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제공

 


'''황주 황보씨의 시조
황보제공
'''
'''시호'''
'''충의공(忠義公)'''
'''향직 품계'''
대승(大丞)
삼중대광(三重大匡)
'''삼공'''
태위(太尉)
'''직위'''
천안도독부사(天安都督府使) / 천안도독(天安都督)
'''성씨'''
황보(皇甫)
'''이름'''
제공(悌恭) / 제궁(弟弓)
''''''
신정왕태후
'''생몰연도'''
? ~ ?
1. 개요
2. 상세
3. 미디어


1. 개요


신라 말, 후삼국시대군웅, 호족. 황주 황보씨의 시조.

2. 상세


신라 말, 진성여왕 시대에 이르면 서라벌의 조정이 지방에서 세금을 걷지 못할 정도로 행정력이 약해지게 되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호족들이 할거하게 된다. 황보제공은 송악의 왕륭, 평주의 박직윤-박지윤, 정주의 유천궁 등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패서 내륙지방의 대호족이었다. 신라 후기 당나라에서 넘어온 황보경(皇甫鏡)의 후손이라 하는데, 사실 중국에서 넘어왔다는 식의 서술은 당장 왕건도 그렇고 실제로는 아니면서 그렇게 주장하는 경우가 흔해서, 실제로는 토착민일 수도 있다.
후삼국시대 초창기에는 도적떼가 일어나는 와중에도 독자세력을 유지했다가 궁예패서를 공략할 때 항복했다. 이후 태봉 휘하의 호족으로 있으면서 왕건과 유대를 쌓았고, 918년 쿠데타로 왕건이 고려 왕으로 즉위한 뒤 그의 딸이 왕건에게 시집갔다.[1]
925년 7월, 견훤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 조물성을 공격하려 하자 왕건, 왕충, 박수경, 은녕 등과 함께 지원군을 이끌고 견훤을 막아섰다. 고려는 군대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누었는데 황보제공이 상군, 왕충이 중군, 박수경과 은녕이 하군을 이끌었다. 그러나 황보제공의 상군과 왕충의 중군이 무너지고 박수경과 은녕의 하군만이 남아 겨우 버티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고려 최고의 명장 유금필이 임존군의 형적, 연산진의 길환과 공직을 무너뜨리고 200km가 넘는 거리의 후백제 영토를 돌파한 후 왕건에 합세했다. 이에 고려 왕건은 견훤에게 화친과 함께 불가침 조약을 맺자고 제안하고, 견훤도 유금필이 온 이상 어려운 전투가 될 것임이 분명하기에 왕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2]
930년, 태조의 명령으로 천안도독부의 도독이 되었다.[3][4]
935년 4월, 견신검 일당에 의해 금산사에 갇힌 견훤을 구원하기 위해 왕건은 나주 탈환작전을 계획한다. 이에 홍유, 박술희 등이 자신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나 왕건이 여러 이유를 대며 거절한다. 그리고 황보제공과 강공훤이 '유금필이 적임자입니다' 라며 유금필을 추천하고 왕건이 이 제안을 수락한다.
936년 9월, 일리천 전투에서는 황보제공의 동생인 황보금산이 고려 좌군 지휘관으로 참전하기도 한다.
황보제공은 왕건 휘하에서 후삼국 통일의 공신으로 태위(太尉) 삼중대광(三重大匡) 벼슬을 지내고 충의공(忠義公) 시호를 받았다. 이후 황주 황보씨는 외척으로 큰 권력을 얻는다.

3. 미디어


  • 제국의 아침에서는 박정웅[5]이 연기했다.
  • 빛나거나 미치거나에서는 우상전이 연기했다.

[1] 훗날 손자 성종이 즉위한 후에 왕태후로 추존되었다.[2] 이후 927년 1월 고려 왕건이 먼저 불가침 조약을 기습적으로 파기하며 후백제를 침략한다.[3] 고려사 천안부 지리지 기록.[4] 태조 세가엔 천안도독부의 도독부사가 됐다고 한다.[5] 자막으로 이름이 나오지는 않고, 그냥 '황보씨'로만 표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