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마산 민주 항쟁
억눌린 우리 역사
터져나온 분노
매운 연기 칼바람에도
함성소리 드높았던
동트는 새벽벌
시월이 오면
핏발 선 가슴마다
살아오는 십 일육
동지여 전진하자
깨치고 나가자
뜨거운 가슴으로
빛나는 내일로
-
- 부산대학교 새벽벌도서관 10.16 기념비.
[clearfix]많은 취재들은 그때의 분위기를 '''축제로 표현했다.'''
1. 개요
釜山·馬山民主抗爭 / Busan–Masan Democratic Protests[2]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부산광역시, 마산시[3] 등의 지역에서 일어난 민주 항쟁. 박정희의 제4공화국 유신 독재 체제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사건으로 '''유신 정권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2. 배경
1970년대 후반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권은 한계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유신 헌법 제정 이후 독재를 무너뜨릴 정치적 기회조차 사실상 박탈당하자 시민들은 사회운동 등에 대한 찬성론이 커졌으며, 역으로 정부는 이를 누르기 위해 더 학생, 시민운동을 탄압했다. 당시 미국은 지미 카터 대통령이 박정희 정부의 인권 문제를 강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한미관계도 역대 최악이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1차 오일쇼크로 물가상승률이 크게 오르면서 경제위기도 봉착했다. 그나마 1차 땐 중동에서의 대규모 건설사업 수주로 수십억 달러의 외화가 들어와 어찌어찌 넘어가나 싶었지만, 이것 역시 투자조정에 실패하면서 중화학공업이 시중자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어 중소기업들이 큰 피해를 보게 되었고, 이와중에도 물가상승률은 여전히 두자릿수대를 기록하며 경제성장률을 추월할 지경이었다. 여기에 부동산 폭등과 물가가 안정되지 않던 상황에서 도입된 부가가치세는 물가상승률을 높여주는 요인이 되며 서민들의 반발을 극심하게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1978년 건설주 파동으로 주식시장의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면서 경제에 다시금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고, 비슷한 시기에 2차 오일쇼크까지 닥치면서 물가상승률은 20%대까지 오르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중공업에 비해 자금 우선순위가 떨어졌던 경공업이 중심이 된 부산, 마산 지역의 많은 중소업체들은 이러한 타격의 직격탄을 받는다. 이렇듯 당시의 경기 불황과 부가가치세 신설 등의 여파로 인해 박정희 정권에 대한 경남지역 민심은 크게 악화되고 있었고, 이런 요인은 이후 시민들이 학생들에게 호응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그 결과 1978년 12월 12일에 치러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을 포함한 무소속이 민주공화당의 득표율을 '''앞서는 등''' 크게 약진했으며, 이에 충격을 받은 민주공화당은 부가세 도입을 주도한 이들에 대한 책임론을 강하게 들고 나왔고, 대통령 박정희는 김정렴 비서실장, 남덕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등을 경질하는 개각을 단행하였다.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유신정우회의 백두진을 국회의장에 앉히면서 국회를 통제하려 하였다. 이런 와중에 1979년 5월 김영삼은 신민당 총재 경선에서 온건파였던 이철승을 누르고 총재에 선출된다. 그리고 강경 대여노선을 취하며 과감하게 대여/청와대 투쟁을 하게 된다.
이때 YH 사건이 일어나고 신민당은 당사를 노동자들에게 내주었는데, 박정희와 여권은 40시간 이상 당사를 내준 것에 김영삼을 배후로 의심하였다. 어쨌든 결말은 공권력을 투입해 진압하는 과정이 벌어져, 당사에 경찰이 들어가 야당 의원 등과 실랑이를 벌이며 진압 작전을 벌이던 중 당시 21세 여공 김경숙 양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런 와중 신민당에서는 내분이 발생해 유기준, 윤완중, 조일환 등 신민당 원외 지구당위원장 3명은 5월 전당대회에서의 대의원 몇 명의 자격을 문제삼아 서울지방법원에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게 했고, 전당대회 의장이던 정운갑이 총재권한대행이 되었다. 그리고 그해 9월 12일 김영삼은 뉴욕 타임스지와 인터뷰를 하였다.
이 인터뷰에서 김영삼 의원은 "미국이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 박 대통령을 제어해줄 것이며 이를 위해 대한민국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라는 취지의 말을 하였고, 이에 발끈한 여권은 국회의원으로서 품위를 잃은 사대주의적인 망동이라며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을 일으키게 되고, 야당이 항의의 표시로 10월 13일 신민당 국회의원 66명 전원, 민주통일당 국회의원 3명의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자 민주공화당은 선별적 수리를 하겠다는 발표를 한다.
3. 전개
3.1. 부산에서의 전개
이런 상황 가운데 평소 데모 안 하기로 유명해 '''유신대학교'''(...)라는 오명이 붙어있던 부산대학교[5] 에서 시위 준비가 이뤄지고 있었다. 그 시작은 항쟁 하루 전인 10월 15일이었다. 이날 공대생 이진걸이 '민주선언문'을, 법대생 신재식이 '민주투쟁선언문'을 각각 뿌리면서 오전 10시에 도서관에 모일 것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되도록 학생들이 모이지 않자 주동자들은 실패한 것으로 단정하고 해산하였고, 정작 10시 40분쯤 되어서 모인 수백 명의 학생들은 주동자가 나타나지 않았기에 흐지부지 해산하고야 말았다. 이에 큰 좌절감이 교정을 휩쓸었으나 그럼에도 교내의 각 동아리와 학생들은 시위 준비를 멈추지 않았다. 이중 상대생 정광민이 나서서 '선언문'을 작성하고 16일 인문대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뿌리며 "저 유신독재정권에 맞서 우리 모두 피 흘려 투쟁하자"고 선동하였다. 이에 수십명의 학생들이 호응하였다.청년학도여. '''지금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조국은 심술궂은 독재자에 의해 고문받고 있는데도 과연 좌시할 수 있겠는가.''' 이 땅의 위정자들은 흔히 민족을 외치고 한국의 장래를 운운하지만 진실로 이 나라 이 민족의 영원한 미래를 위하여 신명을 바칠 이 누구란 말인가. 청년학도여!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돌이켜보게나... (중략)
소위 유신헌법을 보라! '''그것은 법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을 위한 법이라기보다는 한 개인의 무모한 정치욕을 충족시키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정당한 비판과 오류의 시정을 요구하는 순수한 의지를 반민족적 행위 운운하면서 무참히 탄압하는 현정권의 유례없는 독재.''' 이러고도 우리 젊은 학도들은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사회 문제에 방관만 하고 있을 것인가! 너희들의 정열은 어디 있는가... (중략)
청년학도여! 부디 식어가는 정열, 잊혀져 가는 희미한 진실, 그리고 이성을 다시 한번 뜨겁게 정말 뜨거웁게 불태우세! 혼탁한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지성인으로서의 사명감, 그리고 책임감으로 '''우리 모두 분연히 진리와 자유의 횃불을 밝혀야만 하네!''' (중략)
모든 효원인들이여 '''드디어 오늘이 왔네!''' 1979년 10월 16일 10시 도서관으로!
정광민이 인솔하는 시위대는 도서관 앞에 이르자 수백 명으로 불어났고 곧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교직원들이 시위대를 말리려고 했지만 시위대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기만 했다. 2000여 명 정도로 불어난 시위대는 운동장을 한 바퀴 돈 뒤에 교문으로 나아가 시내 진출을 시도하였다. 전경은 최루탄을 쏘며 교내로 진입했는데 여기에 분노하여 교내의 다른 학생들까지도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오전 11시경 5000명가량의 학생들은[6] 세 갈래로 나뉘어 각각 대학 담벼락을 무너뜨리고 진압부대를 격파하여 마침내 시내로 진출하였다.
학생들은 일제히 부산 중심가인 남포동과 부산시청[7] 앞, 광복동에 집결해 '유신 철폐' 와 '독재 타도'를 부르짖었다.[8]
오후 3시부터는 부산대 학생들의 소식을 들은 고신대학교와 동아대학교 학생들의 합류로 더욱 시위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시위 대열은 부산 국제시장 일대에서 게릴라식으로 전개되었다. 바둑판 같은 골목길에 수십 명 단위로 시위대가 돌아다니자 경찰들은 당황했다. 시위대 한 무리를 해산시키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시위대가 튀어나오곤 했던 것이다. 여기에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학생들을 응원해주었다. 시민들은 박수를 치고 경찰의 진압 작전을 방해하며 쫓기는 학생을 숨겨주는가 하면 빵이나 김밥, 청량음료, 캔맥주 같은 먹을거리와 담배[9] , 물수건 등을 던져주며 열렬히 호응하고 시위대를 격려했다. 퇴근 시간에 가까운 오후 6시부터는 회사원, 노동자, 상인들도 시위에 합류했다.
저녁 7시 5~7만여 명의 인파가 부영극장 앞 간선도로를 꽉 메운 채 시위의 물결을 이루었다. 시위의 주역인 대학생들 무리에 퇴근길의 회사원과 재수생, 교복 입은 고등학생, 심지어 상인과 노동자, 접객업소 종업원들까지 가세하였다. 이 시점부터 시위는 단순한 학생시위를 넘어 도시 하층민까지 포괄하는 '''민중항쟁'''의 성격을 띠었다.
시민들은 "유신철폐", "독재타도", "언론자유", "김영삼 총재 제명 철회" 등을 외치며 부산 시내를 쏘다녔다. 밤이 깊을수록 시위는 민중의 격렬한 저항으로 바뀌어갔다. 시위대는 새벽까지 부산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보이는 파출소마다 공격하여 남포, 부평, 보수, 중앙 등 총 11곳의 파출소가 파괴되었고, 파출소마다 걸려 있던 박정희 사진도 철거되어 태워졌다. 시위대는 이를 보며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으며 애국가를 부르기도 했다.
10월 17일, 이날부터 부산대는 임시휴교에 들어갔지만 시위는 멈추지 않았다. 부산대 교정에서 다시금 수천 명의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하다가 시내로 진출했다. 저녁이 되자 전날과 똑같은 양상으로 시위가 펼쳐졌다. 어제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듯 경찰은 최루탄과 곤봉을 마구잡이로 썼지만, 시위대는 끈질기게 저항했다. 이날의 시위로 중구, 서구, 동구 지역 내의 거의 모든 파출소, 경찰서, 공공기관이 공격당했다.
이틀 간의 격렬한 시위로 경찰 차량 6대가 전소되고 12대가 파손되었으며 21개소의 파출소가 불타거나 파괴되었다. 언론사[10] 와 경남도청[11] 도 공격당했고, TBC-TV[12] 취재 차량이 투석당하고 피해를 입었다. 그럼에도 경찰은 시위를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였다.
한편 당시 부산에서 집계한 자료에는 부상자는 16일 하루 동안에만 학생 5명, 일반 시민 10명, 경찰 95명 등 총 110명으로서 그 가운데 중상자는 18명이었다. 그러나 시민들로선 자진 신고를 기피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감안할 때 실제 피해는 그보다 훨씬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고문 피해자들도 양산되었던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부산의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서 박정희 정권은 18일 새벽 0시를 기해 이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3.2. 마산에서의 전개
부산에 육군 특전사의 2,000여 명의 병력이 투입되었지만 시위는 오히려 부산을 넘어서 마산까지 번졌다. 10월 18일 경남대학교 학생 1,000여 명이 기동 경찰 300여 명과 대치하다 투석전을 벌였고 3·15 의거탑에서 1,000여 명이 스크럼을 짜서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 및 언론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는 등 시내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날 저녁부터는 학생들과 시민 수천 명이 시내 중심가를 메우고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는 대규모 군중 시위를 전개하였다.
마산의 시위는 한층 더 격화되면서 민주공화당의 당사, 파출소, 방송국이 불타고 파괴되었다. 이에 인근의 창원, 진해시, 함안 등지에서 경찰 병력이 넘어오고 2개 중대의 군인까지 투입되어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경남대학교는 18일부터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으나 19일 학생들과 시민들의 경찰 차량 방화, 파출소·언론기관·관공서가 불타는 등 공권력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었다. 이 시위는 대학생과 일부 고교생은 물론, 노동자, 폭력배, 구두닦이, 접객업소 종업원 등 도시 하층민들이 대거 가세하여 경찰, 군인과 충돌하면서 시위 강도는 한층 격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산의 항쟁이 수출 자유 지역 노동자와 고교생까지 합세하여 더욱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는 10월 20일 0시를 기해 마산과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였다. 육군과 경찰 뿐 아니라, 대한민국 해군의 주요 기지와 부대들이 위치한 진해 지역에선 해군 육상 지원부대 근무자들까지 유사시를 대비해 시위 진압 등의 훈련을 급하게 하기도 했다. 해군사관학교에서 근무하던 어느 예비역 수병은 전역이 코앞이던 와중에 난데없이 샘브레이와 당가리 대신 잔뜩 실어와 던져준 민무늬 작업복 입고 힘든 시위 진압 훈련을 며칠 동안 하느라고 날벼락을 맞았다고 증언했다.
3.3. 계엄군의 진압
당시 부산, 마산에는 육군 특전사 예하 제1공수특전여단과 제3공수특전여단, 해군 제1해병사단[13] 의 제7연대[14] 와 2연대의 일부 병력이 계엄군으로 들어왔다. 이 중 부산에 있던 계엄사령관과 3공수 특전여단장, 전두환 당시 국군보안사령관은 소요사태에 대한 빠르고 강경한 진압을 계획했다.#
증언에 의하면 당시 계엄군의 진압은 매우 폭력적이고 혹독했다고 한다. 아래는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한 "부마항쟁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사건" 보고서에 기록된 실제 사례들이다.
해병대원 이○○(당시 이등병)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증언하길, "해병대는 돌 던지는 시위학생에 맞서 1대 1로 따라가서 다방, 공중전화박스 등으로 도망가는 학생들을 잡아 무차별로 구타하였고 그런 일이 있고 나서 학생들의 시위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는 말을 당시에 계엄군으로 출동한 해병대 동기들로부터 들었다. 당시 보호 장구라고는 철모밖에 없었던 해병대원들도 생존의 위협을 느껴서 갑작스럽게 그런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라고 진술하였다. 하지만 해당 증언을 자세히 보면 이 증언은 당시 실제로 출동한 해변대 제 7연대가 아닌 제 2연대의 해병대원일 뿐만 아니라 증언 자체도 전해 들은 내용으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가내수공업자 김○○(당시 24세)은 퇴근 후 버스를 타기 위해 육교를 건너려고 하다가 계엄군이 육교통행을 제지하자 항의를 했고, 그 대가로 계엄군에게 진압봉으로 머리와 어깨를 두 세 차례 폭행당한 뒤 군화발로 복부를 두세 차례 걷어차였고, 주먹으로 얼굴을 구타당해 충격으로 실신까지 하였다. 깨어나고 나서도 다른 시민 7~8명과 원산폭격을 당했고, 그 와중에 폭행당한 복부의 통증으로 계속 휘청거리자 군인이 엄살을 부린다면서 욕설과 함께 군화발과 진압봉으로 구타하였다. 그러다가 낙하산 마크를 단 군인 선임자의 명령으로 광복동 파출소로 인계되었고, 파출소에서 집으로 귀가했다가 급성 복막염으로 실신하여 가족들의 의해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당시 김○○을 수술한 부산 복음병원 외과 과장 장○○는 몸 내부적인 원인이 아닌 외상으로 인한 복막염, 그것도 군인에 의해 맞아 발생한 복막염 환자라는 점 때문에 충격적인 일로 기억하고 있다고 했으며, 수술 전날에도 군인들이 부녀자를 총 개머리판으로 치는 등 폭행을 가하는 장면을 봤다고 증언했다. 김○○ 이외에 군인에게 폭행당한 다른 환자들이 한두 명 입원했던 적도 있다고 했다.
금은방 직원 전○○(당시 29세)은 시위에 참여하던 도중 시위대가 계엄군을 향해 투석을 하자 계엄군들이 시위대에게 달려들어 총 개머리판으로 무자비하게 구타를 했으며, 그때 군용차량 뒤편으로 피신하다가 6~7명의 계엄군에게 포위당한 후 총 개머리판에 머리, 얼굴, 팔, 다리 등 전신을 구타당하여 실신하였다. 그 뒤 두개골 함몰분쇄골절로 인해 한독병원 응급실로 후송되었으나 한독병원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하여 인근에 있는 한○○ 신경외과 의원으로 재차 후송되어 대수술을 받았다. 골절된 뼈를 제거하는 수술을 한 지 한 달 뒤에도 인공뼈를 심는 두개골 성형술 역시 시행하였다.
부산 소재 동광섬유 직원 신○○(당시 37세)도 1979. 10. 18. 부산시 남포동에서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시청 부근에서 진압군에게 곤봉과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 등을 구타당하여 뇌 손상, 뇌경막 손상의 상해를 입었다.
한국방송공사에서 제작한 "KBS영상실록" 2005. 9. 25. 방송분에는 “베레모를 쓰고 집총을 한 군인이 군용차량으로 이동하는 영상, 한 군인이 총 개머리판으로 적색 상의를 입은 청년을 구타하고 옆에 있던 군인들도 함께 발로 차는 모습이 촬영되어 있고 이는 외신기자가 기록한 18일 부산의 모습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마산경찰서 전투경찰(일경) 서○○는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나는 시위대를 구타한 사실은 없지만 낙하산 마크가 부착된 군인과 일반 군인들이 마산 시내에서 돌아다니면서 시민들에게 불심검문을 요구하고 이에 불응하여 도망가는 시민들을 잡아서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장면을 본 기억은 있다. 당시 그 장면을 보고 무서워서 불안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고 진술하였다.
국제신문 취재기자 조갑제의 취재내용에 따르면 데모 군중에게 곤봉을 쓸 때는 어깨 밑을 때리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있지만 군인들은 데모 군중도 아니고 아무런 위협도 주지 않은 양민들의 머리를 주로 때렸다고 한다. 또 넥타이를 매지 않고 장발을 했거나 젊어보이는 남자들 중에 까닭 없이 붙들려가 견딜 수 없는 수모를 당한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런 무자비한 진압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의심되는[15] 사망자까지 나왔다. 사망자 신원은 마산 완월동에 살던 건설노무자 유치준(당시 51세)씨로 그는 마산에서 항쟁이 발생한 10월 18일에 노무 일을 나갔다가 죽은 채로 발견됐다. 10월 19일에 작성된 마산경찰의 「마산 경남대 소요사건 1차 발생 보고서」에서는 "변사자 발생, 목림여관 앞 도로변에서 50여 세로 보이는 노동자풍에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왼쪽 눈에 멍이 들고 퉁퉁 부은 채(코와 입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 있었음. 민방위 모자, 얼굴 둥근 편, 키 160cm 가량", "정황으로 판단, '''타살체가 분명'''"이라 적혀져 있었다. 그의 신원은 소지품으로 들고 온 도시락 속의 주민등록증으로 확인되었는데, 경찰은 그의 신원을 확인했음에도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부검과 가매장을 실시했다. 가족들은 그를 수소문했으나 찾지 못하던 차에 보름이 지난 11월 초에야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반면, 해병대 내에서는 박구일 연대장 지휘하에 투입된 해병대 제7연대의 주민친화적 행적이 구전되어 오고 있는데, 실제로 신동아에서는 해병대의 신사적 계엄임무 수행에 대해 당시 투입된 해병들과 시민들의 증언을 취재하여 보도하기도 했다.
3.4. 진압 논란
신문에서는 양아치와 불량배가 데모했다고 하지만 실은 선량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난국을 수습하지 못하면 광화문 네거리가 피바다가 됩니다.''' 이걸 수습할 분은 나와 황 총무 뿐입니다.
다만 이에 대해 김재규를 신뢰하지 못하는 (주로 박정희 정권 옹호자) 측에선, 김재규가 암살의 명분을 쌓기 위해 한 발언 아니냐며 신빙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일단 전두환의 신군부 수사 기록상 확인된 경호실장의 발언은 총격으로 죽었던 안가에서의 "새끼들 까불면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간에 전차로 싹 깔아뭉개 버리겠습니다."인데, 진심이건 술김에건 발언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좀 과장된 측면도 있지 않겠냐는 것. 이들은 민주화 세력에 온건적이었다고 알려진 김재규의 성향이 사실 더 강경파였다는 소수 주장도 하는데, 이들의 발언은 아니지만 1979년 11월 계엄군법회의에 선 측근 김정섭은 김재규가 긴급조치 10호를 발령해 달라고 박정희에 여러 번 요청했지만 박대통령이 거절했다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당시 경호실장 차지철은 부마사태에 대한 대응책으로 '신민당이 됐건, 학생이 됐건 탱크로 밀어 캄보디아에서처럼 2, 3백만 명만 죽이면 조용해집니다"라고 주장했지만, '''차지철 자신이 죽는 게 훨씬 더 빠른 해결책'''이라는 건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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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산책 1970년대편 3권〉, 인물과사상사, 강준만, p259
“1979.8.9.10:00시경, YH회사 200여명이 회사 내 문제해결을 요구하며 신민당사에 집결하여 농성을 벌임으로써 발단이 됐습니다. 8.10.10:00경, 김계원과 김재규가 강제해산을 결의했습니다. 사람들이 투신을 하면 그물망, 매트리스 등의 안전장구가 있어야 하는데 당시는 숫자가 부족함으로 며칠간 연기하자는 실무자들의 건의가 있었지만 김재규 부장의 강행지시로 안전대책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8.11.02:00에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 해산한 적이 있습니다.
김계원도 위 김정섭 진술과 비슷한 발언을 했다.“1979. 8월 중순경, YH사건의 후유증과 도시산업선교회 및 가톨릭 농민회의 등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한 청와대 회의가 있었습니다. 이때 김재규 부장은 ‘긴급조치 9호는 칼날이 무딥니다. 아주 강한 10호를 주십시오’라고 건의했습니다. 그 후 10월 하순경, CPX기간 중 B-1방카에서 같은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때에도 김재규 부장은 ‘각하, 긴급조치 10호를 주십시오. 그래야 정국을 수습할 수 있습니다.’하고 건의했습니다. 이에 대해 각하는 ‘학생, 근로자, 종교인 모두를 적으로 돌리면 정국수습이 되겠느냐, 당분간 9호를 가지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방법을 연구해 보시오’라고 지시하셨고, 그 후 10호는 다시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위의 증언은 신빙성 문제가 있는데, 왜냐하면 바로 '''전두환의 신군부측 수사 당시 증언'''이기 때문이다. 전두환식 수사의 문제점은 분명하다. 바로 '''협박과 고문이 사용됐다'''는 것.“1979.8.10. 10:00경 YH 노무자 200여 명이 신민당 당사에 집결, 계속취업을 요구했습니다. 배후에는 도시산업선교회가 있었고, 장차 노동계와 종교계가 합세, 강력한 대정부 투쟁 세력으로 진전할 우려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수습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8.10.10:00경 청와대 제 사무실에서 김재규, 유혁인 정무1수석, 고건 정무2수석, 김정섭 등이 모여 논의를 했습니다. 중론이 나왔는데 그것은 보사부장관이나 노동청장이 신민당사에 가서 해명과 시책을 설명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재규는 정부 고위 관리가 신민당사에 가서 사과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전례가 될 것이다. 금일 중으로 경찰을 투입해 강제해산을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그날 야간에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해산을 시킨 바 있습니다.
양 전 대법원판사는 사표를 내기 직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사흘 동안 모진 고문을 당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에 대한 상고심에서 내란목적살인죄를 적용할 수 없다는 소수의견을 낸 게 화근이었다.#
즉, 전두환 측 수사기록은 고문이 사용됐으니 민주화 이후 증언과 교차검증이 필수다. 흔한 일개 판사도 아니고 지금의 대법관격인 '''대법원판사를 마음에 드는 판결 안 했다고 잡아가 고문'''하는 지경이니 다른 사람들에 대한 대접은 어땠을지 말할 것도 없다.고문당하고 사표 쓴 판사도
대법원 판결에서 소수의견을 굽히지 않은 양 판사는 8월3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돼 밀폐된 공간에서 고문을 받고 사표를 강요당했다. #
실제 상기된 인사들은 민주화 이후 '''다른 증언'''을 했다.
“'''차지철은 김재규보다 더 강경한 입장이었고 중정이 신민당에 대해 강하게 대처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였다'''. 신민당사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중정 소관이었지만 차지철도 관련사항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였을 것이다”
김계원, 진술조서(2007. 6. 26.).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59~60쪽
“'''차지철 경호실장은 모든 걸 강경하게 나가. 김재규 부장은 무언가 온건하고 합리적으로 풀어나가려고 하고, 그런데서 마찰이 생기는 거지. 그런데 대통령은 차지철한테 더 힘을 실어주는 거야. 차지철 말에 더 귀를 기울이니까'''”
당시 공화당 국회의원 이만섭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59쪽
“‘YH 여공 강제해산 작전은 차지철이 시경국장 이순구에게 지시하여 작전이 지시된 것이다’라는 말이 당시 파다하게 퍼져 있었는데, '''그 행동을 엿볼 수 있는 일례로 차지철은 ‘국회의원들을 탱크로 밀어버리겠다’는 말도 하였다'''”
당시 공화당 국회의원 남재희, 남재희, 전화통화결과보고서(2007. 7. 6.).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 60쪽
“김부장(김재규)이 각하에게 ‘정치도 대국적으로 상대방에게도 구실을 주고 국회에 나오라고 해야지 그렇지 않고는 이번 회기에 나오지 않을 겁니다. 국내외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국외 여론도 지극히 좋지 않습니다’고 말하자 '''차 실장은 ‘나오기만 하면 탱크로 싹 깔아뭉개버리지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육군본부계엄보통군법회의검찰부, 김계원 피의자신문조서(1회) , 김재규 등에 대한 내란목적살인 등 피의사건 수사기록철 , 1979.11. 2.)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 60쪽
“사건 이후 김영삼 총재 가처분신청(신민당총재단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이 있을 무렵 듣게 된 이야기인데, '''당시 신민당 이○○ 정책위원회 의장, 이○○ 등이 차지철에게 포섭되어 신민당 집행부의 회의내용 등 비밀사항을 차지철에게 보고하기도 하여 당내에서는 그들에 대해 ‘사꾸라다’ 하는 이야기가 떠돌기도 하였다. 아마 그때는 차지철 씨가 권력을 마구 휘두르던 때였기 때문에 YH 강제해산은 차지철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양방송 취재기자였던 노○○, (노○○, 2차 진술조서, 2006. 11. 7.)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 60쪽
“당시 신민당 내부 관계자들 중 당사 앞 가든호텔에 방을 잡아놓고 농성 중인 '''여공들의 움직임은 물론 신민당 집행부의 회의내용 등 비밀사항까지도 모두 소상히 차지철에게 보고하는 것을 실제로 목격한 신민당 관계자들이 있었다'''”
이종각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 60쪽
“'''당시 YH사건이 있은 후 신민당 내부관계자 중 첩자가 있었다는 등 당내․외에 소문이 무성하였는데 공공연하게 떠돌던 이야기로는 당시 차지철과 가까웠으며 정책위의 장을 하였던 이○○, 이○○ 의원 등이 거론되었다'''”
신민당 대변인 박권흠 (박권흠, 면담결과보고서, 2006. 9. 7.)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 60쪽
김계원은 “진압작전과 관련하여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할 때는 대책까지 말씀드리는데 대통령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을 것”(김계원, 진술조서, 2007. 6. 26.)이라 하였고, 고건은 “추측컨대 김재규가 보고할 때 김계원이 입회하였을 것”(고건, 진술조서, 2007. 8. 1.)이라고 진술하였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 60쪽
치안본부장은 강제해산 작전점검과정에서 “신민당사에 창문이 많아 추락 위험성이 높은데도 소방서에서 사용하는 안전망이 2개밖에 없어 안전대책이 미비하다”며 강제해산작전을 연기하자고 건의하였다. 또 강제해산 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하였던 김상현 시경부 국장도 “경찰국장에게 ‘야당에 예산이 많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만 놔둬도 스스로가 식대다 뭐다 곤란하니까 자연히 내보내도록 조치를 할 텐데…구태여 우리가 끌어낼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조금 그 작전을 연기할 수 있도록 상부에 건의를 해봅시다’”라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김상현이 이를 “구자춘 내무부장관에게 건의하자, ‘좋다. 그러나 청와대에 한번 얘기해봐야 할 거다’라고 구자춘이 말하여, '''청와대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보고하자, ‘무슨 소리냐, 안 된다. 당장에 작전을 개시하여 전부 끌어내라’는 명령이 있었다”'''하였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 61쪽
이렇게 정작 많은 당사자들은 차치철이 김재규보다 훨씬 더 강경파였다고 증언했으며, 차지철 때문에 권력이 압박을 당하는 상황에서 김재규가 어쩔 수 없이 차지철처럼 강경한 작전을 일부 제시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박정희가 김재규보다 온건했다는 식의 주장 역시 근거는 김계원의 증언이었으나 정작 김계원은 민주화 이후 다른 주장을 했다.‘강제해산 작전연기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김계원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 및 건의를 하여 재가받은 사항을 안전대책이 미흡하다며 '''연기하겠다는 말을 대통령에게 다시 하기는 어려웠고, 또, 당시 중정이 경호실에 (세력이) 몰려 있던 상황에서 그렇게 하기는 더더욱 어려웠다”라고 진술하였고, 고건도 “김재규 부장이 정치적으로 너무 몰려 있어서 서두른 것으로 생각된다”라고 진술하였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권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 62쪽
한편, 김재규가 차지철 상대로 권력을 압박당한 계기 중 하나는 바로 최태민 사건 때문이었다. 10·26 사건[16] 문서에서 인용된 인터뷰 내용을 확인해보자.
그 때문에 이미 박근혜 게이트가 터지기 전부터 최태민은 김재규와 차지철 대립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됐다.「김계원:
그게 이제 (잠시 망설이다가) 차지철하고 김재규가 최태민 때문에 많이 싸웠습니다. 최태민 아시죠? 다른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두 사람이 싸운 걸 나중에 보면 최태민 때문이야. 차지철이 최태민을 앞세우고 박근혜양을 너무 업고 다니니까. 그러면 김재규가 '그러지 마라. 그러면 안 된다' 그러거든? 근혜양은 그 때 어머니는 없고 외로운 그런 때인데. 근혜양은 자기가 퍼스트레이디로 활동해야 하는데 주위 사람들이 왜 자꾸 나서서 그러느냐, 이런 소리가 나오니까 이 소리가 최태민을 통해 많이 들어가거든요. 최태민이 근혜양 앞에서 자꾸 알랑거리면서. 그러니까 근혜양은 어렵게 만든 놈이 다 최태민이야! 그래서 저놈을 때려잡아라, 그래 가지고 박대통령이 최태민을 데려다 야단친 일이 있죠."
기자:
박 대통령이 최태민을 직접 불러 혼을 냈다는 말씀 아닙니까.
김계원:
예. 이건 내가 들어가기 전 얘기입니다. 내가 비서실장 되기 전에 있었던 일이고, 비서실장이 돼 내가 김재규에게 '뭐가 제일 문제냐' 그랬더니 '큰 영애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그래요. 그게 뭐냐 했더니, 최태민 문제다 그래요.
(중간생략 - 글쓴이)
기자:
최태민씨가 청와대 드나드는 것은 '''경호실 문제''' 아닙니까?
김계원:
뭐 본론으로 이야기하면 그렇게 되는 건데, 최태민이 문제 있다는 걸 김재규가 얘기해 박 대통령이 최태민을 데려다 야단치고 막 이랬거든요. 나도 비서실장 하면서 중정이나 각 정보기관에서 올라오는 정보 보고서를 보니까 이건 뭐... 최태민이 그놈하고 관계가 이런저런 문제가 많아요.
(최태민이) 나쁜 놈이야. 근데 근혜양은 이게 중앙정보부에서 모함해 그런 거다, 최태민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아주 선량한 사람인데 왜 정보부에서 모략을 해 자기 아버지 생각을 흐려 놓느냐고 하면서 오해가 생겼어요.
그런데 대통령한테 혼나고 나서는 최태민이 청와대에 못 들어왔죠. 또 근혜양한테는 못 나가게 했어요. 외출을 못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근혜양이 밖으로 나가니까 그건 '''경호실 문제지'''. 그래서 박 대통령께 내가 한 번 물어봤어. 이 문제는 내가 청와대 들어오기 전에 있었고 김재규를 통해 주로 들은 얘기니까. 그걸 확인하려고 비서실장 된 뒤에 박 대통령한테 물어봤어.
'각하. 요즘도 최태민이 근혜양과 만났습니까.' 내가 그랬거든. 그랬더니 '아니야. 그놈의 자식 내가 아주 그냥 혼내놨어. 요즘은 근혜도 자주 못 나가. 자주 나가지 말라고 그랬어.' 이러시잖아요. 그러니까 대통령께서도 자식이지만 속이 아프고 하시겠는데 내가 직접 확인한 거니까.
(중간생략 - 글쓴이)
기자:
청와대 출입을 못하게 됐는데 '''왜 최태민 때문에 차지철과 김재규가 다투게 됩니까.'''
김계원:
그 구국여성봉사단인가 뭔가가 집회를 청와대에서 합니다. 그런데 그 모임 멤버가 한 200여 명 된다고 들었는데 재벌들이 그 모임 멤버가 되는 것을 굉장히 큰 영광으로 생각해요. 청와대에서 그 모임을 한 번 하면 말이야, 재벌들이 큰 뭐나 된 것처럼 으스대고 이런 판이거든. 그걸 정보부에서 다 보거든. 문제가 된다 이거지. 그런데 출입증은 경호실에서 발행하는 거거든. 그러니까 또 싸움이 되고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지요. 김재규는 못하게 하고 '''차치철은 왜 막느냐 하고. 그래서 차지철은 김재규가 청와대 들어오는 것까지 막거든? 대통령한테 보고할까봐'''.
기자:
중정부장이 대통령한테 긴급 보고도 할 수 있는데 '''차지철이 김재규가 들어오는 것조차 막았다는 겁니까.'''
김계원:
그래서 내가 청와대 간 뒤로 얼마 후에 '''김재규가 나에게 '실장님, 실장님도 과거에 청와대 들어오는 게 이렇게 어려웠습니까?' 그래요. 그래서 '자네가 청와대 들어와 대통령께 보고드리는데 그렇게 들어오는 것이 어렵단 말이냐' 내가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아유. 지금 저 차지철이란 놈이 어떻게 제한하는지, 왜 들어가느냐, 뭣 때문에 들어가느냐, 빠르다, 늦다, 시간이 길다.' 자꾸 자기 하는 일에 제동을 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아. 정보부장은 국가 유사시에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대통령을 못 만난다니 말이 되느냐, 난 어떨 때 새벽 1시에 가 대통령 주무시는 걸 깨워 보고드린 일도 있어' 그래서 경호실장이 하는 일을 내가 도중에 막을 순 없으니까 '자네가 정 급한 일로 들어와야 되는데 들어오기 어려울 때는 비서실장 만나러 온다'고 전화하라고 했어요. 비서실장이 오라고 하면 그건 누구도 못 막거든. 그래서 내가 한 네댓 번 바로 넣어준 일이 있어요 대통령한테. '''차지철이가 그랬다고 글쎄. 그러니 김재규하고 안 싸워요'''?"
(중간생략 - 글쓴이)
기자:
'''차지철이 그토록 김재규를 막고, 김재규는 가까우니까 실장님한테 얘기하고, 그러면 결국 근혜양에게 실장님이 오해받을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김계원:
그것만큼은 사실일 겁니다. 왜냐하면 노골적으로 정보부하고 쉬 틀어졌던 것이 김재규가 최태민 일로 자꾸 여러 가지 귀찮게 했는데, 그러니까 김재규는 김계원 사람이다, 왜냐하면 김재규가 나하고 가까웠고, 뭐든지 나한테 얘기하고 그랬거든. 김재규가 해군하고 같이 술 먹고 오다 차가 전복돼 거의 죽게 됐을 때 내가 언덕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걸 업고 와 살린 그런 인연이 있어요.
그래서 김재규가 그랬죠. 자기가 세상에 은인이 세 사람 있는데 하나는 박 대통령, 하나는 고 이종찬 국방부 장관, 그 다음에 김계원이라고 했거든? 그러니까 여태까지 박근혜가 아무 지장 없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됐는데 이게 자꾸, 김재규가 정보부장 되더니 브레이크가 걸리거든. 그러니 이건 틀림없이 김계원 지시다, 그런데다 큰 영애가 볼 때는 김재규가 하는 일이 김계원이 정보부장 할 때 하고 똑같구나, 그렇게 느껴질 거 아니겠어요?
최태민을 원인으로 지적한 날짜에 주목. 박근혜 게이트와 전혀 무관한 시기에도 이미 지적당할 정도로 최태민은 김재규가 차지철에게 권력을 압박당한 주요 원인으로 지목됐고 그런 과정에서 김재규가 차지철에게 권력을 압박당하는 상황이었다고 주변인들이 증언하고 있다.김재규 중정의 '큰 영애와 최태민 내사보고서' 박정희의 역린 건드려
강경파와 온건파 간 권력투쟁론은 '전두환 합수부 프레임'에 불과
그러나 김재규가 박정희의 역린을 건드린 것은 그런 정치문제보다도 1977년 봄 중앙정보부가 내사해서 작성한 "큰 영애와 최태민에 관한 종합보고서" 때문이었다. 김재규는 군사법정에서 이 내사 결과를 보고하고 적절한 조치를 건의하자 박정희가 "정보부가 이런 것까지 내사하나?"라며 언짢은 반응을 보였다고 밝혔다. 그래도 박정희는 당사자인 큰 영애 박근혜 씨와 최태민, 그리고 중앙정보부의 김재규와 수사국장인 백 모씨를 한 자리에 불러 놓고 이른바 '친국'을 벌였다. 박근혜 씨와 최태민은 세간에 떠도는 풍문과 중앙정보부의 내사가 음해라면서 강력히 항변했다. 지금 같으면 특검에 맡겨 수사해서 규명해야 할지도 모르는 대통령의 자녀 관련 문제였지만 박정희의 친국으로 그 근거가 밝혀지지 못한 채 유야무야 끝나고 말았다. 당시 중정의 능력을 고려할 때 내사까지 해서 박정희에게 직보할 정도였으니 이는 그렇게 만만한 내용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사보고서는 중정의 문서이니 만큼 당연히 중정의 기밀자료 존안실에 보관돼 있다. 박근혜 후보가 유력한 대선 주자이기 때문에 법률에 의한 정보청구를 통해 검증해야 할 것이다.
김재홍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2012.10.26''' #
하여튼 결론은 무자비한 진압 과정에서 다수의 부상자가 나왔고, 한 저서에 따르면 민주공화당사와 파출소, 방송국, 공공기관 방화 등 사태가 커지자 정부는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비상령을 선포하고 1,058명을 연행,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그리고 주말이던 20일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3공수여단을 출동시켜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한다.# 이후 평일이던 10월 26일 계엄군은 소강 상태에 접어든 주요 번화가 지역에서 물러나 시위가 이어지는 학교 등 일부 지역만 담당하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날 박정희는 암살된다. 한편, 부마항쟁이 다른 지역의 시위로까지 번질 조짐이 보이자 정부는 서울에도 계엄령과 함께 군투입 계획을 세운다.#
사족으로 국내에서 공수특전여단이 민간인 시위 현장에 투입된건 이때가 처음이였는데, 이때 해병대도 일부 들어온다. 그런데 당시 해병대는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를 받았기에 해병대가 왔다는 건 미군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더 나아가 사실상 승인 혹은 최소 방관 또는 묵인한 것 아니냐고 볼 여지가 있다. 실제 해당 영상의 존 위컴 2대 한미연합사령관 역시 당시 미 국무부는 이 일에 관해 무지했다고 발언하며 군대를 보낸 것을 후회하는 투로 인터뷰했다.[17]
4. 항쟁 그 후
나흘간의 시위 결과로 부산에서 1058명, 마산에서 505명 등 총 1563명이 연행되었다. 군법회의에 회부된 87명(학생 37명, 일반인 50명) 중 단순가담자 67명은 소가 취하되었고 20명(학생 7명, 일반인 13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일반 검찰에 송치된 31명(학생 26명, 일반인 5)은 전원이 기소가 취하되었고 651명(이 중 208명은 부산 봉기 학생)은 즉결심판에 회부되었다. 군 부대의 주둔으로 인해 시위는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18] 그리고 그 팽팽한 긴장이 갑자기 끊어진 것이 위수령 발동 6일 후 일어난 '''10.26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박정희가 김재규한테 살해되어 그렇게 타도해야 될 대상이 없어져버렸으니 이때 기소된 사람들도 붕 떠버렸고, 결과적으로 일부는 석방되고 일부는 재판을 거쳐 1982년 전두환 집권 후 사면을 통해 풀려났다.
전두환-노태우 정권 내내 묻혀 있던 부마항쟁은 민주화 정부가 수립된 후 비로소 부마항쟁 관련자를 대상으로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가 이루어졌고 일부 관련자들이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19] 또한 부산민주공원에서 열린 부마항쟁 기념식에 대통령의 축사#가 전해지기도 했다.
이후의 진상조사 및 법률안 제정 과정에 대해서는 아래의 '''진상 규명 및 보훈 과정''' 내용을 참조.
5. 의의
'''대한민국 제4공화국의 종말을 고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자 본격적 민중항쟁의 지평'''.
10월 유신 체제의 정당성의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 사건으로 4.19 혁명 이후 처음으로 본격적 민중항쟁의 지평을 다시 열었던 사건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 점에서 부마민주항쟁은 1970년대 반유신 운동의 귀결점이자 총결산이었다. 게다가 단순한 70년대 반유신운동의 귀결점으로만 머물지 않고, 정권 내부의 갈등을 보다 급속히 자극하여 끝내 10.26 사건을 불러와 박정희 정권이 붕괴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부마항쟁은 학생 운동이나 소수 명망가들에게 국한되어 있던 70년대의 그 어떤 반독재 민주화운동보다 정권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단순히 소수 명망가와 지식인적인 학생들의 참여를 넘어 대중들이 광범위하게 개입하는 거대 사건이었다. 이는 부마항쟁의 주 참여층이 하층 도시민, 이를테면 중국집 배달원, 술집 종업원, 노동자, 구두닦이였고 수출지대의 노동자들의 참여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가진다. 이로써 답보 상태에 처해있던 70년대 학생 및 재야 중심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단숨에 뛰어넘어 노동자와 시민 참여라는 커다란 의의를 가진 운동이다. '''이는 4.19 혁명에 이어 민주주의 성취를 위한 대규모 항쟁이었으며, 이러한 항쟁의 역사는 후에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으로 이어진다.'''
6. 왜 대중적인 인지도가 낮은가?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에 비하면 대중적으로 언급되는 빈도가 의외로 낮은 편이다. 하지만, 부마민주항쟁은 4.19 혁명 이후 다시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자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6월 항쟁으로 연결되는 민주화 대장정의 큰 줄기를 맡고 있는 항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세 항쟁에 대해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기념식도 가지고 영화나 드라마 등 기념사업도 많지만 부마항쟁에 대해선 다른 민주화 운동에 비하여 정부의 관심이나 국가적 차원의 기념행사도 적은 편이었다. 그나마 문재인 정권 이후 2.28 민주운동 등과 함께 기념하는 편이지 2010년대 중반까지도 반쯤은 잊혀진 역사였던 셈.[20]
이는 4.19혁명이 당시 김주열 열사에 대한 언론 보도로 전국적인 규모로 커진 데다 결국 이승만의 하야를 직접적으로 이끌어냈으므로 당연히 전 국민이 다 알았던 것과 달리 부마항쟁은 언론 통제로 인해 부산, 마산 바깥에는 크게 알려지지 못한 측면도 있었다. 당시 신문에는 그저 작은 소요사태가 일어난 것처럼 보도되었고, 서울이나 충청, 전라 등 부마에서 거리가 먼 지역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시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보통은 부산과 마산,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의 민주주의 운동 정도로 알려졌고, 아예 모르는 경우도 생각보다 많았다. 일부에서 광주민주항쟁을 광주사태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라 여기지만 부마민주항쟁을 부마사태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별 거리낌이 없는 것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원인에 대해서는 몇가지 해석이 있다.
우선 부마민주항쟁 직후에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살해되고 곧바로 다시금 전두환에 의한 군사독재의 철권 통치가 이어지는 동란의 과정 속에 항쟁을 주목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고, 부마항쟁이 일어난지 불과 7달 뒤에 광주에서 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 민주화 세력들은 믿기 어려웠던 학살에 더 많은 관심과 부채감(서울역 회군)을 가진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이는 '''박정희는 죽었으되, 군사독재가 종결되지 않은''' 시기적 상황의 역사적 관심편중에서 원인을 찾는 해석인데, 이 해석에 따르면 4.19 혁명은 이승만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고, 5.18은 충격적인 학살이 일어났으며, 6월 항쟁은 전두환의 항복을 받아낸 것에 비해 부마민주항쟁은 10.26의 계기가 되어 '''유신정권 철폐의 철퇴를 가한''' 의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2.12 군사반란으로 인한 신군부 정권이 들어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던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전남대 조정관 교수는 위에서 설명된 '객관적 조건' 이외에도, 항쟁을 기억하기 위한 '주체적 조건'을 5.18과 비교하며, 부마항쟁의 당사자들이 항쟁을 기억하기 위한 주체적 노력을 해나갈 수 없었던 상황이 존재했다는 시각을 제기했다. 첫째, 5.18의 경우 전두환의 존재 때문에 계속 회자되었지만 부마항쟁은 유신세력의 소멸로 회자가 어려웠고, 지역 내 민주화 세력이 부림사건 등의 여파로 타격을 입어 기억의 중심이 될 만한 동력을 갖지 못하였던 점[21] , 짧은 항쟁 기간과 미숙한 조직력으로 항쟁의 주체와 이를 추구하는 주체가 분명히 형성되지 못한 채, 80년대 이후 김영삼이라는 지역 정치인의 동원에 매몰되었다[22] 는 주장이다.
그 외 서강대 손호철 교수를 중심으로 펼쳐진 정치적 딜레마설도 있다. 이들은 부산-경남 지역 베이스의 통일민주당이 1990년 3당 합당 이후 TK, 내지는 군부-권위주의 세력과 한 배를 타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부마민주항쟁은 정치권에서 논의되지 않은 채로 잊혀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3당 합당 이후 구 군사정권에 대항했던 운동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찬양하기도 뭐한''' 묘한 상황이 되어버렸고, 이에 따라 부마항쟁을 자연히 무관심 속에 방치하는 혹은 묻어버리는 방향으로 갔다는 지적이다. 박정희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평가를 하는 정치 세력이 부산-경남 지역의 주류 집권 세력이 되면서 그를 전면 부정하는 이 항쟁에 대해서 높이 평가할 수 없게 된 정치적 딜레마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시각이다.
7. 진상 규명 및 보훈 과정
6공화국 시작 이후로 부마항쟁 관련 시민단체가 경남에 생겼고 정부에 진상 규명과 희생자 보훈에 대한 목소리를 내어 왔지만, 이는 양김 시대의 정치적 한계로 인해 2000년대 초반까지조명을 받지 못하였다. 부마항쟁과 가장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김영삼과 상도동계는 위에서 설명하였듯 3당 합당에서 기인한 모순으로 부마항쟁에 대한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기 때문에, 문민정부에서 부마항쟁은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으로 인한 명칭 격상 이외에는 거의 부각되지 않았다.
한편 이후 정권을 잡은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 또한 뚜렷한 진상 규명 및 보훈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극히 일부가 이 시기 제정된 민주화보상법에 의해 보상을 받았을 뿐이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시민단체에 의해 부마항쟁과 관련한 특별법에 대한 입법청원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결국 불발로 끝났다. 민주계 정당의 특성상, 민주화 운동을 보훈하고 널리 알림으로서 지지기반이 넓어지는 효과가 있어 부마항쟁에 정치적 중요성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있었음에도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간접적으로는 3당 합당의 앙금으로 인해 두 민주화 세력이 분열되어 관심이 끊어진 것도 있거니와#, 김대중이 자신에게 딱지처럼 붙어있는 색깔론이나 지역구도를 극복하기 위해 집권 과정에서 DJP 연합이라는 수를 둠으로서, 결과적으로는 유신 세력의 잔재를 끌어안는 형국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유신 당시의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결국 이러한 정치적 한계로 인해, 부마항쟁에 대한 진상규명 및 보훈 사업은 여야 모두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지역 시민단체의 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고, 노무현 이전까진 PK지역 일부에서만 통하던, 지역주의와 연관되는 담론으로 묻힐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참여정부에서 2005년부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를 출범하고,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가 2006년 11월에 부마항쟁에 대한 조사를 신청 받았고[23] , 이에 대한 진상규명이 2009년 12월부터 2010년 4월까지 이루어졌다. 이 진상조사에서 부마항쟁 과정에서 있었던 인권침해와 폭력적인 공권력 행사, 사건 조작 등의 흔적을 발견하는 등, 진상조사의 사건적 부분에서는 일정 부분의 성공을 거두었으나, 한정된 시간과 조사위원의 부족 등의 한계를 안고 있었으며, 일부 문헌기록과 40여명이라는 적은 수의 참고인(피해자 및 수사관 등) 조사에 의존했기 때문에 피해자 조사에서는 극히 일부분만의 피해자만을 추려낼 수 밖에 없었다.[24]
이는 이 시기까지도 지역 사회의 보수화 및 민주당에 대한 반감, 참여정부-이명박 정부 및 각 정당의 정치적 한계 및 인식 부족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지만,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단기간에 조사하는 진실화해위의 구조적 한계도 컸다. 때문에 진실화해위 또한 권고 과정에서 국가 차원의 별도 조사가 필요함을 명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화해위의 활동은 이후의 진상규명 요구 및 특별법 제정에 대한 논의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는 의의가 있다.
이러한 논의는 18대 국회에 접어들며, 이른바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과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법(이하 부마항쟁 특별법)' 논의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에서는 이주영 의원이, 야당인 민주통합당에서는 조경태 의원에 의해 특별법이 만들어지게 되었으나, 둘 모두 이명박 정부 및 여당의 무관심으로 표류된 채 다음 정권으로 공이 넘어가게 된다.
19대 국회가 출범한 2012년엔 새누리당의 이주영, 이진복, 민주통합당의 설훈 의원의 주도하에 법안이 만들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과거사 문제로 곤혹을 치르고 있었던 박근혜 당시 대선후보가 이에 호응해 부마항쟁 진상규명과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부마민주주의재단 설립 등을 공약하면서 재조명되었다. 결국 2013년 박근혜 정부 시절에 부마항쟁법이 제정되면서, 국무총리 소속으로 부마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위위원회(이하 부마항쟁위원회)가 개설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각종 조사와 지원단을 조직했고, 추가적인 진상 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법안의 제정 과정과 이후의 진상규명 과정에서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부친과 관련한 사건에 대해 부실하게 진상규명을 하고 있다는 논란 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법안에 대한 논란은 다음과 같다.
- 처음에는 여야 모두 ‘부마민주항쟁특별법안’이었다. 4·3 항쟁이나 5·18 민주화 운동처럼, 특별법으로 진행되다가 국회 상임위에서 일반법으로 바뀌었다.
- 법의 명칭에서 여야 원안에 있었던 ‘진상규명’이 빠지고 결국 ‘부마민주항쟁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됐다.
- 부마민주항쟁의 시간적 범위도 제한적이다. 공간적으로 ‘부산과 마산·창원을 포함한 경남 일원’으로 넓게 규정하면서 시간적으로는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로 한정했다. 10월 16일 이전 사전 시위계획을 했다가 실패하고 수배된 사례나 20일 이후 10·26사태 이전에 유사 사례는 포함되지 않는다. 항쟁 당사자인 부산의 김종세 씨는 “10월 15일 부산대에서 주동자들이 유인물을 뿌리고 300여 명을 모았지만 결행하지 못했다. 이런 활동이 있었기에 다음 날 시위가 가능했다”며 “기간설정이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5·18 특별법’에는 ‘12·12부터 5·18 전후’로 기간을 잡았다.
- 여야 원안의 위원 수 20명이 15명으로 축소됐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관계자와 부마민주항쟁 관련자 수를 6명에서 2명으로 크게 줄이고 대통령의 임명 위원 수를 크게 늘렸다. 박근혜 대통령이 누구 딸인지를 생각하면 공정성을 해치는 자세이다. 때문에 중립성 걱정이 나오고 있다. 민주화운동 관련자의 참여 폭을 넓히거나 대통령 지명 위원보다 국회의장이나 대법원장 추천 위원을 포함해야할 텐데······.
- 동행명령권도 결국 삭제됐다. 진실화해위원회에도 있었던 동행명령권의 삭제는 당연히 부실한 진상조사를 초래할 것이 뻔하다. 가해자 조사가 부실하게 될 것이며, 피해자의 보상 청구권도 실질적으로 크게 축소될 수밖에 없다.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위원회의 구성도 논란이 되었는데, 부마항쟁 관련 단체들은 "'부마민주항쟁위원회'의 몇몇 위원은 집권여당과 직간접 관련이 있는 인사이고, 심지어 '''박정희 정권을 찬양'''하는 학술대회에 참가하거나 독재와 친일 미화의 물의를 빚은 역사 교과서를 옹호한 인사도 있다"며, "이러한 위원회 구성을 보면 항쟁의 진상을 규명하기보다 오히려 그 '''역사적 의미를 무력화'''하려는 속셈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수십 년간 부마항쟁 진상 규명을 위해 온 힘을 다해온 단체가 추천한 인사는 배제되고 급조된 단체의 추천인사가 선정된 것은 후안무치한 일이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부마항쟁 규명위의 상당수는 친박 인사로 드러났다.# 2014년 당시 열린 부마민주항쟁 35주년 기념식에서는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의 위원 구성에 강한 비판을 쏟아냈는데#, 문재인 당시 의원은 "언론에서 '친박모임'이라고 비판할 정도로 유신독재를 찬양·지지한 인사들이 부마항쟁 진상규명을 하겠다고 나서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부마민주항쟁과 희생자들에 대한 모욕이다."라고 비판했고, 우무석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도 "부마민주항쟁법 제정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우리 사업회가 위원회에 배제된 점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시한다.", 김광수 부산민주공원 관장도 "부산에서 열린 항쟁 35주년 기념식에서도 잘못된 위원 선정에 대한 규탄이 있었다", "앞으로 위원회의 활동을 예의주시하겠다."며 불만을 나타냈다.
부마항쟁에 대한 진상규명 및 보훈 정책은 문재인 정권에 들어와서야 제대로 된 모습으로 갖춰지는 형국이다. 2018년 부마항쟁위원회에서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안)가 제출되었고, 부마항쟁 관련자로 인정된 사람은 총 152명으로 늘었다. 보상지급은 99건(장해보상금 32건, 생활지원금 67건)의 보상금 신청이 들어왔으며, 이들 중 81건(장해보상금 29건, 생활지원금 52건)만 지원하기로 결정했으며, 금액예산은 총 1,570백만원으로 책정되었다.[25] 한편, 2018년에 부마항쟁위원회의 활동을 연장하는 법안이 통과되었으며, 이에 따라 2기 위원회가 구성되어 활동중이다. 2019년에는 40주년을 맞은 부마민주항쟁을 국가기념일로 제정, 기념식을 정부가 주관하고 문재인 또한 대통령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10차 개헌시 헌법 전문에 부마민주항쟁을 실어야한다는 의지도 나타냈다. #
한편, 박근혜의 훼방으로 지체되었던 법 개정은 문재인 정부 들어 다시 탄력을 얻었다. 20대 국회에 들어서, 미래통합당에서는 이주영과 이진복,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설훈과 전재수, 최인호 의원이 각각 개정안을 발의하였으며, 이 중 일부 법안들이 통합되어 가결되었다. 이 법안에서는 박근혜가 벌인 폐단인 동행명령권 폐지와 시간적 범위 문제가 해결되었으며,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 기간 또한 1년 연장되었다. 21대 국회에서는 2020년 7월에 국민의힘 김희곤 의원이 '10·16부마민주항쟁유공자의 예우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하였다. 아직까지 부마항쟁 관련자를 국가유공자로 예우하는 법은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관련 유공자가 존재하지 않으나, 이들을 국가유공자로 예우하고자 하는 법적 노력은 현재진행형이다.
8. 기념 운동
- 현재 부산에는 부마민주항쟁을 기리는 민주공원이 있으며, 이는 1999년에 부산시와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26] 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2009년경 부산시가 일부 보수 단체의 압력을 못 이기고 민주공원 버스 종점 이름을 중앙공원으로 바꾸는 일을 저지르기도 했는데, 다행히 2011년부터는 종점 이름이 중앙공원, 민주공원으로 바뀌었다.[27] 그런데 시내버스 LED는 '중앙공원' 으로 나오고, 행선지 스티커의 상당수가 '중앙공원' 만을 표기하고 있다.[28]
- 부산대에는 10.16 기념관을 건설하고, 10.16부마민주항쟁탑 및 여러 기념물 등을 통해 부마민주항쟁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부산대학생들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또한, 시월제라는 이름으로 축제를 매년 10월 초에 개최하고 있다.[29]
- 교향시 여명의 발표를 통해 여러 차원에서 이를 기리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 2011년 부마민주항쟁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발의되었다.
- 2011년 민주통합당에서 강령에 부마민주항쟁을 새롭게 추가시켰다.
- 마산(지금 창원)에도 부마민주항쟁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위치는 한국 방송대학교 마산 학습관 옆의 공원(해운동).
- 2019년 들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었으며 2019년 10월 16일에 창원 경남대학교에서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 2019년 10월 7일~11월 1일 MBC경남 부마민주항쟁 40주년 특별기획 라디오 다큐멘터리 드라마 20부작 79년 마산을 방송하였다.[30] 이후 민주언론상을 수상하여 12월 2일~27일까지 재방송하였다.
- 2020년 국민의힘에서 강령에 부마항쟁을 새롭게 추가시켰다.
9. 문화에서
시로는 시인 임수생[31] (1944~2016)의 시 <거대한 불꽃, 부마민주항쟁>이 유명하다. 이 시는 항쟁 10주년을 기념하여 출판된 <부마민주항쟁 10주년 기념 자료집>에서 처음 발표되었으며, 2019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 때 배우 조진웅에 의해 일부가 낭독되었다. 시 낭독
웹툰 브이에서는 중요한 사건으로 나온다. 김훈이 정부의 명령을 받고 태권V 타고 출동하다 보니 임무라는게 이 운동 진압하는 거라 그냥 퇴각했다. 시위대도 정의를 위해 출동한 태권V가 지들 위해 참전할 줄 아는 분위기였다고... 분량은 짤막하지만 결국 김훈의 인생이 꼬이는 계기가 되었다.[스포일러]1.
1979년 10월 16일 / 마침내 불꽃은 치솟았다. / 우리들의 불꽃은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 되어 / 거리와 골목 / 교정과 광장에서 / 민중의 손에 들려 / 노동자와 농어민 / 도시 빈민과 진보적 지식인 / 학생들의 손에서 / 거대한 불꽃으로 불기둥 되어 / 하늘을 찌르며 타올랐다. / 광복동과 남포동, 국제시장과 충무동 / 미문화원 근처 / 부산극장 주위는 / 시위대의 물결로 가득 넘쳤고 / 혁명의 함성은 / 천지를 진동시키며 해안을 뒤덮었다. / 곳곳에서 / 군부독재 타도가 터져나왔다. / 우리들의 절규는 / 우리들의 항거는 / 우리들의 혁명은 / 진압대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 / 굴하지 않고 분연히 떨쳐 일어섰다. / 총칼이 번뜩이며 불을 토했다. / 장갑차가 시위대를 깔고 뭉갰다. / 꽃들은 / 깃발을 들고 물결치며 행진하던 꽃들은 / 짓밟히며 땅 위에 피를 쏟았다 / 피는 보도를 물들이며 / 강물되어 끝없이 끝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흐르는 강물 위로 시위대의 함성은 / 밤하늘을 찢으며 솟구치고 솟구쳤다. / 밤이 깊어가면 갈수록 / 날이 밝아 아침이 오면 올수록 / 항쟁의 불꽃은 / 활활 불꽃을 드높이며 / 산하를 밝혔고 / 20년 군사독재정권은 드디어 / 심복의 손에 의해 무참히 붕괴됐다.
2.
우리들의 항쟁을 누가 짓밟는가. / 우리들의 죽음을 누가 헛되이 짓뭉개는가. / 우리들의 항쟁은 / 우리들의 죽음은 / 깨꽃보다 더한 짙은 피로 / 강력한 빛을 발하는 혁명으로 직결돼 / 역사의 장에 획을 그었지만 / 군부는 총칼을 휘둘러 / 깨꽃 혁명을 짓이겨 버렸다. / 거대한 힘으로 자유를 쟁취한 / 우리들의 투쟁은 / 역사적, 민족사적 기념탑을 우뚝 세우기 전에 / 역사의 아이러니 / 더 강한 군부 독재를 탄생시킨 / 쓰라린 결과를 맛보았다. / 우리들의 투쟁적 열정을 / 거대 집단이 폭력을 동원해 / 깡그리 망가뜨려 버렸다. / 민중이여 / 깨어 있는 대중이여 / 군의 부당한 정치 개입을 타도하자. / 민중의 가슴을 향해 총구를 겨눈 / 맨손의 민중 / 맨손의 형제 가슴에 총탄을 퍼부은 / 군의 횡포는 / 민중사를 핏빛으로 장식할 뿐 / 민주주의를 저 멀리로 후퇴시킨다. / 타오르는 횃불은 민중의 힘이다. / 민중의 힘은 횃불이 될 때 폭발한다. / 민중은 민중의 삶이 / 절대 권력 때문에 고통을 받을 때 / 고통을 물리치기 위해 / 자유로운 삶의 해방을 위해 / 항쟁의 횃불에 불을 당긴다. / 혁명이여 / 혁명 정신이여 / 우리들의 죽음을 무릅쓴 항쟁은 / 우리들의 거대한 민중 항쟁은 / 자유와 민주주의와 / 민족 통일 / 자주와 평화를 위한 /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꽃이어야 한다. / 우리들은 우리들의 투쟁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 역사의 현장 / 민주의 절대한 힘을 하나한 찾아내 /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 민주투사 만세. / 혁명투사 만세.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묘사되었다. 10.26 사건에 대한 영화이기에 영화의 주 배경으로서 등장한다. 김규평(김재규)이 헬리콥터에서 항쟁을 직접 관찰하는 장면이 나온다.
10. 여담
-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이 사건의 당사자 박정희의 둘째 딸인 박근혜도 2016년 연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부마항쟁과 비슷한 범국민퇴진운동이 일어났고, 그 결과 이듬해인 2017년 3월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파면당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재미있는 점은 박정희도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18년 만인 1979년에 비극을 맞이했는데, 박근혜도 1998년 국회의원 보궐선거로 정치에 입문한 지 18년만인 2016년에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았다는 점이다.[32]
- 2017년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10차 개헌 시 부마민주항쟁을 비롯한 다른 민주화 운동들도 4.19 혁명처럼 헌법 전문에 싣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 현재 해당 지역(부산, 옛 마산)은 세대차가 있어서 어르신들은 보수 성향 지지세가 강한 편이지만, 유독 이 사건에 대해서만은 이때를 경험한 어르신들을 꽤 많이 만날 수 있다. "양 산(부산, 마산)이 뒤집어지모 나라가 같이 뒤비진다아이가!"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2019년 들어 5.18 관련 문제가 심각해지자 부울경과 광주는 동병상련의 처지로(까딱하면 차지철의 킬링필드 운운한 강경발언이 박정희에게 받아들여져서 피의 진압을 당할 수 있었던 만큼)[33] 서로를 위로해주고 있는 형국이다.
- 2018년 말부터 5.18 북한개입설을 주장하는 측에서 부마항쟁까지 은근슬쩍 북한이 조종한 폭동으로 몰고 가려고 밑밥을 까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유포 경로는 주로 노인들 대상으로 뿌려지는 출처불명의 단톡메시지.(...)
- 2019년 항쟁 40년을 맞이하여 마침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그리하여 제40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은 정부행사로 치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