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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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2. 생애
1928년 경상남도 창원군 진해면(현 창원시 진해구)에서 황원효(黃源孝)의 7남 1녀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경화초등학교, 마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196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이후 일본 와세다대학 대학원 정경연구과 정치학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1955년 진해세화여자고등학교의 전신 충무상업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에 취임하고, 1966년에 이사장이 되었다.
1967년 신민당 정책위원 겸 경상남도 부위원장이 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이후 김영삼계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치러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진해시-창원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조창대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0월 유신으로 중선거구제 하에서 치러진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마산시-창원군-진해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이도환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6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이철승 대표최고위원 체제가 출범하자 인권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박종규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총재가 되자 다음 달인 6월 원내총무가 되었다. 1979년 김영삼의 구속을 막기 위해 같은 선거구의 국회의원이었던 박종규와 자주 만나기도 하였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그러다가 정치규제에서 풀리고 나서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창원시-진해시-의창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배명국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그러나 당선된 직후 어용야당인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창원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년 동안 대한민국 국회 동력자원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통일민주당이 해체되고 민주자유당이 창당하자 이에 따라갔다.
1992년 창원시 선거구가 갑/을로 분할될 때에 을구에서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1994년까지 국회부의장이 되었으며, 1994∼1996년에는 14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국회의장 시절에 공관에 감금되는(...) 흑역사를 찍기도 했는데, 기초단체장 및 기초의원 정당공천을 놓고 여야가 팽팽히 맞섰던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다. 당시 민자당은 정당공천 배제를 민주당은 정당공천을 주장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황낙주 국회의장이 한남동 의장 공관에 연금되고 김기배 국회 내무위원장이 민주당 의원들에 이끌려 속초로 강제동행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결국 여야의 합의로 기초단체장만 정당공천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국회의장 임기를 마치고 다시 1996년 15대 총선에 출마하여 창원시 을 지역구에서 당선되었다. 이후 국방위원회에서 활동했고, 신한국당 상임고문, 한나라당 상임고문이 되었다.
3. 비판
1991년 창원시 갑/을 분구 때 게리맨더링의 원흉으로 지적받는다. 이 문제는 2010년 통합 창원시 출범 당시 의창구/성산구 분구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4.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