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존

 


'''강릉 김씨 2대 배향공신'''
'''문정공 김상기'''
'''문성공 김인존'''
'''고려국 중서문하성 문하시중
김인존
'''
'''시호'''
'''문성공(文成公)'''
'''수직'''
'''수태부(守太傅)'''
'''직위'''
'''문하시중(門下侍中)'''
'''작위'''
강릉군 개국후(江陵郡 開國侯)
'''본관'''
강릉 김씨(江陵 金氏)
'''이름'''
연(緣) → 인존(仁存)
''''''
처후(處厚)
'''아버지'''
김상기
'''생몰연도'''
? ~ 1127
1. 개요
2. 가족관계
3. 일대기
3.1. 선, 헌종 시대
3.2. 숙종 시대
3.3. 예종 시대
3.4. 인종 시대
4. 평가
5. 역임 관작


1. 개요


고려왕조 예종 문효대왕 대의 문관. 강릉 김씨 출신으로 뛰어난 정치 감각과 인천 이씨, 정주 유씨[1]와의 결혼을 통해 당대의 명신이 되었다.

2. 가족관계


할아버지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2] 대사(大師) 김양(金陽)이다. 아버지는 문정공 김상기. 남동생 평장사 김고(金沽)가 있었다.[3]
아내는 경원군부인(慶源郡夫人) 이씨(李氏)[4]. 아들은 김영석(金永錫), 김영윤(金永胤), 김영관(金永寬)이다.

3. 일대기



3.1. 선, 헌종 시대


김인존은 김상기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권세와 자신의 재능을 가지고 크게 출세했다. 고려사 기록엔 김인존은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원에 입사, 선종의 조칙을 성문화하였다.
이후 선종의 내시(內侍)[5]가 되어 최측근이 되었고, 헌종 대에도 큰 변화 없이 계속 일한 것으로 보인다.

3.2. 숙종 시대


숙종이 권좌를 차지한 뒤, 숙종의 내시가 되었는데, 숙종 이전에 있었던 정변 때문인지 최측근 일을 그만두고 파견직을 맡고자 자임했다. 그렇게 개성부사[6]가 되어 궁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길 반복한다.
확실히 머리가 좋았는지 요나라 사신을 감탄시킨 일화가 실려있다. 김인존은 앞서 언급했듯 어린 나이에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 때문에 그가 요나라에서 온 사신을 접견했을 때 30세도 안된 그를 무시했다고 한다.[7] 당시 요 사신의 직위는 학사(學士)로 국가에서 인증한 지식인이여서 더욱 낮게 보았을 것이다. 어느날 김인존과 요 사신 맹초(孟初)가 같이 길을 걷다가 사신이 시를 지었는데, 인존이 바로 응제했다. 놀란 맹초는 계속 시를 짓자 인존은 계속 응답했고, 맹초는 김인존을 달리 보게 되어 나중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금제 허리띠까지 주었다고 한다.
태자부에 소속되어 당시 태자였던 예종의 강사가 되었다. 예종에게 논어를 강의하기 위해 '논어신의(論語新義)'란 해설서를 직접 제작했다고 한다.
한 시대를 풍미한 숙종이 붕어하자 외교관으로 요나라에 갔다. 요나라는 관례대로 풍악을 틀어 맞이하려 했지만 김인존이 극구 거부하여 요나라도 틀어주지 않았다. 또한 의복도 상복을 입었다. 돌아갈 때도 풍악을 거부하고 상복을 입으려 했지만 지난번 고려에 사신으로 와 친분을 가진 학사 맹초가 설득하여 상복만 벗는 것으로 타협했다.

3.3. 예종 시대


이후 예종이 즉위하여 여진정벌을 시작하자 이를 말렸다. 전쟁 막바지에 조정에선 동북9성을 돌려주자 말자로 다툼이 벌어졌다. 김인존은 요나라와의 관계 및 국력을 거론하며 포기하자고 주장했고, 결국 군대는 철수된다.
이후 북송에 외교관으로 갔다. 북송은 고려 사신의 지위를 국신사(國信使)로 올려 요나라 사신과 대등하게 대우해주었다. 김인존을 추밀원에서 맞이해주고 백옥 그릇으로 연회를 열었는데, 김인존은 북송 조정이 지나치게 사치스럽다며 국정에는 신경쓰고 있는지 의심스러워했다.[8]
다시 고려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 김상기의 죽음을 전해듣고 바로 집으로 달려갔다. 세간엔 임금의 명을 받든 상태에서 자기 집안일부터 챙겼다며 비판했다고 한다.
그래도 재주는 재주였는지 이후 계속 승진해 중서문하성의 차관인 평장사가 된다. 요와 금의 전쟁으로 내원성과 포주성이 버려지자 예종은 바로 김인존을 시켜 빈 땅을 점령하게 한다.
예종은 장남 인종을 태자로 봉하고자 했고 장소를 물색했다. 예종이 인종의 태자 책봉식을 서경에서 하고자 했으나 이를 반대했다.

3.4. 인종 시대


'''개부의동삼사 - 수태보 겸 문하시랑 - 감수국사 - 상주국 - 강릉군 개국후 식읍 1,300호 식실봉 300호'''

'''開府儀同三司 守太保 兼 門下侍郞 監修國史 上柱國 江陵郡 開國侯 食邑一千三百戶 食實封三百戶'''

- 해동역사[9]

가 인용한 고려도경 기록. 1123년 당시 김인존의 관작.

전쟁군주 예종이 빈천한 뒤, 인종이 즉위했다. 이자겸은 인종의 숙부들을 하나씩 치웠고, 정쟁에 휘말릴까 두려웠는지 김인존은 일부러 낙마사고를 일으키고 퇴직을 요청했다. 중신들이 모두 사라지자 이자겸의 시대가 왔고, 인종은 점차 권신 이자겸을 싫어하게 된다.
인종은 은밀히 김인존에게 편지를 보내 이자겸을 내쫓고자 했는데, 김인존은 반대했다. 결국 이자겸의 난이 터지고 만월대는 불탔다. 이 때 인종은 김인존의 말을 들어야했다며 후회했다고 한다.
이후엔 문하시중이 되어 조정의 일인자가 되었다. 어느날 조정에 한 속보가 들어오니 남송이 금을 치는데 성공해 금이 대패했다는 정보였다. 이에 매파 신료들은 즉각 이에 호응해 금을 치자고 주장했다. 인종이 서경에 있으면서 김인존에게 편지를 보내 물어보자 김인존은 거짓 정보일 가능성이 높다며 우선 송에 보냈던 사신의 귀환부터 기다리자고 주장했다. 이윽고 돌아온 사신 김부식의 설명으로 거짓정보임이 드러났다.
이후엔 학술저서에 관심을 쏟아 정관정요에 주석을 달고 '시정책요(時政策要)', '해동비록(海東秘錄)'을 저술했다.
인종 재위 5년차인 1127년에 죽었고, 인종은 가장 좋은 시호인 문성(文成)을 추증했다.

4. 평가


김인존은 개경파 문벌귀족의 한계를 보였다. 여진정벌을 반대했으며 시종일관 부정적이었다. 예종의 '서경' 태자 책봉식도 반대했다. 또한 자기처신에 급급한 모습도 여럿 보였다. 숙종의 정변 때는 개성부사가 되어 밖을 나가버렸고 이자겸의 난 때도 아예 퇴직해서 도망갔다.
허나 김인존은 확실히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학자였다. 그가 저술한 책만 2권이고 주석을 단 책도 2권, 즉석에서 시를 지어내는데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이를 바탕으로 실무에도 뛰어났을 것으로 보이는데, 요나라와 북송을 종횡무진하는 실적을 보여줬다.
즉 김인존은 당시 귀족으로서의 입장상 한계를 보여줬지만, 학자로서 더할나위 없이 교과서적인,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준 신하라고 할 수 있다.

5. 역임 관작


'''김인존의 마지막 관작: 김영석 묘지명 기록.'''
'''시호'''
문성공(文成公)
최고의 시호.
'''수직'''
수태부(守太傅)
태부는 삼사 직으로 2번째로 높다.
'''직위'''
문하시중(門下侍中) - 판상서이형부사(判尙書吏刑部事) - 감수국사(監修國史) - 판국학사(判國學事)
문하시중은 중서문하성 장관, 판상서이형부사는 상서성 이부 및 형부 장관, 감수국사는 사관 장관이다.
'''훈위'''
상주국(上柱國)
1등급 훈위.
'''김인존의 마지막 관작: 고려사 김인존 열전 기록.'''
'''시호'''
문성공(文成公)
최고의 시호.
'''공신호'''
익성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
동덕공신호.
'''향직 품계'''
삼중대광(三重大匡)
1품 1등위 명예 품계.
'''문산계 품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종1품 정식 품계.
'''수직'''
수태부(守太傅)
태부는 삼사 직으로 2번째로 높다.
'''직위'''
문하시중(門下侍中) -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 - 감수국사(監修國史)
문하시중은 중서문하성 장관, 판상서이부사는 상서성 이부 장관, 감수국사는 사관 장관이다.

[1] 명의태후의 가문.[2] 상서성의 장관.[3] 김고의 아내이자 김인존의 제수는 부인 유씨(夫人 柳氏)로 유홍의 딸이다. 김고의 아들이자 김인존의 조카는 김의광(金義光)으로 승려였다. 김의광의 묘지명인 '정각수좌의광묘지명'이 현존한다.[4] 이자연의 손녀, 경원군 개국백(慶原郡 開國伯) 이호(李顥)의 딸. 이자겸의 남매.[5] 조선시대의 고자 내시가 아니라 고려국왕의 최측근으로 곁에서 시위하는 고위 관료를 의미한다.[6] 개경 개성부의 시장. 대한민국으로 치자면 서울특별시 시장과 같은 직위다.[7] 파한집 권중 기록.[8] 이는 결국 정확한 판단이 된다. 몇년 뒤, 요가 멸망하고 금이 부흥하자 북송은 크게 다치고 남하하여 남송이 된다.[9] 조선 왕조의 유학자 한치윤이 지은 역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