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정치인)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김삼'''
'''金三'''

[image]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명'''
김흥기(金興起)
'''자 / 호'''
여장(汝長) / 내곡(內谷)
'''본관'''
강릉 김씨[1]
'''출생'''
1918년 8월 23일
강원도 강릉군 구정면 금광리[2]
'''사망'''
2012년 7월 18일
강원도 강릉시 내곡동
'''종교'''
불교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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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김삼은 1918년 8월 23일 강원도 강릉군(현 강릉시) 구정면 금광리에서 아버지 김진건(金振建)과 어머니 문화 류씨 류기영(柳畿永)의 딸 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0살 되던 1927년에 성덕면 내곡리(현 강릉시 내곡동)으로 이주했으며, 강릉공립보통학교(현 강릉초등학교)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문맹타파를 목적으로 강릉읍 욱정(현 강릉시 성남동)에 삼원당이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 '''독서회'''를 구성해 징용 및 지원병 반대 등을 비롯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일제가 심어놓은 밀정에 의해 징용 반대 운동을 벌인 정황이 발각되었고, 이른바 '대동청년단' 사건에 연루되어 1940년 12월경 체포되었다. 그는 7개월 동안 구금되면서 고문을 당했고 함흥형무소로 이송된 뒤 1945년 2월까지 5년간 옥고를 치렀다.
8.15 광복 이후 건국청년회, 우국동지회, 한국독립당 강원도당, 민족통일건국전선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이승만 정권 때 대한민국 지방선거에서 강릉시의회 의원, 강원도의회 의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한편 윤봉길·김창숙 의사 기념사업회 부위원장, 김구선생 살해규명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강원도 강릉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김명윤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 후보로 강원도 강릉시-명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자유민주당, 민정당, 민중당, 신민당에 속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최익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원도 강릉시-명주군-삼척군 선거구로 공천을 받았으나 출마를 포기하여 대신 김명윤이 공천되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말년에 중풍 등으로 고생하다가 2012년 7월 18일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3. 여담


  • 본명은 김흥기(金興起)이나, 독립운동에 가담한 이후 '3.1 운동·삼천리강산에 3.1 운동 정신을 가지고 삼각산의 정기를 받아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김삼(金三)으로 개명한 것이라고 한다.
  •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시 92세의 연세로 거동이 불편함에도 선거관리위원회의 장애인 투표 지원차량 및 휠체어를 이용해 자택 근방인 강릉시 내곡동 명주초등학교에 마련된 제2투표구를 찾아 투표를 마쳐 눈길을 끌었다.#

4. 참고 문헌


  • 장정룡, 『강원도 출신 독립운동가 및 강원도 거주 실향민생애사 조사연구』, 강원발전연구원, 2005.#

[1] 한림공-청간공-위촌파. 38세 기(起) 항렬. 강릉 김씨 대종회장을 지낸 바 있다.[2] 인근의 구정리·여찬리·제비리·학산리와 함께 강릉 김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