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춘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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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당지
1. 개요
2. 이름
3. 역사
4. 여담
5. 매체에서


1. 개요


昌慶宮 春塘池
창경궁연못이다. 연못이 두 개로, 북쪽의 작은 연못과 남쪽의 큰 연못으로 이루어져 있다.

2. 이름


연못 이름은 근처에 있던 춘당대에서 따왔다. 춘당대는 창덕궁 영화당 앞의 넓은 마당이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창경궁을 한 권역으로 묶어 사용하였다. 특히 후원 권역은 더욱 그랬다. 지금은 춘당대 한 가운데를 담으로 막아 인식하기 어렵지만, 춘당대의 위치는 현재의 춘당지 바로 옆이다. 그래서 연못의 이름을 거기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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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당대 자리. 파란 원 안이다.

3. 역사


남쪽 연못 자리에는 원래 권농장(勸農場)이 있었다. 권농장은 임금농사를 장려하고 백성들의 고단한 노동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만든 궁궐 내의 작은 농장이었다. 크고 작은 11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논을 일컬어 내농포(內農圃)라 한다.
북쪽 연못은 조선시대부터 있었다. 《동궐도》를 보면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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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에 나온 현재 춘당지 일대. 왼쪽 상단의 연못이 현재의 북춘당지이고
오른쪽의 논 11개가 권농장이다.
그러다 1909년(융희 3년) 일제창경궁놀이공원 창경원으로 개조하면서, 권농장 자리에 큰 연못을 만들고 기존에 있던 북쪽 연못과 합쳤다. 그리고 이름을 춘당지라 지었다.
춘당지는 창경원 시절 서울의 핫플레이스로 유명했다. 놀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 도심 한복판에 있는 테마파크의 큰 연못은 그 자체로 시민들의 발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남춘당지 북쪽에 일본식 건물 수정(水亭)을 세웠고, 8.15 광복 이후 1965년에는 케이블카까지 설치했다. 이 밖에도 파라솔테이블 등 여러 관람 편의 시설을 춘당지 주변에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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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수정

대한뉴스 제 356호 - 창경원에 케이블카
1967년에는 재일교포 사업가가 연못 안에 지상 3층, 지하 1층 규모의 수정궁(水亭宮)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건축가 김중업이 기존의 수정을 한국식 전통을 살려 재건축했다. 완공 후 수정궁에는 레스토랑예식장, 오락실, 다과점 등이 입점했고, 각종 정치모임을 비롯하여 회갑연, 피로연 등 시민들의 연회 장소로 기능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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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궁
수정궁 스케이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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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궁 야경
춘당지 주변은 산책 코스로도 인기가 많았다. 에는 창경원벚꽃놀이를 즐기는 명소였고,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으로도 기능했다. 겨울을 제외한 나머지 계절에는 관람객이 뱃놀이를 즐기는 장소로도 쓰였다. 그렇게 춘당지는 역사성을 잃은 채 시민들의 여가 공간이 되었다.
1984년 창경궁 복원 사업을 진행하면서 여러 놀이 시설, 편의 시설을 전부 철거했고, 현재의 모습으로 재정비했다.

4. 여담


  • 창경원 시절 벚꽃놀이할 때, 이곳에서 미팅하려는 대학생들이 많았다. 이를 은어로 ‘나체팅’이라고 했다. 당연히 이상한 건 아니고, '나이트(night) 리 블러섬(Cherry blossom) 미(meeting)'의 줄임말로, '밤 벚꽃 미팅'이란 뜻이다.[2]
  • 한겨레에서 만든 지역밀착형 섹션신문 《서울&》에서 춘당지 케이블카와 관련한 웃픈(?) 사연을 소개했다. 강원도 양양군에 살던 한 어린이가 케이블카를 너무 타보고 싶었고, 몇 년 지나고 상경한 뒤 드디어 창경원에 가면서 소원을 이루는 듯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아버지가 돌아가자고 하는 바람에 못타고 말았다. 다음해에 미국으로 떠났다가 1986년에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2년 전에 창경궁 복원사업으로 케이블카가 사라져 결국 영원히 탈 수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5. 매체에서



[1] 수정궁은 1976년 국가 소유로 넘어갔고, 이후 '궁에서 어떻게 술을 파냐'는 여론에 밀려 영업을 정지했다. 그리고 후술할 1984년 철거당할 때까지 방치 상태로 놓였다.#[2] 꼭 춘당지만은 아니고, 창경원 내 벚꽃이 핀 장소면 어디든 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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