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준(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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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권준(權晙)
본명
권중환(權重煥)
이명
권중석(權重錫)·강병수(姜炳秀)·진민각(陳民覺)·
장종화(張從化)·장수화(張樹華)· 양무(楊武)·권문술(權文述)·
권무산(權武山)·권준(權俊)·권중산(權中山)

백인(百忍) 또는 양무(揚武)
본관
안동 권씨[1]#
생몰년도
1895년 5월 2일 ~ 1959년 10월 27일
출생지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면 척동리#

1. 개요


권준은 의열단에 참여하고 중국군 장교로 항일전쟁에 참전한 독립운동가이다.

2. 생애


1917년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한 권준은 광복회 활동에 참여하였고, 1919년 3.1 운동 직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그 무렵 3.1 운동이 무력에 의해 진압되고 만세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고 생각한 독립운동가들이 여러 방향으로 독립운동을 모색했다. 권준도 만세운동보단 무력투쟁이 필요할 것이라 판단해 같은 해 11월 9일 김원봉·윤세주 등과 의열단을 결성한다. 거기서 그는 김상옥종로경찰서 투탄의거·김익상조선총독부 투탄의거·나석주동양척식주식회사 투탄의거와 김지섭의 도쿄 니주바시(二重橋) 투탄의거 등 의거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책임을 주로 도맡았다. 이로 인해 조선에서 검거되어 잠시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출옥 후 다시 상하이로 망명했다.
1924년에는 1차 국공합작이 일어나 국민당과 공산당이 힘을 합치는 일이 일어난다. 이를 보고 독립운동 노선도 하나로 합쳐야 한다고 생각하여 1926년 3월 8일 쑨원의 추천장을 받아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을 전공, 졸업한 뒤에는 교관으로 배속되어 민족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하나로 합치기 위해 노력했다.
1932년에는 난징에서 장제스의 지원을 받은 의열단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한다. 이 학교는 1935년까지 125명의 졸업생을 냈으며 권준은 거기서도 교관을 맡았다.
1933년, 권준은 국민혁명군 장교로 항일 무장투쟁에 참여한다. 그 와중에도 다른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하려고 했으며, 1937년 조선의용대 비서장으로서 항일우한방위전에도 참가했다. 1942년 조선의용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의 한국광복군에 편입될 때 임시정부에 들어가 1944년 내무부 차장에 취임하여 활동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해방 후 우한지구 교포선무단장 및 광복군 제5지대장을 잠시 맡다가 1946년 12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국군 창설에 도움을 아끼지 않았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육군 대령에 특채되어 제106여단장·초대 수도경비사령관·103사단장·서부지구경비사령관 등을 지냈다.
1959년 10월 27일 별세하였으며,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3. 참고 자료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263~264p

[1] 32세손 '''중(重)''' 종(宗) 인(仁) 무(武)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