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

 

1. 서진의 인물
2. 조선의 인물
3. 고려의 인물
4. 후한의 인물


1. 서진의 인물




2. 조선의 인물




兪泓 1524년(중종 19년) ~ 1594년(선조 27년)
조선 중기의 문신. 시호는 충목(忠穆). 본관은 기계로 기계 유씨의 중시조 중 한 명이다. 시관으로 이이를 뽑은 적이 있다고 한다[1] 함경 병사, 개성 유수, 충청·전라·경상·함경·평안도의 관찰사, 한성 판윤을 두루 역임한 실무형 관료였다.
오랫동안 조선의 골머리를 앓게 한 종계변무에서 공을 세워[2] 윤근수, 황정욱과 함께 광국 공신 1등에 봉해졌다.
기축옥사 때는 정철과 함께 옥사를 지휘했는데 잔혹한 정철에 비해 죄 없는 사람은 살려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근데 기축 옥사 자체가 선조의 비호를 받는 정철의 원맨쇼에 가까워서 크게 영향은 없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를 호종했으며 우의정에 오른다. 파천을 할 때 자기 가족들을 먼저 대피시키고 임금과 신하들은 서울을 사수하자고 해서 욕을 먹기도 했다. 본인은 이미 일흔에 가까운 노인이니 죽어도 미련이 없겠지만 아직 천수를 누리지 못한 사람들한테야 곱게 보일리가 없다. 그러다 도원수 김명원의 장계를 그대로 읽고 본의 아니게 신각의 처형을 주도한다.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고 함경도로 향하자 세자를 수행하길 청한다.[3] 함경도가 이미 적에게 넘어갔다는 걸 파악한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고 남하하자 유홍도 뒤따르며 의병을 격려하는 격문을 돌린다.
왜군이 명나라와의 강화 회담으로 잠시 물러났을 땐 임금보다 먼저 서울에 와서 불탄 도성을 수습하고 전재민을 수습했다. 이후 좌의정으로 승진했으나 해주에서 왕비를 호종하다 객사한다.
참고로 그 의심 많은 선조가 일관적으로 신임한 드문 케이스의 신하였다. 전쟁 도중 대간들에게 지기는 있지만 일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아 끊임없이 탄핵받았고 본인도 나이가 많고 재주가 없다는 이유로 사직을 여러번 청했지만 선조는 대신을 함부로 바꿀 수 없다며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실록을 보면 능력 없는 자가 재상 자리에 오래 앉아 있었다고 사관에게 까이고 위급한 때에 재상을 바꾸지 않았다고 선조도 까인다. 인재를 보는 눈 하나는 세종만큼이나 뛰어나다는 선조가 계속 중책을 맡겼던 만큼 능력이 없는 것 아니었겠지만 이미 평균 수명을 훌쩍 넘긴 노령이었으므로 전시의 거친 업무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모양.
나름 조선사의 여러 굵직한 사건에 얽혀 있지만 대중적 인지도는 심하게 안습하다. 종계 변무는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기보단 뒷마무리를 처리한 거였고(게다가 홍순언의 야사 때문에 당시 실무자들은 전부 묻혔다), 기축옥사는 뭐 정철을 빼면 다들 존재감 없기는 매한가지지만, 임진왜란 초기에 유성룡, 윤두수와 함께 전시 삼정승으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 어떤 드라마에서도 유홍의 배역은 없었다. 심지어 광해군을 따른 신하들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4]에 있었던 신료임에도 광해군이 주인공인 매체에서까지 나온 적이 없다.
여담이지만 본인은 존재감이 없어도 사위와 외손자는 조선사에 엄청난 임팩트를 남긴 인물들이었다. 부인이 둘 있었는데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 모두 딸을 하나 낳았다(딸만 낳았다는 소리는 아니다). 이때 첫째 부인의 딸이 시집간 게 김장생의 아들이자 아버지와 함께 송시열을 가르친 김집이고, 둘째 부인의 딸은 김탁에게 시집가 김자점을 낳았다.

3. 고려의 인물


  • 유소(고려)의 아들로 명의태후유인저의 아버지다. 숙종(고려)과 김고[5], 윤언영[6]의 장인이다. 유홍(고려) 문서 참조.

4. 후한의 인물


  • 후한의 사공, 후한의 수학자, 후한의 현령으로 총 3명이 있고 유홍(후한) 항목 참고.
[1] 이때 이이가 한때 불교에 빠져있었다는 이유로 장원은 주지 말자고 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유홍이 선현들도 처음 공부할 때는 실수한 적이 있다. 이제 제대로 유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뭘 탓하냐?라고 두둔해서 장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2] 1584년 종계 변무 주청사 황정욱 일행이 대명회전에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되어 있는 오류를 고쳐놓겠다는 답을 받아왔는데, 이후 조선에선 대명회전 수정본이 거의 완성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유홍을 사은사로 보내 수정본을 받아오도록 시킨다. 기존에 명나라가 고쳐주겠다고 하고 입을 싹 닦은 전례가 있기 때문에 조선 측에서는 아예 수정본까지 속시원하게 확인해야 불안감이 사라질 거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중국 쪽에선 아직 황제가 수정본을 읽지 않았다는 핑계로 거부하려고 했고 이에 유홍이 사신단을 이끌고 피눈물을 흘리며 간청해서 수정본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고 한다.[3] 징비록에 의하면 이때 유홍이 선조에게 하직 인사를 청했는데 선조가 씹었다고 묘사된다. 당시 선조는 무책임한 행태로 권위가 엄청나게 흔들린 상황이었는데, 영의정 최흥원은 세자를 수행하기로 되어 있었고 좌의정 윤두수는 평양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우의정까지 세자를 따라가겠다고 하면 선조 곁에는 삼정승이 아무도 없으니 곱게 보이지 않았던 모양. 유홍까지 떠나자 당시 선조 곁에 있는 재상급 인사는 정철 밖에 없었다.[4] 영의정 최흥원은 강계까지만 호종하고 왕이 있는 의주로 돌아갔다.[5] 김상기의 아들이자 김인존의 동생.[6] 윤관의 아들이자 윤언이의 형제, 윤인첨의 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