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와리
1. 개요
おわり. 끝을 뜻하는 단어인데 간혹 캐릭터 이름으로 쓰이기도 한다.
2. 인명
2.1. 실존인물
2.2. 가공인물
3. 일본의 옛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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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옛 지방명. 율령제에 의한 일본의 옛 쿠니(국가) 중 하나로 대략 7세기 무렵부터 이 지명이 기록된 내용이 발견되고 있다. 현재 아이치현 서부 일대에 해당하며, 나고야시 일대가 이 지역에 해당한다. 별칭은 비슈(尾州).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일본 센고쿠 시대의 쟁쟁한 인물이 여기 출신이다. 3개 하천 하류에 형성된 비옥한 노비(濃尾) 평야가 있어 쌀 생산이 괜찮았고, 혼슈 동부에서 교토로 가는 길목이라 교통이 좋아 자연스레 상업이 발달하여, 다른 지방과 비교하면 꽤 살기 좋은 축에 속했다고 한다. 센고쿠시대만으로 한정해도 특히 툭하면 농민봉기가 일어나던 우에스기 켄신의 에치고[2] 나 다케다 신겐의 카이[3] , 오닌의 난 이후 난장판이 돼버린 긴키[4] 일대에 비하면 확실히 살 만했을 듯. 따라서 타 지방보다 먹고 살 만하니 악바리가 적어, 오와리 병사는 3명이 뭉쳐야 미카와[5] 병사 1명을 감당할 수 있다 한다.[6] 여기에다 카이[7] 병사는 미카와 병사보다 강하다는 속설도 생겨났다. 다케다가 오다와 교전 중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코요군감에도 오와리 병사는 약병(弱兵)이었으나 이마가와의 동국[8] 무사와 싸우면서 단련되었다는 부분이 있다. 오다의 병사가 약탈품을 둘러싸고 도쿠가와의 병사와 싸우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도쿠가와의 병사에게 깨졌다는 기록이 있다는 걸 보면 그냥 낭설은 아닌 것 같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에도 막부가 세워지면서 오와리 일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4남인 타다요시의 차지가 되고 오와리는 본성의 이름을 따 키요스 번으로 개명한다. 그러나 1607년에 타다요시가 28세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대가 끊기게 되자 당시 고슈 번주이자 이에야스의 9남인 요시나오가 오와리로 전봉되면서 오와리 번으로 다시 개명했다. 이 요시나오의 가계가 에도 막부의 고산케(御三家)중 필두인 오와리 도쿠가와 가로서, 이 시기 이후 본성이 키요스 성에서 나고야 성으로 바뀌며 이후 나고야가 일대의 중심지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3.1. 역대 오와리 번주
- 도쿠가와 요시나오
- 도쿠가와 미츠토모
- 도쿠가와 츠나노부
- 도쿠가와 요시미치
- 도쿠가와 고로타
- 도쿠가와 츠구토모
- 도쿠가와 무네하루
- 도쿠가와 무네카츠
- 도쿠가와 무네치카
- 도쿠가와 나리토모
- 도쿠가와 나리하루
- 도쿠가와 나리타카
- 도쿠가와 요시츠구
- 도쿠가와 요시카츠
- 도쿠가와 모치하루
- 도쿠가와 요시노리
[1] 구 표기법은 をはり.[2] 현재 니가타현 일대[3] 현재 야마나시현 일대[4] 수도 교토 인근 지방. 한국으로 치자면 경기도.[5] 오와리와 이웃한 지역으로 현재 아이치현 동부에 해당하는 지역. 마츠다이라 가, 즉 도쿠가와의 근거지이기도 하다.[6] 사실 미카와 동쪽의 산악지대 사람 이야기이다. 미카와 동부는 오와리와 달리 척박한 산지가 많았다.[7] 평야가 거의 없는 척박한 지형이라 다른 지방에선 보통 수확량의 6할을 세금으로 거둘 때, 카이는 5할만 거뒀는데도 불구하고 카이 영민들이 타지방 사람들보다 잘 먹고 잘살았다는 기록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수 없을 정도로 안습한 땅인지라... 미카와는 비록 동부가 고원이었지만 서부는 오와리 못지않은 평야 지대를 가지고 있었다.[8] 옛 스루가노쿠니로 현재 시즈오카현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