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우
[clearfix]
1. 개요
조선시대의 인물로 '''김일성의 증조부'''이다.
평양부 중성리에서 소작을 짓다가, 고평면으로 이동해 지주 집안의 묘지기를 맡았다.
본래 김일성은 본인의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서 자신의 집안이 전라도 전주에서 살다가[2] 8대조인 김계상이 함경도로 이전하면서 북으로 들어왔다고 주장하는데, 중성리에서 농사를 짓던 김응우가 먹고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지주 이평택의 묘지를 돌봐주기로 하고 산당집을 한 채 받아 이주한 것이 김씨 일가의 시초라고 한다.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1878년 3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묘지기인 김응우가 사망한 후에도 집은 그대로 김응우 일가의 소유가 되었는데, 이곳에서 '''김일성'''이 태어나면서 집은 '''만경대'''라는 이름으로 북한식 사적화가 된다.
2. 사후의 역사왜곡
북한에서는 1866년 미국의 상선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며 통상을 요구하다가 관민들에 의해 불타버린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통솔자가 김응우라고 주장하며, 김응우를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의 선두에서 위훈을 떨친 애국자'''로 선생'''님'''[3] 이라는 호칭까지 붙이며 존경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북-미 혹은 한-미 관계의 시작을 제네럴 셔먼호 사건을 바라 보고 있으며, 사건의 맥락을 제국주의 침략 야욕에 대한 조선 민족의 저항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이 사건의 중심 인물로서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를 내세움으로써 백두혈통의 정당성을 강화하고 있다.
물론 김응우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핵심 인물이라는 것은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역사왜곡'''인 것이, 실제로 이 사건의 총 책임자는 어디까지나 당시 평안도 관찰사이자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와 철산부사 백낙연이었고, 이 사건의 행동 대장 역할을 맡은 사람은 퇴역 군관 출신의 박춘권이었다. 당연히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다룬 당대 사료 그 어디에도 김응우의 이름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당시 김응우는 20살도 안 된 햇병아리 묘지기였을 뿐이지만 박규수는 이미 60을 바라보는 노회한 행정 관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