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동(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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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26년 5월 1일 ~ 2019년 1월 28일 (향년 92세).'''내 이름이 왜 '위안부' 입니까? 내 이름은 김복동 입니다.'''
대한민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인권운동가이다.
2. 생애
1926년 5월 1일 경상남도 양산시에서 출생하여 양산보통학교[1] 4학년까지 다니다 어머니에 의해 집에서 내보내졌다. 그의 언니들은 먼저 시집을 갔다. 열다섯 살에 동네 구장과 반장, 일본인에게 속아서 공장 노동으로 알고 '위안부'로 끌려가게 되었다.
'위안부'로 대만, 광둥 성을 거쳐 홍콩, 싱가포르, 수마트라, 인도네시아 자바 섬, 말레이시아, 방콕 등으로 이동했다. 일제 패망 후 수년 후에 귀국했다. 후에 결혼했으나 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하게 되었고, 재결합 후에 얼마 못가 남편과 어머니를 떠나보내며 홀로 살았다. 구멍가게를 운영하다가 가게가 철거되는 바람에 아파트를 보상으로 얻었다. 나중에는 채소밭 일로 연명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세계 곳곳을 돌며 여성의 인권을 신장시키려고 뛰어다녔다. 1992년 피해자임을 밝히고 1993년 유엔인권위원회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처음으로 파견되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하였다. 미국, 일본, 유럽 등 여러 곳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2012년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쉼터에서 함께 기거하는 길원옥과 함께 나비기금을 출범했다.
2019년 1월 28일,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오후 10시 41분쯤 대장암으로 별세했다.[2] 향년 92세. 장지는 충남 천안의 망향의 동산. 일본 주요 매체 중에서는 아사히신문만 별세 소식을 다뤘다.
3. 국정감사 참고인
2016년 9월 26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한 김복동은 자기들에게 아무런 얘기도 없이 위안부 합의안을 체결했다고 박근혜 정부를 꾸짖었다. 그리고 "아베 신조를 비롯한 일본정부가 직접 석고대죄를 하기 전에는 어떠한 얘기도 듣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대충대충 처리할 바에는 때려치우라고." 말했다. 자신들이 대신 싸운다는 뜻이다.
4.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
김복동이라는 제목으로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2019년에 개봉했다.근데 하필 엄복동이랑 복동이 겹쳐서 이상한 드립들이 나오고 있다. 물론 복동이란 이름때문에 이런 것이지, 줄거리와 김복동 여사에 대하여 알고 깊이 연결하는 드립은 그리 없다.
같은 시기에 개봉한 봉오동 전투처럼 화려한 흥행가도를 달리는 것은 아니지만 개봉 이틀만에 전국 1만 5천 관객을 넘기면서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중에서는 꽤 흥행 중이다. 13일 째인 8월 20일에는 6만5천 관객을 넘겼고 개봉관이 차츰 사라진 9월 10일까지 전국 관객 82,210명을 기록해 꽤 흥행을 거뒀다.
그런데 이 영화의 해외상영을 위해 정의기억연대에서 모금 활동을 벌였는데, 제작사에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5. 기타
2020년 5월 정의연에 문제가 발생하면서 김복동 피해자의 활동이 마냥 좋게 끝난 것이 아니게 되고 있다. 여러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1] 현 양산초등학교[2] 이때 장례식때 문재인 대통령이 현직 국가원수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장례식에 참석해 조의를 표하였다.(이때 문재인 대통령은 천주교도인데도 고인을 향해 2배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