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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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사키 Ki-91 (川崎 キ-91)'''
1. 제원(예정)
설계 : 가와사키 항공기
승무원 : 8명
전장 / 전폭 / 전고 : 33.35 m / 48.00 m / 10.00 m
익면적 : 224.0 m2
중량 : 34톤 ~ 58톤
최대속도 : 570 km/h
상승한도 : 13,500 m
상승률 : 8,000 m까지 20분 30초
항속거리 : 9,000 km(폭탄 4톤 탑재시) / 비무장 항속거리 10,000 km 이상
동력 : 미츠비시(三菱) 하-214루(ハ214ル) 공랭 18기통 엔진 (2,500 hp) 4기
프로펠러 : 4엽 가변피치 (직경 4.4 m)
연료 탑재량 : 27,500리터 (19.15톤)
폭탄 탑재량 : 8톤
방어무장 : 20mm 기관포 9문
2. 전략폭격기를 요구한 일본 육군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3년(쇼와 18년)에 일본 육군은 가와사키 항공기(川崎航空機)에 대하여 장거리 전략폭격기에 관한 소요 제기를 바탕으로 개발을 지시했다. 그 무렵 일본 육군항공본부는 이미 일본 제국 해군의 G5N 신잔(深山) 폭격기를 육군 사양에 맞춰 개수한 Ki-85(キ85)의 연구 개발을 지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Ki-85는 1943년 7월에 원형기의 성능이 여러 면에서 부족하다는 결론이 나와 개발 중지가 결정되었다.
나카지마 비행기(中島飛行機)가 이끌던 육군의 중폭격기 개발이 중단됨에 따라, 육군항공본부는 가와사키 항공기에 '''Ki-91'''이라는 장거리 전략 폭격기의 개발을 명령했다. 가와사키에도 도이 다케오(土井武夫 : 1904~1996) 기사 같은 재능있는 엔지니어가 있었고, 곧 개발주임으로 임명된 그는 설계팀을 총동원하여 4발 중폭격기 개발에 달라붙었다. 사실, 가와사키 개발진들은 자체적으로 1943년 6월부터 기초 연구를 시작하고 있었다.
3. 개발 조건
육군이 Ki-91의 계획 단계에서 가와사키 개발진들에게 요구한 성능은 상승 고도는 10,000 m에 최대 속도 580 km/h 이상, 그리고 4,000 kg의 폭탄을 탑재했을 때 항속거리는 9,000 km 이상이어야만 했으며 폭탄은 최대 8,000 kg까지 실을 수 있어야만 했다. 방어 무장은 20mm 기관포를 12문 갖추길 원했는데 특이한 요구 조건이 하나 덧붙여졌다. 그것은 폭격기로서의 성능 뿐만이 아니라 무장 병력을 태워 공중수송할 수 있는 수송기로서의 능력을 설계 단계부터 고려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거창한 요구조건에 따라 기체는 점점 커져서 전장 33.35 m, 날개폭 48.0 m, 전고 10.0 m 규모에 전비 중량은 58톤이나 될만큼 거대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당시 일본의 빈약한 공업 능력을 고려한다면 그만큼이나 거대한 항공기를 띄울 수 있을 만한 강력한 엔진이 없었고, 또한 성층권의 입구인 고도 10 km의 희박한 대기 조건은 설계자에게 극히 어려운 장애물로 작용했다. 1만 미터 고공은 해발 고도에 비하면 기압이 1/4에 지나지 않아서 기체 외부와 내부는 대기 압력 차이로 인하여 외피에 무려 1평방미터당 6톤이나 되는 엄청난 압력이 걸리게 된다. 승무원들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극한의 추위와 저산소 환경에 노출시키지 않으려면 여압식 캐빈은 필수적이었는데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기골 간격을 빽빽하게 좁혀 보강하고 밀봉 조치를 철저히 신경써야만 했는데 이런 구조는 모두 기체가 무거워지는 첩경이어서 상승 성능에는 마이너스로 작용했다.
당시 일본제 항공기 중에서 제대로 된 여압 캐빈을 갖춘 기체는 없었다. 그런데 미국은 같은 시기에 이미 B-29를 통해 기수와 기미를 여압화하고 중간은 여압 터널로 연결시켜 왕래할 수 있게 제작되어 있어서 고공 비행에서도 문제가 없었다. 이런 복잡하고 제작비가 많이 드는 거인기를 그 무렵 일본 항공업계 수준에서 대량 생산을 한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4. 원형기 설계와 생산 준비
그래도 가와사키에서는 일직선 형태의 외형을 가진 신잔의 기체 디자인을 참고하여 재설계하고 1944년 4월과 5월에는 각각 2회에 걸쳐 실물 모형에 의한 심사를 받을 수 있는 단계까지 기초 설계를 마칠 수 있었다. 도이 다케오 기사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실물이 아닌 모의 평가 결과는 아주 우수했으며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가와사키 사는 기후현(岐阜)에 시작기 제작을 위한 공장을 세우기 시작했고 1944년 6월에 공장이 완공되자 먼저 생산 라인을 위한 설비와 제작 비품의 설치를 시작했다. 그 무렵, 가와사키 내부적으로는 프로토타입 1호기 완성은 1946년(쇼와 21년) 6월로 스케줄이 잡혔으며, 2호기는 1947년(쇼와 22년) 3월에나 완성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원형 1호기는 개발과 공작이 어려워 여압실이 생략되었고, 본격적인 여압 기능은 시제 2호기에서 갖추도록 계획하여 조금이라도 납기를 앞당기려고 애를 썼다. 이 계획은 나중에 1호기도 여압장치를 갖추게끔 개수하는 방안이 제안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미군은 일본 본토에 대한 전략 폭격에 본격적으로 나서 기후현 소하라역에 세워진 조립 공장도 공습 표적이 될 것이 예측되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생산 체제를 변경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처럼 공장을 소개시키면 원형기 제작에 빠뜨릴 수 없는 주재료인 알루미늄 합금을 제때 공급받기 어려운데다, 배기 터빈식 과급기가 추가된 하-214루 엔진의 튜닝과 설치 작업이 늦춰질 것은 불 보듯 뻔했고, 분명 시제기 개발을 위한 환경은 나빠질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이처럼 B-29에 의한 공습이 연일 계속되며 전황이 수세에 몰리게 되자, 육군으로서는 당장 적국을 공격할 폭격기 보다는 막는데 필수적인 방공 전투기가 1대라도 아쉬워지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5. 개발 중지와 새옹지마?
이처럼 전황이 돌변하자 육군은 Ki-91의 개발 중단을 검토하게 되는데, 종래는 1945년(쇼와 20년) 2월에 모든 개발과 시제기 제작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계획이 중단된 싯점에서 Ki-91의 설계는 60%까지 진행되어 있었다. 하기사 이런 군의 조치가 없었다 하더라도 이 폭격기는 1946년 중반에나 비무장 상태의 1호기가 겨우 완성될 예정이어서 전쟁의 향방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귀중한 개발 인력과 자원, 그리고 그 무렵 무엇보다도 소중했던 시간만을 낭비했을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Ki-91의 개발이 멈춰진 싯점에서 가와사키의 거의 모든 직원들이 기후 공장에 모여 있었는데, 이들은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에 자동차 부품 생산 같은 민수 산업 분야로 그대로 옮겨져 조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패전 후에 일본인들은 오랜 전쟁이 빚어낸 경제 마비로 인한 빈곤이 덮쳐 식량조차 구하기 어렵던 기아와의 전쟁을 또다시 겪어야만 했던 사실을 비춰보면, 이 직원들은 상당히 운이 좋은 것이었다. 가와사키 중공업(川崎重工業)이 재건되자 이 공장은 그대로 가와사키 기후 공장의 일부로 되살아난다.
6. 평가
지금부터는 만일에 Ki-91이 실제로 실용기로 완성되어 일선부대까지 배치되었다는 가정 하에 과연 어떤 방식으로 임무를 수행했을지 따져보자. 1943년에 일본은 태평양에서 일부 차지하고 있던 제해권은 완전히 쪼그라들어 실제로는 남양 군도 방면 외에는 전진 비행장을 마련할 수 없었지만, 남쪽 전선은 지리적으로 미 본토 서해안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더 멀어질 뿐이다. 일본 열도에서 미국과 가장 가까운 대규모 비행장의 후보지라 한다면 삿포로 정도나 그 부근을 생각해볼 수 있다. 삿포로에서 대권 항로로 가장 가까운 미국 서해안 도시는 샌프란시스코. 미국 최대의 군항이자 미 해군의 중심부니 폭격 목표로는 안성맞춤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삿포로에서 샌프란시스코 항로는 지금의 제트 여객기로도 12시간 10분이 소요되며 그것도 가장 빠른 항공편일 경우에 그렇다. 그 편도거리는 7,708 km이며 왕복이면 무려 15,416 km에 달한다. 즉 Ki-91은 삿포로나 치토세 비행장에서 발진해 쉬지 않고 17시간 이상 날아가야 목표 상공에 다다를 수 있고 운이 좋아 적 요격기를 만나지 않고 곧바로 폭탄을 던지고 기수를 돌린다 해도 또다시 날아온 만큼 비행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강력한 편서풍으로 정면에서 불어닥치는 제트기류를 안고 훨씬 느린 속도로 더 오래 날아야만 출발지인 훗카이도까지 도착할 수 있다. 게다가 목표는 비교적 가까운 샌프란시스코나 시애틀 뿐만이 아니라 훨씬 먼 LA나 더 내륙 지방에도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일본과 미국을 왕복하는 전략폭격기란 최소한 18,000~20,000 km의 실용 항속거리를 지녀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현재 미 공군의 중폭격기 B-52가 16,000 km의 항속거리를 지니지만 그것도 무장을 싣지 않았을 때나 가능한 거리이다. 결론부터 잘라 말하자면 현재에도 공중급유기가 동반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폭격 임무를 일본 육군은 1940년대 기술로 실현하려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