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전쟁

 

1. 개요
2. 전개
3. 사회구성주의자들의 주장
4. 과학자들의 입장
5. 교훈
5.1. 과학계의 교훈
5.2. 인문학계의 교훈
6. 그 이후
7. 비슷한 논쟁
8. 관련항목


1. 개요


과학전쟁이란 일부 인문학자[1]들이 "과학지식은 패러다임 (paradigm)에 따라 결과가 다른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며 사회문화적 조건의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한 것이 빌미가 되어 과학지식의 본질을 놓고 자연과학자와 인문학자 사이에 일어난 논쟁을 말한다.

2. 전개


중세 이후 철학과 종교에서 분리된 과학은 이성 중심의 합리주의의 토대 위에서 번성하고 진리의 왕좌를 차지하게 된다.[2] 그러나 세계대전 및 경제대공황을 거치면서 ‘이성적인 것을 추구해도 안 되는 게 있다’ 라는 합리주의의 한계성 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탄생하였다. 과학도 이러한 상황에서 ‘과학 또한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불완전한 토대 위에 있는 학문이 아닌가?’라는 문제제기를 받았지만, 이미 과학 위에서 찬란하게 물질적인 풍요를 누린 사회에서 이런 의문은 묵살되었다.
홍성욱 교수는 2000년대 초반 "과학전쟁"(Science War)이 북미와 유럽의 과학자와 인문학자 사이에서 화제와 논쟁의 대상이었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 사건 혹은 과학전쟁에 대한 기사가 복수 신문[3] 및 전문 과학학술지[4]에 게재되었고, 1996년 가을 독일 빌레펠트에서 열린 유럽과학기술사회학회에선 과학전쟁이 학자들 사이의 규범을 어기고 서로를 헐뜯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개탄한 성명서가 채택되는 등 활발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있다.

3. 사회구성주의자들의 주장


이들의 이론도 시간에 따라 변하고 학파에 따라 달라서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기본적인 주장은 과학철학의 상대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과학지식은 과학자 개인의 합리적 추론과 객관적 관찰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들의 사회적 협상과 합의에 의해서도 구성된 상대적이며 한 시대에 한정된 지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 사회문화의 영향 : 관찰을 해석하는 방법 등에 불가피하게 사회문화의 영향이 들어간다. 가령, 개인적인 성향과 사회학적인 압박으로 인해 과학적으로 설명되어지려 노력한 이론 중 대표적인 것이 우생학이다.
  • 과학 패러다임의 변화 : 시대에 따라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이 변한다.(업데이트이든 개정이든) 과거에는 현상에 대한 관찰, 이해, 증명이 서로 톱니바퀴처럼 굴러갔다면, 아인슈타인 이후 사유하여 이론을 만들고, 이를 증명하려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과학자들이 어떠한 가설을 세워도, 이를 뒷받침할만한 과학적기술이 따라주지 못하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어느 하나의 현상과 결과는 관찰하는 과학자들의 합의로 이루어지게 되며 ‘있지도 않은 것’을 추구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불어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이런 지적들을 싸잡아 비과학적인 것으로 매도하는 과학자들의 태도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어떤 설을 진리라 주장하면서 다른 의견들을 싸잡아 무시하는 태도는 겉보기엔 미신을 믿는 광신교도들의 태도와 다를 바 없으며, 이는 학자로서 올바르지 못한 태도라는 것이다.[5] 과학자들이 밝혀낸 것들이 과연 사실이냐는 문제와, 그것이 과학자 외의 다른 사회구성원들에게 가치있고 이득을 주는 것이냐의 문제도 따지고 보면 별개의 문제이고 말이다.[6]
그리고 사회구성주의자들이 과학을 완전히 사회적인 것이고 사실과는 동떨어졌다거나 아예 사실이 존재하니 않는다고 주장하진 않는다. 상대성이론의 역사를 연구한 사회구성주의의 대가 해리 콜린스는 "상대성이론의 타당성을 의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7]라고 말한 바 있고, 사회구성주의와는 좀 떨어졌지만 저명한 학자인 브루노 라투르도 과학을 이미 정립된 '과학'과 아직 정립되지 않은 '연구'로 나누고 진화론과 같은 '과학'은 연구와 달리 합리적이고 증명된 것이고 누구나 인정할 만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8]
사회구성주의자의 의견으로 홍성욱 교수의 기고문이 있다. 원문은 다음의 논문 참고. 누가 과학울 두려워하는가 " - 최근 " 과학 전쟁 " ( Science Wars ) 의 배경과 그 논쟁점에 대한 비판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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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과학자들의 입장


물론 과학자들마다 입장이 조금씩 다르다. 여기서는 가능한 공통적인 입장을 서술한다. 위의 사회구성주의 진영과 반대되는 의견을 보완해 추가해주길 바람.
과학자들의 입장에서 사회적 구성론과 상대주의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의 상당수는 실제로 과학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잘 모르기 때문에 다소 과격한 주장을 한면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 중 두 가지(관찰의 이론의존성과 과학이론의 과소결정성)이 아주 터무니 없는 소리는 아니다. 다만 이 주장들이 실제로 과학현장에서 일어나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과학자도 사람이니만큼 사회적, 정치적 영향을 받는건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저명한 과학자의 주장이라고 할지라도 관측된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수정/폐기 된다는 점을 빼먹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보조가설들을 수정해야 유지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분명히 과학자들은 기존의 이론을 조금 수정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대뜸 일반화하여 '증거에 의한 과학이론의 과소결정성'을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다. 실제 과학사에서는 몇 차례 혁명이 일어났다. 이들의 주장이 아주 엉터리는 아니지만 실제로 과학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구성주의에서 '''패러다임'''과 '''사회적 영향'''의 정의를 잘못 내리고 있다는 것도 문제다. 단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과 뉴턴 물리학, 아인슈타인 물리학, 양자역학의 순으로 이어지는 역학의 패러다임 변화는 철학적인 패러다임이나 사회적 합의가 아니다. 물론 과학자들도 인간으로 구성된 집단이므로 사회적인 동의가 패러다임의 전제인 것은 맞지만, 그것은 집단으로서의 동의가 아니라 부지(不知)했던 차원에 대한 증명이 완료되었음을 모두가 검증하였다는 것을 공유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과학적 패러다임은 그 해석결과의 유사와는 무관하게 공존 혹은 후퇴 불가능하다. 이전에 놓친 것을 새로 발견하거나 오류를 폐기하는 것은 있을 수 있어도 알아낸 것(엄밀한 영역으로 들어가자면, 수학에서 공리에 의해 증명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을 잊고 묻어버리거나 '사회적 집단' 에 따라 일부 지식만을 취사선택하는 집단이 대립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9]
이런 생각이 여기서 멈춘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이것이 '''반과학'''으로 향한다면 과학자들이 뒷목을 잡을 수밖에 없다. 사회구성주의 진영에서는 자신들이 반과학이 아니고 오히려 과학을 추켜세운다고 열심히 주장하지만 일부 철학자들이 보이는 행태는 아무리 봐도 빼도박도 못 할 반과학이다. 일례로 파이어아벤트는 강연 중에서 대체의학, 초능력이 현대과학과 별 다를바 없는 동등한 과학이며 자신은 텔레파시가 있다는 주장을 지지한다고 밝힌 바 있다.[10] 파이어아벤트는 사회구성주의 내에서도 좀 극단으로 치우쳤으니 무시하고서라도, 페미니즘적 과학학의 거두로서 사회구성주의 안에서 나름 인지도 있는 샌드라 하딩도 실증주의에 기반한 과학적 방법이 전부 남성주의의 산물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11][12] 그리고 이런 주장은 페미니즘의 입장에 선 사회구성주의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비록 많은 사회구성주의자들은 과학과 과학적 방법을 인정하지만, 또한 위와 같은 반과학적 주장들을 '''탁월한 업적이다.''','''명쾌한 분석이다.'''라고 칭찬하는 것도 사실이다. 위의 하딩 사례나 예전 나무위키 라캉 서술 사례 등에서 보이듯이 인문학을 대중만큼 모르는 과학자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당연히 사회구성주의=반과학 이라는 인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히려 사회구성주의 진영에서 '과학계 내에서 사회적 상대주의의 발현' 으로 발견한 상당수의 예가 유사과학 혹은 과학계 내의 아집과 싸우고 있는 과학계의 모습을 나름대로 해석한 그쪽 입장에서의 시각일 수 있다. 진화-창조론 논쟁이라든가.
''''1+1=2'를 인정하지 않는 수학자 집단이 있을 수 있다. / '지구가 평평하다' 라고 주장하는 과학자 집단이 있을 수 있다.[13] 그러나 그것이 '1+1=2' 혹은 '지구는 둥글다' 라는 것의 상대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외에도 사회구성주의 진영의 실수로 과학자들이 뒷목을 잡는 경우도 많다. 아무래도 사회구성주의자들이 과학 현장에서 떨어져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인 듯. 예로 상온핵융합이 있다. 20년 전 유타대 교수 2명이 자신들이 상온 핵융합에 성공했다고 발표된 적 있다. 당시 그들의 연구는 실험의 재연실패, 데이터 조작 징후 발견 등 연구부정행위로 드러나 기각되었는데, 해리 콜린스라는 사회구성주의자가 이것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연구부정행위와 관련된 부분은 감추고 물리학의 관행과 어긋나서 기각된 것처럼 서술하여 오해를 부른 일이 있다.
특히 이들은 과학적 개념을 사실판단이 아니라 가치판단에 대한 근거로써 제시하는 실수, 즉 다음 인용과 같은 자연주의 오류를 자주 범한다.

"액체는 부당하게 무시되어 왔다. 남성우월주의적인 물리학은 강직하고 딱딱한 것들에 우위를 부여했다. 유체역학의 고체역학에 대한 특권적 우위는, 그리고 난류에 대한 과학적 무지는, 유체역학으로 하여금 유체성과 여성성을 융합하도록 하였으며, 반면 남성은 튀어나오고 경직되는 성기를 갖고 있으며, 여성은 생리혈과 질분비액이 있는 열린 틈을 갖고 있으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현대 과학이 난류에 대한 성공적인 모델에 다다르지 못한 것이 놀랍지 않다. 난류의 문제는 풀 수 없다. 왜냐면 액체 및 여성에 대한 개념은 미가공된 부산물을 남길 수밖에 없도록 공식화 되었기 때문이다."[14]

- 루스 이리가레이[15]


5. 교훈


간단히 요약하면 과학자들은 "'''과학의 엄밀성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왜곡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사회학자들이나 인문학자들은 "'''사회문제에도 관심 좀 가지고 살아라. 우리가 보기엔 니들도 인간사회 흐름따라 이래저래 하는것 같더만'''"이라고 말하면서 서로 투닥투닥한 사건. 이 사건으로 인문사회학자와 자연과학자사이에 골이 생기기도 했다. 인문학계쪽은 과학자들을 과학에 미쳐서 다른 건 어찌되든 상관 안 하는 사람들 쪽으로, 과학계 쪽은 인문사회학자들을 유사과학을 옹호하는 사람들로 치부하며 서로 언쟁을 벌인 것이다.
양측의 시각 대립을 보여주는 예로 위에서 홍성욱 교수의 기고문만 보아도 일관되게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 사건을 '소칼의 날조 사건' 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의도적으로 날조한 논문을 기고한 것이니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단어 선정에 있어서 의도된 바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5.1. 과학계의 교훈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일방적으로 사회학자들이나 인문학자들이 병크를 저질렀고 정의롭고 똑똑한 과학자들이 승리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일부 과학자들의 고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과학지상주의 태도는 까여야 마땅했다. 과학이 엄밀하고 신뢰도가 높은건 분명 사실이지만, 그 과학'''자'''들도 결국 밥먹고 똥싸고 실수하는 사람이다. 이들이 과학 이외의 분야에 무지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기도 하다.
과학적 사실과 그 가치가 대중에게 올바로 전달되고, 대중도 그것을 중요시하게 될 때에야 과학의 가치는 비로소 인정받게 된다. 대중이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과학과 진리의 아름다움이 훼손되지는 않는 것이지만,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과학이 소수 전문가 집단의 전유물로 남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다.
결국 이런 논쟁이 생겨난 근본 원인은 과학계와 사회학계(또는 인문학계)[16]의 관점이 다르다는 점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란 점이 중요하다. 과거 철학에서 중요시한 3대 가치로 진, 선, 미(즉 진리, 윤리, 아름다움)가 있는데, 현대과학은 진리에 치중하는 반면, 인문학계는 윤리 등의 다른 가치도 중요시한다.

5.2. 인문학계의 교훈


반대로 이 사건에서 '''인문학자들이 오만한 과학자들을 훈계했다란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오히려 '''사회구성주의자들의 여러 무리수'''로 인해 이들의 무지가 드러나는 예시가 더 많았다. 인문학자가 과학에 대한 이해가 얕은 것은 비난할 일이 아니지만, 자신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분야를 자신들의 잣대로 비난하고 나서면서 일이 커진 것은 비판 받을 수 밖에 없다.[17]
과학계에서도 윤리적으로 민감해 할 집단이 있거나 현 사회에서 반사회적 행위 혹은 사회적 혼란을 초래할 소재에 대해서는 아예 연구를 하지 않거나 설령 연구 결과가 나와도 발표를 자제하는 경향이 있다. 배아줄기세포나 진화론기독계와 연일 피튀기는 전쟁터이기에 특히 서구 쪽의 신생 과학도들은 기독교 단체와 맞붙기를 결심하지 않는 이상 연구 소재를 정할 때 이쪽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물리 화학 공학자들의 경우 무기개발 분야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 살인을 목적으로(혹은 살인에 적합한) 연구결과를 얻어내는 분야에 종사한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타인에게 그리 좋은 시선만을 받을 순 없기 때문이다. 이쪽은 자칫하면 지탄받기도 쉽다. 당장 리틀 보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들만 봐도 당시 명령을 내린 상부보다 더 표면적으로 인지되기에 세계적으로 비난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경향의 원인은 과학자들 역시 인문학자들과 같이 똑같은 세상, 똑같은 사회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18][19]
당연히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과학자는 인문학적 지식에 무지한 것도 아니다. 한국에서야 문과, 이과로 학문의 영역을 분리하여 청소년들을 한쪽에만 속하게 가둬버리니 그런 시각이 형성될 수도 있겠지만 영미권에서는 과학과 철학을 같이 배우기도 하는 등 그런 쪽으로 상당히 유연한 편이다. 그리고 이공계열 학사 재학 이상의 학력이라면 잘 알겠지만 당연히 정상적인 대학에서는 이공계열 학도들에게도 인문학적 소양과 지식을 쌓도록 커리큘럼을 짠다. 사실 학사과정 까지 갈 것 없이 애초에 과학자라고 인문학 서적을 읽는다든가 인문학적 고찰은 갖다버리고 과학계통 자료만 탐독한다고 생각하는게 넌센스다(...). 더욱이 인문학자들 역시 그동안 밝혀진 과학적 사실들을 토대로 나름의 인문학적 결론을 내려 책을 써낸다. 인문학자들의 활동 또한 사회에 큰 파급을 불러올 수 있는 것은 매한가지다. 소칼이 지적했던 것은 이런 과정에서 과학적 지식에 전문적이지 못한 인문학자들이 섣불리 과학 이론들을 인용하는 태도이다. 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조건 과학 vs 인문학 식의 진영 논리를 적용시키는 건 그냥 싸움판을 만들겠다는 것과 같다.
포스트모더니즘 진영의 문제점은 너무 오버했다는 것이다. 과학계의 엄밀한 연구방식에 지나치게 과민반응해 기독교의 권위주의나 나치의 전체주의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위험사상으로 찍어버렸다. 과학이나 종교나 국가주의나 "A라는 가치를 중시하고, 그 이외의 다른 가치들을 A에 따라 해석한다"는 점에서 편협한 관점을 가지게 될 우려가 있지만[20] 그렇다고 마이너리티 리포트마냥 죄인 취급하는건 올바른 태도가 아니었다. 위의 홍성욱 교수의 말처럼 그런 과민반응 자체가 포용력 없이 편협한 관점이 될 수 있기 때문. 상식적으로 과학자들이 저렇게 열심히 연구하는 건 결국 그 연구 결과가 사람들을 이롭게 할 거란 기대가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않은가? 게다가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소칼이 지적했던 것처럼, 대안없이 '탈피해야 한다'고만 말하는 이론치고 제대로된 해결책이었던 적이 없다.[21] 과학자들이 해석가치를 설정하고 거기에 집중하는 것을 보고 자신들이 인문학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그 집중하는 정도 자체가 과학이 추구하는 위계라고 해석해버린 것이다.

6. 그 이후


현재는 소칼의 지적 사기 사건 이후로 사회학자들 사이에서도 자정/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과학계도 더 이상의 광역도발은 서로에게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린 상태라 예전보다는 많이 조용해졌다. 포스트모더니즘 자체의 세력이 줄어든 것도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조건 기존 것을 비판하고 해체하자는 얘기에 사회학, 인문학계에서도 회의적인 목소리가 많다. 그러나 신합리주의자 사이에서 '''과학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서 과학과 공학의 에서 또 다른 과학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한편 과학자 에드워드 위튼은 과학전쟁 사태에 대하여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 개념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위튼이 사회구성주의 진영의 편을 들어준 것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초끈 이론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이며 과학의 종결이라고 주장했다.

7. 비슷한 논쟁


이런 마찰이 일어나는 또 다른 분야로는 뇌과학 분야가 있다. 이는 간단히 말해 '자유의지가 있느냐?'의 여부에 대한 찬반에 따라 진영이 나눠진다. 당연히 샘 해리스를 위시한 신경과학이나 정신의학 쪽은 자유의지는 없고 인간의 사고와 판단은 생화학적, 전기적 반응의 산물이라고 본다. 다음과 같은 기사에 드러나는 시각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시각에 대해 일부에서는 인간을 단순한 유기체로 격하시키는 이야기라며, 우생학이나 홀로코스트의 그것과 다를바 없다는 식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명백하게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혼동하는 착각이다. '''단순한 유기체이니 함부로 다뤄도 된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뇌과학과는 거리가 먼 자신들의 가치판단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현상은 인류가 새로운 지식들을 밝혀낼 때마다 흔하게 일어나던 가치관의 혼란일 뿐이다. 물론 이로 인해 벌어질 미래의 일들에 대한 우려도 있겠지만 말이다.[22] 이러한 가치관의 혼란은 물론 중요한 문제이지만 그걸 가지고 과학에 무작정 태클을 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는 과학자들도 물론 고려해야 하지만, 오히려 '자유의지는 없으며 인간의 사고와 판단은 생화학적, 전기적 반응의 산물이다'는 '''가치중립적 사실'''에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인문,사회 분야에서 주도적으로 노력하여 해결해야 할 문제. 그리고 인간의 사고와 판단이 생화학적, 전기적 반응이라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이지 그것이 인문학적 개념에서 '무엇'인지는 말하지 못한다. 물을 유리잔에 담든지, 플라스틱 컵에 담든지, 그것이 '용기에 담긴 물'이라는 것이라는 관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자유의지란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미시적이고, 수단적인 것과 거시적인 것을 똑같은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은 인식의 오류를 낳을 수 있다. 요약하자면 환원적 사고의 오류라는 것이다.

8. 관련항목


[1] 이때 상당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었다.[2] 실제 지금도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라고 하는 말은 거부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다.[3] 뉴욕타임스, 디 차이트, 르 몽드[4] 사이언스(Science)와 네이쳐(Nature)[5] 물론 과학은 엄밀한 근거가 있다. 하지만 이런 고압적인 태도는 결국 과학자들도 광신도들와 다를 바 없게 행동한다는 오해를 키울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문제가 있다. 이런 비존중적인 태도는 인문학자나 사회학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태도 중 하나이다.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처세술의 문제인 것.[6] 원자폭탄이나 어린 앨버트 실험# 등이 대표적인 사례. 일부 옹호론자들은 이건 과학자들을 협박하고 과학을 오용한 관료들의 문제라고 선을 긋지만, 과학자들이 이에 응하지 않았으면 그런 오용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란 점에서 보면 당연히 책임이 0%라고 할 수 없다.[7] Harry Collins 외 1인,'골렘:과학의 뒷골목',이충형 역,새물결,2005[8] 홍성욱 외 7명,'과학철학:흐름과 쟁점 그리고 확장',창비,2011에서 재인용[9] 쉽게 예를 들자면, "청산가리를 섭취하면 어떤 원리로 사람이 죽는가" 는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청산가리를 섭취하면 죽는다" 라는 사실이 해석에 따라 잊혀지거나 무시되지 않는다는 소리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패러다임의 변화는 "육안으로 태양을 관측했을 때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진다" 라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잊었기 때문에 일어난 게 아니다. 천동설은 관측된 태양의 움직임이나 별들의 움직임을 무시하거나 잊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천동설에 입각해서 그러한 사실을 설명하려 한 것 뿐이고 지동설도 그러한 사실을 부정한 게 아니라 그 사실에 대한 해석을 부정한 것이다.[10] E Selinger 외 1인 편집,'The philosophy of experience',Columbia university press,2006[11] Harding, S.(1986), The Science Question in Feminism, Ithaca: Cornell Univ. Press[12] 하딩은 또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바이마르 공화국 문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는데,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은 각각 1905년, 1915년에 발표되었고, 바이마르 공화국은 1919년에 수립되었다. 혹자는 이것이 바이마르 공화국 이전 시절에는 상대성 이론이 대중들에게 진리로서 잘 안 받아들여졌다(엉터리라는 둥)가 바이마르 시절의 혼란상으로 인해 대중들이 상대성 이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주장이지 단순한 연도문제는 아니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관점도 상대성 이론의 유명세를 바이마르 공화국의 산물로 취급할 수 있는 논리지, 상대성이론의 존재 자체를 바이마르 공화국과 연계지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당시 전 세계의 수많은 관련 분야 석학들이 검증과 토론을 통해 시간을 들여 상대성 이론을 이해 및 검증하고 이를 받아들인 시점이 우연히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와 맞물린 것 뿐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상대성 이론의 검증과 연구에 무슨 기여를 한 것도 없고, 상대성 이론의 전파가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시작했거나 그 중심으로 퍼져나간 것도 아니다. 즉 어떤 관점에서 보든 하딩의 주장은 말 그대로 무리수였다는 것. [13] 실제로 존재한다.[14] 리처드 도킨스의 강연 동영상[15] 어느 정도 물리학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주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리인지 이해할 것이다. 여성의 생체분비물 때문에 유체역학이 여성적이라는 억지는 둘째로 치더라도 유체역학의 발전이 다른 분야보다 더딘 것은 물리학이 남성우월주의이기 때문이 아니다. '''유체라는 존재가 그만큼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분야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물리학이 "강직하고 딱딱한 것들"의 관점 위주로 발전한 것은 여성차별주의 관점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수학적 능력의 한계''' 때문이다. 유체나 기체는 정말 천문학적 숫자의 개체들로 이루어져 있고, 제대로 된 역학 연구를 위해서는 이 개체들 각각의 위치, 운동, 에너지 등을 계산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를 인간의 두뇌로 산출한다는 것은 그저 망상 수준의 헛수고다. 현대에 와서야 컴퓨터 등의 계산도구가 발전하면서 이를 이용해서야 유체 및 기체역학에 어느 정도 진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16] 미적 가치에 한정한다면 예술가도 이에 해당한다.[17] 어머니 자연을 과학이 동의없이 억지로 탐구하는 만큼 뉴턴역학을 뉴턴 강간 매뉴얼로 불러도 무관하다고 주장한 샌드라 하딩, 아인슈타인 방정식는 빛의 속도에 특별 지위를 부여하므로 권력적이라고 주장한 뤼스 이리가레 등 자신들의 저서에서 과학이론에 대한 자신들의 무지를 여지없이 드러냈다.[18] 그래서 리처드 도킨스 같은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사실을 밝히는 것에 대해 주변 시선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거듭 피력한다.[19] 물론 리처드 도킨슨이 말한 것은 '''지성의 산물이 부조리한 사회구조에 의해 발표하기가 어려울때 용기를 내어 밝히라'''는말이지 비윤리, 비도덕적 결과를 초래할 자료를 발표하라는 것이 아니다.[20] 사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허구한 날 다양성이니 다원주의니 죽어라 부르짖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단일 사상, 이론, 질서에 모든 것을 종속시키려는 시도치고 좋게 끝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21] 물론 대안 하나 만들어서 '이거닷' 하고 미는 경우엔 또 그 대안이 권위적인 질서로 굳어지는 경우가 많지만.[22] 일각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가치관이 종래에는 인간이 다른 생물과 구분되는 특별한 존재라는 일반적인 인식에 기대고 있다가 그런한 인식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에 직면하면서 그 기대고 있던 가치관까지 흔들린 셈인 것이다."라고 하지만, 인간이 다른 생물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라는 인식과 과학적 환원론으로 인해 인간이 더이상 존중받지 못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걸 우려하는 인식은 상당히 다른 문제이다. 과학자들 중에 후자를 전자로 자꾸 물타기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글에도 썼지만 이는 결국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타인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인식을 드러내는 꼴에 불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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