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진레이온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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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 개요
경기도 남양주시 도농동, 지금동[1] 일대에 있었던 원진레이온이라는 회사의 합성섬유 공장에서 일어났던 사고다. 국내 사상 최악의 산업재해로 여겨지는 꽤나 중요한 사건.
이 회사의 시초는 1964년 화신그룹의 창업주 박흥식이 일본 도레이에서 노후된 비스코스 인견을 제조하는 설비를 들여와 2년 뒤인 1966년 공장을 세워 운영한 것인데,[2] 정작 박흥식은 1년만에 이 회사를 매각했다.[3]
2. 문제 및 피해
설립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노후된 기기에서 발생한 불순물인 이황화탄소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직원 대부분이 가스에 중독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결과적으로 직업병으로 인한 사망자 8명에 장애판정 637명이 발생했다. 이들은 언어장애, 반신/전신 마비, 정신 이상 등의 증세를 보였다.
이황화탄소의 발생과 그 유해함을 회사 측에서도 알기는 한 모양인지, 환기 설비를 설치하긴 했으나 문제는 거꾸로 설치하는 바람에 바깥으로 나가야 할 이황화탄소가[4] 도로 안으로 들어오는가 하면, 격무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기계에 머리를 박고 일했기 때문에 환기 장치의 유무와 상관없이 기계에서 스며나오는 이황화탄소를 직접 들이마시게 되었다.
물론 직업병으로 인정받지 못해서 그렇지, 실제 사망자와 재해자는 위에서 소개한 수치보다 훨씬 많다. 김봉환씨는 직업병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1991년 별세했고, 같은 해 권경용씨는 방에 연탄불을 피워놓은 채 극약을 먹고 자살했다. 1992년 고정자씨는 정밀검진을 받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다가 목욕탕 수도꼭지에 스카프로 목을 맨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몸이 아프고 죽을 것 같아서 퇴사하는 사람들을 두고 회사는 약간의 보상금으로 입막음을 시도했다. 당시 구리, 도농주민 상당수가 이 회사의 일자리에 의존했기에 회사의 은폐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이다. 정부의 방조도 한 몫 했다. 이 회사에서는 1981년 첫 이황화탄소 중독 환자가 나왔음에도 오히려 '''노동부는 1986년 25,000시간 무재해 달성으로 원진레이온을 표창했다'''(...).
그러나 사지 마비, 정신 이상, 기억력 감퇴, 콩팥 손상 등의 이황화탄소 중독 증상이 십수 년 동안 여러 명에게서 나타났고, 그중 몇명이 1987년 정부에 진정함으로써 원진레이온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다. 노동부는 조사에 나서 원진레이온의 위법 사실을 파악, 발표하지만 산업재해의 인정과 보상에는 지극히 인색했다. 피해 노동자들은 1개월간의 요양치료를 받고 산재등급에 따라 장애보상금을 받았지만, 이황화탄소 중독이 장기간의 치료를 요한다는 사실은 몰랐다. 이후 병세가 악화되어 재요양신청을 했지만 노동부는 이미 끝난 일이라며 재요양신청을 거부해 버린다.# 결국 회사는 1993년 6월 8일 폐쇄와 동시에 폐업되었고, 많은 노동자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당시 섬유, 의류 업계에 종사했던 타사 사람들에게도 평판이 매우 나빴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더 섬뜩한 것들이 많은데, 영업사원으로서 원진레이온에 계약차 방문했더니 노동자들의 비중격(鼻中隔)이 녹아내려 콧구멍 사이에 구멍이 뚫리는 바람에 마치 만화에 나오는 식인종들처럼 콧구멍 사이에 볼펜을 끼워놓고 다니더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3. 사태 이후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피해자들의 정신적, 신체적 후유증이 심각한 상태라는 통계가 있다.[5] 여기서 직업병을 얻어 고통받는 노동자들과 가족들을 위해 설립된 비영리법인인 원진재단이 만든 병원이 있는데, 그게 바로 이웃한 구리시 인창동에 위치한 원진녹색병원이다.[6] 이 병원이 설립된 이유가 노동자와 관련되어 있어, 축하공연 당시 노래를 찾는 사람들 등 민중가요 가수들이 초청되었다.
원진레이온 사태는 20세기 몇몇 기업인의 어두운 면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여담으로 후에 발생한 '삼성전자 백혈병 사건'을 이 사태와 견주는 사람도 있는데, 이런 기존에 발생한 문제점들이 대중에게 부정적 인식을 쌓다보니 더 주목을 받게 된 사례기도 하다.
4. 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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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에 부영에서는 도농동 일대의 큰 대지를 매입해 1998년부터 '''아파트를 건설'''했다. 2000년 가을 이후에 입주를 시작했는데 과거의 악명이 지역 주민들에게 잘 가시지 않다 보니 역시 입주를 꺼리는 편이었으나, 중앙선 전철 개통 1~2년 전부터는 제법 자리를 잡아갔고[7] 이후 중산층 거주지로 그럭저럭 남게 된다. 남양주시/행정 문서 참고.
5. 그 외
레이온은 국내에서는 유지 중인 공장은 없고 원사는 대부분 외국에서 수입하고 있으며, 특히 중국산 원사가 많이 수입되고 있다.[8] 국내산 인견이라고 해도 실 자체는 대부분 중국산이고, 그 원사로 천을 만들고 염색을 한 후 옷이나 원단을 만드는 공정이 국내에서 이루어지는지라 국내산이라고 표기하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국내의 레이온 공장이 전부 문을 닫았고, 특히 원진레이온의 설비는 폐업 후 1994년 라전모방[9] 이 경매로 낙찰받아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의 국영 화학섬유총공사에 팔았다.[10] 당연히 거기서도 한국보다 몇 배나 더한 온갖 질병이 터져나왔다고 한다. 1999년에 참여연대 국제인권센터가 답사하여 공장 인근에서 노동자들을 만나 인터뷰했으나, 이들은 한국 수입 사실을 알았지만 유해성에 대해 모르겠다고 했다. <월간중앙> 2014년 9월 17일자에 의하면 북한으로 기기가 흘러들어갔다는 말이 나왔다.
박재동은 자신의 만평에서 노동자의 감사의 말 형식으로 이 사건을 비판했다.
저는 항상 회사와 노동부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만일 직업병 판정이 더 일찍 났더라면 어찌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도와주신 여러분,
[1] 설립 당시 양주군 미금면 도농리, 지금리였으며, 폐쇄 당시에는 미금시 도농동, 지금동이었다. 지금은 인근에 다산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이 일대가 다산동으로 조정되었다.[2] 이때는 원진레이온이 아니라 흥한화학섬유(興韓化學纖維)라는 회사의 공장으로 세워졌다. 그런데 설립 초기부터 경영 부실이 있어서 한국산업은행의 법정 관리를 받다가 인수되어 세진레이온으로 바뀌다가 원진레이온으로 바뀌었다. 이후 소유주가 한국민속촌 회장을 지낸 정영삼, 코오롱그룹의 창업주 이원만의 동생 이원천 등으로 소유권이 바뀌었으나, 1979년에 한국산업은행에게 법정 관리를 더 받았다.[3] 이후 박흥식은 사업에서 실패하는데, 물론 그래도 1989년 당시 집 매각으로 (압구정 현대아파트 35평형이 3억하던 시절) 무려 30억을 받았다고 하니 가난과는 거리가 멀었던 듯.[4] 이것도 당연하지만 정상적인 발상은 아니다. 정상적인 공장이라면 환기 장치로 독가스를 빼낸 후, 중화시켜 무독한 기체만 공장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5] 해당 페이지(다운로드)의 안전보건 연구동향 '10년 4월호-Vol.32'의 PDF 파일을 참조.[6] 서울시 중랑구 면목동 사가정역 근처에도 구 기독병원을 인수해 개원한 같은 재단 부설 '녹색병원'이 있다. 그런데 흥미로우면서 가슴 아픈 사실 한가지는, ‘녹색병원’이 현재 이용하는 건물이 ‘YH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의 ‘뒷이야기’ 부분 참조.[7] 큰길 건너편 동화고등학교의 입지도 한 몫 했다.[8] 공정에 염산 등 유독물질을 쓰지 않는 대체공정으로 생산하는 '라이오셀'과 같은 원사를 만드는 공장은 아직 남아 있다고 한다.[9]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지금의 아일랜드 캐슬 자리에 있었던 소모방 업체. 이후 1999년 조업을 중단하고 회사 터를 재개발하던 중 2001년 부도로 문을 닫았다.[10] 앞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원진레이온의 생산 기계는 일본의 도요레이온(현 도레이)에서 들여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