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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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장 법률사무소(이하 김앤장)는 국내·외 로펌(법률회사) 업계에서 보기 드문 '오너 중심 지배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1973년 김앤장을 세운 김영무 대표변호사가 45년 넘게 확고한 오너로 김앤장을 이끌어왔다. '파트너십'이 구축된 국내 다른 로펌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김 변호사는 김앤장의 역사이자 저물지 않는 태양이다.
그만큼 설립자이자 오너, 로펌 내 최고참 선배로서 여전히 김앤장 내부에서 영향력이 큰 인물이다. 그가 탁월한 경영 능력과 리더십을 발휘해 김앤장을 업계 선두로 올려놓은 주역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지금까지도 김앤장 조직은 김 변호사를 정점으로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법조인.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설립변호사(Founding Partner).김씨가 김앤장에 들어와 느낀 신기한 것 중 하나는 독특한 사내 문화였다. 무엇보다 어느 조직이나 있는 ‘대표 뒷담화’를 들을 수가 없었다. 김앤장 법률사무소를 세운 김영무 대표변호사는 김앤장 조직 내의 실질적인 우두머리였다. 그가 없는 자리에서조차 동기 혹은 선배 변호사들이 김영무 변호사를 욕하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존경했다. 김앤장 변호사들은 김영무 뒤에 꼭 ‘박사님’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김앤장 직원들 간에는 상호 존중하는 풍토가 뿌리박혀 있었다. 소위 말하는 선배들의 ‘갑질’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다만 김씨의 학교 선배인 한 변호사는 김씨에게 김앤장에 들어온 이상 이곳의 룰(rule)을 익히라며, 이 같은 충고를 남겼다. “김앤장은 위에서 일을 뿌리는 구조다. 아무리 자기가 기업 일을 가지고 와서 수임을 해도 윗선에게 찍히면 배제될 수밖에 없다. 어떤 시니어 변호사는 자기 독단으로 일을 하다가 몇 달 동안 월급이 0원이었고, 결국 법원으로 돌아갔다고 하더라. 그러니 항상 변호사가 아닌 ‘김앤장 변호사’로서 어떻게 행동하는 게 맞는지 고민해야 한다.”
흔히 '''법조계의 이건희'''라고도 불린다.[1]
2. 생애
1942년 7월 19일에 태어났다.
1960년 경기고등학교(56회)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1963년 제2회 사법시험에 차석으로 합격했다. 1966년 현 사법연수원의 전신인 사법대학원을 마치고 미국에서 유학해 1967년 시카고 대학교 로스쿨에서 비교법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에 입학하여 1970년 JD 학위를 취득했다. 당시 미국 로스쿨에 들어간 한국 유학생들이 1년 남짓한 해외 법률가 전용 LLM(법학석사) 과정을 밟는 것과 달리, 미국 학생들과 같이 3년간 빡세게 공부하여 한국인 최초로 정규과정 학위인 J.D.(법무박사) 학위를 취득한 것으로 화제를 모았다.[2] 하버드 로스쿨 J.D. 과정 졸업 후 일리노이 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일리노이 주 변호사 자격도 취득하였다.
1970년 하버드 로스쿨 졸업과 일리노이 주 변호사 시험 합격 후 국제 로펌인 베이커 앤 맥켄지의 시카고 본사와 일본 도쿄 사무소에서 근무했다. 눈치 챘겠지만 병역기피를 위해 만 31세가 되어서야 귀국한다. 귀국하여 1973년 1월에 김앤장을 설립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전문 로펌시대를 본격적으로 개척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3. 논란
3.1. 국회 증언 거부 논란
2011년 박한철 헌법재판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김영무 변호사가 증인으로 채택되자.[3] 증인을 공동대표인 이재후 변호사로 변경해 달라는 김앤장 측의 로비가 있었고,# 결국 김영무 변호사는 청문회 이틀 전인 4월 25일 돌연 미국으로 출국하고서는 다음 날 외국 출장을 구실로 국회에 불출석 사유서를 내 버렸다.
이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김영무 변호사를 고발하였으나, 대한민국 검찰청은 김 변호사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을 하는 것에 그쳤다.
3.2. 세습 논란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는데, 장남 김현주에게 김앤장을 승계하려 한다는 소문이 요즘 파다하다.[4]
사실 김앤장을 제외한 우리나라 모든 대형 로펌에는 오너가 없다. 법무법인 형태인 이 로펌들은 파트너(구성원) 변호사와 어소시에이트(소속) 변호사로 나뉘는데, 파트너는 지분을 공유하고 어소시에이트는 월급을 받는다. 구성원 변호사가 되려면 소속 변호사로 경력이 쌓여야 한다. 파트너들은 법무법인을 공동으로 소유해 어소시에이트 변호사를 고용하고 이익을 나눈다. 자기 지분만큼만 권한을 행사한다. 대표변호사도 타이틀에 불과하고 설립자들도 특별한 힘이 없다.[5]
하지만 김앤장은 다른 로펌과 달리 김영무 대표가 오너이다. 모든 변호사가 김 대표와 계약을 맺는 방식이다. 김앤장은 법무법인이 아닌 공동법률사무소로서, 변호사들은 일종의 월급을 받는다. 월급을 주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김영무다. 그리고 김영무 대표가 7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포스트 김영무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관련 기사
3.3. 배금주의 논란
한쪽 의견에 따르면 어지간한 기업가들을 포함시켜 보더라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인데도, 개인적으로 기부나 그 밖의 공익활동을 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다. 물론 세상에 기부에 관심 없는 부자들은 많지만, 문제는 하필 그가 설립하고 평생 키워 온, 그래서 그의 분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김앤장이라는 곳 자체가 '돈만 많이 주면 악마라도 변호해 주는 데 아니냐'라는 의혹을 사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쪽 의견에 따르면, 김앤장의 조직 문화 자체가 워낙 비밀주의이다 보니, 정말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선행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 인권변호사 조영래를 후원했다. 내란음모 조작사건으로 인해 사법연수원에서 퇴소당한 조영래를 김앤장에서 비공식 사무원으로 채용했고, 조영래가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돼서 수배를 받던 때에는 어둠의 경로를 통해 조영래의 어머니에게 생활비를 대주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조영래 변호사와는 KS동기이기 때문에.
- 1997년부터는 김앤장의 공익활동 기록이 확인된다.
4. 기타
-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출신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주치의였던 김승현(金承鉉)(1911~1993)과 이현경(李賢卿)(1999년 사망) 사이의 4남 2녀 중 3남이다. 김승현의 장남 김영식은 UC 버클리 교수, 차남 김영기는 미네소타 대학교 교수, 그리고 4남 김영욱(金永旭)(1948생)은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를 역임하였고 현재 같은 대학 석좌교수이다.
- 2005년 한 해 570억원을 벌었고, 그 금액은 삼성 이건희 회장을 제치고 개인 소득 국내 1위라고 하여 화제가 되었다. 2006년에도 600억 원의 소득신고를 하였는데, 역시 이건희보다 많은 액수였다.[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