중간 발매한 리미티드 버전은 제외, 빈티지 아웃풋은 현재 일본 내수용이며 직구로 구매하여야 되고 현재 생산이 중단된 상태로 보인다.)
시그너처를 총 3번 발매하였다. USA, Japen(내수용),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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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bson Les Paul Jr'''
뉴욕 공연에서 들고 나온 적이 있으며, 특이점은 넥 픽업이 찰리 크리스천 모델이라는 것과 픽업 셀럭터가 있단 점. 브릿지는 일반 P90이다. 깁슨 커스텀 샵에서 한정판매 되었다.[68]

5. 정치 성향



Power to the People ('''인민에게 권력을''')
음악적인 업적 외에도 정치적으로도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이자 사회주의자로서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사회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가 작곡했던 Imagine은 현대에 들어서는 거의 평화주의와 아나키즘의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을 정도다.
오노 요코를 만나기 전까지는 신시아 레논이 다른 남자와 같이 있었다는 이유 만으로 뺨을 때릴정도로 마초적이었다. 그러나 오노 요코를 만난 이후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페미니스트가 되었으며, 좌파 운동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69] 그가 1971년 작곡한 Power to the People여성주의, 사회주의적인 색체가 짙은 대표적인 노래이다.
좌파적인 운동을 하면서 보수 언론과 정치권과 수많은 마찰을 겪었으며, 이 때문에 말년에는 영국의 보수 언론을 피해 미국 이민까지 준비했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존 레논의 신좌파 운동 주도에 경계를 가지고 조치를 취하자, 그를 독재자라고 폭풍 디스하는 곡까지 발표했다.
다만 아나키스트였기 때문에 당시 68 혁명의 주류 기류였던 호치민마오쩌둥 옹호에는 비판적이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Revolution에서는 '''만약 너가 마오 주석의 사진을 들고다닌다면 누구와도 함께 할수 없을거야'''라고 마오쩌둥과 학생 운동권을 비판했다. Some Time In New York City에서는 리처드 닉슨마오쩌둥급의 독재자라면서 마오쩌둥을 돌려 깠다.[70]

6. 인기


한때 같은 밴드였던 폴 매카트니, 엘튼 존, 믹 재거, 로버트 플랜트, 프레디 머큐리와 함께 가장 상징적인 록스타중 하나로 사망한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의 조국이었던 영국에서는 존 레논이 가장 위대한 록스타로 꼽히는 일이 흔하다. 특히나 리버풀에서 존 레논은 과장하자면 거의 신과 비슷한 수준의 대우를 받아, 리버풀의 공항 이름까지 리버풀 존 레논 공항일 정도다.
송라이팅에 대한 엄청난 인기는 말할 것도 없고, 그의 가수로서의 커리어 역시 최고의 가수 리스트 top 5 안에는 무조건 들 정도로 뛰어나다. 같은 밴드 내의 폴 매카트니보다도 발성력이 독특하면서도 뛰어나다며 높은 인기를 끌고 있다.[71]
유튜브 구독자 수 역시 존 레논의 여전한 인기를 보여주는 수치이다. 존 레논의 공식 계정은 사후 40년이 지났음에도 140만명이 넘는 구독자수를 보유해 비틀즈 멤버들중 유튜브 구독자수 1위이다. 2021년 1월 기준으로 2위인 폴 매카트니가 84만명이며, 그 뒤로 조지 해리슨 42만명, 링고 스타 15만명 이다.
음악가 뿐만 아니라 독특한 개인 철학관 때문에 존 레논 그 자체를 존경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일례로 BBC의 조사에서 존 레논은 영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8위로 꼽혔다. 이는 영국에서 국부급의 대우를 받는 아서 웰즐리호레이쇼 넬슨보다도 높은 수치이며, 현 국왕인 엘리자베스 2세, 전후 영국 최고의 총리[72]로 자주 꼽히곤 하는 마거릿 대처보다도 높은 수치이다. 특히나 전후 영국인만을 대상으로 했을 때 존 레논은 윈스턴 처칠다이애나 스펜서에 이어 3위였다.
물론 에드 시런처럼 폴 매카트니의 광팬인 경우도 많지만, 후배 록 뮤지션중에서는 존 레논을 폴 매카트니보다 훨씬 더 존경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리암 갤러거가 존 레논의 광신도인데, 폴 매카트니도 좋아하는 형 노엘과 달리 리암은 존 레논을 독보적으로 사랑하는 수준이다. 그 외에 전설적인 메탈 밴드 블랙 사바스오지 오스본도 존 레논의 광팬이며, 이나 핑크 플로이드는 멤버 전원이 존의 팬들이다. 공산권 록 음악가들중에서도 의외로 존의 팬들이 많은데 러시아 록의 상징과도 같은 빅토르 초이 역시 존 레논의 노래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진보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은 연예인이다. 존은 1세대 좌파 연예인이라고 할 수 있고,[73] 그에 따라 사회주의, 평화주의, 아나키즘 성향의 노래를 여럿 작곡하는 등 진보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아나키스트들이 진보적인 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존 레논을 우상으로 삼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다만 현대에 들어서는 존 레논은 진보 연예인의 상징처럼 여겨질 정도라, 보수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존 레논의 정치관을 좀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7. 레논 벽


존 레논의 이름을 따온 민주화 운동 성지.홍콩체코 프라하 이렇게 2군데 있다.

7.1. 홍콩 레논 벽




7.2. 프라하 레논 벽




8.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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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 레논은 살아생전 미 육군 제2보병사단부대마크와 미 육군 Sergeant[74] 계급장, 임진강 정찰대(Imjin Scout) 마크 등이 박음질된 OG-107[75] 상의를 입고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1960년대에 있었던 존 레논과의 인터뷰에서 밝히길, 해당 셔츠는 몇년 전 독일의 한 공항에서 레인코트를 입고 기다리다가 만난 피터 제임스 라인하트(Peter James Reinhardt) 육군 하사가 존 레논을 알아보고 이런 옷을 좋아한다면 주겠다고 하여 나중에 자신의 육군 작업복을 소포로 보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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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트 하사의 실제 사진. 그는 1968년에 한국에 배치되어 근무했고, 그 시절의 전투복을 레논에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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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사진의 좌측 인물은 촬영을 위해 해당 상의를 대신 입은 라인하트 하사의 형제 앤드류(Andrew) 라인하트이다.
존 레논은 이것이 베트남전 참전용사의 것이라고 믿고 입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군복을 입은 이유가 베트남전 시기에 퍼져있던 반전의 메시지라는 분석도 있다. 당연히 이 부대는 한국에 주둔한 주한미군 소속이라 베트남에 간 적은 없다.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한반도의 상황을 생각하면 반전, 평화 메시지를 전하는 데엔 부족함이 없는 부대이긴 하다. 실제로 60년대 후반 DMZ는 북한군의 도발이 극심해 미군 사상자도 종종 발생할 정도로 위험한 지역이었다. 오늘날 이 레논의 무대 의상대로 세팅된 OG-107, 혹은 디자인이 거의 같아 대용품으로 쓰이는 OG-507[76] 셔츠는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 국내에도 판매 중이다.
  • 스티브 잡스도 존 레논의 팬. 실제로 아이팟터치 1세대의 32기가 모델 발표였던 1월 이후 출시된 아이팟터치 제품군의 표지에는 존 레논의 Imagine이 재생되고 있으며 존 레논의 앨범아트가 붙어있다. 또한 "내 비즈니스 모델은 비틀즈다"는 등의 평소 발언과 그의 전기 내용에 비추어 볼 때, 팬임이 확실하다.
  • 엘튼 존과 돈독한 사이를 지내기도 했다. 션 레논의 대부가 바로 엘튼 존이다.
  • 비 지스모리스 깁을 알코올 중독의 길로 이끈 경력이 있다. 나중에 모리스 깁에게 어쿠스틱 기타를 선물해주는데 이 기타는 비 지스의 This Is Where I Came In 앨범의 동명의 곡 뮤직비디오에 등장한다.
  • 비 지스배리 깁과는 대면하지 않은채 만난 적이 있다. 비 지스가 영국에 돌아온 1967년 3월 30일, 런던의 나이트클럽인 The Speakeasy Club에서 배리는 피트 타운젠드의 소개로 존 레논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레논은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의 커버 사진을 찍은 날이라 커버 속 코스튬을 그대로 입은 채 발코니에서 밖을 보고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있었다. 배리와 피트는 스카치 앤 코크를 마시고 있었고, 피트가 존을 소개해주겠다고하며 배리를 존에게 데려갔다. 피트는 존에게 "존, 이쪽은 비 지스의 배리 깁이야."라고 소개했고, 존은 뒤도 보지 않고 "Howyadoin"이라고 했고 곧바로 "Pleased to meet you"라고 한 후 다른 사람과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결국 배리는 존 레논을 뒷모습으로만 만나게 되었다.
  • 존의 두 아들들도 가수로 데뷔하여 뮤직비디오(샘 페킨파 감독)까지 찍었으나, 결국 자기 아버지보다는 못했다. 정확히는 전처 신시아 레논의 아들인 줄리안 레논오노 요코의 아들 션 레논이 있는데, 둘 다 가수로 데뷔했고. 앨범 판매량은 플래티넘까지 따낸 줄리안의 압승. 다만 평론가들의 평은 의 음반이 더 좋고 은 사업도 잘 되고 있기에 음악은 취미로 하는 수준.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 대해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을 토로했던 줄리안이지만 의외로 이복동생하고는 2007년 의 투어에도 게스트로 참여할 정도로 사이가 괜찮았다. 하지만 줄리안이 요코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하자 이 일방적으로 줄리안과의 연락을 끊었다고 한다. 결국 줄리안이 사과해 션이랑 같이 잘 지낼려고 노력하는 중이며, 지금은 사이가 많이 좋은 편이다. 줄리안은 나이차가 많이 나는 형제로, 무려 12살 차이다. 후에 비디오 게임 GTA5를 통해서 수록된 줄리안의 곡 "Too Late for Goodbyes"가 다시 주목받기도 하였다.
  • 존 레논은 숫자 9를 매우 좋아했으며 또한 특별하게 여겼는데, 실제로도 존 레논과 숀 레논의 생일은 10월 9일, 비틀즈가 처음으로 공연한 날도 2월 9일인 등 그의 삶 중 중요한 날들은 9라는 숫자와 연관되어있다. 심지어 존 레논이 죽은 날인 12월 8일은 그의 고향 리버풀 시간으로 따지면 12월 9일이였다. Revolution 9, One After 909, #9 Dream 등 노래에 9를 넣기도 하였다. 또 9번째로 만들어진, 일련번호 9가 새겨진 화이트 앨범을 특별히 자신이 소유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리마스터된 비틀즈 앨범의 발매일도 2009년 9월 9일이였다.
  • 그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는 영화 <존 레논 비긴즈 : 노웨어 보이>에서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다. 존 레논 역은 에런 존슨이 담당했다.
  • 중간 이름은 전 영국 총리인 윈스턴 처칠에게서 따온 것이지만, 강경한 좌파 성향이었던 존은 보수의 상징과도 같은 처칠에서 따온 자기 이름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나중에 오노 요코의 성을 따 개명했을때 중간 이름을 빼버리려고 했지만 기각당해 고치지 못했다. 상술했듯이 폴 매카트니와 집단자위를 했는데, 이 자위 룰이 상딸을 하면서 자기가 떠올린 사람을 외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존이 뜬금 없이 윈스턴 처칠(...)을 외쳤다는 사실이 폴 매카트니의 인터뷰를 통해 밝혀졌다.# 정말 어지간히 싫어한듯.
  • 오노 요코로 인해 백남준과도 나름 교분이 있었다고 한다. 요코와 슈아 아베와 함께 넷이서 같이 나온 사진이 있다.
  • 한국의 가수 한대수와 만난적이 있다. 한대수가 1978년 뉴욕의 한 식당에 들렀다가 우연히 존을 보았고, 그가 존에게 훌륭한 음악을 들려줘서 고맙다고 인사하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 구글에서는 2010년 그의 탄생 70년을 기념해 특별히 로고를 만들었는데, 한글날과 겹치는 탓에 한국에서는 짧은 시간밖에 볼 수 없었다. 영상
  • 2012 런던 올림픽 폐막식 무대를 퍼포먼스와 함께 존 레논 생전에 녹화했던 Imagine 영상을 리마스터링해 장식했다. 영상. 개막식을 장식한게 폴 매카트니라면, 존 레논은 폐막식을 장식한 셈.
  • 평소 자신의 얇은 목소리에 콤플렉스가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남자답지 못하다며 싫어해서 비틀즈 시절에는 대부분의 곡에 더블트랙으로 보컬을 녹음했다. 대표적인 트랙이 A Hard Day's Night 스테레오 판에 수록된 'If I Fell'
  • 뉴욕 센트럴 파크에 있는 그의 묘지를 포함해 세계 각지에는 그를 기념하는 기념물이 들어서있다. 이중 매우 특이한 곳에 있는 기념물이 있는데 바로 쿠바 아바나에 있는 레논 공원. 2000년에는 레논 사망 20주기를 맞아 등신대의 레논 동상도 세워졌는데, 제막식에는 한때 비틀즈를 '이기적인 소비주의의 상징'이라고 강하게 비난한 적이 있던 피델 카스트로도 참석했다. 여담으로 이 동상의 안경을 누군가 훔쳐가는 일이 하도 잦아서 자원봉사자들이 안경을 보관한다고 한다.
  • 존 레논의 치아를 낙찰받은 캐나다의 한 치과의사가 2013년에 치아에서 DNA를 추출하여 존을 복제인간으로 부활시키는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물론 팬들의 반응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 영국의 유명 자동차 메이커인 롤스로이스와 '악연'이 있다. 롤스로이스는 자사의 정숙함, 고급스러움이란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인사에게만 차량을 판매하였다. 독재자와 같은 인사는 말할 것도 없고, 연예인도 이미지가 '경박한' 셀러브리티 유형의 스타에게는 판매하지 않았다. 하지만 존 레논의 경우엔 비틀즈라는 유명세를 롤스로이스도 포기하기가 아까워서 차량(롤스로이스 팬텀5)을, 그것도 다른 주문을 제쳐두고 레논에게 먼저 판매했다. 이런 뒷배경을 모를리 없던 레논은 당연히 아니꼽게 보았고 자동차에 장난(?)을 쳤다. 그 장난이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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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에 노란 칠을 하고 여기에다 현란한 아프리카 토속 문양을 그려버렸다. 말 그대로 롤스로이스의 이미지에 먹칠을 한 격. 이 자동차는 이후 스미소니언 재단에 기증하였고,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 65년도 쯤부터 모자 쓰기를 좋아했다.
  • Imagine같은 노래에서 볼 수 있듯, 진보주의적이고 무정부주의적 사상가로도 유명했으며 이로 인해 한창 폴 매카트니와 싸우던 시절 폴 매카트니가 사회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것을 보아 보수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며 비판한 적이 있다.[77]
  • 채식주의자의 상징과도 같은 폴 매카트니에 밀려 잘 안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역시 채식주의자였다. 다만 종교적인 이유로 채식을 했던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나 정치적인 이유로 채식을 한 폴과는 달리, 존은 건강 상의 문제로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고기를 좋아했던 존은 결국 1970년대부터는 채식주의를 포기하고 허용 범위에서만 육식을 하는 플렉시테리언 정도로 돌아섰다고 한다.
  • 워낙 후대 밴드에 인신 공격에 가까운 수준의 악담(...)을 늘어놓는걸로 유명해 당최 좋아하는 음악가가 있었긴 했는지 의심스럽지만, 생전 인터뷰를 들어보면 후대 밴드 중에서는 레드 제플린[78]데이비드 보위를 좋아했던듯하다. 선대나 비슷한 시기 활동했던 음악가 중에서는 에릭 클랩튼, 밥 딜런, 엘비스 프레슬리 등을 좋아했다. 특히나 척 베리를 무척이나 사랑해서 "로큰롤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자면 척 베리라고 불러야한다"라고 할 정도로 좋아했다.
  • 좋아하는 폴 매카트니의 노래로는 "Here, There and Everywhere", "For No One" 등이 있었다. 한창 존과 폴의 사이가 안좋았을때에는 그 외에 폴 매카트니의 곡들은 듣기도 싫다고 무진장 깠다. 페퍼 상사 앨범은 폴 매카트니가 쓸데없이 음악 더빙을 해 곡들을 망쳤고, 화이트 앨범은 폴 매카트니가 너무 스튜디오를 혼자서 오래 썼고, 애비로드는 메들리 구성이 앨범을 망쳤다며 폴 매카트니 때문에 자기가 만든 비틀즈 앨범이 쓰레기가 되었다며 비난한 바 있다(...).
  • 타 뮤지션들의 노래로는 척 베리, 리틀 리처드 등 로큰롤 장르의 노래를 좋아했다. 밥 딜런, 애니멀스의 노래도 좋다고 평가했으며, 후대 밴드의 음악중에서는 Stairway to Heaven을 칭찬했다. 생전에 퀸을 언급한 적은 없었지만 죽기 직전에 퀸의 노래를 흥얼거린적은 있다고 한다.
  • 사생활 면에서 워낙에 성격이 괴팍했던지라 이와 관련된 레논의 썰은 일명 '존레동화'로 불리며 유저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9. 디스코그래피



9.1. 앨범



9.2. 싱글



9.2.1. 빌보드 1위



9.2.2. 빌보드 2위


  • Woman (1981)

9.2.3. 빌보드 3위~10위


  • Instant Karma! (We All Shine On) (1970)
  • Imagine (1971)
  • #9 Dream (1975)
  • Watching the Wheels (1981)
  • Nobody Told Me (1984)

9.2.4. 빌보드 11위~20위



10. 어록


음악 활동 뿐만 아니라 히피 사상가, 사회 운동가로도 활동한 사람이라 많은 어록을 남겼으며, 이 때문에 그의 명언은 종종 SNS나 방송에서도 회자된다. 히피답게 평화사랑에 관한 어록이 많다.

'''You may say that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당신은 저를 몽상가라고 부르겠지만, 저 혼자만이 꿈꾸는 것이 아니에요. 언젠가는 당신이 저희들과 함께하기를 바래요, 그러면 세상은 하나가 될 거예요'''

'''A dream you dream alone is only a dream. A dream you dream together is reality.'''

'''혼자서 꾸는 꿈은 몽상이지만, 우리 모두가 꾸는 꿈은 현실이다.'''

It's weird not to be weird.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려는 것이 더 이상하다.

Time you enjoy wasting, was not wasted.

당신이 낭비된 시간을 즐겼다면 그것은 낭비된 시간이 아니다.

Everything will be okay in the end. If it's not okay, it's not the end.

모든 것의 끝에는 모든 것이 잘 돌아간다. 만약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끝이 아니다.

War is over ... If you want it.

전쟁은 끝났다 ... 당신이 원한다면.

If everyone demanded peace instead of another television set, then there’d be peace.

만약 모두가 TV 하나를 장만하려는 대신 평화를 장만하려고 든다면 평화가 만개할 것이다.

Living is Easy with Eyes Closed, Misunderstanding all you see.

눈을 감고 사는 인생은 모든 것을 오해하기 때문에 쉽다.

I can’t wake you up. You can wake you up. I can’t cure you. You can cure you.

내가 당신을 깨워줄 수는 없다. 당신만이 당신 스스로를 깨울 수 있다. 난 당신을 치료할 수 없다. 오직 당신만이 당신을 치료할 수 있다.

Art is only a way of expressing pain.

미술은 고통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You’re all geniuses, and you’re all beautiful. You don’t need anyone to tell you who you are. You are what you are.

당신은 천재이고 아름답다. 당신은 당신이 누구인지 말 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당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We live in a world where we have to hide to make love, while violence is practiced in broad daylight.

우리는 대놓고 사랑하기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다. 대신 이 세상의 낮에는 폭력이 공공연히 일어난다.

Reality leaves a lot to the imagination.

현실의 많은 것들이 상상에서 비롯된다.

Happiness is a warm gun.

행복은 따뜻한 총이다.

When I was 5 years old, my mother always told me that happiness was the key to life. When I went to school, they asked me what I wanted to be when I grew up. I wrote down ‘happy’. They told me I didn’t understand the assignment, and I told them they didn’t understand life.

내가 5살일 때 우리 엄마는 행복이 삶의 열쇠라고 늘 말하셨다. 내가 학교에 갔을 때 선생들은 내가 자라서 뭐가 되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행복"이라고 답했지만, 그들은 내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난 그들이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해줬다.

Peace is not something you wish for; It’s something you make, something you do, something you are, and something you give away.

평화는 당신이 원해야할 것이 아니라, 당신이 만들어야할 것, 해야할 것, 그 자체인 것 그리고 줘야할 것이다.

It matters not who you love, where you love, why you love, when you love or how you love, it matters only that you love.

당신이 누구를, 어디서, 언제, 어떻게 사랑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당신이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Count your age by friends, not years. Count your life by smiles, not tears.

당신의 나이를 햇수가 아니라 당신의 친구로 세어라. 당신의 삶을 눈물이 아니라 웃음으로 세어라.

Love is a promise, love is a souvenir, once given never forgotten, never let it disappear.

사랑은 약속이자 기념품과도 같다. 한번 주어지면 결코 잊지 않으니, 결코 그것을 잃어버리지 마라.

We need to learn to love ourselves first, in all our glory and our imperfections. If we cannot love ourselves, we cannot fully open to our ability to love others or our potential to create. Evolution and all hopes for a better world rest in the fearlessness and open-hearted vision of people who embrace life.

우리는 모든 영광과 불완전성 속에서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가장 먼저 배워야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나 창조의 잠재성을 결코 얻을 수 없다. 진화와 더 나은 세계를 위한 희망은 삶을 열린 태도로 받아들일것이냐, 혹은 닫힌채 내버려둘것인가에 달려있다.

The more I see, the less I know for sure.

당연하지만 더 많이 볼수록 더 모르는 것이 많아진다.

If everyone could just be happy with themselves and the choices people around them make, the world would instantly be a better place.

만약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과 주변 사람들의 선택에 대해 만족할 수 있다면, 세상은 즉시 더 나은 곳이 될 것이다.

There are no problems, only solutions.

세상에 문제라는 것은 없다. 해결책만이 있을 뿐이다.

How can I go forward when I don’t know which way I’m facing?

내가 직면한 상황을 모르고 있다면 어떻게 전진할 수 있겠는가?

Everything is as important as everything else.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소중하다.

All you need is love

당신이 필요한 모든 것은 사랑이에요

I believe in God, but not as one thing, not as an old man in the sky. I believe that what people call God is something in all of us. I believe that what Jesus and Mohammed and Buddha and all the rest said was right. It's just that the translations have gone wrong.

나는 신을 믿는다. 하늘 위에 떠있다는 노친네 말고. 나는 사람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속에 잠재되어있다고 믿는다. 난 예수 그리스도와 무함마드, 그리고 부처와 나머지 모든 신들이 모두 옳았다고 믿는다. 그냥 그들의 가르침이 곡해되었을 뿐이다.


[1] 후일 베트남 전쟁이나 지원하는 왕실이 주는 훈장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다며 반납했다. 비슷한 성격이었던 조지 해리슨 역시 자신이 받은 최악의 상이 바로 MBE 왕실 훈장이라고 했지만, 반납하지는 않았다. 여담으로 1966년 일본 공연 당시 인터뷰에서 기자가 '왕실 훈장을 받은 기분이 어땠냐'라고 했을때, 링고는 좋았다고 한 반면 존과 조지는 상 받으려고 일찍 일어나야해서 피곤했다고 말했다. 정치 성향과 상관 없이 직설적인 성격 답게 원래부터 그런 훈장을 받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2] 원래는 존 윈스턴 레논이였지만 오노 요코와 결혼한 뒤 개명했다. 원 발음을 고려해 '존 레넌'이라고도 표기하지만 존 레논이 더 많이 쓰이는 표기다. 지상파나 언론에서는 외국어 표기법에 맞춰 '존 레넌'이라고 하나, 대중들 사이에서는 '존 레논'이 더 통용화되어있어 표기법 정리가 필요한 상황.[3] 이후 미국에서 거주했지만 시민권자가 아닌 영주권자였기 때문에 최종 국적은 영국이다. 영국보수언론기레기들의 악의적 선전에 지친데다가, 뉴욕이라는 도시가 마음에 들었는지 미국 국적을 딸려고 했었으나 결국 국적 취득 코앞까지 갔다가 암살되고 말았다.[4]잉글랜드 머지사이드 리버풀.[5] 그가 태어난 곳인 리버풀 모성병원은 1995년 리버풀 여성병원과 합병된 이후 문을 닫았고, 원래 쓰던 건물은 현재 학생 숙소로 쓰이고 있다.[6] 사인은 마크 채프먼의 총격으로 인한 과다 출혈이다.[7] 또한, 들 사이에서도 존은 상당히 높은 비중을 차지했었다. 특히 비틀즈 초기 아이돌 시절에는 그가 사실상의 리더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비중이 매우 높았다.[8] 혼인 관계였으나 이혼. 최근까지 노엘 찰스와 결혼하여 살다가 2015년 4월 1일 사망했다.[9] 젊었을 때 사진을 보면 똑같이 생겼다.[10] 후술하겠지만 존은 줄리안을 잘 돌봐주지 못했다. 오히려 폴 매카트니가 잘 돌봐주었다고...[11] 외모는 수염을 기르면 존 레논과 비슷하지만, 수염을 깎으면 어머니 쪽을 많이 닮았다.[12] 다행히도 많이 돌봐 주지 못하였던 줄리안과는 다르게 오노의 아들인 덕인지, 션은 잘 돌봐 주었다. '''다만 션이 5살일 때, 존이 암살당했다.'''[13] 국내에서는 안경 쓴 이미지가 많이 굳어졌지만, 이 시기의 존 레논은 상당한 미남이다.[14] 존 레논은 좋게 볼 수 없는 사람. 존의 유년시절 그를 떠난 것도 모자라, 훗날 비틀즈의 인기에 힘입어 어느 소녀팬과 결혼(!)한다.[15] 노래제목인 Strawberry Fields Forever가 여기에서 나온것이다.[16] 록엔롤 명예의 전당에서 폴이 연설하는걸 들어보면 벤조가 아니라 우쿠렐레라고 한다. "존의 어머니 줄리아 레논은 빨간머리의 우쿠렐레를 치는 멋진 예쁜 여성이였어요. 그런 여성은 처음 봤어요. 존은 어머니에게 우쿨레레 코드를 배워 치는데 저에게 처음으로 기타코드를 배웠지요."[17] 존은 이모 미미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미미가 보수적이어서 존의 삶을 이해하진 못했음에도 사이는 상당히 좋았다고. 심지어 다른 가족들과 관계를 끊으면서도, 미미하고는 죽을때까지 매주 연락을 했다고 한다. 미미는 존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도 10년을 더 산 뒤 1991년 타계했다.[18] 대학밴드 급이라고 볼 수 있다. 고등학교 이름이 "쿼리 뱅크(Quarry Bank)"였기 때문에 이름을 쿼리+멘(Men)으로 지었다.[19] 이 당시 존은 폴이 기타를 왼손잡이로 잡는 걸 보고 "기타도 똑바로 못 드는 놈이 뭘 하겠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실력은 인상적이었고, 특히 폴이 자작곡을 만드는 것과 기타를 조율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20] 본래 미술학도였던 자신의 정체성과 독일인 애인과의 문제 등이 겹쳤다. 비틀즈 항목으로.[21] 존 레논은 폴의 멜로디 메이킹 실력을 폴 매카트니는 존의 노랫말을 쓰는 실력을 높이샀다고 한다.[22] In My Life의 경우 여전히 논란이 분분한 곡인데, 존의 생전 그의 곡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폴 매카트니가 자신의 곡이라며 주장하고 나온 것. 사실 폴은 존이 죽기 전에도 자신이 작곡한 곡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비틀즈 시절 그들이 쓴 모든 곡들은(심지어 Yesterday처럼 온전히 개인의 창작물인 경우에도) Lennon-McCartney로 표기되어 진위 여부를 가리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일단 작사가는 존이라는 것이 중론. 일부 팬들은 메인 보컬이 존이라는 것과 특유의 서정적인 스타일 등을 근거로 들며 존의 곡임을 주장하지만, 일각에서는 폴이 괜히 거짓말까지 해가며 200곡들 중 한 곡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야했겠냐며 반론한다. 어떤 이들은 아예 작곡가가 누구인지를 크게 신경쓰지 않기도 하고. http://cafe.naver.com/thebeatlemania/76433 같이 읽어보면 좋을 포스팅.[23] 근데 어째 사과 내용도 예수쟁이들을 비꼬는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비틀즈/예수 발언 항목으로.[24] 당시 'Rooftop Concert' 녹음에 참여한 Alan Parson(우리가 아는 알란 파슨즈 프로젝트의 리더)은 "내 인생에서 가장 흥분되고, 대단한 날이었다"고 후에 이야기했다.비틀즈 팬들에게도 말기의 비틀즈 공연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영상이다.[25] 이 백마스킹에 근거해 '비틀즈 노래를 거꾸로 들으면 악마숭배적 메시지가 관측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백마스킹이 화제가 된 또다른 노래로는 Revolution #9이 있다.[26]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각자가 쓴 미완성 곡을 하나로 연결해서 만든 노래다. 이와 반대로 두 사람이 같은 앨범 안에서 같은 주제로 다른 두 곡을 쓴 경우로, 존의 Strawberry Fields Forever와 폴의 Penny Lane이 있다.[27] 이 곡과 폴 매카트니의 'Penny Lane'은 사실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보다도 먼저 발표된 싱글이다. 자세한 내용은 Magical Mystery Tour 항목으로.[28] 이 곡 이후 존 레논은 'Walrus'라는 가사를 곡에 자주 사용하는데, 이유없이 등장하는 경우도 많지만 주로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경우도 잦다. 'Glass Onion'에서는 'The Walrus Was Paul'이라면서 폴을 까기도 했다.(해당 구절의 내용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착한 등장인물로 나온다고 알고 있던 Walrus가 사실 악당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폴은 착해 보이지만 사실은 악당이다'라는 의미. 곡 자체도 폴을 까기 위해 만든 곡이다. 폴이 평소에 자신의 노랫말을 짓는 실력을 부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존 레논이 "폴이 만든 가사는 '유리 양파'라는 단어처럼 뭔가 그냥 있어보이는 단어를 붙여놓았을뿐 사실 아무런 의미없는 가사일 뿐이다."라면서 폴을 디스하는 내용) 음모론자들은 이를 폴이 죽었다는 확실한 증거로 들이밀기도 한다. 왜냐하면 저 가사를 직역하면 "(사실) 왈루스는 폴이었지"라는 뜻인데, 왈루스는 위에서 적은 존의 별명(해마)이기도 하지만, 그리스어로 '''시체'''라는 뜻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스어에 walrus 라는 단어는 없으므로 이는 루머로 추정된다. 일단 폴 매카트니 사망설 자체가 아무 근거없는 음모론에 불과하다.[29] 2015년 4월,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75세.[30] 사망한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대신할 비틀즈의 후임 매니저 선정에 대한 멤버들의 이견 불일치를 말한 것으로 현재 시점에서 비틀즈 해체의 가장 핵심적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31] 일명 베드인 사건. 반전 시위의 일환이었다.[32] 비틀즈 문서로. 사실 존의 인생사와 우여곡절 자체를 비틀즈와 구분지어 생각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33] 요코가 와서 비틀즈 리허설 때 기타는 어떻게 치고 여기서 이렇게 쳐라 노래 맘에 안든다 다시해라 하는 잔소리꾼 역할에 기타 앰프에 앉아서 자신의 행위예술까지 했으니 빡칠만 하다. 존이 Oh! Yoko 녹음 현장 녹화한 영상을 보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34] 원래부터 존은 자의식이 강했는데 밴드 성향 때문에 자신이 작곡한 곡들의 멜로디가 폴의 방향으로 대중성 있게 수정되면서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예로 Help!의 오리지널 템포는 엄청 느리고 우울한 멜로디이다. 존 내면을 드러내는 가사들을 가지고 폴이 로큰롤 사운드를 입혀 대중적인 히트곡으로 탈바꿈시킨 작품 중 하나. 본인이 비틀즈 활동시 발매한 노래들은 대부분 극혐이라고 셀프 디스 한 적도 있다. 이 점이 마음에 남았는지, 훗날 폴 매카트니는 리버풀 공연에서 Help!를 존 레논이 의도한 버전으로 편곡하여 커버해 무대에 선보이기도 했다.[35] 해당 사진은 Abbey Road 앨범 자켓 촬영 당일인 1969년 8월 8일에 찍힌 것이며, 비틀즈의 공식적인 해체 발표는 1970년 4월 10일이지만, 밴드 멤버 네 명이 마지막으로 모인 건 1969년 8월이었다. 이후 넷이 한꺼번에 모이는 일이 더 이상 없었다. 둘이 서로를 마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상상해 보는 것이 사진의 감상 포인트라 할 수 있다. 사실 험악해보이는 분위기와 다르게 다른 사진을 보면 웃으면서 잡담을 나누고 있다. 애비 로드를 마무리할 당시에는 멤버들이 '''이제 끝이 왔구나''' 생각해 꽤나 허심탄회한 분위기로, 화이트 앨범이나 Get Back 세션 당시의 그 험악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꽤 멀었다. 또, 사진에서 폴이 눈을 찡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래 서양인들은 진지하게 이야기 할 땐 저렇게 이야기한다. 표정과 리액션이 자유분방하고 다채롭기 때문이다. [36] 그래도 옥상 공연이나 스튜디오에서의 영상을 보면 녹음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사이가 안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애플사의 경영과 같은 음악 외적인 부분에 대해서 대화를 나눌 때 분위기가 험악해진 편.[37] 상기된 인터뷰에도 나와있지만, 독설을 많이 하고 직설화법을 자주 구사하던 존도 링고만큼은 욕하지 않았다.[38] 이 녹음을 담은 부틀렉이 존재한다. 제목은 "A Toot and a Snore in 74"로 위키피디아에도 항목이 개설되어 있다. 다만 존 레논과 링고 스타가 약과 술에 취해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기에 연주 자체는 형편 없었다. 레코딩의 질 보다는 역사성으로 인해 높게 평가받는 부틀렉이다.[39] 이후에 밝혀진 일화에 따르면 폴의 음반이 나올 때마다 꼭 찾아 들었다던가, 오노 요코가 폴에게 '존은 당신을 정말 좋아했어요'라고 말한 부분들을 살펴보면 한참 싸우는 와중에도 폴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었던 것 같다.[40] 훗날 Cloud Nine을 발표한 1987년, 조지는 존 레논의 영향을 축소 서술한 이유를 질문 받자, "제가 존 레논에게 미친 영향도 스스로 상당 부분 생략해서 서술했어요. 저는 상호 영향을 쌤쌤이 치기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라고 답하면서 오히려 가까운 관계였기에 일일이 서술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음을 시인했다.[41] 사실 존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심한 근시를 갖고 있었으며, 비틀즈 초기에는 안경을 쓰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1966년 무렵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42] 이는 다른 어떤 비틀즈 멤버들의 솔로 1위곡 기록보다 적은 수이다. (폴 9곡, 조지 3곡, 링고 2곡. 링고는 존과 동점이라 생각되겠지만 링고의 1위곡들은 모두 그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1위에 올랐으며, 존 사망 직후 그의 곡들에 관심이 쏠리며 1위에 올라간 스타팅 오버와 같이 취급할 수는 없다.[43] 그 외에도 히틀러, 존 F. 케네디, 예수, 만트라, 성서, 마술 등등을 믿지 않는다는 가사를 실었다.[44] 다만 존이 오노 요코의 알선으로 메이 팡과 동거하던 시기에 줄리안과 함께 자주 시간을 보내주고 부자간의 정을 쌓는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물론 존이 오노 요코와 화해하면서 모두 끝나버렸지만...[45] 그 옆은 아내 오노 요코. 1980년 11월 2일 촬영한 사진으로 '''이 사진을 촬영한 후 36일 뒤 사망한다.'''[46] 채프먼은 총 5발의 총알을 쐈는데 첫 발은 빚나갔고 3발은 레논의 몸을 완전히 관통했으며 나머지 한 발은 어깨 부위에 박혔다. 심장을 맞진 않았으나 할로포인트의 위력에 왼쪽 허파와 심장 주위의 무수한 혈관들이 파괴되어서 사실상 4발 중 1발만 맞고 바로 지체없이 병원에서 소생술을 시행했더라도 결국 사망했을 것이라는게 담당의사의 결론이었다.[47] 주간조선 2010-10-18 《존 레넌 탄생 70년·암살 30년 아직도 눈물 흘리는 뉴욕!》[48] 중앙일보 2002-02-23 [49] 총에 맞은 당일 하루 전날, 레논은 자신의 이모인 미미에게 어린아이같은 말투로 "내일 만나요 미미, 집에 갈게요."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미미는 그 다음날 일어나서 방송에서 레논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고 한다. 인터뷰를 보면 슬픔에 가득한 눈으로 인터뷰하는 미미를 볼 수 있다.[50] 잘못된 정보가 하나 기재되어 있는데 레논은 2발이 아니라 4발의 총탄을 맞아 사망했다. 아마 급작스러운 속보이기도 하고 정확한 정보가 나오기 전이라 약간의 오류가 있는듯.[51] 미국 정부는 당시 헨드릭스의 집에 이사했던 것을 찝어서 마약문제와 여려가지 자잘한 것들을 시비 걸면서 이민을 거부하였다. 사실 이민을 거부한 이유는 존 싱클레어의 자유를 보장하라 라는 사회운동을 하며 젊은이들이 정부에 반감을 가지게 해서 높으신 분들이 맘에 안들어 했다는 것이 누가봐도 정설이다. 하지만 전남편이 미국인이였던 오노 요코는 미국 이민이 신청되었다고 한다. 살해당한 그날까지도 레넌은 이민을 하려고 변호사와 상담을 하며 애썼다. 그전에 했던 마약들을 문제 삼았기에 오노 요코와 헨드릭스가 죽은 집에서 대청소를 했다고 인터뷰한다.[52] 돈 맥린의 아메리칸 파이에 등장하는 가사인 "the day the music died"(음악이 죽은 날)에서 따온 표현. 실제로는 1959년 2월 3일, 즉 비행기 추락으로 버디 홀리, 리치 발렌스, 빅 바퍼가 한꺼번에 객사한 날을 가리킨다.[53] 사실 오노 요코에게도 폭력을 휘두른 적이 있다.[54] Mind Games 녹음을 시작하고 존과 오노 요코가 이별하기로 결정하면서 오노는 존에게 비서 메이 팡을 소개시켜준다. 메이 팡은 존에게 이나 줄리안 같은 사람들과 나은 관계를 쌓을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고 존은 그녀의 말을 납득한다. 이후 존이 다시 오노와 화해하면서 흔히 말하는 잃어버린 주말은 끝나게 된다.[55] 물론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의 서양 열강 식민지에서 살다가 일본의 침략을 당한 유럽계 이주민들에게 일본은 침략자였고 그 이주민들의 후손들 또한 일본을 증오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들의 입장일 뿐, 서유럽 본토인들에게는 남의 일에 불과했다.[56] 아예 이 소문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까지 있을 정도.#[57] 다만 같이 성행위는 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폴 매카트니의 말에 따르면 둘이서 자위 행위를 하여 누가 더 오래 참는지 내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58] 참고로 조지 역시 존 못지 않는 직설적인 성격으로 유명한데 이 때문에 사이가 더 틀어졌을 확률이 높다. 존 레논은 관련 인터뷰에서 오노 요코를 욕했던 조지가 마음에 안들었다고 밝혔고 아예 1970년대 말기에는 편지 한통 안쓸 정도로 사이가 틀어졌다. 이 때문에 조지는 후일 존과 화해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삼았다고 한다.[59] 존은 이 둘을 따라쟁이라고 마구 욕했다. 롤링 스톤스의 펑크함은 마음에 들지만 결국 모든 것이 표절이라는 식으로 롤스의 업적을 폄하했다.[60] 핑크 플로이드의 관계자가 비틀즈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입털기를 시전했는데 이에 존이 극도로 빡치면서 핑크 플로이드와의 만남에서 로큰롤 기본도 안되어있는 따라쟁이라고 폭언을 퍼부었다. 이 때문에 평소 존 레논을 존경했던 핑크 플로이드 멤버들은 엄청나게 충격을 받게되고 아예 시드 바렛의 정신병이 존 레논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61] 그나마 후대 밴드 중에서는 레드 제플린 정도는 인정했지만, 그 외의 밴드는 거들떠도 안보고 비난하는 경우가 잦았다.[62] 다만 예외도 있는데 롤링 스톤즈키스 리처즈AC/DC의 말콤 영은 팀 내 리드 기타 포지션을 맡은 인물들과 동급 내지 더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63] 롤링 스톤 선정 100대 기타리스트에서 11위에 랭크되어 있다.[64] Day Tripper 등...[65] 이러한 면은 링고 스타와 유사하다.[66] 사실 리듬 기타 포지션 자체가 테크닉을 중요시하는 부분이 아니기에, 크게 별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대표적으로 키스 리처즈 역시 테크닉적으로 뛰어나다기보다는 리프 창작, 작곡에 있어서 최고 수준의 평가를 받는다.[67] 숏스케일 기타는 펜더사에선 재규어 머스탱 같은 모델들이다. 일반적인 프렛간격이 아닌 더 짧은 간격을 사용함으로 특유의 짧은 서스테인 그리고 작은 장력이 주는 소리 등이 특징이다. 위해서 서술했다 싶이 본인이 리듬기타 파트인데 손가락이 짧다면 숏스케일 기타를 고려해보는것도 좋다.[68] 쥬니어 모델은 원래 1픽업 1볼륨 1톤이다. 스페셜처럼 되어있다는점이 특별하다.[69] 다만 오노 요코를 만나기 이전부터 존 레논은 리버풀 노동 계급 출신이었던 만큼 진보적이고 반항적인 정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오노 요코를 만난 이후 그런 성향이 더욱 과격해지고 공공연하게 드러내어지기 시작한것.[70] 그 당시 미중관계는 2021년 현재와 달리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우호적인 상황이었다.[71] 그런데 정작 존 본인은 자신의 얇은 목소리에 대해 컴플렉스가 있었다고 한다.[72] 다만 이 부분은 좌우파나 사회적 계층에 따라 관점이 상당히 갈린다. 대처 시기 큰 피해를 입은 노동계급이 많은 잉글랜드 북부와 스코틀랜드에서는 거의 범죄자 취급을 받는다(...).[73] 물론 이전에도 헨리 폰다프랭크 시나트라처럼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연예인들은 많이 있었지만, 존 레논처럼 적극적으로 사회 저항 운동을 벌인 사람은 별로 없었다. 후대 연예인중에서는 호아킨 피닉스, 로저 워터스 등이 비슷한 커리어를 보이고 있다.[74] 국군 공식 번역 및 계급 대치에 따르면 육군 병장이지만, 실제 역할 및 지위를 고려하면 육군 하사에 더 가깝다.[75] 1950년대부터 베트남 전쟁 종전 직후까지 사용된, 미군이 채택한 전군 공용 민무늬 작업복.[76] 베트남 전쟁 종전 직후부터 80년대까지 쓰인, OG-107의 후신인 미군 최후의 민무늬 작업복. 이후 채택된 것이 그 유명한 위장무늬 전투복인 BDU다. OG-107은 폐지된 지 오래된데다 베트남 전쟁 때 소모된 게 많고 재현자들 위주로 많이 사갔기 때문에 가격도 비싸고 순면 재질이라 합성섬유가 들어간 507보다 광택이 덜하고 후줄근해 보여서(대신 흡습성과 속건성, 방염성은 107이 더 높다.), 대용품으로 507이 많이 쓰인다.[77] 그러나 폴 매카트니는 1970년대에 사랑노래들을 주로 냈을 뿐 존 레논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기에 약자 보호, 환경문제, 동물 보호 문제 등에서 매우 진보적인 사고관을 가진 인물이다. 솔로시절 존이 폴과 워낙 오랫동안 교류를 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인 듯. 당시 사회비판적인 노래를 내던 존 레논과 비교되어 상업적 성공을 위해 사랑노래만 낸다며 평론가들이 폴을 까자 폴은 Silly Love Songs를 만들어서 그 해 연말차트 1위를 찍어버린다...[78] 폴 매카트니도 좋아한 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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