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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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제순(1858 ~ 1916)은 대한제국 제12 · 16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조선, 대한제국의 정치가이자 유학자, 외교관 그리고 을사오적과 경술국적에 속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할아버지는 대체 왜 자결하지 않으셨는가. 왜 후손들을 이다지도 욕되게 하는가."
조선 후기의 친청 개화파로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했고 외교관으로 활동했었던 인물.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당시에는 외부대신(현재의 외교부장관)으로서 대한제국의 외교를 담당하고 있었으나 "나는 모르겠오, 마음대로 하시오."라는 등의 자포자기한 태도를 보여주며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이 되었고[2] , 이후 경술국치 때 내부대신으로서 또 다시 한일 강제 병합에 동의하며 경술국적이 되었다.
2. 약력
- 1883.04.29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 1883.10.23 텐진 종사관
- 1886.05.27 공조 참의
- 1888.05.19 인천부사 겸 감리통상사무
- 1890.01.13 영국·독일·이탈리아·러시아 주재 공사
- 1895 외부 협판, 외부대신
- 1898.11.05 농상공부대신
- 1898.11.10 외부대신
- 1899.01.14 청국의약 전권대신
- 1900.12.30 육군 참장
- 1901.11.07 특명전권 공사
- 1904.07.16 법부대신
- 1905.11.28 의정부 참정대신
- 1907.05.30 중추원#s-2 고문
- 1909.02.27 내부대신
- 1910.05.20 임시서리 내각총리대신 사무
- 1910.10.01 조선총독부 중추원#s-4 고문
- 1910.10.07 조선귀족 자작
- 1911.07.31 경학원 대재학
3. 일생
3.1. 일생 초기
1858년 12월 7일 경기도 용인에서 박홍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3년(고종 20) 별시 문과에 급제한 뒤 1883년 4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를 시작으로 10월 주차 톈진종사관, 1884년 1월 기연해방군사마, 3월 주차 텐진독리통상사무 종사관에 임명되었다. 1885년 3월 홍문관 부교리, 5월 사헌부 장령, 1886년 1월 주톈진대원, 2월 주차 톈진통상사무를 역임하고 4월에 귀국했다. 1886년 7월 승지로 임명되면서 다시 톈진으로 부임하여 1887년 6월까지 근무했다.
3.2. 관직 생활
1887년 7월 톈진에서 귀국한 뒤 11월까지 이조참의, 성균관 대사성, 참의내무부사, 경주부윤에 임명되었다. 1888년 5월 인천항 통상사무 감리, 1889년 3월 전환국 총판이 되었다. 1890년 1월 내무부 협판으로 영국·독일·이탈리아·러시아 주재 공사에 임명되었으나 현지에 부임하지 않았다. 1890년 10월 형조참판, 12월 공조참판, 1891년 1월 한성부 좌윤, 3월 형조참판, 6월 성균관 대사성, 9월 한성부 우윤, 10월 호조참판, 1892년 7월 예조참판, 8월 형조참판, 1893년 3월 호조참판을 지냈다.
1893년 3월 11일 동학교도들이 척왜양창의를 내세운 보은 집회가 날로 확산되자 3월 25일 고종의 밀명을 받아 위안스카이와 청나라 군대의 파병 문제를 협의한바 있다. 1893년 7월 이조참판, 8월 여주목사를 거쳤고 1894년 4월 장흥부사로 임명되면서 보외시행사를 겸했고 6월 전라도관찰사, 7월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했다. 충청도관찰사로 재임 중 관군 및 일본군과 연합해 공주에서 동학 농민군 진압에 앞장섰다.
1895년 10월 중앙으로 돌아와 제용원 태복사장에 임명되고 11월 외부협판이 되어 제3차 김홍집 내각에 기용되었다. 아관파천 직후인 1896년 2월 중추원 1등 의관으로 승진했으며 8월 외부협판으로 외부대신 서리를 맡았다가 10월 외부대신, 11월 농상공부대신 겸 외부대신을 맡았다. 1899년 1월 청국의약전권대신으로 한청 조약, 간도 행정관리권 교섭, 경흥·의주 개방 단행과 같은 주요한 외교 교섭을 주도했다. 1899년 6월 궁내부철도용달회사 사장을 맡았고 10월 외부대신, 비서원경, 장례원 장례를 겸했다.
1900년 3월 직조학교 교장, 12월 형법교정 총재도 겸하면서 육군 참장에 임명되었다. 1900년 3월 거제도 협약을 맺었고 1901년 3월 벨기에와 수호통상조약, 4월 일본과 소총 및 탄약 매입 계약을 체결했다. 1901년 8월 만한교환설이 대두되자 한일 제휴를 상주하였고 10월 의정부 찬정에 임명되었으며 11월 특명전권공사를 겸하면서 만한교환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의향을 탐지하고 한일 동맹, 망명자 문제, 재정 원조 등을 타진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일본국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1902년 1월과 3월 주청전권공사에 임명된 후 일본과 청나라에 삼국 동맹을 제안했지만 간도 문제를 둘러싼 한청 양국의 의견 대립과 일본의 반대로 성립되지 않았다. 1904년 1월 귀국해서 외부대신으로 임명되었고 4월부터 11월까지 원수부 회계국 총장, 법부대신, 관제이정소 의정관을 역임했다. 1905년 3월 농상공부대신, 6월 학부대신, 7월 농상공부대신을 맡았는데 8월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한국 연해 및 내하 항행에 관한 약정서」에 반대하며 사직소를 올렸다. 9월 평안남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가 10일 후 외부대신으로 다시 입각했다. 이후 먼 친척인 박영효를 사면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3.3. 을사조약
1905년 10월 을사조약 체결 당시 박제순은 처음 고종과 각료들이 회담할 때 참정대신 한규설과 함께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했다. 그러자 이토 히로부미는 이 결과를 바꾸기 위해 내각의 관리들을 감금하고 억압한 후, 관료들의 의견을 물었다. 당시 외부대신이었던 탓에 박제순은 다른 이들보다 먼저 지명되어 "어제 하야시 공사와 회견할 때에 대략 의견을 말한 바와 같이 본 협약안에 대해 단연코 거부하기로 한 것인데, 이를 외교 담판으로 본인에게 타협하라고 하는 것은 감히 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명령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않는가"라고 답했다. 그러자 이토는 "명령이란 무슨 뜻인가. 폐하의 명령이라면 조인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좋은가"라고 했다. 박제순은 명령이라며 반대하다 말꼬리를 잡힌 것이다. 그는 한두마디 변명을 하다가 자신의 말을 취소할 수 없게 되었고 이토는 "당신은 절대적으로 이 협약안에 반대한다고는 볼 수 없다. 폐하의 명령만 내린다면 조인할 것으로 본다고 믿는다"고 찬성으로 간주하자 그는 침묵하고 말았다.[3] 이 이후의 회의에서는 이완용과 이하영이 대세를 장악했다. 그들의 논리는 조약의 체결을 거부하면 일본이 무력으로 한국을 침략할 것이므로 차라리 체면을 살리면서 이를 들어주자는 것이었다.박제순 : 대감, 사무는 위기에 절박했으므로 우리들의 생사가 판가름나는 중요한 때가 왔습니다. 우리가 물러서는 것은 단지 죽음을 각오하는 것일 뿐입니다. 의정부의 여러 대신들의 의지와 기개를 살펴보고 지난 일들을 미루어보아 확신할 수 없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대감께서와 외부대신인 이 사람, 둘이서라도 고집해서 물러서지 않는다면 이토가 제 아무리 버틴들, 효과가 없으면 자연히 되돌아 쫓겨나갈 것이 아닙니까.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외론이 어떠할지 모를 일입니다. (중략) 이미 이 사람의 뜻은 정해져 있습니다. 힘이 미치지 못하면 죽을 따름이지요. 가사에 대해서는 이미 유서를 족질에게 부탁했으므로 다른 걱정은 없습니다.
한규설 : 다른 대신들이 설혹 다른 의견을 제출한다 해도 주무 대신이 끝까지 버티고 부결하면 무슨 조약이더라도 성립이 될 수 없으니 두 어깨가 무겁겠오.
결국 을사조약 체결에서 외부 대신으로서 학부 대신 이완용의 입장에 찬성해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이자 민족 반역자가 되었다. 다만 한규설과 조약문 수정에 참여하지 않기는 했다.[4] 그렇지만 이후에도 무책임으로 일관한 탓에 경술국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체결 직후 일제가 그의 외무대신관인을 훔쳐 강제로 서명했다고 한다. #
3.4. 박제순 내각
(박제순은) 오적 중에서 글도 있고 교활해서 오랫동안 전 국민의 타매[5]
를 견뎌왔다. 그러나 외부의 압력이 날로 심한 것을 우려해서 지위는 높고 녹봉은 후하지만 일찍부터 밤이 되면 방황했다.
을사조약 체결 직후 박제순과 을사조약에 동의한 을사오적들을 처단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체결 닷새 후인 1905년 11월 22일, 박제순은 오히려 의정대신으로 승진되었다.이때 나인영과 오기호의 옥사가 일어나자 박제순은 크게 두려워하기 시작해서 사람들에게 ‘언제 죽을지 모르니 차라리 피하는 것이 현명한 길’이라고 약간 공분을 토하면서 사직했다"고 한다. 당시 나인영 등이 폭탄을 미국인이 보냈다라며 박제순과 이지용에게 보냈는데 박제순 집안 사람이 열려고 하는 것을 박제순이 막아 겨우 살아났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박제순은 권중현, 성기운, 이하영 등과 친일 내각을 구성해 정국을 이끌어갔다. 하지만 조약 체결에 대한 비난은 거셌고 1906년 2월 16일에는 기산도가 당시 군부대신 이근택 암살을 시도해 이근택이 부상을 입는 일도 발생했다.
얼마 뒤 헤이그 특사 사건이 일어났고[6] 일본과 친일파들은 고종에게 퇴위하라며 압박하기 시작했다. 고종은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들을 달래기도 하면서 자신의 퇴위를 막아보고자 했으나 이완용은 고종을 믿지 않았고 이완용은 1906년 12월 박제순에게 "고종을 그대로 두면 정부대신을 빈번하게 경질해서 친일내각이 붕괴할 수 있다"면서 "앞으로는 내각이 일치협력해 황제에게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박제순은 고종에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그러자 송병준이 박제순 내각을 강하게 비난하며 나섰다. 심지어 1907년 5월 2일 일진회는 박제순 내각 탄핵문을 제출했다. '''박제순 내각이 덜 친일적이라는 게 이유였다.''' 또 박제순 등에 대한 암살 시도 역시 일어나 자리에 계속 있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박제순은 1907년 5월 22일 사임했고, 그 자리는 이완용이 차지했다. 내각 인사들도 교체되어 내부대신은 이지용에서 임선준으로, 군부대신은 권중현에서 이병무, 농상공부대신은 성기운에서 송병준으로 교체되었다. 본래는 이들만 교체하려 했으나 민영기와 이하영도 사의를 고집해 탁지부대신은 민영기에서 고영희로, 법부대신은 이하영에서 조중응으로 교체되었다. 이는 비교적 온건적인 친일 성향을 갖고 있던 이들에서 강경한 친일파들로 교체되어 고종을 퇴위시키기 위한 내각이나 다름없었고 결국 이들의 압박으로 고종은 황제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후 고종은 이완용이 궁중에 들어와도 만나주지 않고 박제순의 사직 후 매일 비탄의 눈물을 흘리며 거주했다고 전하고 있다.
박제순이 의정부 참정대신이었을 때 일어났던 사건으로 1906년 3월 울릉도를 방문한 일본 시마네 현의 관료들은 당시 울도[7] 군수 심흥택에게 일본이 독도를 자신의 영토로 편입했다는 것을 알렸고, 이 일은 강원도 관찰사 이명래를 통해 대한제국 정부에 보고된 일이 있었는데 이 보고를 받은 박제순은 일본의 행위를 비난했고 그와 동시에 사실 관계를 조사했으나 박제순 본인이 체결한 을사조약으로 인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3.5. 일생 후반
내각총리대신에서 물러난 이후 집에 틀어박혔고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친했던 김윤식 등을 초청해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며 짧은 운둔 생활을 지냈다고 한다.
정미 조약 때인 1907년에는 중추원 고문, 1909년에는 이완용 내각의 내부 대신을 지냈다가 그 해 이완용이 명동 성당에서 이재명에 의해 부상을 입게 되면서 내각 총리 대신 권한 대행을 맡았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에 동의하며 이완용 등과 함께 경술국적이 된다. 이후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어 6년여 동안 매년 1600원, 자작 작위와 함께 10만 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은사공채의 원금은 5년 거치 50년 이내 상환으로 연 5푼의 이자가 매년 3월과 9월에 지급되었다. [8] 1915년 11월 다이쇼 천황 즉위 대례식에 참석한 후 《경학원잡지》(1915.12)에 "하늘을 바라보고 성인을 우러르면서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립니다."라는 즉위 대례식 헌송문을 일왕에게 지어 바쳤다. 이후에는 경학원 대제학이 되어 유교 진흥을 주장하기도 했다.
3.6. 사망
1910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수여받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으로도 활동했다. 이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유람을 즐겼고 친일 행적을 이어나가다 1916년 6월 20일, 경성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만 57세. 박제순의 자작 작위는 그의 아들 박부양에 습작되었다. 참고로 을사오적 가운데에서는 가장 먼저 사망한 인물이다. 사망 후 일왕의 특지로 종3위에 서위되었다."매국적 제순이 죽어, 생전의 산 갓흔 죄를 지고"
- 신한민보 (1916.07.27)
광복 이후 을사조약과 한일강제병합에 협조해 을사오적과 경술국적에 포함된 친일반민족행위자였으니 당연하게도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그의 작위를 습작한 박부양과 함께 선정되었으며, 2006년 대통령직속기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적용, 조사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4. 평가
을사오적, 경술국적에 속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을사조약에 찬성한 이후로 한일합병조약에 찬성하는 등 친일 행보를 보여 사후 오랫동안 을사오적·경술국적으로 지탄을 받았고 을사조약 당시의 무책임한 태도는 비난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강직하고 명예롭고 좋은 사람이다. 아이디어가 많다. 의지가 강하고 용기가 있다. 뛰어난 주청 공사였고, 중국어를 할 줄 안다. 다소 보수적이다.
일설로는 을사 조약 체결에 상당히 부정적이거나 반대하였던 입장으로도 알려졌다. 분명 처음에는 대세를 안다고 말하면서도 반대한 건 맞다. 이토 히로부미가 약간의 겁을 주자 "마음대로 하라"라는 식으로 선회해서 결국 체결 도장을 찍어버렸다. 외교 담당인 외부 대신이란 걸 생각하면[9] "마음대로 하라"라는 태도는 변명도 되지 못한다. 이는 경술국치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계속 무책임으로 일관했고 그의 무책임은 그를 추악한 매국노로 만들었다.
5. 여담
- 서예에 능했다고 한다.
- 지금의 성균관대학교 총장 자리인 성균관 대사성직을 맡은 적이 있다. 참고로, 이완용도 이 자리에 있었다. 때문에 성균관대학교는 을사오적이 총장한 학교라고 놀림당한다. 다만 조선 말기, 이완용과 박제순이 활동할 시기에는 성균관은 정계 진출에는 큰 도움이 안 되는 비인기 코스 정도로 취급받았으며 대사성직도 마찬가지로 한직/명예직 취급 받았던지라 이름만 올려두었다고 보는 게 적합하다.
- 을사조약 체결 때 박제순의 딸과 이시영의 조카는 결혼이 예정되어 있었다. 당시 이시영은 박제순에게 을사조약을 거부하라고 했으나 박제순이 체결에 동의하자 결혼을 무산시키고 박제순 집안과도 절교를 선언했다.
- 을사조약 체결 이후 다른 오적들과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와 민중들로부터 표적이 되어서 습격을 받았지만 목숨을 건졌으며 이를 계기로 출퇴근 때 일본군을 대동하기도 하였다. 을사 오적들도 그랬지만 일부 친일반민족행위자 관료들은 조약 체결 이후 조선의 의사들과 민중들의 습격을 우려하여 통감부의 위임으로 일본군 호위병 2명을 동행시켰던 사례가 있었다.
- 1906년 일본의 독도 무단 점거 사건 때 "독도는 일본 땅과는 무관하니 철저히 조사 후 보고하라"라는 지령을 내렸다.[10] 하지만 이후 한일합병조약에 동의한 점을 보면 의아한 모습.
- 이덕일은 박제순을 비롯한 이완용, 박영효, 민병석 등이 노론에 속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들이 실제로 노론에 속해있었다고 보긴 어렵다. 먼저 이완용의 예시를 들면 이완용은 노론에 속해있기는 커녕 노론의 정적이었던 김일경, 민암, 이광좌, 조태구 등을 복권시켰다. 또 조선 말기부터 세도 정치로 당파보다 특정 가문의 힘이 더 강해지자 붕당정치는 완전히 종말을 고했고, 일부 극소수를 제외하면 붕당을 따지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거기다 그마저도 혁파되고 어느 나라와 가까웠는지에 따라 당파의 이름이 정해지던 구한 말 시기였으니 결국 결론은 이들의 조상이 노론일지는 몰라도 그들 당사자들은 노론이 아니라고 보는 게 적합하다. #
6. 가족 관계
- 박부양: 박제순의 아들로 박제순의 작위를 계승했다. 자세한 정보는 해당 문서 참고. 아들로 박승유가 있다.
- 박승유(1924년 ~ 1990년): 송병준, 이완용의 후손들과는 다르게 박제순의 손자인 그는 할아버지의 이런 행적을 부끄러워하고 2차대전 중 일본군에서 탈영하고 광복군에 들어가 주로 초모 활동[11] 과 음악을 통한 심리전 등으로 활약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성악가로 활동하며 강원대학교 교수로도 재직했지만 수십 년을 같이 활동한 동료 음악인들도 그의 내력을 몰랐을 정도로 본인이 개인사를 언급하지 않은데 이어 할아버지의 악명 때문에 친일파 일족이 잘된 사례로만 알려져 있다. #
7. 대중매체에서
- 1984년작 KBS 대하드라마 <독립문>에서 등장하지만 배우는 미상이고, MBC 드라마 <조선총독부>에선 배우 이묵원이 연기했다.
- 2018년작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을사오적 중 한 사람으로 나오지만 배우는 미상이다.
8. 어록
대감, 사무는 위기에 절박했으므로 우리들의 생사가 판가름나는 중요한 때가 왔습니다. 우리가 물러서는 것은 단지 죽음을 각오하는 것일 뿐입니다. 의정부의 여러 대신들의 의지와 기개를 살펴보고 지난 일들을 미루어보아 확신할 수 없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대감께서와 외부대신인 이 사람, 둘이서라도 고집해서 물러서지 않는다면 이토가 제 아무리 버틴들, 효과가 없으면 자연히 되돌아 쫓겨나갈 것이 아닙니까.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외론이 어떠할지 모를 일입니다. (중략) 이미 이 사람의 뜻은 정해져 있습니다. 힘이 미치지 못하면 죽을 따름이지요. 가사에 대해서는 이미 유서를 족질에게 부탁했으므로 다른 걱정은 없습니다.
"조약 체결에 대해서는 나는 모르겠오, 마음대로 하시오."
"독도는 일본 땅과는 무관하니 철저히 조사 후 보고하라"
- 박제순[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