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문

 


1. 개요
2. 역사
3. 관련 문서


1. 개요


'''백화'''(, Vernacular Sinitic)는 중국어의 서면어(고대의 한문이나 현재의 표준중국어 문어체)에 대비되는 구어체(口語) 중국어를 의미하는데, 한자를 이용해 이를 그대로 옮겨 적은 글을 '''백화문'''()이라고 한다.
중국 역사 중 극초기를 제외하면, 중국에서 글말로 썼던 한문은 역사적으로 중국어 입말인 구어체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이미 한나라 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구어체와 문어체의 차이가 생기기 시작하고, 수나라당나라 대에 이르러는 구체적인 한문 지식이 없으면 둘이 완전히 다른 언어로 보일 정도로 달라지게 된다. 그래서 공식적인 기록은 대부분 한문으로 남아 있지만, 가끔 입말 그대로 옮겨적는 기록도 있는데 이러한 문체를 '백화문'이라 한다.

2. 역사


백화문은 당나라 대에 발생해,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를 거치면서 발전하게 된다.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북경 방언을 옮겨적었으며, 입말은 시대가 지나감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이미 문법이나 구조적인 면에서는 수백 년 전에서 정체되어있던 한문에 비해 시대에 따른 차이가 있는 편이다.
백화문을 쓸 때는 입말 그대로 옮기기 위해 기존의 한자를 빌려와 표기하거나 새로이 한자를 만든다. 그래서 이런 글에 쓰인 한자들 중에서는 한국이나 일본, 심지어 중국에서도 다른 방언을 쓰는 사람이라면 듣도보도 못한 한자들이 튀어나오며, 같은 한자라도 일반적으로 한문에서 쓰이는 그 뜻이 아닌 다른 뜻이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다.
백화문은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해 생동감을 불어넣어야 되는 소설 작품들에 종종 사용되곤 했는데, 이를 백화소설(白話小說)이라고 한다. 삼국지연의, 서유기, 수호지, 금병매, 유림외사, 홍루몽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물론 조선에서 한문 쓰던 양반들이 한글로 된 글을 수준 낮은 글이라 생각했듯 당대 중국인들도 백화문으로 된 글을 한문으로 된 글보다 수준 낮게 여겼다. 이 글들은 사실 준백화문으로, 문어와 구어의 절충 비슷한 문체이다.
신해혁명 이후에 신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어려운 한문 대신 입말 그대로 써서 대중과 더 친밀하고 배우기 쉬운 백화문을 쓰자는 언문일치 운동이 일어나면서 한문을 안 쓰고 백화문을 쓰는 것으로 바뀌었다. 루쉰이 1918년 내놓은 광인일기를 최초의 백화문 소설로 보는 견해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과거에는 한문으로 써야 알맞다고 생각한, 격식을 갖춰야 할 글들도 백화문으로 쓰게 된 것이다. 표준중국어 문어체 역시 북경 방언의 백화문에 기초해 있다.
사실 한국에서의 한글전용이 그렇듯 당연히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려면 시간이 소요되니 처음엔 반발도 꽤 있었다. 기존 한문에 익숙한 사람들이 '수준 낮은' 백화문을 서면어로 쓰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백화문 도입 전 과도기에는 한문의 어휘 수를 제한하고 전고(典故)[1] 사용을 배제해 쉬운 한문을 만들어서 보급하자는 대안을 주장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엔 백화문을 쓰자는 쪽이 승리해서 쉬운 한문이나 고전 한문 모두 서면어로 쓰지 않게 되었다.
표준중국어뿐만 아니라 다른 중국어 방언도 백화문으로 적을 수는 있다. 대표적으로 광동어가 그렇다. 그러나 다른 방언이 백화문으로 작성되는 예는 흔하지 않다. 한국에서 글을 쓸 때 표준어 문법과 맞춤법에 따라 쓰지 사투리를 입말 그대로 옮겨적지는 않는 것과 비슷하다. 더군다나 이런 사투리의 백화문은 광동어같은 몇몇을 빼면 한자 표기의 표준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문헌에 따라 표기가 중구난방이다. 또한 글말로 잘 쓰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에 와서 컴퓨터에서 방언 백화문에 쓰이는 한자를 입력하려고 해도 유니코드에 해당하는 한자가 없어 제대로 입력할 수 없는 문제점도 있다. 그나마 활발하게 쓰이는 광동어 백화문마저 백화문 전용 한자가 유니코드에 모두 포함된 게 2009년이니 다른 방언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3. 관련 문서




[1] 옛 문학 작품에 사용된 표현을 인용하는 것. 당연히 해당 작품을 접한 적이 없으면 그 표현도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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