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시미노미야
[image]
후시미노미야의 문장
伏見宮
일본의 '''세습친왕가'''. 에도 시대에 존재했던 4개의 세습친왕가 중 가장 먼저 생겼으며, 나머지 3개의 세습친왕가, 1947년에 신적강하한 구황족은 물론이고, 현재의 황실도 크게는 후시미 궁가의 후손이다.[1]
원래 천황의 자녀들은 ‘친왕’의 칭호를 받고, 친왕의 자녀들은 ‘왕’을 받으며, 왕의 자녀들은 성을 받아 황적에서 나가는 것이 기본적인 황가의 원칙이었다.[2]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대가 끊어지는 등의 위협이 있자, '''세습친왕'''이라고 하여 후손 단절의 위험에 대한 보험과 같은 성격으로 몇 대를 이어도 친왕의 이름을 잃지 않는 가문들을 만든다. 이를 세습친왕가라고 하는데, 기본적으로 후시미노미야(伏見宮)ㆍ가츠라노미야(桂宮)[3] ㆍ아리스가와노미야(有栖川宮)ㆍ간인노미야(閑院宮)의 4대 세습가문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츠라는 메이지 시기에, 아리스가와는 다이쇼 시기에, 간인은 방계에서 현 천황 계통인 직황족(直皇族)을 배출한 뒤 직계가 1988년에 단절했다. 현재 유일하게 남은 후시미노미야도 적장자가 없어서 머지않아 단절할 예정.
일본의 남북조시대에 황가가 분열하여 남조(南朝)의 다이코쿠지토(大覚寺統)와 북조(北朝) 지묘인토(持明院統)가 경쟁한 적이 있다. 이때 지묘인토의 정통후계자였음에도 천황으로 등극하지 못한[4] 요시히토(榮仁) 친왕이 창설한 궁가가 그 시초. 궁가의 명칭은 궁가의 영지였던 교토의 후시미(伏見)에서 땄다.
그런데 3대 사다후사(貞成) 친왕 때 그의 큰 아들 히코히토(彦仁) 친왕이 102대 고하나조노 덴노로 즉위하면서 전기를 맞게 된다. 사다후사의 차남 사다츠네(貞常) 친왕이 후시미노미야의 4대 당주가 되면서 그의 형인 고하나조노 덴노는 후시미노미야를 대대로 신적강하 없이 황족의 자격으로 세습할 수 있는 칙허를 내리면서 궁가의 지위가 천황이 소속된 직궁가(直宮家)에 버금갈 정도로 상승한다. 실제로 19대 당주 사다유키(貞敬) 친왕은 천황의 직궁가가 단절되는 바람에 유력한 차기 천황으로 꼽힌 적이 있다.[5]
그 사이에 가끔 자신들의 딸을 도쿠가와 쇼군가에 출가시키기도 하였다.
19대 사다유키(貞敬) 친왕대부터 자식을 엄청나게 낳아대기 시작했다. 다만 사다유키의 자식들은 많았지만, 구니이에(邦家) 친왕이 후시미노미야를 계승하고, 9남(실제는 10남)이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16] 를 창설한 일 이외에 나머지 자식들은 요절하거나 출가했기 때문에 황족의 규모가 그렇게까지 커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20대 '''구니이에(邦家)''' 친왕은 확인된 자식만 '''33명'''이었고, 그 중 아들이 '''17명'''. 구 황실전범의 제정으로 영세황족주의가 도입되자 황실의 규모가 상당히 커졌고, 불어난 황실을 유지하는데 돈이 들다보니 궁가를 잇지 못하는 차남 이하의 왕자들을 차례로 화족으로 신적강하시키게 되었다. 게다가 메이지 시대에 이렇게 후시미노미야의 방계 창설을 허용한 사정도 있는 것이 당시 직계 황족은 씨가 마른 상황이었다. 당장에 메이지 덴노 본인부터 동생이 요절하고 위로도 장성한 아들이 1명밖에 없는 상황에 그나마 가깝던 간인노미야가 단절되고, 다이쇼 덴노가 태어나기 전까지 아리스가와노미야가 승계순위 1위이던 시절이 장기간 있던 상황이었고 그 아리스가와노미야도 휘청거리는 상황이었다. 당시의 후시미가 당주는 그저 먼 황족이 아니라 '''계승 순위 3위'''의 황족이었다.
1947에 신적강하한 구황족 11궁가 가운데 9궁가가 구니이에의 아들 및 손자들이 창설한 것. 어차피 그 전부터 있던 나머지 두 궁가의 당주도 구니이에의 자손이다.[17] 따라서 소위 '''"구황족"'''이라는 사람들은 모두 구니이에의 후손이다. 또한 고준 황후가 후시미노미야 방계 후손이므로 아키히토 덴노의 직궁가하고도 혈연관계가 있다.
신적강하 및 그 이후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조.
표면상으로는 자발적으로 이탈했다지만, 미국의 압박 등으로 이뤄진 신적강하였기에, 그들을 달래기 위해 현재의 황실과 구황족과의 교류를 위한 모임인 '''"국영친목회(菊栄親睦会)"'''를 만들어서 주기적으로 모이고 있다.
게다가 구황족들이 신적강하 이후 일으킨 여러 가지 사건[20] 등으로 대다수 일본 국민들이 이들을 다시 황족으로 인정할 가능성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현재 남아있는 구황족의 각 궁가의 당주들에게 황적 복귀 의사를 넌지시 물은 적이 있지만 한 명도 긍정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다.[21] 그만큼 그들에 대한 여론이 우호적이지는 않다.
후시미노미야의 문장
1. 개요
伏見宮
일본의 '''세습친왕가'''. 에도 시대에 존재했던 4개의 세습친왕가 중 가장 먼저 생겼으며, 나머지 3개의 세습친왕가, 1947년에 신적강하한 구황족은 물론이고, 현재의 황실도 크게는 후시미 궁가의 후손이다.[1]
2. 세습친왕가란?
원래 천황의 자녀들은 ‘친왕’의 칭호를 받고, 친왕의 자녀들은 ‘왕’을 받으며, 왕의 자녀들은 성을 받아 황적에서 나가는 것이 기본적인 황가의 원칙이었다.[2]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대가 끊어지는 등의 위협이 있자, '''세습친왕'''이라고 하여 후손 단절의 위험에 대한 보험과 같은 성격으로 몇 대를 이어도 친왕의 이름을 잃지 않는 가문들을 만든다. 이를 세습친왕가라고 하는데, 기본적으로 후시미노미야(伏見宮)ㆍ가츠라노미야(桂宮)[3] ㆍ아리스가와노미야(有栖川宮)ㆍ간인노미야(閑院宮)의 4대 세습가문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츠라는 메이지 시기에, 아리스가와는 다이쇼 시기에, 간인은 방계에서 현 천황 계통인 직황족(直皇族)을 배출한 뒤 직계가 1988년에 단절했다. 현재 유일하게 남은 후시미노미야도 적장자가 없어서 머지않아 단절할 예정.
3. 성립
일본의 남북조시대에 황가가 분열하여 남조(南朝)의 다이코쿠지토(大覚寺統)와 북조(北朝) 지묘인토(持明院統)가 경쟁한 적이 있다. 이때 지묘인토의 정통후계자였음에도 천황으로 등극하지 못한[4] 요시히토(榮仁) 친왕이 창설한 궁가가 그 시초. 궁가의 명칭은 궁가의 영지였던 교토의 후시미(伏見)에서 땄다.
그런데 3대 사다후사(貞成) 친왕 때 그의 큰 아들 히코히토(彦仁) 친왕이 102대 고하나조노 덴노로 즉위하면서 전기를 맞게 된다. 사다후사의 차남 사다츠네(貞常) 친왕이 후시미노미야의 4대 당주가 되면서 그의 형인 고하나조노 덴노는 후시미노미야를 대대로 신적강하 없이 황족의 자격으로 세습할 수 있는 칙허를 내리면서 궁가의 지위가 천황이 소속된 직궁가(直宮家)에 버금갈 정도로 상승한다. 실제로 19대 당주 사다유키(貞敬) 친왕은 천황의 직궁가가 단절되는 바람에 유력한 차기 천황으로 꼽힌 적이 있다.[5]
그 사이에 가끔 자신들의 딸을 도쿠가와 쇼군가에 출가시키기도 하였다.
4. 역대 당주
- 여타 궁가에 비해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되었기 때문에 당주의 이름을 짓는 법도 다른 궁가와 다르다. 일단, 1대 요시히토(榮仁)와 2대 하루히토(治仁)의 경우 천황의 자리를 이을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고 천황과 혈통상 가까웠기 때문에 직궁가처럼 이름에 히토(仁)를 넣어서 지었다.[14]
- 그러나 3대 사다후사(貞成)부터 22대 사다나루(貞愛)까지는 아예 별도의 세습궁가로 이어짐으로서 독자적인 통자(通字)[15] 인 사다(貞)와 구니(邦)를 정해서 교대로 짓게 된다.
- 그리고 22대 사다나루에게는 적자인 구니카(邦芳)가 있었지만 정신박약아였던 까닭에, 카쵸노미야(華頂宮)의 당주로 보냈던 서자 히로야스(博恭)가 후시미노미야로 돌아와 이를 계승하면서 23대 히로야스의 후대부터는 카쵸노미야의 통자인 히로(博)를 썼다. 대신 후시미 방계 궁가이며 히로히토의 처가인 구니노미야(久邇宮)에서 '아사(朝)'와 '구니(邦)'를 교대로 쓰고 있다.
5. 부흥 및 방계 궁가
19대 사다유키(貞敬) 친왕대부터 자식을 엄청나게 낳아대기 시작했다. 다만 사다유키의 자식들은 많았지만, 구니이에(邦家) 친왕이 후시미노미야를 계승하고, 9남(실제는 10남)이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16] 를 창설한 일 이외에 나머지 자식들은 요절하거나 출가했기 때문에 황족의 규모가 그렇게까지 커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20대 '''구니이에(邦家)''' 친왕은 확인된 자식만 '''33명'''이었고, 그 중 아들이 '''17명'''. 구 황실전범의 제정으로 영세황족주의가 도입되자 황실의 규모가 상당히 커졌고, 불어난 황실을 유지하는데 돈이 들다보니 궁가를 잇지 못하는 차남 이하의 왕자들을 차례로 화족으로 신적강하시키게 되었다. 게다가 메이지 시대에 이렇게 후시미노미야의 방계 창설을 허용한 사정도 있는 것이 당시 직계 황족은 씨가 마른 상황이었다. 당장에 메이지 덴노 본인부터 동생이 요절하고 위로도 장성한 아들이 1명밖에 없는 상황에 그나마 가깝던 간인노미야가 단절되고, 다이쇼 덴노가 태어나기 전까지 아리스가와노미야가 승계순위 1위이던 시절이 장기간 있던 상황이었고 그 아리스가와노미야도 휘청거리는 상황이었다. 당시의 후시미가 당주는 그저 먼 황족이 아니라 '''계승 순위 3위'''의 황족이었다.
1947에 신적강하한 구황족 11궁가 가운데 9궁가가 구니이에의 아들 및 손자들이 창설한 것. 어차피 그 전부터 있던 나머지 두 궁가의 당주도 구니이에의 자손이다.[17] 따라서 소위 '''"구황족"'''이라는 사람들은 모두 구니이에의 후손이다. 또한 고준 황후가 후시미노미야 방계 후손이므로 아키히토 덴노의 직궁가하고도 혈연관계가 있다.
6. 1947년 신적강하와 그 이후
신적강하 및 그 이후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조.
표면상으로는 자발적으로 이탈했다지만, 미국의 압박 등으로 이뤄진 신적강하였기에, 그들을 달래기 위해 현재의 황실과 구황족과의 교류를 위한 모임인 '''"국영친목회(菊栄親睦会)"'''를 만들어서 주기적으로 모이고 있다.
[image]
사진은 1994년 초 아키히토 덴노의 환갑 및 나루히토 황태자의 결혼 축하행사를 겸해서 열렸을 때의 모습. 참석 멤버들은 천황 부부를 비롯한 황족 및 후시미계 구 황족. 그리고 시집간 공주와 사위 및 그의 자손. 그리고 미치코 황후의 뒤에 있는 분.[18]
역사적 연원도 있는데다 현재의 황족 가운데 후계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지자 구황족 부활 등으로 일부[19] 의 주목을 받고 있다. "후시미 궁가는 또 하나의 황실" 이라는 내용의 책까지 나왔을 정도. 구황족 대부분이 후시미 궁가의 파생유닛이지만 본가인 후시미노미야는 현 당주 히로아키가 딸 셋만을 두었기 때문에 그가 죽으면 단절 확정이다.사진은 1994년 초 아키히토 덴노의 환갑 및 나루히토 황태자의 결혼 축하행사를 겸해서 열렸을 때의 모습. 참석 멤버들은 천황 부부를 비롯한 황족 및 후시미계 구 황족. 그리고 시집간 공주와 사위 및 그의 자손. 그리고 미치코 황후의 뒤에 있는 분.[18]
게다가 구황족들이 신적강하 이후 일으킨 여러 가지 사건[20] 등으로 대다수 일본 국민들이 이들을 다시 황족으로 인정할 가능성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현재 남아있는 구황족의 각 궁가의 당주들에게 황적 복귀 의사를 넌지시 물은 적이 있지만 한 명도 긍정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다.[21] 그만큼 그들에 대한 여론이 우호적이지는 않다.
[1] 후시미노미야에서 떨어져 나온 간인노미야 계통이다.[2] 현대 황실전범에서는, 손자까지가 친왕이고 증손자부터 왕이다. (여자는 내친왕/여왕) 증손자가 없어 왕의 봉호를 받은 자는 없다.[3] 아키히토 덴노의 사촌 동생인 요시히토(宜仁) 친왕의 가츠라노미야와 구분해서 ‘구 가츠라노미야(旧桂宮)’라고도 함.[4] 당시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5] 메이지 시대에 구 황실전범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지금처럼 제위 계승 서열이 철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춰서 후계 천황을 정할 수 있었다. 이때 후시미노미야와 간인노미야가 경합한 끝에 현 황실의 직계조상인 간인노미야에서 즉위하여 지금의 황실로 이어진다.[6] 북조 3대 스코 덴노의 장남[7] 궁가를 상속받은지 몇 달만에 급서하는 바람에 친왕선하를 받지 못해서 그냥 '왕'이다. 요시히토의 장남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동생이라는 설도 있다.[8] 102대 고하나조노 덴노의 부친. 고코마츠 덴노의 양자로서 즉위한 고하나조노 덴노는 친아버지를 태상황으로 높이고 존호를 올렸다. 그래서 추존 천황으로서 고스코(後崇光) 덴노라 불린다.[9] 116대 모모조노 덴노의 차남. 15대 당주 사다타케(貞建)는 적장남인 구니타다(邦忠)만 남기고 나머지 자식들은 출가시켰는데 구니타다가 요절해서 당주자리가 공석이 되었다.[10] 15대 사다타케(貞建) 친왕의 아들, 사다모치(貞行)가 요절하자 환속하여 후시미노미야를 계승했다.[11] 원수육군대장. 구 황실전범 제정으로 인해 천황의 5세손까지만 친왕을 칭할 수 있게 되면서 사다나루 이후의 당주들은 ‘친왕’이 아니라 ‘왕’으로 칭한다. 다만, 구니이에(邦家)는 천황의 5세손으로 간주하며, 이전에 친왕선하(親王宣下)를 받아 친왕이 된 자는 그대로 친왕으로 한다는 경과규정을 두었다. 사다나루는 20대 당주 구니이에의 14남임에도 적자라는 이유로 본가인 후시미노미야를 계승했는데, 친형인 21대 당주 사다노리(貞教)와 나이 차이가 22살 차이가 나는 걸 보면 본래 서자로 태어난 것을 적자로 간주해서 계승시켰다는 말도 있다.[12] 원수해군대장, 군령부총장(=해군참모총장). 명목상 자리만 차지하던 다른 황족과는 달리 해군 내에서 실전경험이 풍부해서 실질적 권한을 행사했다. 이 때문에 천황도 해군을 어쩌지 못했을 정도. 사생활은 소탈한 면이 있었을지 모르나, 태평양 전쟁 때 끝까지 항전을 외치는 등 아직도 일본을 망친 원흉 가운데 하나로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다. 전쟁 중에 저택이 전소되는 바람에 근처의 료칸에서 기거하다 죽었다.[13] 23대 히로야스(博恭)의 손자. 아버지 히로요시(博義)가 수면제 남용으로 요절하는 바람에 어린 나이에 궁가의 당주가 되었지만, 1947년 신적강하로 ‘후시미 히로아키’라는 이름의 일반국민이 됨 [14] 훗날 즉위할 가능성이 높지 않은 친왕에게도 히토(仁)를 넣어서 명명하게 되면서 나머지 3개 세습친왕가는 가츠라노미야의 2대 당주인 도시타다(智忠) 친왕을 제외하면 모두 직궁가와 동일한 통자인 히토(仁)를 쓴다.[15] どうりじ또는 けいじ(系字). 한국의 항렬자와 비슷해 보이는데, 항렬자가 횡적 형제관계를 나타내는데 비해, 일본의 통자는 종적인 계보를 나타내는 차이가 있다. 김정일과 김정은 부자의 ‘正’도 통자의 예로 본다.[16] 훗날 구니이에 친왕의 손자이자 후시미노미야 아사히코의 4남 모리마사가 계승을 하며(참고로 모리마사는 계승 후 바꾼 이름), 영친왕의 처가이자 이방자 비의 친정이 된다.[17] 4친왕가의 하나인 간인노미야와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 간인노미야는 구니이에의 16남 易宮(다카노미야/야스노미야)가 봉사손으로 입적하면서 고토히토(載仁)라는 이름으로 친왕선하를 받아 6대 당주가 되었으며, 나시모토노미야는 구니이에의 손자 모리마사(守正)가 계승.[18] 외가 쪽으로 따지면 후시미 계통이고, 아키히토 덴노와 6촌 형제이다.[19] 주로 극우세력[20] 이혼, 불륜, 성매매, 야쿠자 연계 등등[21] 사실 히로아키를 비롯한 이들 당주들은 아직도 그들 주위에서 ‘전하(殿下)’로 불리며 황족노릇을 하고 있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