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병덕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권병덕
權秉悳'''

'''출생'''
1868년 4월 25일
충청도 청주목 산내일면 성화리
(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종암리)[1]
'''사망'''
1943년 7월 13일 (향년 76세)
경기도 경성부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국적'''
조선대한제국일제강점기 조선
'''본관'''
안동 권씨[2]
'''별칭'''
초명은 권태익(權泰益) 또는 권병준(權秉俊)
호(號)는 우운(又雲)
자(字)는 우삼(友三) 또는 윤좌(潤佐)
도호(道號)는 청암(淸菴)·정암(貞菴)
'''종교'''
천도교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동학교도가 되다
2.4. 천도교와 시천교
2.7.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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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그러나 순수한 독립운동가로 보기엔 어려운 인물이다.

2. 생애



2.1. 초년기


권병덕은 1868년 4월 25일 충청도 청주목 산내일면 성화리(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종암리)에서 아버지 권문영(權文永)[3]과 어머니 고령 신씨 신병권(申柄權)[4]의 장녀인 신문화(申文嬅)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6살 때 본가가 있던 경상북도 상주군 화령면으로 이사했고 8살까지 종숙 권승영(權升永)에게 천자문과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익혔으며, 1876년 8월 청주군 미원면 양곡리로 이사하여 외척형인 신철모(申徹模)와 외척 호족 좌장 신장록(申將祿)의 사숙에서 유학자 유도관(柳道貫)으로부터 한문을 수학했다. 1883년 아버지의 명을 따라 원세화(元世華)의 장녀인 원주 원씨와 결혼했고, 1884년 상주군 화령면 학평리로 이사했다.

2.2. 동학교도가 되다


권병덕은 1885년 임규호(任奎鎬)로부터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입도할 것을 제안받았으나 거부했다. 그러다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읽고 평등한 사회로의 개벽을 주장하는 동학의 교의에 공감하여 4월 27일 임규호의 추천을 받아 동학에 입도했다. 1886년 2월, 그는 최시형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고, 1887년 부친의 명에 따라 과거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하자 이때부터 과거를 포기하고 동학에 몰입해 충청, 경상도 일대에서 200여 명을 포교했다.
이후 최시형으로부터 청주접주에 임명된 그는 충북 보은 장내리에 동학의 중앙 본부인 육임소(六任所)가 설치될 때 중정(中正)을 맡았고 1889년에는 강원도 인제에서 최시형을 호종했다. 1890년, 권병덕은 아버지가 청주 통어영(統禦營)의 공금 3만 냥을 빌렸다가 갚지 못한 일로 1년 정도 투옥되었다. 그 후 1892년 연초(煙草)를 10여회 판매하여 3만 냥의 이익을 남겨 상환했다. 1893년 2월 최시형이 최제우의 신원과 동학 포교의 자유를 인정해줄 것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해 3월 보은 집해가 개최되었다. 1893년 1월 충북 청주군 미원(산동)면 용곡리의 자택에서 최시형을 모시기도 하였다. 이때 권병덕은 보은집회에 참가해 충경포 대접주 임규호 휘하의 차접주에 임명되었다.

2.3. 동학 농민 혁명


1894년 1월 고부 농민 봉기를 시작으로 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했다. 이때 최시형은 무장봉기에 가담하는 걸 단호히 거부했고, 권병덕은 그의 뜻에 따라 동학 농민 혁명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달 후 최시형은 뜻을 바꿔 가담하기로 결정했고, 호족 좌장으로서 고령 신씨 문중 개혁을 선도 했던 신장록의 협력으로 미원면 용곡리가 동학혁명 임시 지휘본부였었다. 그리고 권병덕은 1894년 9월 말 최시형의 명을 받들어 외척 신명록(申命祿), 신원록(申元祿), 신혜모(申惠模) 등과 함께 관하 도인을 이끌고 봉기했다. 그해 10월, 충경포와 문청포 도인 3만여 명을 이끌고 충청북도 보은으로 가 중군 통령 손병희 휘하에서 후군을 맡았다.
그러나 뒤이은 보은 전투에서 동학 농민군이 참패하자, 권병덕은 상인으로 변장해 경상북도 상주, 김천 등지로 도망치며 최시형을 보좌했다. 1896년 최시형의 명을 받들어 전희순과 함께 경남 일대의 접(接)을 순회하고 교인을 독려했지만 1898년 3월 최시형이 원주 송골에서 체포되어 6월에 교수형에 처해지자, 김연국을 보필해 도망다니면서 동학 교인들을 최대한 붙들어 놓으려 노력했다. 1901년 김연국이 체포되자, 그는 김연국이 사형을 면할 수 있도록 구명 활동을 벌인 끝에 김연국이 몇년 만에 풀려날 수 있게 해줬고, 1905년 말 김연국으로부터 정암(貞菴)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2.4. 천도교와 시천교


1906년 1월 4년 만에 일본에서 조선으로 귀국한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했다. 손병희는 자신이 일본에서 보고 배운 문명 개화사상을 교인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교헌(敎憲)을 제정하고 교구제와 의회제를 실시했으며, 신 교리서 발간, 보급 및 교인 교육 등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이때 권병덕은 김연국, 김낙철, 원용일 등과 함께 두발을 자르고 손병희를 찾아가 자신들이 문명개화운동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후 권병덕은 천도교 간부로서 교회의 정비와 교세 신장을 위해 활동했다. 1906년 2월 천도교 대정(大正)의 원직을 받고 이문관(理文觀) 서적원(書籍員)에 임명되었고, 1906년 5월에는 실업을 장려하기 위해 조직한 상업사(商業社) 발기에도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10월에는 전라도 순독(巡督)에 임명돼 전라도 지역의 교인과 교구를 관리하고 교당을 건축하기 위한 자금을 모집했다. 또한 1907년 7월 16일 천주(薦主)가 되었으며, 김연국이 대도주(大道主)가 된 직후인 1907년 9월 5일 현기사장(玄機司長)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가 모셨던 김연국이 1907년 12월 손병희와 갈등을 빛고 천도교를 탈퇴하자, 그도 따라 나왔다. 이무렵 손병희의 측근으로서 진보회를 이끌던 이용구송병준의 유신회와 합쳐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조직했다. 이에 손병희가 이용구 등 62명을 출교시키자, 이용구는 1907년 4월 5일 시천교를 창건했다. 김연국이 시천교로 옮기자, 권병덕 역시 시천교에 가담했다. 이때 이용구를 따라 시천교에 입교한 사람이 20만 명에 달했고, 천도교의 대교구는 72개에서 23개로 축소되었다.
김연국은 시천교에서 교주 격인 대예사(大禮師)를 맡았고, 권병덕은 시천교 교수(敎授)로서 소년입지회와 부인회를 조직하여 일반인 교화에 힘썼다. 또한 1909년 3월 관도사(觀道師)의 지위에 올랐으며 얼마 후에는 봉도(奉道)가 되었다. 그리고 시천교인의 지침서인 '교인필지(敎人必知)'를 저술, 간행했으며, 1912년 1월에는 시천교본부 총무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또 1907년 12월 1일 사립중앙학교를 인수하고 교장에 취임했으며, 대한협회에 참여하여 회원으로 활동했고 1910년 10월에는 박형채(朴衡采) 등 시천교인 50명과 태인군(泰仁郡·현 정읍시)에 농산(農産)조합을 설립해 농민의 삶을 개선하고자 했다.
당시 권병덕은 일제가 조선을 병합한 것은 조선에게 도움이 된다는 일진회와 시천교의 교리를 신봉했고, 조선 백성들이 진정으로 개화되려면 서양의 앞선 사상을 일찍 받아들인 일제를 본받아 옛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취하며 신교육에 힘써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의병 활동을 부정적으로 바라봤고 해외로 망명하여 배일운동을 벌이는 것 역시 쓸모없는 짓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1913년 초 송병준의 독단적 운영과 교권 독점에 반발한 그는 시천교 간부직을 사임하고 낙향했고 1913년 5월 김연국이 설립한 시천교총부의 신도사(信道師)에 임명되었다.
1914년, 권병덕은 '시의종경(是儀經政)' 편찬을 주도했지만 시천교총부가 서도교인파와 남도교인파로 분열되는 상황에 휘말렸고 결국 1915년 4월 시천교에서 출교당했다. 이후 그는 중앙시천교본부를 개교해 독자 노선을 걸으며 시천교의 한 지파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다이쇼 덴노의 즉위식에 참석하는 등 친일 성향을 노골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교세가 갈수록 쇠락해지자, 결국 1916년 휘하의 이근상·손필규·박준관·김기태 등 30여 명의 지도자 및 그 소속 교인들과 함께 참회식을 거쳐 천도교로 돌아왔다.
권병덕은 1917년 9월 장석승례(丈席承禮), 1918년에는 도사(道師)에 임명되어 천도교 중앙총부의 중요 사항을 결정하고 교인 교화 및 교세 신장을 위해 노력했다. 또한 전제관장, 이문과장대리, 금융관장, 보문관장 등을 역임했으며, 3.1 운동 직전에는 손병희의 집사 격인 승례(承禮)를 맡아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2.5. 3.1 운동


1918년 말, 천도교의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이 교주 손병희와 협의해 조선의 독립을 이루기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당초 천도교는 자치권 청원이나 독립 청원을 하는 수준에서 검토했으나 재일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추진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1919년 1월 말 독립선언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기독교의 이승훈, 함태영, 불교의 한용운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 제작과 배포, 민족대표의 선정 등에 대해 협의해 1919년 2월 20일 대체적인 사항을 마무리했다.
다음날인 2월 21일, 권병덕은 손병희로부터 "이번에 조선독립선언을 하므로 여기에 가맹하라."는 제의를 받았다. 당시 권병덕은 일본인과 조선인의 대우가 상이한 점에 불만을 갖고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국가들이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독립할 것이니 조선도 독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흔쾌히 승낙했다. 이후 그는 2월 24 ~ 25일경 가회동 손병희의 집에서 독립선언서의 제작과 배포, 미국 대통령 및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열국 대표에게 건의서와 일본정부와 조선총독에 보내는 청원서의 날인과 제출 등에 대하여 협의했다.
2월 26일, 권병덕은 김상규(金相奎)의 집에서 독립선언서, 조선총독에게 보내는 청원서, 일본 정부와 미국 대통령 및 파리강화회의의 각국 대표자에게 보내는 건의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2월 28일 밤 손병희의 집에서 회합하여 독립선언서의 발표 장소를 파고다 공원에서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으로 변경하는 데 참여했다. 3월 1일 오후 1시 30분 경, 권병덕은 손병희를 따라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에 갔다. 그리고 오후 2시 독립선언식에 참석하고 한용운의 선창에 따라 만세 3창을 행한 후 다른 대표들과 함께 경찰에 자수해 체포되었다.
체포 후 남산 경무총감부로 연행된 권병덕은 취조 및 재판 과정에서 처벌을 각오하고 있었다고 밝히면서 앞으로도 기회가 있으면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1919년 3월 20일에 행해진 서대문 감옥 심문에서, 그는 조선 독립운동을 하게 된 전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천도교주 손병희의 승례(承禮), 다시 말하면 접대계(接待係)로 있었다. 금년 2월 20일경 교주 손병희가 자기는 이번에 조선독립선언을 하고자 하니 너도 그 선언서에 날인하라고 하므로 그 말을 듣고 우리 동지 33인이 조선독립선언을 하고 일본정부와 총독부에 독립하겠다는 건의서를 냄으로써 그렇게 하면 독립이 되느냐고 물으니 동인은 독립이 되고 안 되는 것은 알 수 없으나 지금에 있어 조선 독립을 아니 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배일(排日)이 아니라 일본과 서로 제휴할 생각이니 일본서도 독립을 하여 줄 것이다, 가령 일본이 독립을 해주지 않더라도 우리는 독립청원을 할 것이니 어떤 죄가 되지 않는다 했다.

나는 그 일이 성공하지 못하면 구속을 당하든지 또는 섬(島嶼)으로 귀양 가지 않겠는가 하니 동인은 그렇지만 조선 사람으로서는 한번 해보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며 자기도 날인하겠으니 너도 날인하라고 하므로 나는 그러면 선생께서 명하는 대로 하겠다 하고 종말에 가서 서명날인 하였다. 그런데 이 일은 최린, 권동진, 오세창이 주장한 일이며, 또 동월 26일 손병희가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을 발표한다고 하더니 그 후 동월 28일 밤 손병희 집에서 동지 일동이 집합하여 협의할 때 동지 중 이갑성이 각 학교의 학생들도 독립선언 하는 것을 알고 수천 명이 집합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손병희는 그것은 불가하다, 학생들이 집합하면 난폭한 행동이 있을지 모르니 우리가 정한 이날은 독립선언을 발표하는 데 있다, 학생들이 소동을 벌이면 우리들에게 해가 있을 것이니 공원을 그만두고 명월관 지점으로 가서 그곳에서 평온하게 발표하고 조용히 체포를 당하는 것이 좋다고 하여 일동이 찬성하였다. 3월 1일 오후 1시경에 가서 2시에 발표하기로 하고 종로경찰서에 통지하고 난 후 경찰이 와서 체포되었다.

이에 형사가 물었다.

피고는 조선 독립이 될 줄로 아는가?

권병덕이 대답했다.

나는 원래 시천교 교인이라 한일합병에 반대하지 않았으나 천도교로 돌아와서부터 반대하였기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독립운동을) 하려고 한다.

또한 4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그는 조선독립을 하려고 한 까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별로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손병희가 현재 시세로 보아 조선이 이대로 있을 수 없다고 하므로 나도 찬성하였다.

이에 검사가 "피고는 이번 운동을 한 이상 처형될 것을 각오하였는가?"라고 묻자, 권병덕은 "그렇다."고 답했다. 그 후 경성지방법원은 8월 1일 권병덕 등이 내란죄를 범한 것으로 간주하고 고등법원에 송치시켰다. 하지만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은 이 사건을 '내란죄'로 보지 않고 '보안법 위반'과 출판법 위반'에 해당하는 사건으로 보고 다시 경성지방법원에 환송시켰다. 이에 경성지방법원은 8월 9일 이 사건을 수리하지 않기로 판결했고, 권병덕은 다시 경성복심법원에 송치되었다. 그리고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은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을 적용해 권병덕에게 징역 2년 및 미결구류일 수 360일의 형을 선고했다.
권병덕은 판결 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마포 경성 감옥으로 이감되어 그곳에서 그물 짜는 노역을 했다. 그리고 1921년 11월 4일, 그는 만기출옥했다. 그는 출옥하는 날 소감을 묻는 '동아일보'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답했다.

조선 동포끼리 서로 싸우고 잡아먹고자 하는 것은 사랑(愛)이 없는 것이매 첫째 사랑이란 것이 있어야 하겠다.


2.6. 수운교


출옥 후 천교도에 합류한 그는 오지영, 최동희 등이 교권파를 비판하며 천도교 혁신운동을 추진하자 임예환, 나인협 등과 함께 이를 지지했다. 그러다가 1922년 4월 손병희가 구제도 부활을 지시하자, 그는 박인호, 정광조, 권동진, 최린 등과 함께 구파와 천도교 혁신파와의 분쟁 조정에 나섰다. 하지만 그해 말 천도교 혁신파가 끝내 천도교 연합회를 설립하여 천도교 본부를 떠나버리자, 권병덕 역시 천도교를 탈퇴했다.
1923년 5월 31일, '매일신보'와 '동아일보'에 동학의 초대 교주 최제우가 환생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천도교영우구락부(天道敎靈友俱樂部)'라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조직에 속한 이상룡(李相龍)이란 자가 바로 최제우의 재림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나이가 120세라고 주장하며 최제우가 신통력을 부려서 가짜 육신이 죽은 듯 보였을 뿐 진짜 육신은 살아남아 금강산 비로봉 도솔암으로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권병덕은 이 인물을 계동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서는 최제우가 환생한 사람이라며 음식을 거창하게 차리고 소생식(蘇生式)을 거행했다. 또한 그는 이날 참석한 신도들에게 1인당 1원씩 헌금을 받고는 이상룡에게 참배토록 하였다. 하지만 종로경찰서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상룡의 나이는 60세이고 계룡산 산중에 살던 사람이었다. 천도교 측은 당연히 최제우를 사칭한다며 격렬하게 반발했지만, 권병덕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상룡을 교주로 한 신종교 단체를 세우기로 했다. 그는 처음엔 '천황교'라는 명칭을 지으려 했지만 일제가 받아들이지 않자 1923년 음력 4월 15일 이상룡의 생일에 교도들을 규합해 음력 10월 15일 수운교를 창시한 후 1924년 11월 10일 서대문 인근에서 수운교 개교식을 열었다.
그러나 권병덕은 곧 수운교 내부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했고, 1925년 7월 자신을 추종하는 이들을 데리고 가회동에 근거를 둔 김연국의 상제교(上帝敎)에 들어갔고 서대문 안 영성문 옆에 약방을 경영하며 생활했다.

2.7. 말년


1928년 2월 15일, 권병덕은 신간회 대구지회에서 개최된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민족운동과 신간회의 장래에 대해 연설했다. 하지만 그는 신간회에서 별다른 활동을 하진 않았다. 신간회가 해체된 직후인 1932년, 그는 천교도 구파에 복귀했다. 그는 그해 12월 23일 오전 천도교당에서 개최된 임시대회에 경성종리원의 대표자로 참석해 규칙 변경, 예산 확정 등에 대해 토의하여 결정했다. 그리고 1933년 5월 천도교 황해도 안악교구가 운영하는 양성강습소가 운영난으로 인해 팔릴 위기에 몰리자, 그는 중앙교회의 심계원장으로 하여금 그곳에 가서 지역의 유지들과 협의해 양성강습소를 유지시키게 했다.
1930년대 중후반, 그는 역사서 집필에 매진해 <조선총사(朝鮮總史)>, <이조전란사(李朝戰亂史)>, <궁중비사(宮中秘史)> 등을 출간했다. 이 중 <조선총사>는 일제 침략에 항거한 의사, 열사의 활약을 높이 평가해 독립운동을 부추겼다는 혐의로 삭제 처분을 받기도 했다. 그 후 그는 1943년 7월 13일 오후 경성부 신설정 309번지 12호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76세. 영결식은 7월 15일 오후 2시 30분 천도교당에서 거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권병덕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 인근의 기암리·용곡리·운교리·운용리와 함께 고령 신씨 집성촌으로 권병덕의 외가이다.[2] 부정공파 구(坵)계 33세 '''태(泰)''' 춘(春) 용(龍) 정(正) 항렬.[3] 고령 신씨 대동보에는 권영문(權永文)으로 오기되어 있다.[4] 안동 권씨 대동세보에는 신병권(申'''炳'''權)으로 오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