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일동
대한민국의 정치인.
1. 개요
독립운동 시절 김구의 제자로 활동한 후 정치에 입문하여 1980년까지 반공법 등의 제재로 원활하지 않은 정치 생활 끝 5선 의원을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뜻을 같이한 동지로는 민주화 운동 당시 장준하, 김대중 등이 친한 편이었고 윤보선, 김영삼, 문익환 목사 등 여러 재야 인사들과도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신민당이 유진산 체제였을 시절, 기존의 타협적인 당의 태도에 반발하는 의원들을 이끌고 선명야당을 위시하여 민주통일당, 즉 제3야당을 창당하여 독자 노선을 구축하였다.
하지만 1965년 양일동 본인이 반공법으로 구속된 적이 있을 정도로 거침없이 국회의원을 탄압하고 반정부 행위를 탄압하는 이중에 선명야당을 위시한 민주통일당을 가만둘 리 없었기에 많은 고초가 뒤따랐다.
박정희가 국가 전복을 했을 당시 대통령 윤보선은 박정희와 대통령 선거전을 할 당시 ‘남로당 출신 박정희는 뒤에서 비겁하게 행동하지 말고 남자답게 나와 주먹으로 대결을 하자’라고 말했을 정도로 박정희의 정치적 처신에 대해 격분하여 막말을 한 적도 있다.
확실히 남로당 출신이었던 박정희가 어느샌가 정치적 계산으로 반공을 근거로 정치인을 탄압하는 상황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죄를 덮어씌워 구속시키면 그만인 상황에서 독재 타도를 외치며 제 3야당을 창당한다는 게 독립운동 당시의 각오에 버금가는 자살 행위였을 수도 있었던 일이자,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인 본산이 되어 든든히 민주화 동료들을 지원했다.
아무리 독재 상황이었지만 정치적으로 상당히 명망이 있는 정치가가 어느 정도 타협을 하지 않고 자신의 신변이 정통으로 위협될만한 독재타도 정당을 창당하며 자신의 정치적 안전한 입지를 모두 버린다는 것을 현재에 와서 상상할 수 있을지.
결국 조금씩 입지가 줄어들며 김대중 납치 사건까지 일으키며 양일동에게 죄를 덮어씌우려다 문세광에게 반발로 아내를 총격으로 잃고 악순환을 거듭하다 박정희는 대가를 치루어 생명을 잃고 독재는 마무리된다.
상당히 오해가 있는 것이 요즘도 ‘민주정당’을 공산주의에 빗대지만 세계 어느곳도 민주주의를 공산주의로 몰아붙히는 경우는 없고 민주화 진영이든 공화당 진영이든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있는 것이며 공산당은 그 궤의 밖에 있는 개념인데 남로당 출신이자 나중에 북한에서 같은 남로당 동지를 보내 박정희를 회유하려 할 때도 정치계 안팍, 그리고 독재진영에서도 사형을 부추겼으나 끝내 그 동지를 감쌌던 골수 공산주의자 박정희와는 달리 양일동과 같은 민주화 운동가들은 어디까지나 민주주의를 지키는 입장이지 민주주의가 공산당이라는 것은 김일성이 박정희를 회유하려 했던 것처럼, 박정희가 민주주의를 교묘하게 공산주의로 매도하며 민주주의 정신을 더럽히는 공산주의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행동이자, 그러면서도 미국의 원조는 받는 이중적인 행동에 불과했다.
본디 사회주의적인 것은 적어도 적법한 절차에 따라야 하는데 박정희나 박근혜나 그 과정에서 법치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니 공산주의의 그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2. 기록
1912년 전라북도 군산부에서 태어났다. 1930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연루되어 중동중학교를 퇴교당하였다.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1934년 북경민탁고등학교(北京民鐸高等學校)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가 1935년에 전단물을 가지고 일본에 가던 중 일본의 공항에서 잡혀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고 일본 이치타니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복역 2년 8개월만에 가석방되고, 고국으로 압송되어 농촌운동과 농민교육에 종사하였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면서 이승만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하였는데 우익에 소속되었다. 제1공화국 이승만 정부에서는 야당계 무소속으로 제3대, 제4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민주당과 행동을 같이 하였다.
제2공화국 때는 민주당 소속으로 제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60년 12월 14일 다른 민주당 구파 소속 정치인들과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민당에 몸담았다. 그러다가 5.16 군사정변으로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정치규제에서 풀린 이후에는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성동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후 진산 파동 때 범 유진산계였다가 따로 자신의 계보를 만들면서 유진산과 사이가 멀어졌다.
결국 1973년 김홍일 등과 신민당을 탈당하여 민주통일당(약칭 통일당)을 창당하였다. 그 해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성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중선거구제 하에서 신민당 정운갑 후보, 민주공화당 민병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성동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김제만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이듬해인 1979년 5월 선명야당 노선을 내세운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로 취임하자 신민당과 함께 반 유신정권 투쟁에 동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