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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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EMANI 시리즈의 수록곡에 대해서는 SPEED(비마니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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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멤버는 이마이 에리코, 아라카키 히토에, 우에하라 타카코, 시마부쿠로 히로코.[1]
멤버 전원이 오키나와 출신이라는 특징이 있다. 2011년 현재까지 '''1,963만 장'''이라는 경이적인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수준 높은 댄스 실력과 보컬 히로와 에리코의 뛰어난 고음과 가창력 등 많은 요소들로 주목받았던 그룹이다. R&B와 힙합을 기반으로 한 노래들과 또래에게 어필하는 공감할 수 있는 가사 등으로 크게 히트를 쳤다. 실제로 남성팬보다도 또래 팬들. 특히 여학생 팬들이 굉장히 많았다. 히로와 에리코의 가창력은 요즘으로 치면 '''아이유의 3단 고음 수준'''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며 크게 주목 받았는데, 둘다 고음을 크게 내지르는 창법이다 보니 마치 서로 경쟁하는 듯한 모습처럼 느껴졌고, 이 때문에 '''스피드의 해체 원인은 둘의 경쟁심리와 불화가 아니었냐?'''는 루머의 원인이 되었다. 물론 재결성과 둘만의 유닛까지 나오는 현재엔 완전히 부정된 루머. 노래에도 둘의 이러한 관계가 반영되어 'Body & Soul'의 클라이막스 후반부에서는 정말로 서로 경쟁하는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전성기 당시 실력과 커리어 양면에서 톱을 차지하며 일본의 댄스 그룹들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그룹으로서의 활동이 끝난 후 이마이와 우에하라의 불륜 사건으로 인해 실력과 인성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였으며 그동안의 명성에도 먹칠을 했다. 배신감과 혐오감에 치를 떠는 팬과 대중들은 물론이고 졸지에 아라카키와 시마부쿠로에게도 피해가 갔다.
2. 활동
2.1. 결성과 데뷔
오키나와 액터즈 스쿨의 최정예 학생들을 모아놓은 일종의 특별반인 BBWAVES.
본래 아무로 나미에, MAX 등을 배출한 오키나와 액터즈 스쿨 출신의 7명으로 구성되었던 팀으로 본래 팀명은 'BRAND-NEW KIDS'. SPEED의 전 멤버들은 데뷔전부터 그 쟁쟁하기로 손꼽히는 오키나와 액터즈 스쿨의 최정예 그룹. 일명 BBWAVES[2] 라는 그룹에 속했던걸로 알려져 있다.[3]
당시 인기 티비프로그램이었던 THE요루모힛빠레. (영상은 데뷔이후의 모습이다.)
그러나 데뷔전에 3명이 탈퇴를 하였고, 최종적으로 4명만이 데뷔를 하게 된다.[4] 정식데뷔이전에 이 당시 인기 심야프로그램이었던 'THE 요루모힛빠레'라는 프로그램에 1995년 11월 11일 처음 등장. 12월 2일에 그룹명을 공모받는 다는 소식을 알렸다. 참고로 이 당시 '류큐 걸즈', '허브와 몽구스', '오키나와 챠키챠키 무스메'(...) 같은 괴랄한 닉네임이 추천되기도 했는데[5] , 거의 유일하게 괜찮은 이름이었던 SPEED를 골랐다고.
원래 SPEED 데뷔시에 당시 유행하는 유로비트팝에 카우보이 모자 치마의상을 입고 데뷔할려고 했으나, SPEED의 멤버가 TLC의 광팬이었기 때문에 프로듀서에게 이런 그룹이 되고 싶다라고 해서 스트릿 패션, 힙합의상의 댄스 그룹으로 데뷔하게 되었다. 데뷔곡 Body & Soul 역시 80년대 흑인가수인 Jody Watley - Real Love 와 편곡이 다를뿐 곡구성이 거의 동일하며, 음악 전반부에 흐르는 반주와 인트로는 CHIC의 Le Freak 와 거의 같다.
그렇게 4명의 소녀들은 1996년 8월 5일 이지치 히로마사[6] 가 프로듀싱한 'Body & Soul' 싱글로 데뷔한다. 그리고 데뷔와 함께 인기를 끌어서, 당시 일본 여성 아이돌씬의 암흑기에 종지부를 찍었다. '''전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2.2. 전성기
이후 STEADY, Go! Go! heaven를 차례대로 발표하고 모조리 밀리언셀러를 돌파하며 대성공을 거둔다. 3번째 싱글인 Go! Go! heaven은 SPEED이 첫 오리콘 주간 챠트 1위를 한 곡으로 선배인 B'z의 마츠모토 타카히로가 이 노래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심지어 97년 자신의 무대의 라이브 제목으로 인용도 했을정도.
일본 도쿄 오다이바 야외 공연장에서 열린 스피드의 첫 라이브 공연.
이듬해 5월. 1집 Starting over를 발매한다. 이 앨범은 레코드협회 기준 25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것으로 여겨지며, 골드 인증을 받았다. 워낙 싱글들이 대히트를 했기때문에 판매에도 호조. 도쿄 오다이바에서 치뤄진 야외공연은 무려 2만여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 티켓 판매 개시 1시간만에 매진되는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었다.
1997.12.23. Pop Jam에서의 White love 라이브.
뮤직스테이션 스페셜 라이브에서 처음 선보인 Christmas Stand 버젼. 웅장한 현악 편곡이 특징으로 원곡 못지않게 인기가 많은 버전이다.
그리고 97년 10월 15일. 스피드 불후의 명곡으로 통하는 'White Love'가 발매된다. 무려 2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한 이 노래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그 해 최고의 히트곡으로 지금도 겨울하면 떠오르는 캐롤송으로 사랑받고 있다. 이 노래로 처음 홍백가합전에 출전도 하고 지금도 Body & Soul과 함께 스피드의 메들리에 꼭 빠지지 않는 레파토리로 들어갈정도로 인기가 많다. 지금도 각종 앙케이트지에서 '겨울에 듣고 싶은 캐롤송은?'이라는 주제로 설문조사를 하면 반드시 열 손가락 안에는 무조건 드는 일본의 대표적인 겨울 명곡.
일본의 대표적인 졸업시즌송인 my graduation.
기세를 이어가 98년에 발표한 my graduation 역시 큰 인기를 누리며 승승장구. 일본의 대표적인 졸업송으로 꼽히며 많은 학교에서는 졸업식 시즌이 다가오면 길거리에서 쉽게 들을수 있는 곡으로 졸업합창으로도 불릴 정도로 인기가 많은 곡이다. SPEED의 대표적인 앵콜곡으로 평소 조용히 경청하는 걸로 유명한 일본 관객들조차 이 노래가 나오면 단체로 후렴구를 합창하는걸로 유명. 여담으로 멤버들이 싱글자켓과 PV에서 걸고 나온 목걸이가 이뻐서 어디제품이냐고 묻는 전화가 쇄도 했다고 한다. 사실은 SPEED의 코디가 자체제작한 아이템으로 팬클럽 한정으로 판매했다고.[7]
98년 4월에 발매한 2집앨범 RISE는 최초 출하량만 300만장이 넘어 신문에서도 다뤄질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집계된 판매량만 3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 큰 반향을 일으켰다. 7월에는 싱글 ALIVE를 발매. 이 곡으로 그해 일본 레코드 대상에도 출전하고, 132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기록하였다. 덧붙여 3연속 밀리언 셀러 싱글.
SPEED 최초 돔투어.
ALIVE의 발매에 맞춰 7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되었던 전국 투어는 도쿄돔을 포함한 일본의 4개의 돔을 투어하면서 '''걸그룹 유일, 최초 돔투어''', '''최연소 4대돔 순회 공연'''이라는 기록을 세운다. 또한 이 콘서트를 통해 20회차 공연에 30만명 동원이라는 대성공을 거두며 승승장구 한다. 여담으로 최연소 돔투어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는 커리어이며, 걸그룹 유일 돔투어 성공은 한 동안 깨지지 않다가 AKB48가 돔투어를 성공한 그제서야 겨우 깨졌다.
10월에 발매한 ALL MY TRUE LOVE는 자신의 최고 초동 기록. 거기에 스피드는 출하량과 판매량 양쪽 모두 4싱글 연속 밀리언 셀러라는 진기록을 세운다. 12월에 발매한 베스트 앨범 'MOMENT' 는 그룹 자체 최고 초동, 누계 판매량을 기록. 첫주에만 125만장이 넘는 판매고에 231만장이라는 판매고를 기록한다.[8] 그야말로 스피드 최전성기이자 정점.
2.3. 판매량 하락, 개인활동의 시작
2월과 5월에는 Preious Time와 Breakin' out to the morning을 발표. 처음으로 다카코와 히토에의 파트가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때부터 판매량이 60만장대로 확 꺾이기 시작. 순위도 조금씩 밀려나 주간2위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다만 객관적으로 성적과 인기가 나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실제로 두 곡은 각각 그 해 연간차트 32위, 36위로 그 당시 결코 나쁜 인기가 아니었다. 다만 이전 성적들이 너무 좋아서 상대적으로 더 낮아보이는 느낌이 많이 든다.
99년부터는 각자 개인활동을 시작한다. 사실 ALL MY TRUE LOVE때도 메인보컬 두명의 솔로곡이 수록되어 있었고, 라이브로도 선보인바 있어 개인활동 수순이 예상되고는 있기는 했다. 멤버들이 각자 드라마, 영화에 출연하거나 솔로데뷔를 하는 등 개인활동도 활발. 그룹뿐만 아니라 솔로활동 역시 많은 지지를 받았다. 히로, 다카코, 에리코는 높은 판매량과 나온 싱글들도 나름대로 히트하였고 히토에는 R&B/힙합 성격의 'Inori'로 활동하면서 매니아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단, 다카코는 솔로활동 초기에 부실한 보컬/라이브 실력이 드러나기도 하였다.[9]
2.4. 그룹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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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0월 돌연 해산을 발표한다. 소속사 사장이 밝힌 바에 따르면 실은 SPEED 자체가 솔로 데뷔하기엔 어린 멤버들을 위한 일종의 '프로젝트 그룹'이었고, 다만 생각보다 그룹이 초대박이 나는 바람에 오히려 더 길게 활동하게 된것이라고 한다. 본래는 1997년 즈음엔 이듬해 해산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이미 최전성기였던 2집시절부터 멤버들간의 그룹해산이 논의되고 있었으며, 해산발표 한달전쯤 가서야 결정이 되었다고.[10]
갑작스러운 해산이라 많은 추측들이 난무했다 가장 많은 추측은 멤버간의 불화설이었는데 그룹내 메인보컬이었던 시마부쿠로 히로코와 이마이 에리코 간의 불화설이 가장 많은 의혹을 샀다. 메인보컬이 두명이다 보니 파트배분문제에 있어 서로 갈등이 있지 않았나 하는 추측. 하지만 몇년뒤 이벤트성 싱글을 내기도 하고 콘서트 투어도 여는 모습을 보아 이런 의혹을 믿는사람은 거의 없어졌다.
11월에는 아키히토 천황 즉위 10주년 기념식에 초청되어 참석한다. 각계 각층에서 공로와 활약을 인정받은 이들이 초청되었으며, 연예인으로는 우리에게도 알려진 아무로 나미에. 쿠로키 히토미, GLAY 같은 유명인들과 함께 자리에 초청되는 영광을 얻었다. 참고로 여가수중에서는 아무로 나미에와 SPEED가 유일하게 초청받았으며, SPEED는 전체 참석자 중에서 최연소 참석자였다고.
SPEED의 마지막 돔투어
연말에는 스피드의 마지막 돔투어를 개최하고, 3집 앨범을 발표하며 활동을 마무리 한다.[11] 홍백가합전에도 출전하였는데, 그 당시 스피드 해체 소식 등과 맞물려 화제성이 높았다. 덕분에 홍백 1부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해산 바로 직전, 에리코가 가장 늦게 솔로데뷔를 한다. 그리고 마침내 2000년 3월 31일 정식으로 해산하게 되었다. .
2.5. 해산 이후
히토에는 TLC같은 미국 흑인풍 블랙뮤직을 선보였던 그룹때의 모습을 이어갔고 히로는 Coco d´Or 라는 명의로 발매한 팝, 재즈 풍의 편집 음반이 히트 하는 등 보컬리스트 로써의 역량을 한껏 보여줬다. 특히 히토에는 첫 솔로싱글인 inori와 두번째 싱글인 I got you때 완전히 다른 사람 수준으로 보컬이 급성장했다. 다만 안타깝게도 히토에는 첫 싱글 이후 미국 유학 등으로 공백기가 상당히 길었고, 좋은 퀄리티에도 불구하고 음반판매량은 매우 저조했다. 활동량도 매우 적어서,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음악방송이나 단독투어 등도 없었다. 우에하라 타카코는 도망자 Plan.B에도 출연했었다.
2.6. 재결성, 현재
2003년, 기간한정으로 부활하여 ‘Save the children’ 자선 라이브 투어를 하였다. 전국 9개소에서 13만명을 동원하였으며, 파이널 공연은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개최되었다.
2008년 거의 10년만에 재결성하여 솔로 활동과 병행하며 활동했다. 그러나 2013년에 아라카키 히토에가 결혼하면서 소속사와의 계약을 종료한 사실이 이듬해 밝혀졌고, 이마이 에리코와 시마부쿠로 히로코가 "히토에가 없는 SPEED의 부활은 있을 수 없다"라고 공언하면서 SPEED는 다시 한 번 해체한 셈이 됐다. 다만 소속사에서는 공식적으로 해체를 발표하지는 않았다
2015년 7월 소속사에서 멤버인 히로와 에리코가 'ERIHIRO'라는 이름의 유닛을 결성할 것을 발표하였다. 8월 26일에 발매된 데뷔 싱글의 제목은 'Stars'. 이미 전성기를 훨씬 지난 그룹이다보니 챠트성적이나 판매량은 굉장히 저조했지만 팬들도 그렇고 본인들도 계속적으로 음악활동을 한다는것에 의미를 두고 있기에 개의치 않는 모습.
그러나 2017년 이마이 에리코와 우에하라 타카코의 불륜이 들통났고, 심지어 우에하라는 불륜으로 남편을 자살에 이르게 했음이 밝혀져 연예계에서 매장당했다. 정작 활동당시 숱한 염문을 뿌리고 다녔던 히로코는 결혼 이후에 무탈하게 잘 살고 있어서 그나마 팬들을 안심하게 하는 중.
완전체로 다시 활동한다 하더라도, 이마이 에리코의 참의원 임기가 6년이라 빨라도 2022년에서야 완전체 활동이 가능하다. 참의원은 형식적으로 겸직이 가능하나,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에서 SPEED가 갖는 사회적 위치 및 정치인으로서의 위치를 감안했을 때는 2022년까지 활동이 실질적으로 어렵다.
3. 멤버
3.1. 아라카키 히토에 (新垣仁絵)
SPEED의 리더이자 댄스, 코러스 담당. 1981년 4월 7일[12] 생으로 최연장자이다. 시마지리군 야에세정 출신.
SPEED 멤버 중에서 춤 실력이 가장 출중하다. 강한 인상의 외모와 달리 마음은 무척 여려서, 예능 '헤이!헤이!헤이!'에 출연했을때 마츠모토 히토시에게 머리를 맞자[13] 바로 울어버려서 마츠모토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SPEED 해체시에 다른 멤버들처럼 솔로 활동도 했지만, 연예계 활동보다는 미국에서 유학하며 미술 쪽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방송에서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기도 하고 전시회도 연 적이 있다.
솔로활동 당시에는 그룹때보다 미국 본토스타일의 정통 R&B, 힙합색깔이 강한 노래로 활동하였다. 그룹에서는 노래를 안 부르고 코러스로 활동했기 때문에 히토에의 실력을 몰랐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I GOT YOU에서 보여준 엄청나게 발전한 가창력 덕분에 재평가가 가장 많이 이뤄졌던 멤버. 솔로 데뷔곡이었던 Inori때랑 비교하면 거의 다른 사람수준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히토에한테 이런 음악성이 있었구나' 하고 놀란 사람들이 많았다. 음악적으로 미국 블랙뮤직 스타일을 충실히 재해석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매니아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SNS는 다른 멤버들에 비하면 잘 안 하는 편이다. 한때 HITOE 명의로 트위터를 했었으나 닫은 적도 있었다.
2013년에 일반인과 결혼하면서 연예계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얼마 후 트위터도 다시 열었다.
갓 스물 때 20세 연상의 마츠모토 히토시와의 연애를 시작으로 최근 12세 연하와 결혼한 시마부쿠로, 유부남 시의원과 호텔을 들락거리는 사진이 찍힌 이마이, 그리고 역시 유부남인 배우 아베 츠요시와의 불륜으로 남편을 자살에 이르게 한(...) 우에하라를 볼 때, 그나마 아라가키는 평범하고 조용하게 살아가고 있다.
3.2. 우에하라 타카코 (上原多香子)
우에하라 타카코 문서 참조.
3.3. 이마이 에리코 (今井絵里子)
이마이 에리코 문서 참조.
3.4. 시마부쿠로 히로코 (島袋寛子)
메인보컬. 1984년 4월 7일[14] 생으로 팀에서 막내다. 데뷔했을 때 무려 초등학교 6학년. 기노완시 출신이다.
99년 hiro 명의로 솔로활동을 시작했다. 에리코와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SPEED의 프로듀서 이지치 히로마사가 곡을 제공했으나, 점점 하야마 히로아키[15] 등 다른 제작자의 곡도 제공받기 시작했다. Coco d'Or라는 프로젝트 그룹 명의로 재즈 리메이크 음반을 내 호평을 받기도 했다. 2013년에는 코자 미사코의 동명의 곡을 리메이크한 싱글 童神(와라비가미)와, 여러 오키나와 출신 가수들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앨범 私のオキナワ(나의 오키나와)를 내기도 했다. 현재는 뮤지컬 위주로 활동하고 있으며, 에리코와 함께 ERIHIRO를 결성했다.
2016년 9월 12일 12살 연하인 남자랑 약혼했다.
4. 영향
일본 가요계에서 댄스 그룹의 역사를 말할 때는 빼놓을 수 없는 그룹이다. 때문에, SPEED 앞에선 모닝구 무스메, Perfume, AKB48도 '''닥치고 고개부터 숙인다'''. 단순히 대선배[16] 라서가 아니라, '''현재 메이저 걸그룹의 멤버 다수가 SPEED를 동경해 연예계에 입문한 사람들'''이다. 퍼퓸 같은 경우만 해도 결성동기가 'SPEED' 같은 가수가 되고 싶어서였다.[17] 다들 SPEED와 방송이라도 같이 출연하면 팬심을 주체 못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 시마부쿠로 히로코를 동경하던 AKB48의 전 멤버 카사이 토모미는 솔로 데뷔 당시 시마부쿠로가 축하의 편지를 써 주자 기쁨에 울먹이는 모습을 보였고, 또한 Perfume은 원래 SPEED를 동경해서 연예계에 입문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소위 '틴에이저 그룹'으로 통하는 미성년 아이돌 그룹의 원류격이라고 할 수 있다. 방송에 첫 출연했을 당시 멤버들의 나이가 초등학교 5학년~중학교 2학년이었을 정도로 지금 일본에서 데뷔하는 아이돌 그룹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낮은 연령에 데뷔했음을 알 수 있다.
최고 인기곡이자 가장 높은 판매량을 기록한 곡 'White Love'은 지금도 겨울을 대표하는 J-POP 명곡으로 손꼽힌다.
일본에서는 SPEED 해체 이후로 한동안 SPEED의 아류격인 그룹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같은 라이징 프로덕션 후배인 Folder5, EARTH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대부분 이렇다할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후로 몇년간은 '춤과 노래에 능한 소녀' 컨셉의 가수는 한동안 등장하지 않았다가[18] , 00년대 초반 BoA가 그 빈자리를 적절히 파고들면서 대박을 터뜨렸다.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우리나라 1세대 걸그룹들에게도 굉장히 많은 영향을 끼친 그룹. 지금은 흔한 얼굴마담/춤담당/메인보컬/리드보컬 구성의 원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실제로 티티마를 비롯한 몇몇 그룹들은 아예 대놓고 스피드를 표방했음을 밝히기도 하였다. 2003년에 활동했던 Dejavu라는 그룹의 ‘Run’ 뮤직비디오를 보면 멤버수와 의상, 컨셉, 곡의 분위기는 SPEED의 ‘Go go heaven’을[19] , 세트장은 ‘Breakin’ out to the morning’을 연상케한다.
한국에도 팬이 꽤 많은 편이었다. 한국 최대의 연예 커뮤니티 베스티즈가 원래 이 그룹의 팬사이트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현재 베티에 있었던 SPEED 팬들은 멀티레모니아 등으로 옮겨갔지만 현재는 그 사이트도 잠정 중단. 이미 연차가 오래된 걸그룹이고 본국에서도 활동이 뜸한 그룹이라 AKB48 같이 현세대에 핫한 걸그룹들처럼 활발히 팬 활동을 하는 이들은 없다.
5. 이야기거리
5.1. 싱글
5.2. 앨범
5.3. 베스트 앨범
[1] 메인보컬은 이마이, 시마부쿠로 둘이 맡았고, 댄스와 코러스 담당은 우에하라와 아라카키가 맡았다.[2] Beautiful Beat Waves의 약자로 오키나와의 아름다운 비트의 물결이 세상을 향해 뻗어나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3] 이 그룹에는 지금들어봐도 유명한 연예인들이 굉장히 많다. 현재도 배우로 활발히 활동하는 야마다 유, 쿠로키 메이사를 비롯, DA PUMP, day after tomorrow의 보컬이자 코다 쿠미의 동생인 코다 미소노. SKE48의 멤버인 사이토 마키코 등이 우리나라에도 알려진 대표적인 BBWAVES 출신들.[4] 참고로 이 당시 탈퇴했던 3명중에 한명은 '센다 아이'라는 연예인으로 현재 대만과 일본에서 연예계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5] 멤버들이 전부 오키나와 출신이다. 그래서 거의 반장난식으로 추천하는 닉네임이 많았다고.[6] 일본의 유명 음악 프로듀서이다.[7] 참고로 원래 이 곡으로 그 해 일본 레코드 대상에 출전할 예정이었는데, 당일날 자신들의 주연영화 주제가였던 ALIVE로 선곡을 바꿨다고 한다.[8] 오리콘 기준.[9] 사실상 다카코는 비주얼 담당 멤버였기 때문에, 가수로서보다는 배우 겸 모델로서 활동이 더 활발했다.[10] 여담으로 주간지 FOCUS의 보도에 의하면 직접적인 원인은 시마부쿠로 히로코의 남자 관계라고 하는데, 일본 주간지의 신뢰도는...[11] 스피드의 싱글/앨범 통틀어 마지막 주간1위 작품[12] 같은 그룹의 막내 시마부쿠로 히로코와 생일이 똑같다.[13] 게스트의 머리를 때리는건 그 당시 일본 예능에서 유행하던 문화로, S.E.S.가 일본에서 데뷔했을때 슈 역시 마츠모토에게 머리를 맞았다(...) 너무 괴랄한 문화라 국내에서는 한국을 무시한 태도라며 논란이 되었다.[14] 같은 그룹의 맡언니 아라카키 히토에와 생일이 똑같다.[15] 주로 w-inds 등 아이돌 그룹에 곡을 제공하던 송라이터. 3인조 유닛 Tourbillon의 리더이기도 하다.[16] 2020년 현재 해체없이 현역으로 활동중인 메이저 걸그룹 최고참이 '''아무로 나미에'''의 서포트 멤버로 데뷔했던 걸그룹 MAX인데, 스피드가 바로 그 다음해(96년) 데뷔했다. 한국으로 치면 H.O.T,와 데뷔 동기.[17] 한국도 비슷한 예가 많다. 90년대 중후반의 이른바 1세대 아이돌의 팬이었다가 이후 2-3세대 아이돌로 데뷔한다던지.[18] 이같은 아이돌 침체기를 '아이돌 빙하기'라고 한다. 그 침체기에 모닝구 무스메가 1999년 LOVEマシーン으로 일약 대박을 터뜨린다. 하지만 실력은...[19] 검정색 가죽의상을 입고있다가 후반부에 흰색의상을 입고 야외로 장소가 바뀌는 것까지 똑같다.[20] 일본위키가 출처인듯 보이나 정민철의 일본진출시기는 스피드 해체후인 2000년이므로 신뢰도는 낮다. 다만 97년말부터 몇년동안 대전지역 케이블 방송에서 채널V나 Vibe(MTV Japan)를 송출하였으므로 일본진출전 스피드의 PV를 손쉽게 접할 여지는 있었다.[21] 역대 일본 여자 아이돌 싱글 판매량 1위기록을 가지고 있었으나 2013년 AKB48의 さよならクロール로 인해 깨졌다. 하지만 AKB48의 경우 악수회로 인한 판매가 대부분일뿐더러 기록을 깼던 さよならクロール의 경우 총선거 투표권 싱글이다...[22] 수록곡인 季節がいく時가 1999년에 개봉한 도라에몽 극장판인 노비타의 우주표류기 엔딩곡으로 타이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