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SL
ADSL
Asymmetric Digital Subscriber Line
비대칭 디지털 가입자 회선
1. 개요
일반 전화선을 사용하여 고속으로 데이터 통신을 할 수 있는 기술인 DSL(Digital Subscriber Line)의 하나. 음성 전화와는 별개의 주파수 대역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비대칭'답게 다운로드 회선에 더 많은 대역폭을 할당한 것이 특징.
1988년 미국의 벨코어 사가 VOD(주문형 비디오) 서비스를 위해 개발한 기술이다. 이 때문에 ADSL은 업로드 속도보다 다운로드 속도가 빠른 비대칭 방식이다. VOD 서비스에서는 딱히 업로드 속도가 빠를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나 통신망을 까는데 돈이 들었던것은 물론이고 이 당시 개인용PC의 용량이 동영상을 마음대로 재생, 다운로드 받기에는 현저히 부족했던지라 그야말로 혁명적으로 빠른 속도였음에도 상용화에는 실패했다. 그렇게 몇 년간 묻혀 있다가 1990년대 후반 초고속 인터넷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이 기술이 다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결국 초기의 초고속 인터넷을 보급하는 기술이 되었다.
특히 ADSL은 90년대 후반 이후 국내에서 초고속 인터넷을 전국민에게 보급한 역사적 기술이며, 2천년대 IT 정보화 강국 한국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한 일등 공신이라 할 수 있다. 또 당시만 해도 최초로 상용화 시키는 일이었기에 당시 개발자들은 맨땅에 헤딩하는 정도의 공밀레 작업을 하였다.
2. 원리
아날로그 유선전화는 두 가닥이 서로 꼬여 있는 형태로 된 구리선인 연선(撚線, twisted pair)으로 전화국에서 집의 전화기까지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아날로그 전화망에서 음성을 전달하는 데 사용하는 주파수 대역폭은 고작 300 Hz에서 3400 Hz 사이의 3 KHz 정도, 디지털화된 전화망에서는 보통 4 kHz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구리로 되어 있는 선은 그 이상의 주파수로 된 전기신호도 전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청 영역을 벗어나는 25 kHz 이상의 주파수를 적극 활용하여 넓은 주파수 대역폭으로 통신을 하게 되면 기존의 모뎀에 비해 고속의 데이터 전송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클로드 섀넌의 정보이론에 따르면, 대역폭은 정보를 실어나를 수 있는 능력과 양의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DSL 방식의 기초 아이디어이다.
ADSL은 DMT(Discrete Multi-Tone)라는 변조방식을 사용하여 디지털 데이터를 아날로그 신호로 변환한다. 보통 25 kHz에서 2000 kHz 사이를 사용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고주파 신호는 스플리터(splitter)에서 저주파 신호(전화통화 음성 신호)와 합쳐져서 구리선을 타고 전송된 뒤, 전화국 또는 집에 있는 스플리터에서 다시 분리되어 처리된다. 이 덕분에 DSL 서비스에서는 전화를 하면서도 동시에 인터넷을 할 수 있다. 스플리터가 필요 없는 UADSL이라는 기술도 나왔지만, 속도가 느려서 국내에서는 묻힌 듯하다.
단 주파수가 높아질수록 신호가 전달되는 거리는 짧아진다. 소리로 예를 들자면, 낮은 소리는 매우 멀리까지 퍼져나갈 수 있지만 높은 소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xDSL 서비스를 쓰려면 전화국과 집 사이의 거리가 수킬로미터 이내여야 한다는 제한이 생기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집 근처에다가 DSL 장비를 갖다 놓되 전화국과 장비 사이는 아예 다른 방법(보통 광케이블)으로 통신하고, 집과 장비 사이만 DSL 기술로 통신하는 방식이 상당히 사용되었다. 특히 VDSL 같은 경우에는 이 방법이 필수적이다. 아파트 거주자가 많은 한국에서는 아파트 지하에 장비를 설치하여 해당 아파트 건물 전체에 이런 방식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가 보편적이다.
3. 한국 보급
한국에서 전화선 모뎀과[1] PC통신의 시대를 거쳐, 한국통신, 하나로통신 등을 통한 초고속인터넷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은 1999년부터였다. 원래는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통신(현 KT)에서 시범 서비스를 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통신은 ADSL은 뒷전으로 미뤄두고 속도가 모뎀하고 다를 바 없는 '''ISDN'''을 인터넷 전용선의 주류로 밀고 있었다. 속도는 64 kbps로, 모뎀 최고 속도인 56 kbps보다 고작 8 kbps 빨랐다(...). 2회선을 물려서 두 배의 속도인 128 kbps 를 제공하는 서비스도 있었다. 물론 요금도 2배(...) 물론 요금은 전화요금과 똑같이 종량제로 받아먹고 있었다.[2] 당연히 이게 보급이 될 리가 없었고 정액제 서비스 조차 PSTN보다 2년[3] 늦었다.
결국 한국에서 ADSL은 1999년 4월 1일 제2시내전화사업자로 선정된 하나로통신(현 SK브로드밴드)이 '''최대 8 Mbps(1MB/s, 7KB/s가 고작인 모뎀의 143배)'''라는 압도적인 속도를 내세워 본격적으로 정식 서비스를 하면서 보급되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가격도 한 달에 3만 원 남짓한 24시간 정액제였기 때문에 보급은 시간문제였다. 지금 기준으로는 별 것 아닌 속도이지만, 음성 모뎀 최고 속도는 최대 56 kbps로 ADSL 속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고 야간/할인시간등 정액제에서 시간이 정해져있었다. 사실 56 kbps 접속도 대도시 등 일부 지역에서나 가능했고 그나마도 실제 속도는 40~50 kbps 정도밖에 안 나왔다. 가격 역시 2013년 기준으로는 그렇게 싼 가격은 아니지만, 이때는 모뎀으로 PC통신이나 인터넷에 심취하다가 10만 원 이상의 전화요금을 물던 시절이었다. 야간정액제나 도수정액형서비스료 등의 상품도 있었지만 014xx에 한정되는 등 제한이 많았다. 그러니 한 달 3만 원 정도만 내면 무제한으로 쓰고 속도도 넘사벽 수준인 ADSL이 경쟁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다만 두루넷이 HFC망(케이블TV망)을 1998년 7월에 먼저 상용화해서 정액제를 실시했다. 가격도 ADSL이랑 비슷하다. 아니 ADSL이 HFC망 가격을 기준으로 삼았다. 하지만 공동주택에서 케이블 방송망을 공동선로로 설치한 곳은 설치가 안 된다는 문제점이 있었고, 케이블 방송의 보급도 크지 않았던 데다 서비스 지역도 서울 내 몇몇 지역만 되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두루넷을 초기부터 잘 쓰다 이사간 곳에는 망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ADSL을 쓸 수밖에 없던 위키러도 있다. 서비스 가능 지역은 차차 넓혀갔지만 한전이 통신사업에서 손을 떼 초기 확장 속도가 늦어지고 따라 잡히는 빌미가 된다. 이후 하나로가 ADSL과 HFC망을 같이 런치해서 라이벌로 등극하고 두루넷처럼 HFC망만 하는 온세통신 등의 후발주자들이 가세한다. 이런 판국에도 ISDN을 밀어서 종량제로 돈 긁어내려 발악했었던 KT의 삽질. 그럼에도 최후의 승자는 전화선을 쥐고 있는 KT.[4]
한국통신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었지만 당장 ADSL 서비스를 내놓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그러다 보니 기존 ISDN에 "2"자만 하나 더 붙여서 '''ISDN2'''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물타기를 저지르기도 했다. 기존 ISDN에서 속도 향상이나 요금제 개편 이런 건 없었으니 이게 ADSL의 대항마가 될 리 없었다. 2000년에 ISDN(014XY) 종일요금제를 도입하긴 했다. 물론 도입 전에는 멀티채널이든 아니든 야간/할인시간정액제에 가입해야 했지만... 결국 몇 개월 뒤에서야 한국통신도 메가패스라는 이름으로 ADSL 정식 서비스를 내놓게 된다.
기존의 전화선만으로 컴퓨터의 고속 데이터 통신을 가능하게 해주었으며, 전화와 인터넷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고, 24시간 정액 요금제 사용으로 통신료를 파격적으로 절약할 수가 있는 등 여러 메리트가 있어 기존의 모뎀 시대를 종결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전화선 모뎀을 쓸 경우 전화와 인터넷을 동시에 쓸 수 없었고, 인터넷 사용 중에는 통화중이 되거나, 통화 중 착신 기능으로 전화를 받으면 인터넷은 끊긴다. 과금도 전화통화와 똑같이 분당 몇 원 식으로 종량제 요금을 매겨, 많이 쓸 경우 몇 십만 원의 요금을 물 수도 있어 선택 서비스료, 야간정액제같은 시간형 정액제가 시행되기도 했다. 더군다나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스티브 유(한국명 유승준)를 모델로 내세워 광고를 때리고 지사에서 편법을 동원해 마케팅을 일삼았던지라 사람들은 약정제로 계약하여 사은품이나 요금할인 가입비면제의 혜택(?)을 받았다. 때마침 중소기업의 참여 아래 100만 원 이하의 저렴한 가격을 자랑하는 국민PC 사업이 진행 중이었고, PC방보다는 집에서 컴퓨터를 이용하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마음과 정부 차원에서 학교 정보화 교육을 진행하는 시대적 상황에 놓여있었다. 게다가 양에서는 게임 스타크래프트 열풍이 불었고, 음에서는 나이불문하고 성인물에 대한 욕구가 있었기에 초고속인터넷 열풍을 일으키는 데는 충분했다.
4. 문제점
지금 기준으로 보면 ADSL도 느린 수준이긴 했다. 다만 이건 상대적인 것으로, 당시의 웹 환경에서는 ADSL 속도로도 부족함이 없었고, 오히려 남는 수준이었다. 당시의 웹페이지는 구글/야후/네이버/다음 과 같은 사이트들 모두 그야말로 조촐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래픽은 거의 배제한 채 텍스트로만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56K 모뎀 사용자 역시 고려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개인이나 기업 홈페이지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고, 자바스크립트 같은 건 2000년대 초반엔 쓸 수 있는 사람도 잘 없었다. 기껏 한다는 게 마우스 커서 꽁무니에서 별가루 쏟아지는 수준이었다.
전화국과의 거리에 따라 속도가 판이하게 차이가 나는 문제가 있다. 전화국과 가까이 있는 집이라면 최저 1Mbps 속도가 보장되지만, 전화국으로부터 거리가 점점 멀어질수록 인터넷 속도가 떨어져 사실상의 서비스가 어렵다는 불편한 점이 있었다. 또한 전화선의 노후화 등으로 인해 통신 장애가 발생할 수도 있다. 단 SK브로드밴드(구 하나로통신)는 전화국이 없어서 처음부터 광케이블로 통신망을 구축했다. 브로드밴드는 당시 광케이블을 강조하였지만 ADSL 방식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 광케이블로 아파트 기계실까지 바로 들어온 다음 거기서 전화선으로 분배하는 방식이라 거리 제한 문제에서는 좀 더 자유롭다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주변의 인터넷 가입자 수가 늘면 속도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문제도 있었다.
인터넷 서비스가 발전하면서 P2P 등 파일을 업로드할 일도 많아져서 비대칭형이라는 단점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주로 프루나와 당나귀를 통한 야동 공유 측면에서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던 것. 지금은 유사광랜이 ADSL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
5. 후속 기술
1세대 통신이 모뎀과 ISDN의 시대였고, 2세대 통신의 시작을 ADSL이 열었다면, 후에는 ADSL의 속도를 향상시킨 VDSL과 HFC(케이블 모뎀)이 대체를 해 왔으며, 3세대로 FTTx, 그리고 4세대로 FTTH로 빠르게 발전해 나가는 추세이다.
ADSL을 개선한 기술로 업로드가 개선된 ADSL2, 다운로드도 개선된 ADSL2+라는 기술도 나왔으나, 국내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이미 VDSL이나 광랜 등 다른 고속 통신 기술이 널리 적용되는 상황에서 굳이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VDSL도 전화국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통신 속도가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통신망의 교체가 어려운 국가에는 이 기술들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땅이 넓고 개발이 덜 된 국가들에서는 유선망보다는 WiMAX와 같은 무선 인터넷이 더 인기를 끌고 있다. 원래 WiMAX는 WiBro처럼 이동하면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선을 Wi-Fi보다 더욱 더 넓은 범위에서 무선화 시키지는 취지도 있었다. (이동하면서 쓰는 목적과 유선망의 무선화는 서로 다른 표준으로 지정되어 있다. 어느 한쪽을 목표로 개발된 것을 전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2010년대엔 전화국사(전화국을 국사라고도 한다)와 가입자간을 ADSL, VDSL로 직접 잇기보다는 ONU의 설치로 국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도 VDSL 서비스가 가능해졌다.(IP-VDSL) 전화국은 원래부터 광케이블이나 다른 고속망으로 인터넷에 연결해 놓고, ADSL과 VDSL 적용 구간을 점점 줄여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점점 사라지는 추세에 속한다. 인터넷의 정보량이 매우 증가하여, 더이상 느려터진 전화선으로 인터넷을 하기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주택의 경우 광케이블인 FTTH로 전환이 되고 있으며, ADSL을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없다. 광랜 설비공사가 귀찮아서(...) ADSL을 고수하는 집에는 아예 통신사가 무약정+요금추가X 조건으로 VDSL로 갈아타 달라고 '''간청'''하기도 한다. 노후화된 장비를 더 이상 유지하고 싶지 않아서인 듯. 그러나 오래된 주택의 경우에는 아직도 ADSL 방식을 사용하는 모습이 간간이 보인다.'''장비교체를 미처 못한 경우'''라고 보면 된다. 공공기관도 가끔 있는데,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건드리지 않는 특성상, 특정 용도로만 사용하고 그 용도로 누가 문제를 보고하지 않았다면 담당 ISP에서 장비 일체를 교체할 때까지는 그냥 그렇게 두게 된다. 특히 외진 도서지역. 보통 인터넷 속도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한 집에서 오랫동안 산 어르신 세대의 집에서도 종종 보인다. 빠르지 않은 컴퓨터로 HTS와 뉴스포탈 정도만 이용하며 온라인 게임을 하지 않아 핑에 관심이 없는 경우, 느린 ADSL로도 큰 불편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집은 인근 주택이 다 광랜 이상으로 바꿀 때까지, 전화국에서 장비를 완전히 교체하면서 지원하지 않게 되어 동일요금으로 바꿔드립니다하고 기사가 찾아올 때까지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집에 이사간 위키러의 집에서도 찾을 수 있다. 만약 자기 집 인터넷 속도가 케이블인터넷도 아닌데 다른 집보다 심각하게 느리거나 업로드/다운로드 속도의 차이가 크다면 인터넷 회사에 전화해 문의해보라. '''99.9% 확률로 기사가 회선교체하러 찾아온다.'''
6. 2010년대 이후의 ADSL
지금의 웹 환경에서는 통신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사용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웹 서핑 정도는 지금도 큰 불편함은 없는 속도고, 파일 다운로드도 최적 상황 시 10Mbps 정도, 규격 상 최대는 12Mbps로 괜찮은 속도지만 파일 업로드가 최대 1~2Mbps 정도로 OMG. 다만 저가형 상품은 1.5~2Mbps로 제한되어 꽤 느렸다. 이런 사람은 없겠지만 지금 ADSL 속도를 다시 느껴보고 싶다면 3G 스마트폰 혹은 LTE/5G 스마트폰에서 3G 우선 모드로 설정하고 테더링을 해보자. 2000년대 초반 ADSL 속도를 부분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다(...). 아니면 기가 라이트 수준의 인터넷을 무선으로 6m 이상 띄우자. M'''bps'''라는 것에 주목하자. KB/s로 바꿔 계산하면 약 192.5 KB/s 정도의 속도가 나오는데, 이걸 공유기로 나눠서 사용하면 토렌트로 뭣 좀 받는 동안 다른 기기들은 그저 안습. 실제로 이 시대에는 대학 연구실에서 누가 당나귀를 걸어 놓으면 난리가 났다. 학교 전산실에서 트래픽 폭탄을 만든 범죄자를 매주 체크해 지도교수에게 통보할 정도였다. 하지만 현재는 가입 상품에 따라 속도를 제한하는 것이 아닌 사용자의 이용 환경에 따라서 속도를 제한하고 있다.
또 ADSL을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기업체도 있다. 전송량이 많지는 않고 광통신망의 혜택을 받기 힘들거나 필요가 없는 경우에는 ADSL이 유리하기 때문. 예를 들어 편의점(CVS) 사업에서도 사용되는데, 편의점과 본부가 통신을 위해 전용망 구성을 위해 비용이 저렴한 ADSL을 선호하기도 한다. 전화선 방식의 경우 요즘 시대에 음성 모뎀을 이용하는 건 종량제 방식인지라 사실상 하루 종일 전용망에 접속해야 하는 편의점의 경우에는 요금폭탄을 피하기는 힘들므로. 더욱이 2017년 014XY 번호 회수에 따라 전화선 방식의 서비스가 종료된 상황이기도 하다.
7. 같이 보기
[1] 엄밀히 말해 지금도 ADSL이나 VDSL, 케이블 방식에서 모뎀장치를 사용하고 있지만, 보통은 상징적인 PC통신용 음성 전화망용 모뎀이 가장 알려져 있다.[2] 참고로 일본에서 NTT가 조만간 100메가급 인터넷 서비스가 개시될것이라며 한국통신과 똑같이 ISDN을 밀어놓았다가 일본의 정보화를 늦추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3] PSTN은 1997년 4월 1일, ISDN은 1999년에 서비스 되었다. 1998년부터 수도권 지역에서만 01414로 접속이 가능했다.[4] 90년대 KT 유선전화 점유율이 '''99%''' 였다. 이 당시 ADSL 후발주자임에도 통신 인프라가 압도적으로 깔려있기에 가능한 일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