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케
1. 일본의 성씨
한자 표기는 주로 三宅를 사용한다.
1.1. 실존인물
- 성우 미야케 켄타
- 성우 미야케 마리에
- 성우 미야케 준이치
- 음악 프로듀서 miyake
- 작곡가 미야케 카즈노리
- 정치인 미야케 신고
- 영화 감독 미야케 요시시게
- 일본프로야구 선수 미야케 히데시
- 아이돌 V6 의 멤버 미야케 켄
- 성우 미야케 하루카
1.2. 가상 인물
2. 일본의 지명
2.1. 도쿄도의 지청(三宅支庁)
미야케 지청 문서 참조.
2.2. 도쿄도의 촌(三宅村)
미야케무라 문서 참조.
2.3. 나라현의 정(三宅町)
3. 일본 황실의 분가
3.1. 개요
宮家.
일본의 궁가로 천황의 자손 가운데 성씨를 받아 신적강하를 하지 않고, 황족의 신분을 유지하면서 분가(分家)를 하는 사례이다. 이름 앞에 '-노미야(宮)'라는 '궁호'를 쓰는데, 마치 성씨처럼 보이지만 성씨는 아니다.[1] 다만 일본 황족들은 성씨가 없기에, 칭호나 궁호를 성씨처럼 사용하기도 한다. (학교에 다닐 때나 사회생활을 할 때 등등)[2]
과거부터 여러 미야케가 있었으며 많은 수가 단절되었다.
나루히토(德仁) 덴노는 황태자로 책봉되기 전까지 '히로노미야(浩宮)'란 칭호를 썼는데 미야케는 아니다. '히로노미야'는 궁호가 아닌 어칭호(御稱號)이다. 이는 천황과 황태자의 자녀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나루히토 덴노, 후미히토 친왕, 구로다 사야코는 출생 당시 아키히토 '황태자'의 자녀였기에 칭호를 받았다. 아이코 공주도 나루히토 '황태자'의 딸로 태어났기에 '도시노미야(敬宮)'라는 칭호를 받았다. 반면 후미히토 '친왕'의 자녀로 태어난 마코 공주, 카코 공주, 히사히토 친왕은 칭호를 받지 않았다.
차남 이하의 아들들은 결혼하여 미야케를 창설하여 가장(家長)이 되면서 칭호 대신 궁호를 새로 받으며, 딸들은 결혼하면 칭호 대신 남편의 성씨를 따른다. 예를 들어 후미히토 친왕은 결혼 전까지 '아야노미야(礼宮)'라는 칭호를 쓰다가 결혼 후 '아키시노노미야(秋篠宮)'라는 궁호를 새로 받았고, 사야코 공주는 결혼 전까지 '노리노미야(紀宮)'라는 칭호를 쓰다가 결혼 후 남편의 성씨를 따라 구로다 사야코가 되었다.
현재 존재하는 미야케 공저들은 전부 토구고쇼[3] 에 집중되어 있다. 이들은 궁내청으로부터 황족비라는 이름의 지원금을 받아 생활하고 있다. 황족비는 각 미야케의 상황에 따라서 천차만별이지만, 미야케에 구성원이 많고 서열이 높은 존재가 많을수록 황족비는 늘어난다. 그리고 서열이 높은 사람이 사망하면 미야케의 경제 상황이 나빠질 수 있다.
예를 들어, 2016년 초에 미카사노미야 가문은 7,381만엔을 받았다.[4] 그러나 2016년 10월에 궁주이던 다카히토 친왕이 사망하자, 그 다음 해부터 미카사노미야의 연간 지원금이 4,331만엔으로 급하강해서, 미카사노미야 가문은 경제적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다카히토 친왕의 막내인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은 2002년에 죽었는데, 가장이 죽자 다카마도노미야 가문에 주어지는 황족비도 줄었다. 때문에 노리히토 친왕의 장녀인 쓰구코 공주는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 유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귀국하기도 했다.[5]
이들 이외에도 2차대전 패전 이후 GHQ 등에 의하여 신적강하, 즉 평민으로 강등당한 11개 미야케가 있다. 2019년 기준으로 5개 가문은 자녀가 없어서 사실상 멸문되었다. 2개 가문은 멸문 확정이다. 나머지 4개 가문은 일단 후손들이 다수 있어서 향후 오랫동안 그 위치를 유지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들 중 3개 가문은 2018년 하반기 기준으로 총 9명 가량의 미혼 아들들이 있다. 그래서 아키시노노미야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 이후 "직계 황족 단절을 방지하기 위해, 이들 구 황족 아들과 공주의 결혼을 통해서 직계 가문을 늘리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가장 많은 미혼 남성 5명을 보유했으며 구 황족들 중에서 현 황족들과 가까운 히가시쿠니노미야 가문[6] 의 경우에는 알려진 것에 의하면 5명 전부 2000년대 출신 즉, 히사히토의 비슷하거나 아래의 연령대 남자아이들이기에 사실상 지금 당장 공주들과 결혼하기 어렵다. 2018년 기준으로 20대 이상의 미혼 남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카야(賀陽) 가문이나 다케다(竹田) 가문의 아들들이 그나마 결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다케다 가문의 경우, 현 당주의 남동생들 중 하나인 다케다 츠네카즈[7] 가 2020 도쿄 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뇌물 등을 준 혐의로 조사받고 있다. 그의 장남인 다케다 츠네야스는 황족 출신[8] 임을 내세워서 극우활동을 하는지라, 극우에 대한 부정적인 아키히토 상황이나 현 천황인 나루히토의 입장에서는 만일 구 황족 출신자와 현 공주들과의 결혼하려고 생각하더라도 타케다 가문은 대상에서 배제될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1990년대생들 2명이 있는 카야 가문이나 히가시쿠니 가문[9] 이 공주들과의 결혼 가능성이 높은 구 황족이 된 상태이다.
2019년 기준으로 가장 유력한 구 황족 집안은 바로 히가시쿠니 가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집안은 패전 직후 자발적으로 신적강하를 해버리면서 다른 황족 집안의 신적강하를 강요해서 현 상태로 만든 원흉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의 집안이다.
이러한 것 때문에 공주가 결혼하더라도 황족에서 이탈하는 게 아니라 황족에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는 여성 미야케 논의도 제법 나왔다. 문제는 2019년 시점에서 천황 직계 황족 가문인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의 장녀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에 의하여 여성 미야케의 최대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 황족으로 들어오는 남자 문제가 그대로 노출되어버리면서[10] 일반 대중에 대한 여성 미야케에 대한 지지도가 제법 떨어진 상태이긴 하지만 적어도 구 황족의 복귀보다는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한다.
3.2. 목록
3.2.1. 현존하는 미야케
- 아키시노노미야(秋篠宮): 아키히토 덴노의 차남으로, 일본 황위 계승 순위 1위인 후미히토(文仁)의 결혼으로 창설된 미야케. 후미히토의 아내 키코 비, 큰딸 마코 공주와 작은딸 카코 공주, 아들 히사히토(悠仁) 친왕이 여기에 소속되어 있다.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가 터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황태자 내외를 쫒아내버릴 기세였으나, 결혼 문제가 터지면서 사실상 과거 황태자 내외가 당했던 엄청난 패싱을 받고 있다.
- 히타치노미야(常陸宮): 아키히토 덴노의 남동생으로 일본 황위 계승 순위 3위인 마사히토(正仁) 친왕의 미야케. 자녀는 없고, 마사히토 친왕과 아내 하나코 비로만 이루어져 있기에 이 두 사람이 사망할 경우 사라질 미야케이다.
- 미카사노미야(三笠宮): 다이쇼 덴노의 4남으로 쇼와 덴노의 남동생이자 아키히토 덴노의 삼촌이자 일본 황위 계승 순위 4위인 다카히토(崇仁) 친왕의 미야케. 다카히토 친왕의 2남 요시히토와 3남 노리히토는 각각 가츠라노미야(桂宮)와 다카마도노미야(高円宮)로 분가하였지만, 장남인 토모히토(寬仁) 친왕은 미카사노미야의 후계자였기에 별도의 궁호를 갖고 있지 않았다.[11] 그러나 토모히토 친왕은 두 딸 아키코 공주와 요코 공주만을 남기고 아버지보다도 먼저 사망했다. 다카히토 친왕은 2016년 사망했다. 다카히토 친왕의 아내 유리코 비와 토모히토 친왕의 아내 노부코 비가 죽고, 아키코 공주와 요코 공주가 평민에게 시집가면 사라질 미야케이다. 그래서 아키코 공주는 미카사노미야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선언했지만, 그렇다 해도 아키코 공주가 죽으면 미카사노미야 가문은 문을 닫게 된다.
- 다카마도노미야(高円宮): 다카히토 친왕의 3남인 노리히토(憲仁) 친왕이 결혼하며 창설한 미야케이다. 노리히토 친왕은 2002년에 사망하여, 당주는 노리히토 친왕의 아내 히사코 비이다. 자녀는 딸만 3명으로 쓰구코 공주, 노리코 공주, 아야코 공주이다. 차녀 노리코 공주는 2014년 평민 센게 구니마로(千家國磨)에게 시집가 평민 센게 노리코가 되었고, 3녀 아야코 공주도 2018년 평민 모리야 케이(守谷慧)에게 시집가 평민 모리야 아야코가 되었다. 장녀 쓰구코 공주가 시집가고 히사코 비가 사망하면 장기적으로 사라질 미야케.
3.2.2. 역사상의 미야케
- 후시미노미야(伏見宮) : 과거 세습 친왕가 4가문 중의 하나.
- 아리스가와노미야(有栖川宮) : 과거 세습 친왕가 4가문 중의 하나로, 에도 시대 때부터 다이쇼 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다. 역대로 서도(書道)와 가도(歌道)의 사범을 맡았다.[12] 고요제이 덴노(後陽成天皇)의 7남이 창설했으며 당초 이름은 다카마츠노미야(高松宮)였다. 다이쇼 덴노 시기에 단절됐다. 그 뒤로 잊혀졌는데, 2003년에 아리스가와노미야의 후계자를 사칭하는 남자가 가짜 결혼 피로연을 열고 400명의 하객으로부터 축의금을 가로채는 사기 사건이 일어나서 일약 유명해졌다.(…) 연예인이나 기업인 등 유명한 인물들도 많이 속아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체포된 범인은 자신이 노부히토 친왕의 서자라고 주장했다.[13]
- 간인노미야(閑院宮) : 과거 세습 친왕가 4가문 중의 하나. 이 간인노미야 계에서 현재 천황가 직황족(直皇族)이 나왔다.
- 다카마츠노미야(高松宮) : 위의 아리스가와노미야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리스가와노미야가가 단절되자 다이쇼 덴노의 제3남 노부히토(宣仁)가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제사를 상속했는데,[14] 당시 황실전범 상 황족의 입양이 금지되어 있어서, 양자로 들어가는 형태가 아니라 다카마츠노미야케를 만들고 아리스가와노미야케를 상속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쪽도 1987년 노부히토 친왕이 죽고, 2004년 아내인 키쿠코 비도 죽어서 단절됐다.
- 지치부노미야(秩父宮) : 다이쇼 덴노의 차남 야스히토(雍仁) 친왕이 마츠다이라 세츠코와 혼인하면서 창설했다. 야스히토 친왕은 한때 형 쇼와 덴노가 딸만 내리 4명을 낳자 군부로부터 천황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었으나, 1933년에 황태자 아키히토의 출생으로 묻혔다. 정작 야스히토 친왕은 자식을 못 보고 죽었다. 아내 세츠코 비가 별세한 1995년에 치치부노미야는 단절했다. 참고로 토구고쇼에 있던 구 치치부노미야 저택은 1997년부터 아키시노노미야 저택[15] 으로 사용 중이다.
- 카츠라노미야#s-5(桂宮): 위의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차남인 요시히토(宜仁)가 1988년 1월 1일에 얻은 미야케. 요시히토 친왕이 독신이라, 결혼으로 생긴 미야케는 아니다. 2014년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친왕이 사망하면서 단절했다. 아울러 에도 시대에 이와 별도로 세습친왕가 4가문 중의 하나인 카츠라노미야가 있었다. 요시히토 친왕의 궁가와 구분해서 '구 가츠라노미야'로 구분하기도 한다. 요시히토 친왕은 세습친왕가를 이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 상징인 가츠라(桂: 계수나무, 침나무)를 궁가의 이름으로 써서 이름이 겹친 데 불과하다.
3.3. 일본의 역사상 존재한 귀족 목록
3.4. 같이보기
[1] OOO궁 용법은 원피스의 천룡인에서도 나타난다.[2] 비슷하게 영국 왕실등 유럽 왕실들도 프린스나 프린세스(미혼일 시) 칭호를 보유한 직계 왕족일 경우, 대개 본인이나 (미혼이거나 본인의 작위를 받지 않은 경우) 부친(혹은 모친)의 봉지명을 성씨처럼 사용한다. 영국의 조지 왕자의 경우 아버지의 작위인 케임브리지 공작에서 따 (사회생활 시) 조지 케임브리지로 지칭한다. 단 왕실 공식행사에선 엄연한 왕족이므로 '케임브리지의 조지 왕자 전하(HRH Prince George of Cambrige)로 지칭한다.[3] 황태자 일가의 거처[4] 2번째로 많이 지원받는 아키시노노미야 가문보다 약 671만엔가량 더 많은 액수였다.[5] 사실 쓰구코 공주가 유학을 중단하게 된 배경에는, 경제적 이유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품행 문제도 있다.[6] 아키히토 상황의 첫째 누나인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가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의 장남인 모리히로와 결혼해서 3남 2녀를 낳았다. 그래서 히가시쿠니 가문이 그나마 구 황족들 중에서 부활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7] 일본올림픽위원회 회장을 역임해서, 구 황족들 중에서 일본인에게 이름이 알려진 인물. 하지만 신적강하 이전에 태어나 왕/여왕 명칭을 부여받은 바 있는 형/누나와 달리 신적강하 이후에 태어나서 왕/여왕 명칭을 받지 못한 사람으로, 구 황족의 부류에 아슬아슬하게 벗어났다고 한다.[8] 하지만 족보를 자세히 따질 경우, 다케다 츠네야스는 다케다노미야 가문이 신적강하된 후에 태어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사람이기에 사실상 황족이 아니며 많이 봐줘도 구 화족에 가깝다는 평가가 있다. 물론 그는 그걸 무시하고 계속 황족 출신이라고 주장하지만.[9] 히가시쿠니 시게코의 장남의 손자인 2010년생 남자아이(14세)와, 시게코 3남의 손자인 2004년생 남자아이(20세)가 있다고 한다. 항간에 알려진 해당 집안의 미혼 남성 5명 중 3명은 해외 이주하거나 양자로 들어간 해당 집안 출신자의 자손이라고 한다.[10] 실제로 여성 미야케 반대파들 사이에서 여성 미야케를 허용하게 되면 그 코무로 케이가 황족이 되어서 일본 국민들의 세금을 자기 멋대로 낭비하면서 '코무로 케이 황배(皇配) 전하'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돌아다니는 꼴이나 케이의 어머니 코무로 카요가 황족 인척이라는 걸 이용해서 온갖 범죄들을 저지르고 다니는 것을 허용하자냐는 식으로 대응하고 다닌다.[11] 공식적으로는 미카사노미야의 일원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토모히토 친왕가'로 별개 궁가 대우를 받았다. 2012년 토모히토 친왕이 사망하면서 중단.[12]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외손녀인 키쿠코 비는, 외가로부터 배운 서예를 조카 아키히토 덴노의 차남 후미히토 친왕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개구쟁이였던 후미히토 친왕은 교본에 없는 글자를 묻는 등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종조할머니와 조카 손자가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13] 노부히토 친왕과 키쿠코 비 사이에는 자식이 없다. 여기에 대해서는 노부히토 친왕에게 동성애 성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다.[14] 노부히토 친왕의 아내 키쿠코 비의 외가가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이다.[15] 아키시노노미야는 결혼으로 미야케가 창설된 1990년부터 치치부노미야 저택으로 이사한 1997년 전까지, 다카쓰카사 가즈코가 서거 전까지 사용하던 임시 저택에서 지내왔다.[16] 창덕궁 이왕, 덕수궁 이태왕 등의 칭호가 마치 궁호와 유사하지만 '창덕궁'과 '덕수궁'은 단순히 거처를 의미하는 의미일뿐 일본 황실의 궁호와는 구별된다. 예컨대 일본 황족에 대해서는 궁호 뒤에 전하라는 경칭을 붙여 아키시노노미야 전하와 같이 호칭하지만 창덕궁 이왕과 덕수궁 이태왕에 대해서는 이왕 전하, 이태왕 전하와 같이 지칭하는 것이 상례였다는 점에서 그 차이가 뚜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