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가와노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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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가와노미야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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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당주 다카히토(幟仁) 친왕
9대 당주 다루히토(熾仁) 친왕
10대 당주 다케히토(威仁) 친왕
1. 개요
2. 성립과 소멸
3. 역대 당주
4. 기타
5. 아리스가와노미야 사칭사건


1. 개요


有栖川宮
유서천궁
일본의 세습친왕가. 에도 시대에 존재했던 세습친왕가 4가문[1] 중 3번째로, 1625년 창설되었으나 1923년 단절되었다.
세습친왕가에 대해서는 후시미노미야 항목에 간략히 서술하였다.

2. 성립과 소멸


1625년 107대 고요제이 덴노(後陽成天皇)의 7남 요시히토(好仁) 친왕이 '''다카마쓰노미야(高松宮)'''를 창설한 것이 가문의 시초이다. 궁가(미야케#s-3)의 이름은 요시히토 친왕의 할머니가 기거하던 건물의 이름 다카쓰노덴(高松殿)에서 땄다.
초대 당주 요시히토에게는 자식이 없어서 조카인 나가히토(良仁) 친왕[2]을 양자로 들였고, 그가 2대 당주가 되면서 궁가의 이름도 '''하나마치노미야(花町宮)'''로 변경하였다.
나가히토 친왕은 111대 고사이 덴노(後西天皇)로 즉위했다. 그러나 이는 뒷날 112대 레이겐 덴노(霊元天皇)가 되는 사토히토(識仁) 친왕이 너무 어려서 땜빵으로 맡은 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나가히토 친왕이 천황으로 즉위했지만 아들 유키히토(幸仁) 친왕은 차기 천황이 될 수 없었고, 궁가의 당주가 되는 데 그쳐야 했다.
3대 당주가 된 유키히토 친왕은 다시 궁가의 이름을 '''아리스가와노미야(有栖川宮)'''로 바꾼다. 궁가의 명칭의 유래, 변경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교토아리스가와(有栖川)라는 지명이 있으므로 연관이 있는 듯하다.
이후 유키히토 친왕의 아들인 다다히토(正仁) 친왕이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어서, 레이겐 덴노의 17남 요리히토(職仁) 친왕이 아리스가와 궁가의 5대 당주가 되었고 이후 그의 자손들이 대를 이었다.
아리스가와노미야의 위상은 상당히 높았다. 특히 당시 직황족이 줄줄이 황자들이 요절하고 줄타기로 천황을 계승하고, 간인노미야 나루히토 친왕의 죽음으로 간인노미야가 단절되면서 고메이 덴노 시기와 메이지 덴노 시기에는 계승 순위가 1~2위던 시기가 있었을 정도였다. 8대 당주 다카히토(幟仁) 친왕과 9대 당주 다루히토(熾仁) 친왕이 특히 그러했다. 직궁가에는 황태자를 제외하고는 장성한 아들이 없다 보니, 천황 자리가 방계 황족에게 넘어가기 일보직전이었기 때문이다. 후시미노미야 계통이 대부분인 방계 황족 가운데서 유독 아리스가와노미야만이 레이겐 덴노 황통이라 부계로 따졌을 때 다카히토 친왕 기준으로 메이지 덴노와 12촌으로 가장 가까웠다. 이 때문에 메이지 덴노도 아리스가와노미야에는 특별히 신경 써서, 다루히토 친왕이 자식이 없자 신적강하 예정이던 다케히토(威仁)를 차기 친왕으로 지명하기를 허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계자 다네히토(栽仁) 왕이 일본해군병학교 생도 시절 맹장염으로 요절하고 만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구 황실전범 시행으로 양자를 들이는 것도 금지되어 단절이 확정되었다. 마지막 당주 다케히토 친왕이 별세한 뒤에는 다케히토 친왕비 야스코(慰子) 친왕비가 궁가의 당주로 대우받았고, 1923년 야스코가 죽으면서 아리스가와노미야는 정식으로 단절되었다.
다이쇼 덴노는 아리스가와노미야가 사라지는 걸 안타깝게 생각해서, 자신의 3남인 데루노미야 노부히토(光宮 宣仁) 친왕이 아리스가와노미야를 원래의 명칭인 다카마쓰노미야의 이름으로 계승토록 했다. 또한 노부히토 친왕은 훗날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의 마지막 당주 다케히토 친왕의 외손녀인 도쿠가와 키쿠코[3]와 결혼했다. 구 황실전범상 천황의 자식은 궁가의 양자로 보낼 수 없었기 때문에[4], 새로운 궁가를 창설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제사 및 재산을 계승하였다. 따라서 노부히토 친왕은 작은형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보다 먼저 궁가의 당주가 되었다. 그러나 노부히토 친왕과 키쿠코 비가 자녀를 낳지 못하여, 다카마쓰노미야도 지금은 단절되었다.

3. 역대 당주


대수
당주
생몰년
1대
요시히토(好仁)
1603~1638
2대
나가히토(良仁)[5]
1638~1685
3대
유키히토(幸仁)
1656~1699
4대
다다히토(正仁)
1694~1716
5대
요리히토(職仁)
1713~1769
6대
오리히토(織仁)[6]
1754~1820
7대
츠나히토(韶仁)
1785~1845
8대
다카히토(幟仁)
1812~1886
9대
다루히토(熾仁)[7]
1835~1895
10대
다케히토(威仁)[8]
1862~1913

4. 기타


  • 아리스가와노미야에 가전되는 특유의 붓글씨 서체 아리스가와류(有栖川流)가 있다. 이 서법은 궁가(미야케#s-3) 내에서 대대로 전해왔으며, 다케히토 친왕의 외손녀인 다카마츠노미야 키쿠코 비를 통해 지금은 아키시노노미야(秋篠宮)[9] 가문에서 보유하고 있다. 자녀를 낳지 못한 키쿠코 비는 조카 아키히토 황태자의 둘째(차남)인 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에게 이 서법을 가르쳤다. 어린 후미히토 친왕은 교본에 없는 글자를 질문하는 등 작은할머니 키쿠코 비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작은할머니와 조카손자가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 키쿠코 비후미히토 친왕과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10]를 손주처럼 귀여워했다. 사야코 공주는 키쿠코 비가 사망하던 해인 2004년에 약혼했는데, 키쿠코 비는 죽음을 앞두고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사야코 공주의 약혼 및 관련 소식들에 관심 많았다고 한다. 또한 일본 황실에 남자아이가 없고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외동딸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만 있던 당시, 키쿠코 비는 "여자의 천황 계승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발언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보수파들은 '키쿠코 비는 여성 천황[11]를 찬성했지, 여계 천황[12]를 찬성한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키쿠코 비가 사망하고 2년 후인 2006년에 키코 비고명아들 히사히토 친왕을 낳으면서, 여성 천황이나 여계 천황 이야기는 잠잠해졌다.
  • 9대 당주 다루히토 친왕은 걸판의 배경이 된 이바라키현 오아라이(大洗)에 있는 오아라이 이소사키(大洗磯前) 신사의 제2 도리이에 현판을 쓰기도 하였다. 이 도리이는 신사의 본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시작 부분에 있는데, 걸장판에서도 현판은 나오지 않지만 해당 도리이가 묘사되기도 하였다. 아래는 해당 현판의 사진. 아리스가와류 서체가 어떠한지 구경할 수 있다.
  • 10대 당주 다케히토 친왕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1907년 요시히토 황태자가 방한했을 때 수행차 와서 사진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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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궁가인 데다가, 이름이 주는 느낌이 서구적인 느낌을 주는지[14] 주인공 이름을 이 궁가의 이름을 따서 짓는 경우가 종종 있다. 소설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도 그 예시.
  • 가끔 이 궁가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사기사건이 벌어진다. 아래는 그 중 가장 유명한 경우.

5. 아리스가와노미야 사칭사건


2003년 4월에 일어난 황족 사칭사건. 아리스가와 궁가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자가 가짜 결혼식을 올리고, 하객들에게 축의금 명목으로 거액의 돈을 뜯어낸 사기사건이다. 범인 기타노 야스유키(北野康行, 당시 41세)는 아리스가와 사토히토(有栖川 識仁)라는 가명으로 '아리스가와노미야 기념사업단'의 '''총재'''를 칭했다. 더불어 자칭 '''"전하"'''. 그리고 공범인 사카모토 하루미(坂本晴美, 당시 45세)는 비(妃) 전하. 이들 둘은 애당초 혼인관계에 있지도 않은 사이로서, 일본의 보통 사람들도 일본 황실의 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을 악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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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역대 당주들의 이름을 보면 통자인 '''히토(仁)''' 외에 5대 요리히토 친왕 이후로는 7대 츠나히토 친왕을 제외하면 모두 이름에 '''戈'''(창 과)가 들어가는 한자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사토히토(識仁)는 이 관례에 따라 지은 이름인데다, 자칭 '전하'께서는 노부히토(宣仁) 친왕의 사생아임을, 교토의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생전의 노부히토 친왕으로부터 아들임을 인지받고 제사를 모시고 있음을 주장했다.
서자이지만 친왕의 아들이니 궁호 다카마쓰 대신 아리스가와라는 성을 쓰게 되었다고 나름 치밀한 이유를 제시했으니, 왕실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속아 넘어갔을 정도. 여기에 극우단체까지 합세하면서 무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꼴통극우단체 일본청년사에서는 '사토히토'를 '''명예총재'''로 추대하기까지 했다.[15]
이들은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리면서 여기저기 청첩장을 돌렸는데, 여기에 낚인 사람들 가운데는 꽤 유명한 재계 인사, 연예인들도 섞여 있었다. 물론 가 보고 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일본 경찰에 신고가 들어가면서 범죄가 드러났다.
문제는 이때 키쿠코 비가 살아 있었고 아직 아리스가와노미야를 사실상 계승한 다카마쓰노미야가 존재했으므로, 사토히로에게는 아리스가와노미야 가의 제사를 지낼 정통성이 없다. 게다가 현행 황실전범은 '''적계 적출의 황자 및 황손에게만 계승권을 인정한다. 설령 그가 진짜 노부히토사생아였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한국에서는 MBC 서프라이즈에서 이 내용을 방송한 적이 있다.
이들 사기범들은 현재 2년 2개월 복역 후, 만기출소한 상태인데, 아직도 자신을 '''전하'''라고 부르며 조직 재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런 류 '황족 사칭' 사기범들 가운데서는 가장 유명한 사례이다. 한편, 아리스가와 궁가의 당주를 주장하는 자칭 '아리스가와 치카히토(有栖川 親仁)'라는 작자도 있다.

[1] 후시미노미야(伏見宮), 카츠라노미야(桂宮), 아리스가와노미야(有栖川宮), 간인노미야(閑院宮)[2] 고미즈노오 덴노(後水尾天皇)의 아들[3]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친손녀이기도 하다.[4] 구 황실전범 42조 皇族ハ養子ヲ為スコトヲ得ス. 즉, 황족 신분으로 있는 한 양자를 들일 수도 없고, 양자로 들어갈 수도 없다는 말. 참고로 현행 황실전범 9조도 마찬가지.[5] 111대 고사이 덴노(後西天皇)로 즉위했다[6] 에도 막부 마지막 쇼군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외할아버지.[7] 닌코 덴노의 딸 카즈노미야 치카코 내친왕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 혼담은 깨지고, 카즈노미야 치카코 내친왕은 도쿠가와 이에모치 쇼군에게 시집갔다. 1877년 서남전쟁에서 지휘관으로 참전.[8] 차녀 미에코(實枝子) 여왕만이 살아남아 도쿠가와 가문에 출가하여 도쿠가와 키쿠코를 낳았고, 키쿠코는 다이쇼 덴노의 3남인 노부히토 친왕과 결혼했으나 자녀를 낳지는 못했다.[9] 아키히토 덴노의 차남인 후미히토 친왕이 1990년 가와시마 키코와 결혼하면서 창설된 미야케#s-3(황족 가문). 현재 구성원은 후미히토 친왕, 키코 비, 장녀 마코 공주, 차녀 카코 공주, 장남 히사히토 친왕이다(총 5명).[10] 아키히토 덴노의 2남 1녀 중 막내[11] 여성의 몸으로 천황직에 오르는 것.[12] 여성 천황의 자손들이 뒤를 이어 천황이 되는 것.[13] 왼쪽부터 요시히토 황태자, 영친왕, 다케히토 친왕[14] 아리스(アリス)=앨리스(Alice) 심지어 타케히토 친왕은 생긴 것 마저 서구적으로 생겼다. [15] 나중에 '임기 만료로 퇴임했다.'는 식으로 어물쩡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