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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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1. 개요
2. 내용
3. 바깥고리
4. 보물 제121호


1. 개요


慶州 掘佛寺址 石造四面佛像. 통일신라 초기, 8세기 전반 경에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에 위치한 굴불사(掘佛寺)에서 조성한 화강석제 마애사면불상 8구. 현재 굴불사[1]에 소재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보물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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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경에 조성된 통일신라 시대의 석조 마애불상으로, 높이 약 3.5m 정도의 커다란 바위 사면에 각각의 불상들을 조각해놓은 것이다. 서쪽 면은 서방 극락세계의 아미타삼존불, 동쪽 면은 유리광세계의 약사여래, 남쪽 면은 양각의 석가여래입상과 음각의 입불상 2구, 북쪽 면도 역시 미륵보살 입불상 2구를 양각으로 새겨놓았는데 이렇게 동서남북 4면에 불상을 조각하는 것은 사방정토(四方淨土)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러한 불상군을 사방불(四方佛)이라 부른다.
먼저 서면에 조각된 불상의 경우 왼쪽의 보살입상은 머리 부분이 파손되었지만, 오른쪽의 보살입상의 보관에서 화불(化佛)이 확인되고 있어 중앙의 본존이 서방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불이고 그 옆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불로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앙 본존의 높이는 약 3.51m 정도 되는 대형 거불이다. 남면의 삼존상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불상의 훼손이 심한데 이 파손된 이유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는 일제강점기일본 문화재 도굴꾼들이 떼어갔다는 얘기가 있고, 두번째로는 그보다 앞선 조선시대 때 유학자들에 의하여 파손된 것이란 이야기도 있다. 다만 조선 유학자들이 파손했다면 바로 옆에 있는 다른 불상들을 가만히 놔뒀을 이유가 없으므로 일본인들이 떼어갔다는 주장이 좀 더 현실성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아미타 본존불은 한국 내에서 바위에 몸체를 새기고 머릿돌을 따로 만들어 얹은 최초의 사례인데, 이런 양식은 이후 경주시 남산 약수곡 마애불이나 경주시 이천동 마애불 등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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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면에 있는 석가여래상 역시 원래는 서면의 아미타삼존불처럼 총 3구가 모여 삼존불의 형태를 하고 있었으나 협시불 1구가 완전히 소실되어 사라져버린 관계로 지금은 단 2구만이 남아있다. 파괴한 주체에 대하여 아직 논란이 있는 서면과는 달리 이 남면의 삼존불은 일본인들이 파괴한 것이 확실한데, 일제강점기 당시 굴불사를 찾은 일본인들이 남면의 오른쪽 보살을 완전히 떼어가고 가운데 본존상의 머리마저 부숴서 떼어내 가져갔다는 기록이 남아 전하고 있다. 북면의 미륵상과 마찬가지로 굴곡진 신체의 맵시 있는 처리, 얇은 옷무늬의 흐르는 듯한 묘사로 인해 우수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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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면에 있는 약사여래상은 결가부좌(結跏趺坐) 자세를 하고 있으며, 왼손에는 약그릇을 상징하는 보주를 들고 있다. 또한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수인은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의 사방불 동면과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광배 뒷면 상에서도 나타나는 모습이다. 그러나 8세기 중반 이후 한국에서 조성된 대부분의 약사불상들은 대부분 왼손에 약합을 들고 오른손을 무릎위로 올리고 있어서 시무외인을 결한 이러한 형식의 약사불상은 그보다 이른 초기 형식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북면에는 2구의 보살상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선각(線刻)으로 표현된 십일면의 얼굴과 여섯 개의 손이 달린 십일면육비(十一面六臂)을 하고 있는 관음보살이고 나머지 하나는 미륵보살이다. 여섯 개의 손을 가진 관음보살의 경우 그중 두 개는 양어깨 위로 올리고, 두 개는 가슴 앞에 모으며, 두 개는 양옆으로 내린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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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이차돈 순교 사찰인 백률사에 오르던 중 땅에서 염불소리가 나 파보니 사면석불이 나왔고, 이후 절을 지어 굴불사(掘佛寺)라 이름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 사면불상이 바로 그것이다. 8세기 전반 경에 만들어진 신라의 석조사면마애불로, 공식적인 기록이 남아 전하는 자료라 한국 고대 사면불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또한 서면에 있는 아미타삼존상은 8세기 후반 일본에서 제작된 나라현(奈良縣)의 도쇼다이사(唐招提寺)의 목조불상과 쌍둥이처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고대 신라의 석조기술 및 불교문화가 일본으로 전래된 과정에 대해서도 연구해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사면석불의 북쪽 면에 조각된 십일면육비의 관음보살상은 이미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밀교적 성격을 띠는 불상이 조성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매우 귀중한 예이다. 이에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었다.

3. 바깥고리



4. 보물 제121호


경상북도 경주 굴불사터에 있는 이 불상은 바위의 서쪽에는 아미타여래불, 동쪽에는 약사여래불, 북쪽에는 미륵불, 남쪽에는 석가모니불을 각각 새긴 사방불(四方佛) 형태이다.

『삼국유사』 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이 백률사를 찾았을 때 땅속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땅을 파 보니 이 바위가 나와서 바위의 사방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굴불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 기록만으로는 분명하지 않지만,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보아 이때쯤 불상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쪽의 아미타여래는 신체만 돌기둥에 조각했고 머리는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머리가 얼굴보다 크게 표현되어 꼭 모자를 쓴 것처럼 보인다. 신체는 당당하고 굴곡있게 표현되어 있으며 손과 발 또한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좌우에는 다른 돌로 보살입상을 세워 놓아서 3존불의 모습을 띠고 있다. 동쪽의 약사여래는 양 발을 무릎위로 올리고 앉아 있는데 몸 전체가 앞으로 숙여져 있다. 얼굴 표현은 매우 세련되었으며, 신체는 활기차고 긴장감이 넘쳐 보인다. 북쪽면의 오른쪽에는 도드라지게 새긴 보살입상이 서 있고, 왼쪽에는 6개의 손이 달려있는 관음보살을 얕은 선으로 새겼다. 오른쪽의 보살상은 둥글고 예쁜 얼굴, 굴곡있는 우아한 자세 등 그 표현이 매우 뛰어나다. 남쪽면은 원래 3존상으로 되어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오른쪽 보살을 완전히 떼어 가고 가운데 본존상의 머리마저 떼어갔다고 한다. 미래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불을 표현한 것인데, 굴곡이 진 신체의 모습과 얇은 옷주름의 묘사가 매우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고 있다.

이처럼 입체의 표현, 음각과 양각의 표현, 좌상과 입상의 표현 등을 변화있게 배치한 점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풍만하고 부드러우면서 생기를 잃지 않은 솜씨를 볼 때 통일신라 초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