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적

 


'''경술국적'''
'''이완용'''
'''윤덕영'''
'''민병석'''
'''고영희'''
'''박제순'''
'''조중응'''
'''이병무'''
'''조민희'''
1. 개요
2. 명단
3. 경술국적 명단에 들지 않은 이들
4.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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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庚戌國賊
을사오적, 정미칠적에 이어 1910년(60갑자로 경술(庚戌)년) 8월 29일한일 강제 병합 늑약 체결에 찬성, 협조하여 문자 그대로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 매국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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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적 중 한 명인 윤덕영이 매국을 한 대가로 누린 대저택이다. 현 서울 특별시 종로구 옥인동에 위치해 있었다. 이름은 벽수산장. 광복 이후에는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의 본부로 사용되다 1973년에 철거되었다. 다만 여전히 터 주변은 UNCURK에서 따와 엉컹크길이라고 부른다.

2. 명단


'''이름'''
'''직위'''
'''사진'''
'''이완용
(李完用)'''
내각총리대신

'''윤덕영
(尹德榮)'''[1]
시종원경

'''민병석
(閔丙奭)'''
궁내부대신

'''고영희
(高永喜)'''
탁지부대신

'''박제순
(朴齊純)'''
내부대신

'''조중응
(趙重應)'''
농상공부대신

'''이병무
(李秉武)'''
친위부 장관 겸 시종무관장

'''조민희
(趙民熙)'''
승녕부총관

총 여덟. 특히 '''이완용'''은 '''을사오적''', '''정미칠적'''에 이어 여기에도 이름을 올리는 '''삼관왕을 달성'''했다. 을사오적에만 참여하지 않은 고영희는 2관왕, 그나마 5적 중에 당시엔 부끄러움은 알았던 박제순도 2관왕이다. 이로써 박제순은 일말의 옹호[2]도 불가능해졌다.
이들은 모두 합방의 공을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으며, 2002년 '민족 정기를 세우는 국회 의원 모임'과 '광복회'가 공동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708인 명단과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당연히 모두 수록되었다.
당시 이들이 일제 강점기에 받은 은사금은 엄청났다. 일단, 이완용은 15만 엔(30억 원)을 받았다. 여기까지 보면 이완용 혼자만 나라를 팔아먹은 돈으로 호의호식한 것 같지만, 이지용은 10만 엔, 송병준과 고영희는 자작이지만 10만 엔을 받았다. 왕족 출신의 후작, 이재각과 이재완은 16만 8천 엔을 받았다. 최고액 수령자는 궁내부 대신인 이재면으로, 83만 엔을 받았다. 순종의 장인인 윤택영은 50만 엔을 받았고, 신궁봉경회 총재이자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은 16만 3천 엔을 받았다. 귀족은 아니지만, 이용구는 10만 엔을 받았다.

3. 경술국적 명단에 들지 않은 이들


참고로 이 당시 조약 테이블에 같이 앉아 있던 학부 대신 이용직은 비록 조약 후에 중추원 간부를 지냈고 일본에게 자작 지위를 받았으나, 조약에 결사 반대하였고,[3] 이후 3.1 운동 당시에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여 결국 지위를 박탈당했기 때문에 친일파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용직과 같은 길을 걸은 사람이 바로 온건 개화파로 한국 근·현대사에서 김홍집만큼 이름을 뿌리는 김윤식이다. 둘 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소리를 들었던 적도 있지만, 애시당초 일본의 힘을 빌어 국가를 근대화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던 이들이기 때문에 매국노와는 근본이 다르다. 실제로 대한 제국이 멸망을 피할 수 없게 된 시점에 매국노의 반열에 접어든 자들이 아닌 개화파들은 모두 돌아섰다. 그들의 목적은 조국의 근대화지, 매국이 아니었으니까.[4]

4. 관련 항목


[1] 순정효황후 윤씨의 백부로 순정효황후가 치마폭에 숨겨놓은 옥새를 빼앗어서 옥새를 찍는 데 큰 공을 세웠다.[2] 을사 조약 당시 민영기는 반대했으나 자구 첨삭에 참여하고 훗날 훈장·작위를 받았으며, 이하영도 찬성자로 분류되었다. 반면 박제순은 "시대와 대세를 안다"라는 언급으로 이토에 의해 찬성자로 분류되었으나 조약 당시엔 묵묵부답이었다.[3] 그러나 혼자 반대해 봤자 대세를 뒤집을 힘 따윈 없었다.[4] 근데 김윤식은 좀 애매한게 자작 박탈 이후에도 민족 운동의 분열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정확하게는 김윤식이 사망한 뒤 사회장을 치러야 할지에 대해 온건파(김윤식은 그래도 국가의 대신이었고, 3.1 운동 당시에 독립 청원서를 제출했으니 마땅한 대우를 해야 한다는 입장)와 급진파(한일 합병 당시에 어쨌든 작위를 받았으니 소극적이든 훗날 갱생했든 친일파니 대우하면 안된다는 입장)의 대립 때문에 결국 독립 운동에 영향을 줄 정도로 내부 분열이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