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창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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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昌悳
창씨명 : 吉本昌悳
1930년 1월 10일 ~ 2010년 1월 30일
1. 소개
2. 약력
3. 별세
4. 작품
5. 수상 경력
6. 활동


1. 소개


꺼벙이로 유명한 원로 만화가로 한국의 대표적인 1세대 만화가.

2. 약력


1930년 1월 10일 평안북도 선천군 동림면에서 개신교 장로로 양말 공장을 경영하던 아버지 길경춘(吉景春)과 어머니 서정희(徐廷熙) 사이 6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고#, 코주부로 유명한 만화가인 김용환의 그림과 일본 만화 등을 통해 독학했다. 6.25 전쟁 당시 월남하면서 홀어머니를 놔두고 와야했던 게 한이었다고... 1975년 그의 에서 어머니가 나타나 멀리 작별한 다음, 산으로 올라가는 걸 보았다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 같다며 종일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1955년에 <야담과 실화>라는 잡지에 허 서방을 연재하며 만화가로 데뷔하여[1] 1970년부터 만화왕국에 2년간, 소년중앙에 4년간 '''꺼벙이'''를 연재하고 1971년부터 여성중앙에 '''순악질 여사'''를 18년동안 연재하면서 명랑만화로 인기를 얻었다.
정의의 재동이, 꺼벙이, 순악질여사 등을 통해 4,800회로 국내 최장 연재기록을 세웠다. 순악질 여사는 후일 스핀 오프인 순악질 남편으로 재연재되기도 했으며 영화 및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심지어 1983년부터 KBS2 <사랑방중계> 삽화에도 참여했다.
그의 작품 중 '순악질 여사'는 개그우먼 김미화쓰리랑 부부라는 개그코너를 할 때 활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김미화는 이 역할로 스타 개그우먼이 되자, 길창덕에게 직접 찾아가 감사인사를 했고, 그는 크게 기뻐하며 그녀에게 '순악질 여사'그림을 손수 직접 그려주고, 싸인까지 해줬다고 한다. 김미화 역시 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금까지도 이를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이후 여러 매체에 어린이 만화와 시사만화 등을 연재했고, 명랑만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만화가로 평가 받았다.
현대정공 사보에서 미스터 현정을 연재한 것을 마지막으로 1998년부터 폐암으로 인해 작품 활동을 중지했다. 2009년에 한국만화100주년위원회 고문으로 활동했고, 한국만화가협회 고문으로 재직했었다.

3. 별세


엄청난 골초였고, 그로 인해 폐암을 앓았으나 거의 나았고 노환으로 사망했다. 같은 실향민이라 친하게 지내던 후배인 윤승운이 회고하길...

하루에 2, 3갑은 기본이고 심지어 하루에 5갑까지 피운 걸 봤다. 어이구, 선배님 피워도 너무 많이 피우시네. 너무 많이 한 번에 피우면 나쁘다고요! 라는 내 말에 그냥 웃으셨다...

그런데 은 매우 꺼려했다고 한다. 만화가 모임에서도 한잔 마시고 그만두는 게 허다했다고... 2010년 1월 30일 오후 12시 10분 ~ 오후 1시 사이, 폐암으로 12년간 투병 끝에 만 80세를 일기로 작고.
가족은 부인과 4녀가 있다. 경기도 평촌 한림대 성심병원 특1호실에 빈소가 마련됐고, 2010년 2월 1일 오전 9시에 발인.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이다.[2]
인터넷 상에서는 추모 이미지로 아래의 꺼벙이 마지막화 장면이 업로드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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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 장면은 꺼벙이의 아빠가 중동 지사로 발령나서 가족과 함께 고국을 떠나 사우디로 가는 꺼벙이 남매의 마지막 장면이다.
흔히 만화가로 알려졌지만 '''군인'''이기도 했고,더불어 '''화랑무공훈장'''까지 받았다. 그래서인지 무덤에는 만화가 길창덕이 아닌 '''군인 길창덕'''이라는 이름으로 묘비가 세워졌는데 생전에 문화훈장까지 수훈했으나 국립묘지의 안장 원칙에 문화훈장 수훈자 자격은 포함되어있지 않아 하는 수 없이 화랑무공훈장을 받은 참전군인 신분으로 안장될 수 밖에 없었다. . 그래서인지 그의 만화에서도 반공적 요소가 강했는데(판문점에서 멀리 보이는 북한 군인들을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는 어린 주인공들 대사를 봐도....),아무래도 6.25를 겪고 고향에서 강제로 나와야했으며 전쟁에도 참전했던 분이니 더 그런 성향이 깊을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지금 보자면 반공적 요소를 강조하고 군사정권을 매우 긍정하는 어용만화가라는 비난도 있다.그러나 반공을 강조하고, 당시의 시대상을 만화에 반영했을 뿐인 것을, 매사를 정치적으로만 해석하려는 편파적인 견해를 가진 일부의 시선일 뿐이다. 중앙일보 편집위원으로 신문만화를 연재하던 시절, 정부를 비판한 작품으로 중앙정보부에 불려갔다가 사흘만에 풀려난 일도 있었다.
정확히는 전투를 한 게 아니라 홍보 만화, 도면을 그리는 형식으로 참전했었다. 대담집에도 나온다. 사실 비단 길창덕 뿐만 아니라 전쟁때 참전한 만화가들 대다수가 소위 삐라그리는 작업에 동원됐다. 대표적으로 고바우 영감의 작가 김성환이 있다.

4. 작품


70-80년대 연재 당시엔 일본 문화의 수입이 전면 금지되어 있었기에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순악질 여사 중 일부 작품의 에피소드 내용이 일본 것을 표절한 것이었다. 믈론 당시는 저작권 의식이나 관련 법이 전혀 없었고, 출판사/잡지사에서 그렇게 일본 것을 베껴 그리도록 강요한 일도 많았기에 시대상의 한계라고 볼 수 있는 일이긴 하다. 결국 그는 말년에 이를 후회하는 의미에서 가족들에게 순악질 여사 단행본은 재출간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고 가족들도 그의 유지를 받들어 이행하였다. 하지만,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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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수상 경력



6. 활동


  • 1955년 만화가로 데뷔
  • 1961년 5월 25일 ~ 6월 28일 : 대한일보에 '꼴뚜기' 연재
  • 1973년 1월1일 ~ 1974년 7월 1일 : 중앙일보에 '나원참 여사' 연재
  • 1984년 1월 17일 ~ 1984년 2월 25일 : '거북이' 경향신문에 연재
  • '돌석이' 학원에 10년 연재
  • '순악질 남편' 주부생활에 10년 연재
  • 한국만화100주년위원회 고문
  • 한국만화가협회 고문
  • 중앙일보 편집 위원
[1] 위키백과에서는 1955년 서울신문에 《머지않은 장래의 남녀상》으로 데뷔했다고 나온다.[2] 군인 신분로 안장되었고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하여서 그런듯하다. 그의 묘지에는 육군 하사 길창덕으로 안장되어있다.[3] 실은 그 당시 만화가들의 의식은 그 정도였다. 이두호항목 참조. 에외로 2세대인 황미나는 생계, 강압 때문이었지만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말을 한 적이 있고, 김수정은 한동안 만화를 때려치운 적이 있다. 김수정 항목에 나오지만 생전에 이에 대한 죄책감은 있어서 김수정의 그림이 일본것을 베낀게 아니냐고 떠보았고, 아니라고 하자 잘했다며 격려해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