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시미노미야 구니이에
1. 개요
伏見宮邦家親王
생애 : 1802년 11월 19일 ~ 1872년 9월 7일(만 69세)
에도 막부 말기에 살았던 일본의 황족, 후시미노미야의 20대 당주이다. 동생으로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1] 를 창설한 모리오사 친왕(守脩親王, 1819 ~ 1881)이 있다.[2] 엄청난 정력가로 많은 자식을 낳았으며, 1947년에 '''신적강하한 '구황족(旧皇族)'은 모두 그의 자손들이다.'''
2. 생애
쿄와(享和) 2년(1802년) 11월 19일, 교토에서 후시미노미야의 19대 당주 사다유키 친왕(貞敬親王)[3] 과 첩 이리에 도모코(入江誠子)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마사노미야(睦宮)이다.
1817년에 친왕 작위를 받고 구니이에(邦家)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동시에 고카쿠 덴노(光格天皇)의 유자(猶子)[4] 가 되었다. 또 3품(品)의 작위를 받았으며, 1835년에는 칸바쿠(關白)[5] 인 다카쓰카사 마사히로(鷹司政熙)의 딸 히로코(景子)와 결혼하였다.[6] 6년 후인 1841년에는 아버지 사다유키 친왕이 사망하여 그를 이어 후시미노미야의 20대 당주가 된다. 그런데 다음 해에 아래에 나오는 장남의 스캔들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서 6남인 사다노리 친왕(貞敎親王)[7] 에게 당주 자리를 넘기고 그 자신은 물러나 은거한다. 그런데 사다노리 친왕이 1862년 젊은 나이로 죽자, 구니이에 친왕은 당주 자리에 복귀한다. 2년 후에는 작위가 3품에서 2품으로 올라간다. 대정봉환 후 1868년에 1품으로 작위가 올라간다. 1872년에는 메이지 덴노를 따라 도쿄로 이동했으며, 차대 당주의 자리를 사다나루 친왕에게 넘기고 동년 8월 5일에 사망했다.
3. 수많은 자식들
사다유키 친왕을 필두로, 그 아들인 구니이에 친왕, 그 아들인 4남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久邇宮朝彦親王)까지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수많은 자식을 두었다는 것인데, 특히 구니이에 친왕은 67세(!)에도 자식을 낳을 정도로 정력이 엄청났다.[8] 무려 17남 15녀(!!)를 두었는데 그 자녀들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다만, 아들 가운데서 사진이 남아 있지 않은 사람과 딸들은 생략했다.
3.1. 장남 야마시나노미야 아키라
장남 야마시나노미야 아키라 친왕(山階宮 晃親王) , [9]
1816년 10월 22일 ~ 1898년 2월 17일, 아명은 시즈노미야(靜宮)
일본 황실의 최대 말썽꾸러기 였으며, 조선의 양녕대군과 유사하다.
난잡한 짓을 많이 했는데, 그 중에서도 유명한 일이 2살 어린 고모(!)[10] 와 부적절한 관계로 얽혔던 일이다. 이 일로 황족에서 영원히 제명될 뻔했지만 14년 뒤에 극적으로 메이지 덴노가 구제해 주어서 다시 황적에 복귀하고 야마시나노미야라는 궁호를 하사받는다. 이름이 한 글자인 것도 과거에 있었던 일들 때문. 하여튼 장수는 했다. 형제들 중에서 제일 오래 살았다.[11][12] 참고로 이 사건 때문에 아버지가 당주 자리를 내놓고 몇년간 은거했었다.
3.2. 4남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4남 구니노미야 아사히코(久邇宮 朝彦親王) 친왕,
1824년 3월 27일 ~ 1891년 10월 25일, 아명은 도미노미야(富宮).
초명(初名)은 '나루노리'(成憲)이었으나, 후에 아사히코로 고쳤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못지않은 정력가. 그래서 후시미노미야 계 구황족들이 대부분 이 사람의 후손이다. 대표적으로, 고준 황후의 아버지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王)는 그의 3남이고, 후에 총리를 지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는 9남.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는 8남. 그리고 이방자 여사의 아버지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 守正王)는 4남이다.
이름의 '아사히코'는 '도모요시'로 읽기도 한다.[13]
3.3. 8남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왼쪽은 어릴 때 닌나지(仁和寺)[14] 로 출가했을 때의 사진, 가운데가 그이다.
8남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친왕(小松宮 彰仁親王).
1846년 2월 11일 ~ 1903년 2월 26일, 아명은 나가노미야(豐宮).
본래 궁호는 닌나지노미야(仁和寺宮), 히가시후시미노미야(東伏見宮)였으며, 이름은 요시아키라(嘉彰)였다.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나 메이지 유신으로 후시미노미야로 복적한다.
보신전쟁, 세이난 전쟁 등에서 많은 공적을 올렸고 그 대가로 메이지 덴노로부터 고마쓰노미야(小松宮)라는 궁호를 부여받으면서 새로운 세습친왕가의 당주로서 아키히토(彰仁)라는 이름을 하사받는다. 하지만 1889년 구 황실전범 시행으로 기존의 1대에 한해 황족신분을 유지하던 걸 다른 황족 모두 세습 친왕가로 규정하는 바람에 의미가 퇴색했다. 요리코(頼子) 친왕비 사이에 자식이 없었기에 고마쓰노미야는 아키히토 친왕 1대로 끝났다.
그는 후에 외국을 순방하며 군사 제도를 많이 익혔고, 초대 일본 적십자사 총재에 부임하는 등 여러가지 단체의 장도 하였다. 에도시대같았으면 절간에서 떨거지 대우를 받다가 끝났을 처지였지만, 메이지유신으로 그의 운명이 일변해서 그런지 다른 황족들에게도 군인으로서의 활동을 독려하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옆모습 뿐만아니라 대놓고 뒷모습을 찍은 사진까지 있을정도.
그를 가까이서 모셨던 사람들의 말을 종합하면 변덕도 심하고 꽤 별스러웠던 모양. 양자였던 21살 아래의 막내동생 요리히토(依仁)와의 사이가 벌어진 건 이 때문으로 추측한다. 요리히토를 파양할 수 없다면 스스로 신적강하하겠다고 하기까지 한 걸 보면 사이가 꽤 좋지 않았던듯. 결국 그의 후사는 동생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의 4남 데루히사(輝久)가 신적강하하여 고마쓰 후작가문으로 승계했다.[15]
3.4. 9남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왼쪽은 외국에 유학했던 때의 사진
9남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北白川宮 能久親王)
1847년 4월 1일 ~ 1895년 10월 28일, 아명은 미츠노미야(滿宮).
보신 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막부군의 편이었던 오우에쓰 열번 동맹(奥羽越列藩同盟)에 의해 '''토부 덴노(東武天皇)'''로 추대되었으나, 실제로 천황으로 즉위하진 않았다.[16] 형 아키히토 친왕과 마찬가지로 각종 전쟁에서 활약했으며 특히 대만 정벌 때 사단장으로 출정했는데 대만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했다. 이에 대만에는 곧 요시히사 친왕을 참배하는 신사가 세워졌다.
유학을 위해 프로이센에 갔을때 그곳 귀족 여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으나 일본에 귀국했을때 인정받지 못했고 어쩔 수 없이 일본 여자와 결혼했다.
특이하게도 1대 당주였던 '동생'을 이어서 기타시라카와노미야의 2대 당주가 되었다.
그의 아들이 일본 미남 황족으로 손꼽히는 나루히사 왕(成久王, 1887년 4월 18일 ~ 1923년 4월 1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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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당시의 현장.
나루히사는 잘생겼지만, 삶이 비극적으로 끝났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나루히사 왕은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의 7녀 카네노미야 후사코(周宮房子) 내친왕과 결혼하여 아들 나가히사 왕(永久王)과 3녀를 낳았다.
나가히사는 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포병 대위가 되었다. 도쿠가와 가문의 사치코(徳川祥子)와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 미치히사(道久)와 딸 기타시라카와 하츠코를 두었으나, 부임지였던 장자커우에서 항공기 사고로 순직했다.[17]
미치히사는 황실 종친들에게 매우 귀한 몸으로 대접받았는데, 기타시라카와노미야 가문의 적자였던 것도 있지만 미래의 천황이 될지도 모르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미치히사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에 태어나 성장했는데, 천황과 그 가족들이 예상치 못한 변[18] 을 당할 경우 미치히사를 천황으로 옹립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황실 가족들은 다들 별 탈 없이 살아남았고, 쇼와 덴노도 황위를 유지하게 되면서 미치히사는 평범한 일본 시민으로 살게 되었다. 그나마도 신적강하 이후 딸만 셋이나 두어 기타시라카와노미야 가문 자체가 미치히사가 죽은 2018년 단절되었다.
하츠코는 1939년 출생한 직후부터 장래의 황태자비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었으나, 평민 쇼다 미치코에게 밀려 탈락했다. 이후 하츠코는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다.
한편 요시히사 친왕의 3녀 호시나 다케코(保科武子)는 하츠코의 고모할머니로, 훗날 고준 황후(나가코)의 시녀장(侍女長)을 지냈다. 다케코가 퇴임한 후로는 하츠코의 어머니 사치코(祥子)[19] 가 나가코 황후의 시녀장이 되었다.
3.5. 12남 가쵸노미야 히로쓰네
12남 가쵸노미야 히로쓰네 친왕(華頂宮 博經親王),
1851년 4월 19일 ~ 1876년 5월 24일, 아명은 다카노미야(隆宮).
여기서 언급된 구니이에 친왕의 자식들 중에서 제일 짧게 산 인물.
형들과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에는 절에 출가하고, 다시 복귀해서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와서 일본 해군 소장이 된다.
그러나 일찍 죽는다. 하나뿐인 아들 히로아츠(博厚)가 뒤를 이었지만, 그마저도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죽었다.[20]
3.6. 14남 후시미노미야 사다나루
14남 사다나루 친왕(伏見宮 貞愛親王)
1858년 6월 9일 ~ 1923년 2월 4일, 아명은 아츠노미야(敦宮).
장남은 아니었지만 정실에게서 태어난 적자(嫡子)였기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후시미노미야의 22대 당주가 되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과 대만 정벌에도 참전했었으며, 최종 계급은 육군 대장이다. 여러 단체의 총재를 역임했고 승마, 바둑, 음악, 서예, 서화, 검도, 화훼 등의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차대 당주는 서자인 히로야스(博恭) 왕.[21]
3.7. 15남 키요스 이에노리
15남 키요스 이에노리(清棲家教) 백작,
1862년 6월 19일 ~ 1923년 7월 13일, 아명은 무소노미야(六十宮).
구니이에 친왕의 아들들 중에서 유일하게 신적강하(臣籍降下)하여 화족(華族)이 된 케이스.
귀족원 의원, 여러 현(縣)의 지사를 지냈다.
3.8. 16남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16남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閑院宮 載仁親王)
1865년 11월 10일 ~ 1945년 5월 20일, 아명은 야스노미야(易宮)[22]
형제들 중에서 2번째로 장수했으며, 일본의 패전 3달 전에 사망했다. 4대 세습친왕가 간인노미야의 5대 당주인 나루히토(愛仁) 친왕이 아들 없이 죽었기 때문에 그가 간인노미야로 입양되어 나루히토 친왕을 이어 간인노미야의 6대 당주가 되었다. 이로써 간인노미야로부터 나온 당시 황실과 간인노미야의 당주는 부계혈통상 상당히 멀어졌다.
프랑스에 유학하여 프랑스의 육군 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이 되어 러일전쟁에서 큰 승리를 이끌었다. 그 공로로 일본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고, 천황과 제일 관계가 가깝기도 했다.[23]
사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수염이 멋있기로 유명했다.
귀족원 위원을 무려 54년(!) 동안이나 계속했다. 사실 등원한 적은 한번도 없지만.(...)
총 2남 5녀를 낳았으나 장남은 요절했고 차남인 하루히토(春仁)는, 아내 이치조 나오코(一條直子)와의 이혼 소송에서 나오코가 하루히토의 동성애 성향[24] 을 폭로해서 문제가 된 것으로 유명하다.
3.9. 17남 히가시후시미노미야 요리히토
17남 히가시후시미노미야 요리히토 친왕(東伏見宮 依仁親王),
1867년 10월 16일 ~ 1922년 6월 27일, 아명은 사다노미야(定宮).
구니이에 친왕의 막내아들이다(진짜 막내는 따로 있다). 구니이에 친왕이 65세(!) 때 낳은 아들이라, 장남인 아키라 친왕과는 그 당시 결혼 나이를 보면 거의 할아버지와 손자 뻘(!!) 차이가 난다. 그래서 형 아키라 친왕의 양자(!!!)가 된다.[25] 결국 아키히토(彰仁) 친왕의 양자가 되었고 사다마로(定麿)였던 이름도 요리히토(依仁)로 개명한다.
하지만 배다른 형이자 양부인 아키히토 친왕과의 관계는 상당히 좋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아키히토의 후사는 신적강하한 다른 조카 데루히사(輝久)가 잇고, 요리히토는 고마쓰노미야의 옛 이름인 히가시후시미노미야라는 이름으로 새 궁가를 창설하는 식으로 갈라섰다.
해군의 길을 걸었으며, 하와이 왕녀와의 혼담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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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방문한 칼라카우아 왕, 가운데가 그이고, 왼쪽에 앉아있는 사람은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小松宮 彰仁)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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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살의 카이울라니 공주, 13세의 요리히토 친왕.
하와이 왕인 칼라카우아 왕은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의 외교를 중시해 하와이에 일본인의 이민을 장려하고 1885년 외국 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메이지 천황에게 몇 가지 제안을 했다. 그 중 하나가 자신의 조카인 카이울라니 공주를 요리히토에게 시집보내는 것인데 괜히 이 제안을 받았다가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한 메이지 덴노의 거절로 성사되지는 않았다.
[1] 후에 조카손자인 모리마사 왕(守正王)이 그 뒤를 이었고, 모리마사 왕은 화족 나베시마 이츠코(鍋島伊都子)와 결혼하여 두 딸 이방자 비와 히로하시 노리코(廣橋規子)를 낳았다.[2] 다만 장남인 아키라 친왕이 그의 아들이 아니라 동생이라는 썰도 있다. 자세한 것은 아래 참고[3] 118대 천황 고모모조노 덴노가 딸 1명만 남기고 죽자, 그의 후사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 과정에서 3명의 친왕이 차기 천황 후보로 올랐는데, 당시 간인노미야(閑院宮)의 당주였던 스케히토(典仁) 친왕의 장남 하루히토(美仁) 친왕과 그의 이복 동생인 모로히토(師仁) 친왕,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이 바로 이 사다유키 친왕이었다. 단 차기 천황이 될 조건에는 고모모조노 덴노의 딸 요시코 내친왕(欣子內親王)과 결혼해서 고모모조노 덴노의 사위가 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었으므로 이미 왕비가 있었던 하루히토 친왕은 제일 먼저 제외되었고, 모로히토 친왕과 사다유키 친왕이 남은 와중에 기존의 천황 가문과 혈통이 더 가까운 모로히토 친왕이 최종적으로 차기 천황으로 결정되었다. 이 사람이 현재 일본 황실의 직계 조상인 고카쿠 덴노다. 이 과정에서 탈락한 하루히토 친왕은 후에 아버지 스케히토 친왕이 죽자 간인노미야의 3대 당주가 되었고, 사다유키 친왕은 그 당시 후시미노미야의 당주였던 아버지 구니요리(邦賴) 친왕이 죽었기 때문에 후시미노미야의 당주 자리를 이어받고 몇 십년간 그 자리에 있다가 장남 구니이에 친왕에게 당주 자리를 넘겨주고 죽었다. [4] 천황의 계승자. 혹여나 황태자가 죽는 경우를 대비한 대책으로, 일종의 보험같은 것이다.[5] 메이지 유신 전까지 일본에서 제일 가는 관직으로, 천황에게 조언을 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자리였다.[6] 웃긴 것이, 구니이에 친왕은 정실인 히로코와 결혼하기 전에 이미 첩들로부터 5남 4녀를 낳은 상태였다. 그 중 1남은 출생 당일 요절했다.[7] 정실 소생의 장남으로 빨리 죽어 동복 동생인 사다나루 친왕(貞愛親王)이 아버지가 당주 자리에 복귀한 후 사망하자 당주 자리를 잇는다. 특이한 점은 사다노리 친왕의 아명이 아버지의 아명과 한자가 똑같다는 것. '睦宮'으로 똑같지만 음은 다르다. 구니이에 친왕은 '마사노미야'이고 사다노리 친왕은 '요리노미야'이다.[8] 아버지 사다유키 친왕도 58세에 막내를 낳았고, 아들 아사히코 친왕도 63세에 막내를 낳기는 했다. 더 막장인 것은, 아사히코 친왕은 정실이 없고(!) 첩만 있다는 것.[9] 아키라는 구니이에의 막내아들인 요리히토와는 '''51살'''이나 차이난다.이정도면 맏이와 막내의 나이차가 아니라 할아버지와 손주의 나이차와 다름없다.[10] 구니이에 친왕이 워낙 일찍 자식을 낳기 시작했기 때문에 아키라 친왕을 14살에 낳았다.(...) 그래서 사다유키 친왕의 자식(삼촌이나 고모)들의 태반이 그보다 나이가 어려지는 일이 발생했다.[11] 야마시나노미야 가문은 1987년에 단절[12] 다만 그가 구니이에 친왕 제1왕자가 아니라 할아버지 사다유키 친왕의 제8왕자라는 썰도 있다. 이유는 아버지 구니이에 친왕이 당시 만 13세였기 때문. 구니이에의 제1왕자로 인정 받은건 메이지 시절인 1889년이다.[13] 일본어는 한자 한 글자에도 읽는 방법이 많게는 10여 개다. 예를 들어 '옳을 의'(義) 자를 이름에 쓰면 읽는 방법이 아키(あき), 이사(いさ), 시게(しげ), 타케(たけ), 타다시(ただし), 치카(ちか), 쓰토무(つとむ), 토모(とも), 노리(のり), 미치(みち), 요시(よし), 요리(より)까지, 총 12가지에 달한다. 이름이 1글자인 경우에 주로 쓰는 3글자의 타다시, 쓰토무를 제외해도 10가지다. 그래서 일본인은 '타로'(太郞)같은 읽는 방법이 거의 정해져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름을 밝힐 때 한자뿐만 아니라 읽는 방법(후리가나)도 가르쳐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한국인의 이름은 한글로 쓰기 때문에 읽는 방법이 항상 한 가지라 문제될 일이 없다. 가끔 이름을 한자로 쓰면 '흰 백'(白) 같이 음이 '백'도 있지만 '배'로도 읽는 경우도 있으나, 이러한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에 적어도 통성명을 하는 상황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하는 데 큰 불편한 점 중 하나.[14] 교토 소재. 일본 왕실의 남성 왕족들이 많이 출가한 절이다. 다만 출가하더라도 대처승이어서, 처자식을 둘 수 있었다.[15] 구 황실전범이 제정되고 난 후 황족신분으로 양자가 되어 미야케를 계승할 수 없기 때문에 데루히사는 화족 신분으로 신적강하해서 계승했다. 데루히사는 이후 해군에 복무하며 중장까지 진급했고, 6함대 사령관으로 재직 중 휘하의 잠수함대가 하와이 근해 정찰작전에 실패, 미 항모기동부대의 종적을 놓쳐버리면서 미드웨이 해전의 참패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16] 만약 동맹의 청을 받아들여 즉위했다면 일본에 제 2의 남북조시대가 펼쳐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시대가 바뀐 만큼 신정부군에 의해 금방 축출되었겠지만.[17] 이후 할아버지 요시히사 친왕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다.[18] 폭격에 휘말려 사망하거나, 강제 폐위를 당하는 등. [19] 도쿠가와 가문 출신[20] 가쵸노미야는 양자를 들여서라도 일단 존속은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양자까지도 아들이 없는 상황이 되어 단절되었다.[21] 서자였기에 원래 가쵸노미야로 입양되었다. 그러나 훗날 사다나루 친왕이 낳은 적자는 정신 박약아였다. 그래서 히로야스 왕이 가쵸노미야로부터 후시미노미야로 복적하고 대신 자신의 아들인 히로타다 왕(博忠王)으로 하여금 가쵸노미야를 잇게 하였다. 히로타다 왕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가쵸노미야는 단절되었다.[22] 본래 다카노미야였으나 나중에 야스노미야로 읽는 법만 바꿨다.[23] 이는 그의 보직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궁가인 간인노미야 자체가 현 천황의 직계 조상인 고카쿠 덴노를 배출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간인노미야에 입양되었기는 하지만, 혈통은 그렇게 따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24] 그가 군인이었던 시절 그를 시중드는 부관과의 관계로 알려져 있다.[25] 더 어이가 없는 것은, 또 다른 형 아키히토 친왕이 요리히토를 입양하려 했다가 형님(아키라 친왕)한테 퇴짜를 먹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