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흥원문

 




1. 개요
2. 역사
3. 구조
4. 여담


1. 개요


慶熙宮 興元門
경희궁의 동쪽 궁문이다. 정문 흥화문의 북쪽에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흥화문 자리는 현재 위치한 곳이 아니라 지금의 구세군회관 자리이다.
대비전 및 동궁 영역과 가까웠다. 그래서 해당 권역에 볼 일이 있는 사람들이 주로 드나들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2. 역사


1617년(광해군 9년)에서 1620년(광해군 12년)에 경희궁을 창건할 때[1] 지었다.
1860년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대부분 경희궁 건물들을 공사 자재로 쓰려고 없앴다. 그러나 영역만은 살아남았고, 흥원문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1868년(고종 5년)과 1879년(고종 16년)에는 흥원문 북쪽 담장이 무너져 고쳐지었고, 1891년 5월 19일[2]에 근처 민가에서 화재가 일어났는데 불이 흥원문으로 옮겨붙어 서까래 6개가 탄 일이 있었다.# 그러나 저 때 문 전체가 불에 타진 않은 듯 하다. 1890년대에 그린 서울 지도 《수선전도[3]를 보면 경희궁 궁장과 궁문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일제경희궁 터에 경성중학교[4]를 짓고, 그나마 남아있던 경희궁 건물과 영역을 매각하면서 흥원문도 같이 헐렸다.

3. 구조


  • 《서궐도안》에 모습이 나와있다.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지붕은 맞배지붕이었다.#

4. 여담


  • 1625년(인조 3년)에 소성대비(인목왕후)복을 기원하려고 중관을 시켜 시각장애인 7명을 흥원문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자 당시 병조좌랑이었던 김육이 "임금의 명 없이 감히 금문(禁門)에 아무나 받아 들일 수 없다"며 저지했다. 중관이 온갖 공갈을 함에도 끝까지 들여보내지 않아 결국 시각장애인들은 못들어갔다고.#
  • 1712년(숙종 38년)에 한 스님훈련도감에 가려다 실수로 흥원문으로 들어간 일이 있었다. 스님은 일종의 야간통행증인 물금첩(勿禁帖)을 소지했으나, 신분증인 호패가 없어 형조에 갇혔다.#



[1] 당시에는 경덕궁(慶德宮). 1760년(영조 36년)에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2] 음력 4월 12일.[3] 북장로교 의료선교사였던 헤론(J. W. Heron) 박사의 유품으로, 김정호의 《수선전도》를 으로 새로 필사한 후 한글영어로 지명을 수록한 것이다. 제작 연대의 경우 1890년(고종 27년)에 지은 러시아공사관인 아라사공사관이, 1896년(건양 원년)에 헐리는 서대문 밖의 모화관이 적혀 있어 그 사이에 필사한 듯 하다.[4] 현재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경성중학교와는 전혀 다르다. 그 곳은 1967년 개교하였으며 한자가 '景'城으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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