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과학
대한민국에서는 "과학" 이라는 용어가 기술과 공학까지도 포함하므로, 이하와 같이 나누어 서술한다.
1. 과학적 방법에 대한 반대
'''Anti-Science'''
말 그대로 '''"과학은 뒤질 놈들의 소설이다!!!"'''를 외치는 것. 반지성주의와 상통하며, 계몽주의 및 과학주의의 대척점에 있다. 대중주의와 신앙주의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간 지식 축적의 방법으로서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세계를 관찰한 결과에 대한 합리적 의심과 철저한 검증 절차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태생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엄연히 극단주의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보다 광의의 개념 내지는 온건한 개념으로 이해할 경우, 환원주의에 한해서만 반대하는 경우까지도 포함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의외로 대화의 여지가 상당히 있는 편.
인류 역사상 다양한 이유들로 인해서 과학은 욕을 먹어 왔는데, 극좌에게는 가진 자들에게만 봉사하는 학문이라고 까이고 극우에게는 공연히 체제를 위협하고 기득권을 훼손한다는 반계몽적인 논리로 까이기도 했다. 그외에도 자연을 분석함을 통해 파괴하고 자연과 인간의 연결을 끊어서 인간을 타락시킨다며 철학자, 문학인에게 까이기도 했는데, 이런 비판은 무려 '''과학이 생겨날 때부터''' 있어왔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시인 블레이크는 과학이 자연과 인간의 연결을 끊어버리고 인간을 개개인으로 조각내 버린다며 과학을 공격하기도 하였다.[1]
대한민국이나 미국의 경우 가장 대표적으로 일컬어지는 반과학의 사례는 아마도 종교적인 이유로 나타나는 사회현상일 것인데, 사실 이는 엄밀히 말하면 반과학이 아니라 유사과학이다. 애초에 기독교 우파 근본주의에서 반과학을 표방했다면 그들의 슬로건을 "창조'''과학'''"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2] 한때 미국에서 꽤 재미를 보았던 뉴에이지 운동 역시 반과학적인 성격도 있지만 괴랄한 이론을 만들고 심취했다는 점에서 유사과학적 성격이 더 강하다.
일부 극단적이고 강경한 인문학계 인사들이 반과학적인 관점을 갖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과학은 총천연색 상상력과 경이로 가득한 아름다운 세계를, 냉혹한 이성의 메스로 자르고 재단하여, 결국에는 박제된 회색빛 지식의 묶음으로 바꾸어 버린다"와 같이 주장하는 경우다.[3] 한때 논란이 되었던 과학전쟁 문제도 (약간은 결이 다르긴 했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반과학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다.
이보다 조금 넓은 사례로 과학이 무지에 기반한 상상력을 과학적 방법으로 재단하여 동심 파괴를 수없이 저지르고 다닌다는 주장도 아주 넓은 의미에서 반과학으로 볼 수는 있다. 벨 에포크와 같이 과학이 새로운 동심이나 상상의 기회를 열어준 적이 있으니 과학 측 입장에선 억울한 주장. 비과학, 반과학과 유사과학이 오랫동안 인류를 고통에 빠트렸고, 과학이 무지의 베일을 벗겨 인류를 무지의 공포에서 해방시킨 것을 생각한다면 마냥 과학을 깔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동심 파괴의 문제를 철학적 수준으로 고찰하지 않는 예술인들이나 대중들에게도 이 이유로 과학이 자주 까이는 것을 생각한다면, 무작정 신경끄고 있을 수도 없다. 특이하게도 아폴로 11호는 동심 창조와 파괴에 둘 다 해당하는데, 미국인들에게 우주개발의 꿈을 심어주어 한동안 우주 붐이 일었지만 달토끼가 없다는 사실을 밝혀 달토끼를 믿던 사람들, 또는 달의 무늬를 보고 달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믿던 사람들을 절망시키기도 했다.
이는 과학과 과학적 방법론의 성격에 기인한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비과학은 기본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과학 측에서는 증명되기 전까지 비과학을 배척할 수밖에 없고, 비과학에서 유사과학이 나오기 쉽기 때문.[4] 그러나 미학과 같이 주관적이라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가치들도 이 비과학에 해당되기 때문에 상상과 마법, 신화는 과학이 밝혀내는 사실과 이론에 의해 사라질 수밖에 없다. 거기에 주관적 가치도 검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으니 과학전쟁과 환원주의를 비롯한 논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 거기에 과학은 계몽주의와도 일맥상통하니, 과학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말이 엘리트주의로 똘똘 뭉친 어그로로 들릴 수밖에.
그러나 위 문단의 내용은 사실과는 좀 거리가 있다. 일단 '가치'라는 것은 모두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것이지, 딱히 검증할 수 없는 가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가치를 인정받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즉, 과학이 미학을 배척하거나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으로 인해 얻어진 지식이 미학의 내용을 바꿔갈 뿐이라는 것이다. 과학이 밝혀내는 사실들이 기존의 상상을 현실로 끌어내버린다면, 그것에 기반하여 완전히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생긴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하늘을 나는 상상이 현실이 된 뒤에는 우주로 나가는 상상이 그자리를 차지했듯이 말이다. 지금까지 쭉 그래왔듯이, 과학이 발달한다고 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정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 대상이 바뀔 뿐인 것이고, 그것은 굳이 과학이 아니어도 항상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그 변해가는 과정에서 진통이 생기고 누군가에게는 고통이 될수도 있는 것은 사실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사례들은 즉 인문학자들과 예술인, 일반인들로 이루어진 비과학적 사람들과 과학자들이 교류하고 소통할 기회가 없었음을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다행히도 21세기가 오면서 학제간 연구 및 교류가 늘고 있는 상황이지만, 일부에서 과학만능주의라는 어그로 끌기 좋은 카드를 내세우는 경우가 생겨서 반과학주의도 맞불마냥 번져가고 있다. 우습게 볼 문제만도 아닌 것이, 실제로 유명한 마녀사냥이나 과학자에 대한 종교탄압이 심해진 것이, 흔히 생각하듯이 종교가 절대권력을 쥐고 있던 중세가 아니라 자신의 위치를 위협받던 근세였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쉽게 말해 동물이 상처입고 위태로운 상황에서 더욱 공격적으로 변하듯이, 과학을 내세워 사회전반적으로 압박을 가해오면 그만큼 반발도 심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인 것이다. 물론 과학주의에도 과학만능을 외치는 사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과학쪽이던 과학주의쪽이던 간에 항상 목소리가 큰 쪽은 극단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실제로 국내에서도 인터넷 등지에서 과학관련 키배가 벌어질 때 보면 '''과학만능주의 vs. 반지성주의''' 같은 극단주의자들만 보이는 경우도 많다.
2. 기술과 공학에 대한 반대
'''Neo-Luddism'''
러다이트 운동에서 기원하며, 굳이 번역하자면 '''신러다이트주의''' 정도가 되겠다. 국내에 흔히 알려진 "반과학" 의 이미지는 이쪽인 경우가 많으며, 이 항목에서는 신러다이트주의보다는 대중적으로 이해되는 넓은 의미의 반기술을 중심으로 다루기로 한다.
이 역시 인류 역사상 정말 다양한 이유들로 인해 형성되었다. 러다이트 운동에서 그렇듯이 일자리를 빼앗길 것으로 염려한 사람들이 이런 입장을 취하게 되기도 하고, 위의 반과학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논리에 의해 첨단기술이 가진 자들의 전유물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거나 멀쩡한 애들 망친다고 주장한다거나 하는 경우도 있다. 환경파괴 문제나 원자력 발전소의 위험성을 강조하다가 급진적 생태주의 비스무리한 이상한 사상으로 흑화(…)해서 무작정 자연으로 돌아가라 드립을 치는 경우도 있고, 이상한 동양문화 독자연구에 잘못 흑화하는 경우에도 반기술 마인드를 갖게 되기도 한다. 현대사회에 들어서는 디지털 치매나 GMO와 같은 떡밥들을 물다가 이쪽으로 빠지기도 한다.
종교적으로는 아미쉬(Amish)가 이쪽으로 가장 유명한데, 자동차 대신 마차를 타고, 흔한 백색전자 대신 전통 화로로 음식을 조리하는 사람들로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은 내부적으로 전기와 내연기관을 거부하도록 합의한 바 있다고. 한편 개신교 근본주의의 경우 베리칩 떡밥을 잘못 물면 반기술로 빠지기도 한다. 종교계에서는 특히 ISIL이 반기술 이미지로 알려져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이 그렇게나 거부하던 과학기술의 총아인 트위터를 통해서 선전선동을 하고 대원을 모집하는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유대교 중에서도 최악의 과격 근본주의자들인 하레디(Haredi) 역시 빠질 수 없다.
이런 류의 사람들은 특히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지리산에 괴인이 있다느니 하면서 동네 사람들의 바람잡이를 좀 보여주고, 구태여 오밤중에 찾아가서 누군가의 인기척을 슬쩍 보여준 다음, 다음날 대낮에 정식으로 만나서 촬영팀과 허허 웃으며 인사하고 하루쯤 같이 살아보고 병원에도 데려가서 진료받아 보게 하는 건 거의 클리셰 수준. 여기에 조금만 살을 더 붙이면 진짜로 한 화 내용을 통째로 뽑을 수 있다. 보다보면 대한민국에 과학기술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은근히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 정도가 심하지만 않는다면 사회적으로 크게 물의를 빚거나 지탄받는 경우는 드물다. 도리어 디지털 치매 같은 떡밥처럼 현대 과학기술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경계하는 목소리는 여론에게 환영받기도 한다. 그 정도가 더 심해져서 개인의 일상생활에 불편을 느낄 정도로 문명의 이기를 거부한다 해도 그것이 크게 문제삼아지는 경우는 없다. 단지 주변 지인들에게 좀 괴팍하다, 좀 별난 사람이다 같은 평가를 받게 될 뿐. 해외의 경우 위의 아미쉬처럼 집단적으로 문명을 거부하더라도 그렇게까지 사회로부터 유리되는 결과는 초래되지 않는다. 대놓고 반기술 시위를 한다고 해도 대중의 평가는 "그래 점점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으니까" 와 같은 호의적인 시선도 섞이곤 한다.
그렇지만 일단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서 옛날 러다이트 운동처럼 레알 기계 설비를 파괴한다든가 발전소에 사보타주를 한다든가(…) 했다간 그건 정말로 난리난다. 과학기술을 거부함으로써 발생하는 일상의 어려움은 전적으로 개인이 감내하는 선에서 그쳐야지, 타인의 사유재산을 함부로 파괴한다거나 공공시설물, 특히 발전소나 사회간접자본을 노리는 건 저녁 뉴스에 보도될 정도로 큰일이자 엄연한 '''범법행위'''이다.
2.1. 관련 문서
[1] 그리고 그 대안으로 낭만주의 운동을 들고 일어나서 자연과 인간의 재연결을 추구하였다. 윤효녕 외, '19세기 자연과학과 자연관',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7, pp75-78[2] 좀 더 부연하자면, 그들만의 구시대적인 교리를 구태여 "과학"이라고 치장하는 것은, 과학적 방법은 사용하지 않으면서 과학적 방법을 통해 확보된 권위는 훔쳐 누리겠다는 심보이다. '''이것은 유사과학의 특성에 아주 정확하게 부합하며, 반과학이 아니다.'''[3] 리처드 파인만이 한때 TV에 출연하여 이런 류의 주장에 대해 한탄하기도 했었다. 과학자들도 엄연히 '''과학적 방법'''과 '''사실'''에 기반한 과학적 감수성과 과학적 상상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학적 상상력은 어디까지나 과학적 방법론에 의해 아주 조심스럽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냥 상상력에 비하면 범위가 한없이 좁다.[4] 굳이 유사과학이 아니더라도 우민화 정책과 종교의 여러가지 악행을 비롯해 '''무지를 이용해 사람들을 공포에 빠트려 뜻대로 조종하던 사례'''는 많고도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