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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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한말의 관료이자 외교관, 친일반민족행위자.'''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 갔다.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부등켰던 재물은 그만하면 내놓아야지.'''
조선 후기의 외교관이자 정치가, 교육인으로 친청, 친미, 친러를 거쳐 친일파가 된 기회주의적 민족반역자이다. 본래 친미파에 속해 있는 관료로 일제가 을미사변을 일으켜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늘린 후 김홍집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이 정권을 장악하자 춘생문 사건과 아관파천을 일으켰다. 이후에는 독립협회에 합류했지만 공금횡령죄로 제명당했고 양부인 이호준이 사망하는 등의 악재가 겹치자 몇년간 은둔해 있었다. 1904년 복귀해 친일파로 전향했다. 을사조약을 적극적으로 체결하고, 고종의 강제 퇴위를 주도했으며, 정미 7조약, 기유각서, 한일병탄조약을 체결하며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포함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5]
2. 상세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포함된 대한민국의 가장 대표적인 매국노로 그가 사망한 지 98년이 된 현재까지도 국가와 민족을 배신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비판받고 있다.[6]
관료로서의 능력은 상당히 좋으나 그것을 매국에 활용해 아무리 명석한 사람이라도 돌이킬 수 없는 악행들을 저지르면 어떤 평가를 받는지를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후술하겠지만, 이완용은 주위에서 총명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고 판단이 명확했으며 처세술에 능한, 흔히 말하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데 최적화된 사람'이었다.[7] 하지만 그 똑똑한 머리로 '''매국노 짓을 했으니''' 두고두고 욕을 먹는 것. 이와 같은 악질적인 친일 행각으로 인하여 국내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라 하면 바로 이완용이 연상될 정도로 매국노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을 확고히 했다. 근데 확실히 신동이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을사오적 중 다른 4명의 이름은 몰라도 이완용의 이름만은 대부분 알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누군가를 이완용에 비유하는 것 자체가 쌍욕을 넘어서 모욕으로 통하며[8] , 이는 서양 국가에서 누군가를 나치, 아돌프 히틀러에 비유하는 것 수준의 모욕이다.
이완용과 동시기에 똑같이 매국노 짓을 한 송병준[9] 같은 경우도 이러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면 생전에 이완용이 얼마나 대표적인 악랄한 매국노였는지를 알 수 있다. 또 그의 후손들은 국가를 상대로 환수된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하는 등, 조상과 다를 것 없는 뻔뻔함을 낱낱이 보여주며 국민들을 더욱 분노하게 하고 있다.
3. 생애
4. 성품
이완용은 처세술에 뛰어나고 영민했던 인물이었다. 이완용과 교류했던 미국인 선교사 알렌은 그를 한마디로 요약하면서 머리가 잘 돌아가고 영민하지만, 영혼이 없는 것 같은 기계 같은 사람이라는 평을 내렸다. 다만 의외로 검소한 습관을 지향했다고 한다. 낭비가 심하기로 유명한 궁중식단[10] 의 병폐를 비판하고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가져왔던 사람이 이완용. 당시 궁중식단의 경우, 거하게 상을 차린 후 윗사람이 다 먹지 못한 음식들은 그대로 아랫사람에게 주었다. 먹다 남긴 거나 먹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덕을 나눠준다는 의미였다.[11] 그래서 반찬을 집을 때에는 결코 남이 먹다 남긴 것처럼 헤집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다만 그러다 보니 식사시간이 한없이 길어지고, 임금부터 다 먹고 나면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곤 했다. 그래서 이러한 비효율성을 타파하고 덤으로 음식물 쓰레기도 줄이고자 했다.이완용? 그는 한마디로 '''기계 같은 사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완용은 생전에 일본어는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고 한다. 한국인에게 일본어보다 익히기 어려운 영어는 원어민 수준으로 배워 익힌 걸 감안하면 굳이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걸로 보인다.[12] 영어는 처음엔 육영공원에서 배웠지만, 서툴러서 미국에 파견되었을 때는 큰 활약을 못했다. 하지만 오랜 미국 생활로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나중에는 조선총독부 관료들보다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나 데라우치 마사타케 같은 일본인들과 대화할 때는 영어를 사용하거나 통역사와 함께 다녔으며, 정사를 맡을 때도 이토 히로부미와 같이 영어를 할 줄 아는 일본인과 했다. 여건이 충분함에도 일본어를 배우지 않은 데서 알 수 있듯 일본인 인맥을 넓히려 하지도 않아서 그가 공직에 있을때 아는 일본 정치인들은 이토나 데라우치 총독 정도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람이 1906년 학부대신[13] 시기에 공교육의 일본어 시간 도입을 추진하고, 가장 교육시간이 많은 과목으로 만들어 일본에서 '''"이완용이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행적과 성격과는 관련 없이 서예에 능해 조선 후기의 명필가로 꼽히기도 한다. 그의 필체에 대해 예술의 전당 학예연구사인 이동국 씨는 "이완용은 행서와 초서가 뛰어났다"고 밝힌 바 있으며, 그 동안 공개된 이완용의 필적을 보면 그는 행서를 즐겨 쓴 편이다. 행서는 정자체인 해서와 흘림체인 초서의 중간 서체로 미적인 감각이 뛰어난 우수한 글씨체라 할 수 있다.
그의 자서전인 <일당기사(一堂紀事)>에 의하면 경북 김천 직지사의 대웅전 및 천왕문[14] , 창덕궁 함원전 등에 걸린 현판 10여 종의 글씨를 썼다고 기록했다. 또 독립문 현판의 '獨立門'이라는 글자는 그가 쓴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친일파 연구가 정운현은 "필체는 이완용이 아니라 동농 김가진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행적 때문에 글씨의 수준과는 별개로 가격은 바닥을 긴다.''' 물론 그가 원체 명필이었던 까닭에 가치가 아주 없는 건 아니고, 인사동 같은 곳에서 가끔씩 40~50만 원에 거래가 된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지 않았다면 최소 '''수백만 원에서 천만 원'''은 했을 글씨라는 말도 된다. 서예는 글씨를 얼마나 잘 썼느냐도 중요하지만, 글쓴이의 인품·평판도 가격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글씨는 그 사람의 성품·평판을 반영한다고 보기 때문. 실제로 안중근의 글씨가 명필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것은 물론 필체 자체가 좋아서도 있지만, 그의 올곧은 성정이 글씨에 남성적이고 당당하게 그대로 묻어났기 때문이다. 괜히 일본 순사들이나 간수들도 글씨 한 점 얻어가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15] 안중근의 유묵은 실제로 시장에서 거래될 경우 억대의 가격을 자랑한다. 김구의 글씨도 수천만 원이고, 비교적 덜 유명한 신익희의 작품도 최소 수백만 원의 가격에 거래된다. 그러니 이완용의 40~50만 원은 그야말로 '''똥값'''인 셈이다. 같은 원리로 똑같은 역대 조선 임금임에도 성군인 세종대왕의 글씨는 부르는 게 값인 반면 폭군인 연산군의 글씨는 서예로 쳐주지도 않는 수준이다.
5. 각종 논란
- 이완용의 평판이 나빴던 탓에 그의 아들 이승구[16] 가 26세로 요절하자 이완용이 며느리와 간통해서 그걸 안 아들이 자살한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해당 내용은 매천야록에 나와있으며 흔히 이 에피소드를 사실로 아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실은 본래부터 몸이 허약해서 을사조약 이전인 1905년 음력 7월 병으로 사망한 것. 해당기사
- 순종 때인 1908년, 이완용은 조선시대에 간신으로 취급받은 사람들의 복권을 건의하여 받아들여졌다. 그 중에는 윤원형처럼 '간신'도 있지만 붕당정쟁에 휘말려 역적 취급된 소론, 남인, 북인계 인사들도 있었고,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사람들, 여기에 고종을 시해하려 한 사람들, 세조 때의 이징옥, 광해군 때 북인(대북)의 영수로 인조반정 때 처형된 정인홍 등도 있었다. 상당수가 현대에 재평가되고 있는 인물. 순종의 즉위 기념 대사면령의 일환인데, 고종 친정 직후부터 명예회복 운동이 불었으나 최익현 등이 결사 반대했었다. 이후에도 이완용은 박지원, 정약용, 남이 등 그동안 신원받지 못했거나 재야의 명성에 비해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인사들을 신원하고 시호를 수여하는 작업을 행했다. 이완용의 이러한 복권 사업은 그가 매국노라서 그동안의 간신들을 복권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어차피 나라가 망해가니 명목상의 신원이나 해주자는 정리 작업에 가깝다. 일부 노론 음모론자들은 이완용이 친일 노론의 수괴라서 조선에 해악을 끼친 간신들을 복원시켰다고 우기기도 하는데 간신, 역적으로 낙인찍힌 것 말고는 아래 명단에 공통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작 그 노론에게 당했던 소론, 남인계 등의 인사들도 적지 않다. 아래는 그 명단과 당파 및 기타 설명.
>- 영의정(領議政) 정인홍(鄭仁弘, 대북)
>- 좌의정 목내선(睦來善, 탁남)
>- 이조 판서(吏曹判書) 문경공(文敬公) 이현일(李玄逸, 영남 남인)
>-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이광좌(李光佐, 소론)
>- 영의정 문정공(文貞公) 조태구(趙泰耉, 소론)
>- 좌의정 문충공(文忠公) 조태억(趙泰億, 소론)
>- 좌의정 충간공(忠簡公) 최석항(崔錫恒, 소론)
>- 좌의정 충정공(忠靖公) 유봉휘(柳鳳輝, 소론)
>- 대사헌(大司憲) 김일경(金一鏡, 소론 준론)
>- 병조 참판(兵曹參判) 김중기(金重器)
>- 회인 현감(懷仁縣監) 김도응(金道應)
>- 예조 참판(禮曹參判) 정후겸(鄭厚謙, 영조 때의 외척)
>-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하재(金夏材, 정조를 모독한 노론)
>- 좌승지(左承旨) 안기영(安驥泳)
>- 우부승지(右副承旨) 권정호(權鼎鎬)
>- 부호군(副護軍) 조중호(趙中鎬)
>- 선천 부사(宣川府使) 김익순(金益淳, 김삿갓의 할아버지)
>-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 이희화(李喜和)
>- 우의정(右議政) 민암(閔黯, 남인)
>-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의징(李義徵)
>- 대사헌(大司憲) 한세량(韓世良)
>- 승지(承旨) 신치운(申致雲)
>- 절도사(節度使) 이징옥(李澄玉, 계유정난에 반대한 장군)
>- 사옹원 판관(司饔院判官) 원용성(元用星)
>- 감역(監役) 허욱(許煜)
>- 군부 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
>- 이조 참판 이진유(李眞儒)
>- 승지 정해(鄭楷)
>- 예조 참의(禮曹參議) 서종하(徐宗廈)
>- 이조 참의(吏曹參議) 윤성시(尹聖時)
>- 대사헌 박필몽(朴弼夢,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소론 준론)
>- 대사간(大司諫) 이명의(李明誼, 소론 준론)
>- 형조 판서 이사상(李師尙)
>- 이조 참의 윤연(尹㝚)
>- 훈련 대장(訓練大將) 윤취상(尹就商, 소론 준론)
>- 부제학(副提學) 이명언(李明彦)
>- 보덕(輔德) 김중희(金重熙)
>- 함경 감사(咸鏡監司) 권익관(權益寬)
>- 교리(校理) 윤상백(尹尙白)
>- 지평(持平) 윤지(尹志, 나주 괘서사건의 주모자로 소론)
>- 목사(牧使) 이하징(李夏徵, 소론 준론)
>- 동부승지(同副承旨) 유수원(柳壽垣)
>- 대사헌 심악(沈䥃)
>- 판윤(判尹) 박찬신(朴讚新)
>- 포도 대장(捕盜大將) 조동정(趙東鼎)
>- 교리(校理) 이거원(李巨源)
>- 정언(正言) 이명조(李明祚)
>- 경무사(警務使) 권형진(權瀅鎭)
>- 이조 판서 윤휴(尹鑴, 청남)
>- 영의정 윤원형(尹元衡)
>- 지평 이동양(李東讓)
>- 정언(正言) 이범제(李範濟)
>- 현감(縣監) 이공윤(李公胤)
>- 승지 이중술(李重述)
>- 진사(進士) 이하택(李夏宅)
>- 승지 이보욱(李普昱)
>- 승지 김호(金浩)
>- 현감 박필현(朴弼顯, 소론 준론)
>- 병사(兵使) 박태신(朴泰新)
>- 감역(監役) 정권(鄭權)
>- 부수(副率) 조현빈(趙顯彬)
>- 부사(府使) 심유현(沈維賢)
>- 감사(監司) 권첨(權詹,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노론)
>-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사로(李師魯)
>-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垣)
>- 승지 이재화(李在華)
>- 정언 이우화(李宇和)
>- 주서(注書) 권숭(權崇)
>- 이조 참판 김정관(金正觀)
>- 동부승지 김정리(金正履)
>- 감사 정사효(鄭思孝,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소론)
>- 정언 권집(權䌖)
>- 부사(府使) 김주태(金柱泰)
>- 통제사(統制使) 김윤(金潤)
>- 좌부승지(左副承旨) 채동술(蔡東述)
>- 좌의정 박홍구(朴弘耉)
>- 승지 박홍도(朴弘道)
- 성균관대학교 홈페이지에 역대 총장 명단[17] 에 이완용이 포함되어 있다. 컨트롤 + f키를 이용하여 직접 찾아보자. 참고로, 같은 을사오적인 박제순도 있다. 덕분에 성균관대는 "친일파가 총장한 학교"라고 놀림받는다. 단, 이 당시의 '대사성'의 실질적인 위치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대사성이 당대 성균관을 총괄하던 직책인 것은 맞지만 실질적으로 현재의 총장과 비슷한 급의 인물이었다고 보기 힘들 것 같다. 조선 초기에는 실제로 대사성이 권위를 가진 직책이었으나, 이후 성균관은 정계 진출에 그다지 유리하지 못한 뻘코스 취급을 받고 그에 따라 대사성의 지위도 급격히 추락하였다. 고종 때 와서는 어느 정도 실력만 되면 대사성 직함을 붙여줬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실제 저 페이지로 들어가보면 고종 대의 대사성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고종 재위 기간 15,886일 동안 대사성이 344명이었는데, 이는 1인당 평균 46.18일(1달 반 정도) 재직한 셈이다.
- 이완용과의 관계를 오해받은 사람들로는 같은 집안인 것뿐인 역사학자 이병도는 물론이고, 이완용의 고향이 아닌데 고향으로 잘못 알려진 전라도[21] ,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삼성그룹의 창업주 이병철 등이 있다. 가만 있는 이완용을 가지고 입맛에 맞게 조작하다 보니 누구는 특정 지역을 반역의 땅 운운하고, 다른 편 누구는 특정 기업을 깎아내린다.
- 이병도는 이완용의 조카가 아니며, 촌수로는 30촌인데 이 정도면 그냥 남이다.[18] 게다가 '병'자 돌림은 '용'자 돌림과 두 항렬 차이가 나 조카는 절대 될 수 없다.
다만, 이것과는 별개로, 이병도는 동정의 여지가 없긴 하다. 일단 자신의 친일 행적도 그렇고, 이완용과 관계가 있음을 부정하기 위해 했던 짓, 예를 들어 박물관에 멀쩡히 전시 중이던 이완용의 관뚜껑을 태워없앤다든지[19] , 이완용을 모 인터뷰에서 익산의 아들(?)로 만들려는 시도는 역사학자라 할 수 없는 저열한 짓이었다. - 루머의 마지막 피해자는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다. 이완용의 손자인 이병철이란 사람과 삼성그룹의 이병철은 별개의 인물로, 본관도 다르고, 한자 이름[20] 이 아예 다르다. 이완용 손자 이병철은 작위를 세습한 이항구의 아들이며, 이병철 명예회장은 경주 이씨 판전공파에 진주 향반 출신인 이찬우의 아들인데, 이완용과 어떻게 엮어보려고 이찬우를 이완용의 늦둥이 아들 정도로 끼워맞추려는 사람까지 보인다.
- 이병도는 이완용의 조카가 아니며, 촌수로는 30촌인데 이 정도면 그냥 남이다.[18] 게다가 '병'자 돌림은 '용'자 돌림과 두 항렬 차이가 나 조카는 절대 될 수 없다.
- 배짱있고 침착한 인간이었다고 한다. 지인과 함께 마당에 나와있는데 갑자기 마른 하늘에 벼락이 떨어져서 나무가 부러지는 사건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놀라서 지붕 아래로 뛰어가는데 혼자만 태연하게 있으면서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것도 희귀한 일인데 같은 곳에 2번 떨어지는 건 더 드문 일이다" 라고 했다고 한다.
- 이덕일은 "이완용이 노론 최후의 수장으로, 노론 세력을 대표해서 나라를 팔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노론이었으면 위의 인물들을 사면복권 시켜줄 리 없다. 사실 조선 말기부터 외척의 세도 정치가 활성화되면서 붕당정치는 완전히 종말을 고했고, 서인/동인/남인/북인/대북/소북/노론/소론/벽파/시파 따지는 게 의미가 없어졌다. 그마저도 혁파되고 아예 외세에 놀아나게 된 근대화 시기였으니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 이완용은 어렸을 당시에 총명했고 똑똑했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애초에 민족을 팔아넘길 정도면 똑똑함을 넘어선 머리인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이완용이 만약 자신의 능력을 우리 민족을 위해 사용했다면 모를까, 민족을 팔아넘기는 짓에 사용했으니 그야말로 곡학아세의 훌륭한 표본이다.
6. 기타
- 중국에서도 매국노로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다. 중화민국 북경 정부 시절인 1921년, 안직전쟁으로 돤치루이의 안휘군벌을 몰락시키며 중국의 패권을 잡은 봉천군벌과 직예군벌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이때 봉천군벌의 수장이던 장쭤린은 진윈펑 내각의 사퇴 이후 자신과 친한 교통계의 수장인 량스이를 국무총리에 임명,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서 차관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이게 당시 말 많던 산동반도의 소유권 문제하고도 연결되어 중국 사람들이 내부에서 반발이 심했다. 거기다 방금 전까지 적이던 돤치루이의 안휘파 인물을 대량으로 사면하기까지 하자 직예군벌의 수장이던 우페이푸는 이를 비난하면서 전보를 보내곤 과거 중국의 여러 매국노와 더불어 이완용을 같이 언급하면서 량스이에 대해 욕을 한다.[22]
>─ 량스이는 기회를 틈타 내각을 차지했다. 일본 대표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전일 의논한 것을 뒤집었는데 동경에서 주중국 일본 대사에 훈령한 것을 보면 외교부에 일본 차관을 요구토록 하고 일본이 추천한 사람을 쓰게 했다. 량스이는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여론을 고려하지도 않고 있다. 외직 경험도 없는 사람이 제멋대로 일본의 요구를 허락하고 철로를 되찾기 위해 마침내 차관을 일으키고 주미 각 대표가 이에 따르도록 훈령했다. 철로는 일본인 경영으로 귀속토록 하고 수천만 원의 채권을 일으켰다. 역대 내각이 하지 못했던 것을 서슴없이 그가 했다. 지난날 인민들의 통곡이 쌓여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고집스럽게 일을 저질렀다.
>국권이 희생되고 운송권이 중단되는 데 어찌 외인을 후대하고 어찌 조국을 원망하지 않겠는가? 량스이는 끼리끼리 무리 짓는 것을 지원하고 조종하며, 외세에 아첨하는 매국으로 이완용, 장방창[23] 이 되었으니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남녀노소 전국 인민은 이민족이 우리 강토를 침략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으니 간적을 물리치고 정의를 위해 용감히 앞으로 나가자. 모두가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쳐야만 한다. 바로 중국 대표에게 급전을 쳐 원래 계획을 밀고 나가도록 하자.
> --
> '만주군벌 장작림' 中
이렇게 전문에서 언급할 정도면 당대 중국인들이나 식자층도 '이완용 = 나라 팔아먹은 사람'이라고 인식했고 그 이름도 유명했다는 이야기.[24]
- 충격적인 사실은 이완용도 배향공신이 되어 최소 5년 간 종묘에 모셔지는 대참사가 실제 일어났다는 것이다. 1928년 5월에 대한제국 시기의 고위 관료와 황실 인사들이 후보 추천과 투표를 거쳐 순종의 배향공신으로 송근수, 김병시, 이경직, 서정순 4인을 정한 후, 순종의 후사였던 황태자 이은에게 보고하고 결재를 받았다.[25] 그러나 며칠 후 이왕직 장관인 한창수[26] 의 주장에 따라 김병시, 이경직이 보류되고 이완용이 추가되었고[27] , 배향공신 논의에 참여했던 고위 관료 출신과 황실 인사들이 이에 반발하자 7월에 이왕직은 배향공신의 종묘 배향을 일단 보류했다. 하지만 1940년 3월 11일에 송근수, 12일에 이완용, 13일에 서정순을 종묘에 배향하는 의식을 정식으로 치렀으며[28] , 이왕직에서 간행한 기록물에 이를 등재했다. 해방 후에 이완용의 신위는 당연히 출향되었고, 김병시, 이경직의 종묘 배향이 정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여부가 분명하지 않아서 다수 기록물에 순종의 배향공신이 송근수, 서정순 2인만 기재되어 있다.
- 정식으로 창씨개명한 이름은 리노이에 칸요(李家 完用). 그냥 이(李)씨 가문(家)의 완용(完用)이라는 뜻이다. 한국어로 그대로 읽으면 '리가 완용'
- 이렇게 여러가지 의미로 유명하다보니 다른 동명이인들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이완용은 나라를 배신하고 팔아먹은 아이콘이며, 이완용이라는 단어는 대한민국 내에서 배신과 매국의 상징이 돼버린 것이다. 다른 매국노들은 몰라도 이완용은 이름만 들어도 '아, 그 매국노?'라고 할 정도로 다른 방향으로 유명해진 사람.
- 동명이인은 물론 이름이 똑같거나 연상이 될 정도로 비슷한 이름이라서 주변으로부터 피해를 당해서 개명신청을 한다면 범죄자라든지 하지 않는 이상 거의 100% 허가해준다고 봐도 되는데, 개명 허가받기 힘들던 2000년도 이전에도 웬만해선 허가해 줄 정도였다.
- 이완용이란 이름 가진 것 하나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TV로 나올 정도다. # 물론 일부 방송 프로그램에 의하면 이름이 같으니 하도 놀림을 받아 해탈한 것인지 그 누구도 잊을 수 없는 이름이라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는 듯 하다.(링크의 마지막 이미지)
- 심지어 두시탈출 컬투쇼 사연 중에는 친구 이름이 이완용, 그것도 한자까지 똑같아 어릴 때부터 고통을 받았고, 옆 반 친구 이름이 하필 이순신이라 둘이 싸우면 선생님이 항상 이순신 편을 들었던 사연도 유명한 일화.
- 동명이인이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나왔는데, 그 이완용 후보는 뒤에서 1등으로 낙선했다.
-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다른 이완용 후보가 출마했는데, 이 사람도 뒤에서 1등으로 낙선했다.
- 성씨와 이름 모두가 일치하는 경우 뿐만 아니라 이름만 같아도 취급이 좋지 못하는 사례는, 다른 나라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 미국의 경우 독립전쟁 당시 영국과 내통하여 반역을 저지른 베네딕트 아놀드와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들은 종전 200여 년이 넘은 지금도 까이기도 한다.
- 중국의 경우 진회가 여기에 해당.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인들은 이름에 '회'(檜)를 넣지 않는다.
- 독일의 경우도 아돌프라는 이름이 과거에는 흔했으나, 아돌프 히틀러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쓰이지 않으며 이미 아돌프라는 이름을 쓰고 있던 사람들도 절대다수가 개명을 했다. 실제로 미국의 한 막장 부모가 첫째 자녀의 이름을 '아돌프 히틀러'로 지었다가 아동 학대로 간주되어 실형을 선고받고 4명의 자녀들에 대한 양육권을 박탈 당했던 사례가 있다.
- 2011년 5월 20일 이완용에 대한 김윤희의 <이완용 평전>이 출판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이완용은 '합리적인 근대인'이었기에 ‘충군(忠君)’과 ‘애국’을 위해 용기를 내거나 분노하기보다는 절대로 분노하지 않는 이성적 인간이었다. 그로 인해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조약을 주도하면서 평소 자신의 소신이었던 황제와 황실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고 한다.# 이로 인해 김윤희의 <이완용 평전>이 이완용을 옹호하고 재평가한 매국행위 변론 서적이라는 낭설이 있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김윤희가 이 책에서 보여주려고 한 것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근대의 이성을 비판 없이 충실히 따라갔을 때 얼마나 가증스런 역적이 탄생하는지를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바로 이완용과 근대에 대한 진짜 비판을 가하려고 한 것."이라고는 하는데 독자에 따라 의견이 갈리는 듯 하다.
- 2013년 1월 중순경 위키피디아 한국어 버전 이완용 문서에 이완용을 매국노로 평가한 부분을 삭제하고 조선을 근대화시킨 위인이라는 류의 내용을 추가하며 미화하려는 지속적인 반달이 행해졌다. (정보없음 부분) 이후로도 잊혀질 때마다 특정인들에 의해 문서가 훼손되고 있으며, 이는 본 문서도 마찬가지라 편집에 1단계 제한이 적용되었다.
- 전라북도 부안군에는 이완용을 칭송하는 공덕비가 있었다. 다만 이건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기 전에 세워진 거라... 대략 1898년 부안군 줄포면에 큰 해일이 밀어닥쳐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당시 전라북도 관찰사였던 이완용은 직접 부안으로 내려와 참상을 시찰하고 제방을 중수토록 지시했다. 그 결과 오늘날의 줄포 시가지가 생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기리기 위해 공덕비를 세웠는데, 이후 이완용이 천하의 개쌍놈이 됨으로서 이러한 공덕은 사실상 무의미해졌고, 자연스럽게 광복 후 이 공덕비는 수차례 수난을 당했으며, 본래 서 있던 자리가 아닌 줄포면사무소 뒤편에 반파된 채로 보관되고 있다고.
- 의외로 관료로서의 이완용과 지식인으로서의 이완용에 대한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고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29] 실제로 이완용의 업무 스타일은 해당 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실사구시를 내세우며 문제를 해결하는 스타일이다. 만약 이완용이 대한제국에 대한 애국심만 투철했더라면 꺼져가는 조선의 명운을 되살릴 만한 유능한 인재였음에는 부정할 수 없다. 사실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인에게 진심으로 증오받고 욕먹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을사조약이다. 그 이전에 죽었거나 중립적인 침묵만 지키고 국권피탈에 협력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역적으로 낙인찍힐 일은 없었다[30] . 오히려 그럭저럭한 일생을 보냈고 을사조약 참여를 거부하거나 자결로 항거하였다면 을사의인이라 존경받고 훌륭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 또한 조선 통감이 되지 않고 을사조약 그 이전에 정계를 은퇴하여 장기적으로 일본의 초대 수상이 되었고 성공한 인생으로 자국인에게 존경받고 유유자적하게 보냈으면 유신 동지인 기도 다카요시, 사카모토 료마, 오쿠보 도시미치의 유신지사로서 일본을 근대화시킨 중립적인 인물로 평가받을 수 있었고 이재명 의사나 안중근 의사에게 칼부림과 죽임을 당하지 않고 그리고 조선 민중에게 욕먹거나 증오받지 않고 여생을 편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잘못된 외세의존적 심리와 부귀영화라는 탐욕, 잘못된 선택이 자신에게 '최악의 가증스런 역적'이라는 더러운 오명과 함께 후세에 더러운 이름을 남기고 죽은 후 부관참시와 함께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 일제강점기 때 화장실 낙서에는 이완용 욕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고 한다. 당시 화장실 낙서들. 또한 이완용의 식당/요리옥/요리점이라는 낙서가 꽤 많이 보이는데, 변소가 이완용의 식당이라는 의미인 듯 하다.
- 의외로 효자였다고 한다. 공무로 바빴음에도 10리가 넘는 길을 하루도 빠짐없이 다니며 양아버지 이호준을 문안하였고, 이복형[31] 이윤용이 서자였음에도 서로 우애가 돈독했다고. 가문 시조묘를 찾아 복원하기도 했다.
- 얼마나 악질적이었는지 같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 사이에서까지도 외면 당했다고 한다. 물론 생전 일본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몰랐던 것이나 일본인 인맥을 넓히려 하지도 않았던 것 때문에 친일파 내에서도 부정적으로 볼 여지와 별개로, 이완용이 상당히 악질적이란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사항.
- 한때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9번지에 이완용의 자택이 현재도 존재한다고 알려졌지만 얼마 후 2003년 건축된 이완용과는 전혀 관련 없는 건물임이 밝혀졌다. 출처.실제 이완용의 자택이 옥인동에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나 해당 건물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며, 그 집터에는 옥인교회 · 아름다운재단 · 길담서원 등이 들어서 있다.
- 심지어 죽을 때도 일제에 자신의 재산을 바쳤다. 다른 사안에는 유언을 남기지 않았으나, 재산 문제에만 분명한 유언을 남겨서, 당시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에게 사회사업 기부금으로 3만 원이 전달 되었다고.[32]
- 아들에게 유언으로 "내가 보니까 앞으로 미국이 득세할 것 같으니 너는 친미가 되거라" 라고 했다는 설이 있었으나, 알고 보니 엔하위키 시기에 벌어진 문서 훼손이 최초 출처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정확히는 4순위 근거를 반영하는 주장과 관련된 토론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로그 중 가장 오래된 시기인 2011년 7월 이전에는 해당 어록이 아예 발견되지 않은게 확인되면서 발굴되었고, 그 전 엔 퍼진 게 없던 것이 발견된 것. [33] 그 사이에 상당히 퍼진것이 확인되고, 문헌 오염 당한 내용 자체가 화제가 된 경우였던 데다, 제도권 언론사 MBC 에서도 그대로 인용하기도 했을 정도.[34] 다만, 해당 문서 훼손은 엔하위키 로그 중, 로그가 누락 된 부분에서 발생한 것이 나무위키에 크롤링 될 때 넘어온 것 이라서, 문서 훼손의 정확한 주체를 파악 할 수는 없으나, 문헌오염 자체는 친미를 비난할 목적으로 인용되거나[35] , 일뽕들이 이완용을 재평가하자고 주장할 목적으로 인용하는 등, 문헌 오염 자체는 성향에 관계 없이(…) 발생하였다.
- 이 사진이 이완용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이 사진의 인물은 야마가타 아리토모로 이완용의 사진이 아니다.
- 이재명 의사가 죽일 뻔 했으나 극적으로 살아남고 한국 최초의 흉부외과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김구 선생이 이재명 의사가 21살이어서 총을 빼앗았으나 결국 칼로 시도하다가 실패했다고 한다. 이재명 의사가 체포되고 나서 김구가 엄청 후회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동 시대에 같은 이름의 친일파가 있었다. 종실 이완용으로, 사도세자의 3남 은언군의 현손이자 봉사손이다. 다만 이름 끝 글자의 한자가 다르다. 이 문서의 이완용은 ‘李完用’으로 쓰지만 동명이인 이완용은 ‘李完鎔’으로 쓴다.
6.1. 재산과 호의호식
검약한 습관이 있었다지만, 그런 습관과는 별개로 자신과 자신 일가의 치부에 상당히 열심이었다.[37] 이런 이완용만큼이나 친일 행위로 많은 재산을 치부한 사람들은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휘와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 윤덕영 뿐이였다. 민영휘는 원래 친청파였는데 일제강점기에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됐으며, 일제강점기 동안 가장 재산이 많은 조선인은 윤덕영이였고 이완용이 2번째였다.
참고로 가장 많은 재산의 소유자였던 윤덕영(尹德榮, 1873년 12월 27일 ~ 1940년 10월 18일)은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계비로 대한제국의 2대 황후이자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였다. 순정효황후의 아버지인 윤택영이 윤덕영의 동생. 순정효황후는 1910년 8월 22일 경술국치 일주일 전 창덕궁에서 열린 마지막 어전회의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됐던 한일합병조약에 온몸을 던져 항의하며 옥새를 치마 속에 숨겨 울면서 도망쳤는데 이걸 빼앗은 장본인이 바로 그녀의 큰아버지 윤덕영이였다.
친일인명사전에서 확인된 바로는 이완용의 재산은 당시 돈 300만원으로,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600억 원''' 가량 된다고 한다. 이완용은 해방 직전에 땅들을 다 팔아서 현금화했다고 한다. 당시 이완용이 소유한 땅은 '''여의도의 8배 면적이었다.''' 이완용보다 더한 부자였던 윤덕영의 땅은 "19,467평", 즉 축구장 8개의 면적이였으며 옥인동의 약 "54%"나 되는 대부지였다.(지금의 서촌부지의 수성동계곡, 배화여고) 그걸로도 모자라 인왕산 자락까지 모두 다 윤덕영의 집터였으며, 능금나무밭 자연숲 한옥 99칸이 있는 총 "2만평"의 대저택이 윤덕영의 소유였다고 한다.
당시 신문인 1921년 6월 23일에 보도된 동아일보기사에서 화려함에 감춰진채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백성들의 피, 땀, 눈물로 만들어진 조선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집이라고 소개된 벽수산장도 윤덕영의 저택이였다. 윤덕영 역시 나라 잃은 백성들에게 영원히 사라지지않는 상처를 남긴 최악의 친일파였고 그가 나라를 팔아먹어가며 지은 벽수산장은 겨우 100년도 못 버티고 사라졌다. 하지만 이런 윤덕영과 이완용보다 더 많은 재산의 소유자가 있었으니 바로 위에서도 언급한 '''민영휘'''.[38]세상 사람들이 아방궁보다도
그 까닭을 더 이상하게 생각한다.
바로 이 벽수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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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이 병탄 이후 벌어들인 돈이 현재 가치로 '''400억~450억 원'''이 넘는데, 이는 또한 병탄 전의 자기 일가의 재산에 비해 3배나 늘어난 것이다. 최근 그의 후손들이 땅을 찾는다고 난리법석을 부리는 것도 이처럼 막대한 재산 때문이리라. 물론 몇몇 개념있는 일부 후손들은 자신의 성을 바꿔가면서까지 이런 땅 찾는 행태에 반대하기도 했다.
게다가 호의호식하던 이완용 일가는 당시에는 굉장한 사치품이던 자동차도 타고 다녔다. 그 시절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고종과 순종에게 아첨을 하기 위해 자신이 타고 다닐 차와 조선 왕실용 어차를 들여왔는데[39] 고종과 순종과 왕실을 위한 어차로는 캐딜락과 다임러[40] 와 오버랜드[41] 를 들여왔고 데라우치 자신은 위슬리[42] 차를 타고 다녔으며 그 외에 이완용과 송병준을 포함한 고관대작들도 뷰익이나 포드나 쉐보레 등등의 차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포드나 쉐보레 등은 현재는 그냥 그저 그런 수입차/국내 생산 차량이지만, 이 당시 자동차가 귀할 시절에는 조선 사람들에겐 그림의 떡이요 고급품이었다. 기록 사진으로 당시 고관들이 탔던 고급 자동차들이 덕수궁 석조전 앞에 세워진 장면들도 있다.
자동차와 관련해서는 이완용 생전인 1912년에 그의 아들 이항구가 술에 취한 채로 사위 홍운표와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지나가던 어린아이의 다리를 부러지게 해 놓고는 배상은커녕 안하무인격으로 무시하는 바람에 이것이 백성들에게 알려지며 큰 공분을 산 일이 있었다.[43] 참고
사실 이완용은 재산이 물려받은 금액이나 은사금으로 받은 금액은 미미하였고[44] 거의 대부분이 부동산 투기를 통해 벌어들인 것이었다. 당시 이완용은 경기도와 전라도 일대에 여의도의 7.7배 정도 면적의 땅을 보유했으며(참고), 집을 여러 번 옮긴 부동산 투기의 선구자. 이 중 훗날 국가에서 귀속시킨 것이 10,900m2(3천 평 남짓)인데, 이는 그의 땅의 0.05% 정도다. 몰수원칙상 그가 받은 은사금과 이자를 고려한 금액만 몰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손들이 1992년 소송을 걸어 되찾았고, 이완용의 후손은 그 비열한 씨가 어디 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듯, 증손자 이윤형은 소송으로 되찾은 땅을 최대한 빨리 팔아버린 뒤 캐나다로 이민갔다. # 땅을 돌려줬다는 이유라는 게 민족정기보다 민사법이 더 앞선다는 논지였다.[45] 이윤형은 2002년에 캐나다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7. 어록
구문공신 이완용은 사후 세계 염라국에 들어갔으니, '''염라국의 장래가 걱정된다.'''[46]
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 갔다.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47]
,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부등켰던 재물은 그만하면 내놓아야지.
1926년 2월 13일[48]
동아일보 1면에 실린 기사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
우리는 미국 같은 부강한 근대적 국가를 건설해야지, 남의 나라 노예가 되는 폴란드 같은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된다.
1896년 7월, 독립협회 강연 중. 그러나 정작 한국을 남의 나라의 노예로 만들었다.
해가 아직 바다 속을 떠나지 않았을 때는 온 산이 어둡더니, 하늘로 떠오르니 온 세상이 밝아지는구나.(未離海底千山暗 及到天中萬國明)
이토 히로부미: 甘雨初來霑萬人(감우초래점만인)
단비가 처음 내려 만사람을 적셔주고
모리 타이라이: 咸寧殿上露華新(함녕전상로화신)
함녕전 위에 이슬 빛이 새로워지니
소네 아라스케: 扶桑槿域何論態(부상근역하론태)
과 근역[50] 을 어찌 다르다 논하리오이완용: 兩地一家天下春(양지일가천하춘)
두 땅이 한집을 이루니 천하가 봄이로다
1909년 덕수궁 함녕전에서 열린 연회에서 한일합방의 주역들인 통감 이토 히로부미, 궁내대신 모리 타이라이,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기승전결 한 줄씩 돌아가며 지은 합작시[51]
오호, 조선 동포여. 세상 말에 죽음 중에서 삶을 구한다는 말이 있더니 지금에 조선인민은 '''삶 중에 죽음을 구하니 이 어찌된 일이오'''. 얼핏 알아듣기 용이하도록 일언을 진하노니 제군은 잠깐 정신을 수습하고 잘 듣기를 바라노라.
(중략)
독립운동이라는 선동이 허설許說이라 망동이라 하는데 대하여는 각 유지인사의 천언만어가 끊이지 않아도 일향자각치 못하니 근자에 여余(=이완용)가 다시 말해도 제군의 귀에 들어가지 아니할 줄 스스로 의심하여 췌언(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거니와
(중략)
'''처음에 무지몰각한 아동배가 선동하고 그 후에 각 지방에서 역시 소문을 듣고 치안을 방해하는지라 당국에서 즉시에 엄중이 진압하려면 피해가 없겠냐마는''' 몰각자 부류를 돌아가게 하고 관대한 수단을 사용하여 일차 유고諭告와 이차 유고가 내려와도 아직도 깨닫지 못한 기자기질其子其姪(어린 것들)이 여전히 몰각한 행동이 있어 일차 효유하고 효유에 따르지 않으면 다음으로 그것을 책責하니 책한 후에 따르지 않으면 필경에 달지초지撻之楚之(매를 들어 때린다)는 어린 것들을 진심으로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첫째, 어린 것들을 선도코자 함이요, 둘째, '''다른 어린 것들에게 오염치 못하게 함이라.'''
이차 유고에도 따르지 않을 뿐만아니라 관청을 침범하여 난폭한 행동을 하니 '''당국에서 엄중이 조치함은 부득이한 것이니라.''' 근일에 모모처에서 듣기로는 많은 인민이 죽고 다쳤다하니 그 죽고 다친 인민 중에는 혹 주창한 자도 있겠지마는 그 다수는 부창부수한 자로 여余는 믿고 있노라. 농사 때가 임박하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한 즉 안락이 있을 것이요, 망동을 따라하면 즉 죽고 다침이 목전에 있으니 이것이 바로 삶 중에 죽음을 구함이 아닌가. 자신이 삶 중에 죽음을 구할 뿐아니라 망동함으로 인하여 그 부근에서 횡액으로 죽고 다침에 이르는 자가 많이 있으니 이 무슨 일인가. 눈뜨고 못 볼 일이오, 귀로도 듣지 못 할 일이로다.
(이하 생략)
8. 대중매체에서
- 가수 문희준의 외조부 이향(1914~1991)은 왕년에 '이완용 전문 배우'로 알려졌는데, 1959년작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전창근 감독)》과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신상옥 감독)》 등 총 6편의 영화에 해당 배역으로 출연했다. 반면 1959년작 《한말풍운과 민충정공(윤봉춘/남홍일 감독)》에선 배우 허장강이 맡았다.
- 1979년 KBS-TV 8.15 특집극 《대한국인》에선 배우 정래협, 1980년 MBC 8.15 특집극 《의친왕》에선 남성훈이 각각 연기했다.
- 1982년작 KBS 대하드라마 《풍운》에선 배우 조재훈이 연기했으며, 1984년에 동시대를 다룬 《독립문》에서는 김진해가 각각 열연했다. 반면 같은 해 방영한 MBC 《조선총독부》에선 변희봉이 연기했다.
- 1985년 KBS1 국군의 날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배우 박규식, 1986년작 《님의 침묵》에선 이순재, 1990년 8.15 특집드라마 《왕조의 세월》에선 박경득이 각각 연기했고, 같은 해 MBC 《조선왕조 오백년》 '대원군' 편에선 박태호가 연기했다. 이후 1995년작 KBS 대하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선 노영국, 1996년 SBS 3.1절 특집드라마 《안중근》에선 이환지가 연기했다.
- 2004년 영화 《도마 안중근》에선 성형진이, 2006년작 영화 《한반도》에선 배우 우상전이 연기했는데, 우상전은 2015년작 《암살》에서도 동일 배역을 맡았다. 특히 《암살》에선 과거 장면에 잠깐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역관 없이도 일본말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 tvN 《SNL 코리아》의 코너 GTA경성에는 플레이 가능한 3 캐릭 중 하나로 등장했지만[53] 게임 클래스와의 시너지가 겹쳐, 결코 좋게 그려지지 않았다. 애초에 절대로 멀쩡하게 그려질 만한 작자가 아니지만. 초장에는 권위를 악용해서 지나가던 일본 순사를 두들겨패질 않나, 기생집에서 기력 회복을 해 댄다. 염천교 거지패를 처리하라는 퀘스트를 받아 이동을 해야 하는데 조작법 실수로 김첨지의 인력거를 뺏어 직접 끌고 가는 신세가 되고, 전투에 들어가서 무기를 준비하는데 자꾸 삑사리가 나서 깻잎과 불로초만 들다가 그 와중에 김춘삼의 낭심샷 집중공격에 고자가 된다.[54] 그 다음부터는 기생과 어울릴 수 없게 되는 바람에 빡쳐[55] 악랄한 짓을 벌이다가 등장한 각시탈에게 총을 쏘며 저항하지만 쇠퉁소에 총알이 다 튕겨나가고,[56] 가뜩이나 없는 곳을 계속 가격하는 이크에크샷으로 응징당한다. 얼쑤 절쑤.
- GTA 3.1절편에도 최종보스로 재등장하는데 플레이어 캐릭터인 독립운동가가 버튼 액션에 실패하자 마구 패지만, 시간을 넘어 등장한 윤형빈의 주먹에 한방에 뻗는다.
- 네이버 웹툰 스페이스 킹의 등장인물 안용이는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이완용과 비슷한 행보를 걷는다.
- 2016년작 영화 《덕혜옹주》에서도 잠깐 등장했는데, 배우 이황의가 연기했다.
- 2018년작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선 배우 정승길이 연기했다.
- 다음 웹툰 《왕 그리고 황제》에서는 각성한 고종 밑에서 유능한 신하로서 활약한다. 능력치 자체는 좋았던 실제 역사를 감안하여 외국어에도 능통하며 영국과의 협상도 잘 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기회주의적 면모 역시 고증되어 실제 역사를 알고 있는 고종이 "역사가 바뀌어도 넌 그대로구나"라는 생각을 하게끔하며 이에 따라 고종이 크게 믿지는 않는다.
-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중화제국과의 전쟁에 군중들이 환호하는 와중에 첫 등장을 한다. 주인공 이형 덕분에 역사가 바뀌게 되어 매국노가 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였지만, 후에 미국 사절단이 인천항을 떠나는 모습을 보는 와중에, 정계에 진출해 과잉된 애국주의를 이용해 권력을 쥐겠다는 마음을 가진다. 설령 국익과 반하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의지를 내비치면서 이미 다른 방면으로 싹수가 노랗다는 모습을 거나하게 인증해버린 꼴. 하지만 미래인이 빙의한 고종이 이완용의 존재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관료가 되는 길은 진작에 막힌 상황. 그래서 다른 방면으로 출세할 방법을 모색하다 여흥 민씨 가문의 사위로 들어가고 언론사 사장으로 취직하지만, 이후에 퓰리처가 울고 갈 정도로 자극적인 기사를 내보냈다가 국내 정국은 물론 한미영 삼국 외교까지 혼란에 빠뜨리는 대형 사고를 치고 만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남산의 국정원에 다녀와야 했고, 고종에게 원래 역사에서 자신이 매국노가 된다는 걸 듣고 절규한다. 설상가상으로 장모 민자영과 정을 통해 사생아를 낳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대한일보의 최익현에게 거하게 까였다. 전국민의 공적이 된 건 덤. 이에 아내 몰래 해외로 도망치려다가, 기차역에서 자신을 알아본 김구에게 떠밀려 기차에 치이는 바람에 아예 산산조각이 났다. 남은 시체 중 가잠 큰 것이 가방을 쥔 손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