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PC

 

1. 개요
2. 탄생 배경
3. 사양과 가격
4. 성공과 영향
5. 비슷한 사례
6. 둘러보기


1. 개요


1990년대 후반 국민의 정부 당시 PC 보급 사업의 일환으로, 1999년 10월 20일부터 진행된 '국민PC 사업'으로 보급된 컴퓨터를 칭한다. 다른 말로는 인터넷 PC라고도 한다. 당시 셀러론으로 무장한 100만원 짜리 컴퓨터는 엄청난 판매고를 올렸고, 스펙 좀 타협한 고사양 PC도 120~150만원선에서 보급이 되었다.[1] 쉽게 말해 지금의 컴퓨터, 인터넷 대중화 특히 가정용 대중화에 한 획을 그은 사업. 100만원대 '국민PC' 나온다.[2]

2. 탄생 배경


국민의 정부는 1997년 외환 위기를 극복해야 했다. 그리고 극복 방안의 일환으로 거론된 것 중 하나가 IT 사업 집중 육성이었다. 그런데 IT 사업을 육성하려면 먼저 국민들이 정보화에 적응하는 것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일단 컴퓨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참고로 1990년대 초중반 당시 컴퓨터 보급 대수는 이전에 비하면 상당히 늘어나긴 했지만 실상을 보면 주로 회사나 학교에서 쓰던 업무용이나 교육용 컴퓨터였고[3], 가구보급률로 따지면 PC통신과 PC게임이 차차 보급되면서 일부 가정에서 여가, 오락용으로 쓰는 경우도 있었지만[4] 1995년 통계로도 여전히 30%대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5]
이렇게 보급률이 지지부진한 주요 원인은 역시 높은 진입장벽과 가격대였다. 1990년대 당시만 해도 다나와 같은 가격 비교 사이트도 없었고[6] 더군다나 인터넷으로 물건을 산다는 아니 인터넷이란 개념조차 생소했던 시기였다. 그러다보니 컴맹인 일반 대중들이 컴퓨터 하나 장만하려면 당시엔 당시 기준 200만원 내외 하던 대기업 브랜드 PC를 사거나 용산 전자상가처럼 관련 상가나 동네 PC 가게를 찾아가 조립컴을 사는 수밖에 없었는데, 조립컴의 경우 관련 물가에 대한 정보 접근성이 터무니없이 떨어지던 시절이니 운이 좋아 양심적인 업자를 만난다면 모를까 재수없으면 용팔이한테 걸려 돈은 돈대로 뜯기고 고장은 잦은 성능 구린 컴터 사는 호구되기 십상이었다. 이러니 일반 서민들은 컴퓨터 구입을 꺼릴 수 밖에..
그런 와중에 정부가 중소기업도 지원하고 국민들에게 가성비 좋은 컴퓨터도 보급할 겸 해서 입안한 정책이 바로 국민PC였다. 때마침 1997년 4월 1일 야간/할인시간정액제의 시행과 제2 시내전화 업체로 선정된 하나로통신ADSL이라는 당시에는 획기적인 인터넷 망을 준비하고 있었고, 스타크래프트의 영향으로 PC방이 본격적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한 것도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국민PC는 중소기업을 지원한다는 정책과도 맞물려 대기업의 입찰을 제한했기 때문에, 제조업체는 대부분 중소기업으로 총 12개의 업체가 선정되었다. 선정된 업체는 현대멀티캡, 세진컴퓨터랜드, 주연테크, 현주컴퓨터, 컴마을[7], 용산전자상가조합, 멀티패밀리 정보산업, 성일컴퓨텍[9], 세지전자, 엘렉스컴퓨터[10], iDOM엑스정보산업, PC뱅크[11]이며, 이 중 2020년까지 남아있는 업체는 주연테크 뿐이다.

3. 사양과 가격


국민PC는 컴퓨터가 없는 사람들에게 컴퓨터를 저렴하게 쓸 수 있게 해주자는 것이 취지였기 때문에 본체 + 모니터 구성의 큰 본체 외에도 키보드, 마우스, 스피커, 운영체제(Windows 98 Second Edition[12]) 및 기타 소프트웨어를 함께 구매하는 경우가 많았다. 스피커는 지금이야 많이 저렴해져서 전자제품 매장 뿐만 아니라 다이소에서도 구매할 수 있고 심지어는 완제품 컴퓨터를 한 대 사면 덤으로 끼워주기까지도 하는 물품이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돈을 내고 추가로 구입해야 되는 물건이었다. 국가에서 밀어준 브랜드인지라 판매를 우체국에서 담당했으며 각 회사의 판매 대리점에서도 구입 가능했다.
사양은 크게 두 가지 모델로 나눠서 출시가 되었는데 펜티엄 3 카트마이를 장착한 고급형 모델, 멘도시노 셀러론을 장착한 보급형 모델로 나눠 출시되었다.
일단 고급형 모델의 기본 사양을 기준으로 설명하자면
  • 메인보드: (불명)
  • CPU: 인텔 펜티엄 3 카트마이 450~600MHz[13]
  • RAM: 64MB
  • HDD: 15GB~17.3GB
  • ODD: 48배속 CD-ROM
  • 모뎀: 56kbps
  • 그래픽 카드:
    • NVIDIA RIVA TNT2 32MB (6개 업체에서 선택)
    • 3dfx Voodoo 3 (일부 모델에서 채택된 사양이었다.)
  • 사운드 카드:
    • 메인보드 내장형
    • ESS/Crystal 칩셋 외장형
여기에 모니터키보드마우스OS와 기타 잡다한 프로그램이 딸려오는 식. 100만원 미만의 PC를 보급한다는 정부의 생각보다 비싸게 결정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성능을 내면서 업체의 마진을 주면서 가격을 맞춰보았을 때 합리적인 가격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급형 모델의 유일한 단점은 64MB라는 RAM 용량으로, 당시 고사양 유저 기준으로는 약간 빡빡한 감이 있었기 때문에[14] 추가로 비용을 지불하고 128MB로 업그레이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때마침...이라고 하기엔 좀 애매하지만 2001년 9.11 테러 이후 램값이 똥값이 되어 많이들 업글하기도 했다.
그 외에 보급형 모델의 사양은 이러했는데
  • 메인보드: (불명)
  • CPU: 인텔 멘도시노 셀러론 300~500MHz (후기종은 코퍼마인 셀러론 766MHz)
  • RAM: 64MB (기본적으로는 64MB 이상을 권고했지만, 일부는 32MB에 불과한 것도 있었다.)
  • HDD: 6.4GB~10GB (후기종은 20GB)
  • ODD: 40배속 CD-ROM
  • 모뎀: 56kbps
  • 그래픽 카드:
    • ATi 레이지 IIc 4~8MB
    • 트라이던트 블레이드 3D 8MB
    • 인텔 i740 4MB
    • S3 그래픽스 트리오 64+
    • 인텔 810 칩셋 온보드 내장 그래픽 16MB (후기종에 적용)
  • 사운드 카드:
    • 메인보드 내장형 ESS 마에스트로-3
이쪽은 모니터 포함으로도 100만원대 이하의 가격을 책정할 수 있는 경우도 많아서# 엄청난 판매량을 자랑했다. 사실 일반적인 인터넷 서핑이나 문서 작업, 가벼운 게임 용도로는 셀러론 CPU도 성능 면에서는 크게 손색이 없었고, 대략 스타크래프트 권장 사양과 비슷하다.
12개 업체의 사양이 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는 정부가 사양을 지정해주고 그 틀 안에서 만들도록 지시했기 때문인데 견적만 주고 대충 지시했을 때 어떤 부속이 빠질지는 당시 정부도 잘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국민PC의 가격은 모니터의 유무와 크기, OS의 종류(리눅스, 윈도우)에 따라 가격이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당시 가장 인기가 있는 기종인 고급형 본체+윈도우 OS+17인치 모니터의 경우 150만원대에서 구입 가능했고 보급형 본체+윈도우 OS+17인치의 경우 110만원에서 120만원대에 구입 가능했다. 가격은 업체마다 2~3만원 정도 차이가 있었지만 거의 그 정도 선이 유지.

4. 성공과 영향


이전까지 완만하게 증가하던 PC보급률은 이 사업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늘었고, 2000년에는 PC 보급률이 70%를 넘어서기에 이르렀다. 그 이전에도 PC가 어느정도 보급되긴 했지만 가격 부담 때문에 다수의 서민들은 컴퓨터 살 생각 자체를 잘 안했는데, 가격을 획기적으로 낮춘 국민PC붐은 대중들에게 컴퓨터가 생활하는데 여러모로 편리하다는 인식전환의 계기도 만들어 '''컴퓨터를 지금의 필수가전제품으로 등극시키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또한 국민PC 적금이라는 소액 대출을 내놓아 소비자의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이 상품은 우체국에서 대출은 안되고 예적금담보대출만 취급할 수 있어서 내놓은 꼼수였다. 그래서 추심업무를 할 수 없었던 우체국은 보증보험을 들게 했다. 소비자의 부담을 줄였던 덕분에 약 5개월 만에 약 28만대의 국민PC가 팔리고 19만여명의 국민PC 적금 가입자가 생겨났을 정도. 덕분에 당시 중고딩들은 집에 돌아가면 스타크래프트를 하느라 바빴다.
기존 PC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삼성전자, 삼보컴퓨터 등 대기업에서도 국민PC의 출현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PC보다는 약간 높은 스펙의 제품을 가격을 이전보다 내려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PC의 보급은 더 가속화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국민PC와 ADSL의 만남은 IMF 이후 살 길을 찾던 한국에 IT 정보화 강국이란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 정부의 IT정책 중 대표적인 성공 사례.
이런 성공에 힘입어 정부에서는 국민 노트북 PC 사업도 진행했다. 가격은 160만원에서 240만원대로 지금의 고성능 노트북 가격에 가깝다. 하지만 이 쪽은 크게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는데 일단 컴퓨터 있는데 뭐하러 노트북까지 또 사냐는 인식이 있었을 뿐더러[15], 노트북 가격도 상당히 비쌌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16]
하지만 밝은 면이 있다면 어두운 면도 있는 법. 이 시절 PC의 대중화는 불법 복제네티켓 등 관련 도덕 교육이나 법령이 전무한 상태에서 PC만 팔아, 즉 질적 성장은 고려하지 않고 양적 성장에만 의존해, 인터넷은 말 그대로 불법자료의 천국이 되었고 부모들은 대개 컴퓨터를 잘 다룰 줄 몰라 아이들이 어떤 식으로 컴퓨터를 이용하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주 사용층인 자녀들이 음란물이나 사행성 게임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경우가 많았다.[17] 지금의 촘촘한 19금 규제 같은건 존재하지도 아니 존재해야 한다는 인식조차 드물던 시절이니.. 물론 지금의 인터넷 문화에 비해 전반적으로 클린한 것은 있어서 양지에선 반말조차 규제를 당하기 일쑤였던 시절이긴 했다. 물론 음지에선 대놓고 뻘드립을 치기 시작하는 등 인터넷 문화가 서서히 양극화되던 시기기도 했고. 세이클럽, 버디버디처럼 채팅 문화도 유행한다.
그런데 오히려 그 덕분에 사람들의 컴퓨터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아이러니한 계기도 되었다. 세상에 컴퓨터 사면서 "이제 이걸로 숙제하면 내 학업 능력이 증진될거야!" 하면서 기뻐한 청소년이 얼마나 됐을까. 다 영화/애니/게임 등 불법 다운받으면서 쌓인 노하우와 게임하면서 사운드 드라이버 잡던 실력들이 나중에 과제하면서도 발휘되었던 것이다.(...) 인터넷 보급 초창기만 하더라도 '인터넷 정보검색 자격증' 이란 것이 당당하게 존재하였고[18], 검색 엔진에 키워드를 넣어 자료를 찾아내는 과정을 TV 방송에서 시합까지 벌여 중계하기도 했다. 당시의 검색 엔진은 자연어처리 성능이 2010년대와 비교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빈약하여서, 키워드 서치를 위한 키워드를 사용자가 선택하는 것에 따라 검색결과의 차이가 컸다. 또한, 옛날에 도서관에서 사서가 책을 찾는 방식과 같이, 키워드가 아닌 카테고리를 이용한 정보검색 능력도 필요했기에, 질문의 내용을 어느 카테고리에서 찾아야 하는지 아는것도 정보검색사의 능력중 하나였다. 컴퓨터활용능력 자격증이나 워드프로세서 자격증 같은 지금에 와서는 별 의미가 없어보이는 자격증들이 당시에는 막연히 '미래의 운전면허증' 처럼 여겨졌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당시 아이들에게 엄청나게 강력한 인터넷 학습동기를 유발하였던 불법 유통물 등 음지의 공로는 실로 무시하기엔 꽤나 큰 수준이긴 했다.
개도국 아이들을 위한 OLPC를 이용해서 아이들이 게임이나 불법 유통물, 음란물 등을 보는 비율이 높다는 소식에 한 컴퓨터 관련자는 "저나 당신이나 다수는 그렇게 컴퓨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지 않았나요? 좋은 현상입니다." 라고 쿨하게 넘겼다는 얘기도 있다. KOICA 소속으로 아프리카에서 2년 동안 선생으로 자원봉사하고 온 이도 현지에서 컴퓨터를 접한 아이들이 가장 먼저 하던 게 게임이나 동영상 관람이었다고.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인터넷 인프라 부족과 낮은 사양 등으로 음란물 접근성은 떨어져 고전게임이나 저화질 영화 동영상이 인기 폭발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당시 용던이라고 불리면서 호갱님들을 뒤통수치던 용산 전자상가도 강한 타격을 입게 된다. 국민PC 사업 이전에는 안정적인 서비스나 편리함, 브랜드를 고려하자면 대기업 PC를, 혹은 가격적인 측면을 고려하자면 조립PC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대기업보다는 서비스가 떨어지지만[19] 용산보다는 편리하고 가격도 그리 높지는 않았던 국민PC가 등장하면서, 이들은 신용결제나 적금결제가 가능한데다 정가제였기 때문에 용산보다는 믿음이 간다는 점이 크게 어필, 많은 사람들이 구매하게 되었다. 물론 용산 전자상가 내에서도 용산전자상가조합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크게 재미는 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 왜냐하면 당시엔 현대 멀티캡, 세진 컴퓨터, 현주 컴퓨터가 아직 살아있어서 브랜드 인지도에서 크게 밀렸기 때문. 하지만 조합을 결성하고 함께 호흡을 맞추었던 경험은, 후에 용산의 정직한 업자들이 에누리닷컴과 다나와 등에 힘을 함께 실어주는 데 큰 역할을 한다.

5. 비슷한 사례


2006년경 독일도 컴퓨터 사용 저변 확대라는 목적으로 컴퓨터를 만든 적이 있었다. 지멘스후지쯔의 합작 회사인 후지쯔 지멘스에서 만든 PC이다. 사양은 다음과 같다.
  • CPU: AMD Athlon X2 5000+
  • RAM: 2GB
  • HDD: 씨게이트 바라쿠다 7200.10 320GB
  • ODD: DVD 멀티 RW
  • VGA: ATI 라데온 X1650GTO + HDMI
  • 듀얼 TV 튜너
  • 윈도우즈 XP 미디어 센터 에디션
OS로 윈도우 XP 미디어 센터 에디션을 설치하고 TV 튜너가 기본 사양에 들어있는 등 유비쿼터스 보급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PC로 멀티미디어 관련 사양이 강력하다. 가격은 999유로로 1500원 환율을 적용했을 때 150만원 수준. 현재 기준으로는 가벼운 작업용으로도 쓰기가 어려운 사양이다. 애슬론X2 5000+는 2006년 3분기쯤이 지나서야 나왔다. 15년 사이에 참 많은 것이 변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사양.

6. 둘러보기



[1] 2020년 기준으로는 150만원이면 6코어 프로세서와 16GB 램, 고가형 그래픽카드는 물론 용량도 빵빵한 고스펙 조립식 컴퓨터 본체 단품을 살 수 있지만, 1990년대에는 이게 지뢰찾기, 카드놀이 같은 기본 게임만 되는 저가형 컴퓨터 가격이었고(관공서에 투입되는 사무용 컴퓨터 가격이 130만원대던 시절이었다) 당시 기준 고사양 게임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물건은 200만원이 넘었다. 성능은 급격히 좋아졌는데 가격은 오히려 낮아진 것.[2] 매일경제, 1999.08.02.[3] 국민PC 사업 이전에 정부 주도로 컴퓨터를 보급하기 위한 교육용 컴퓨터 보급 사업이 2차례 있었다. 1983년에 시행된 8비트 컴퓨터 보급을 위한 1차 교육용 컴퓨터 보급 사업과 1989년에 시행된 IBM PC 호환기종을 대상으로 한 2차 교육용 PC 사업이 그것. 다만 1차는 당시 대중 인식이나 업체 능력 부족 등으로 실패했고, 2차는 그래도 중박은 터트렸다. 1차가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컴퓨터 본체도 아닌 프린터 1대값이나 마우스 3개값이 근로자 월급과 맞먹었기 때문이다. 즉 80년대 초반 국민소득이 컴퓨터를 보급하기에 낮았다.[4] 물론 지금 보면 지뢰 찾기, 카드놀이 수준이긴 했다. [5] 1990년대 중반만 해도 한 아파트에 컴퓨터 가지고 있는 집을 손에 꼽을 정도였고, 2000년대 초반까지도 PC 없는 집은 수두룩했다. 당시 국민PC붐이 일면서 마치 초창기 스마트폰 붐이 일던 시절처럼 너도나도 사기 시작한 것.[6] 다나와는 2000년 2월 디카 가격 비교 사이트로 출발하였다.[7] 1999년 9월에 삼보컴퓨터가 대주주였던 나래이동통신에 인수되었으며 삼보컴퓨터의 제품을 OEM으로 공급받았었다. 사실상 삼보컴퓨터의 멀티였었다. 지금은 회사 자체는 망하고 당시 계약했던 일부 사설 컴퓨터 수리점들에 상호가 남아있다.[8] 그래픽카드 이름이 아니다. 여기서 R은 Rotation을 의미한다.[9] PC케이스와 파워서플라이를 국내에서 생산하던 업체였었는데, 일반적인 ATX 구격을 거꾸로 뒤집어놓은 듯한 케이스(현세대에서 RTX[8]라 불리는 그 규격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MK2 등 일부 업체에서 이 방식으로 생산한 적이 있었다.) 를 주로 생산했었다.[10] 과거 애플 매킨토시 유통업체였으며, 후에 다른 회사에 인수되어 현재는 봄툰을 운영하는 키다리스튜디오로 바뀌었다.[11] 2000년대 중반까지 LCD 모니터를 판매하다가 어느새부터인가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12] 1999~2000년 당시 최신 OS이자 2000년대 중반까지도 주류였던 OS였다. 많은 이들이 알고있다시피 2000년 9월에 출시된 Windows MeWindows Vista조차 범접할 수 없을 정도의 희대의 망작이었고, 동년대에 출시된 Windows 2000은 성능은 준수했지만 당시 수준으로는 요구 사양도 높은 편이었고 서드파티 업체들도 NT 커널에 대한 지원이 부족해 하위호환 문제도 상당했다. 커널 지원 문제는 2001년 10월에 출시된 Windows XP에도 이어졌다.[13] 180nm 공정으로 미세화되고 클럭이 높아지면서 가격대까지 낮춘 코퍼마인 CPU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출시되기 딱 5일 전에 국민PC 사업이 시행되었기 때문에 코퍼마인 CPU로 채택될 수 없었다... 다행히 펜티엄 3 코퍼마인도 슬롯1 타입이 존재했기 때문에 코퍼마인으로 업그레이드가 가능했다.[14] 2000년 당시 삼성 매직스테이션 데스크탑 중 중급형 기종의 램 사양이 64MB였다.[15] 사실 이건 지금도 상당히 유지되고 있는 인식이다.[16] 대도시의 중심부 학교에서도 2~3대 정도만 보유하고, 그나마도 학생들은 있다는 것도 잘 모를 정도로 귀하던 시절이었다.[17] 물론 지금의 포털처럼 방대한 양의 검색 자료들이 존재하던 시절은 아니어서, 일단은 게임 목적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담으로 이런 인터넷 초창기 시절 가장 먼저 등장한 사이트들 중 하나가 연예인 팬클럽 못지 않은 안티 사이트들이었다.(...)[18] 내용이래봤자 무슨무슨 검색 엔진이나 유명 유즈넷/FTP/고퍼 등을 검색하기 수준이었다.[19] 이런 점 때문에 선정된 업체들 중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들의 경우 이후 경영난을 겪어, 이때 PC를 산 고객들이 사후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