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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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학렬(金鶴烈)
출생
1923년 3월 1일 경상남도 고성군
사망
1972년 3월 21일
본관
경주 김씨
경력
재무부 장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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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종합제철 기공식에서
왼쪽부터 당시 포항제철 사장 박태준-대통령 박정희-경제기획원 장관 김학렬.
1. 소개
2. 생애
3. 이모저모


1. 소개


한국의 전 경제관료. 전임자인 장기영, 후임자인 남덕우 등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경제개발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2. 생애


1923년 경상남도 고성군에서 태어났다. 부산상업학교와 원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일본 주오대학을 졸업하였다.
1950년 제1회 고등고시 행정과(현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에 응시하여 외무직 1회 합격자가 되었다. 1952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미주리 대학교 등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유학을 마치고 나서는 재무부와 경제기획원 등에서 근무하였다. 1963년 경제기획원 차관을 역임하였다. 1966년 재무부 장관, 대통령비서실 산하 정무수석비서관, 경제수석비서관 등을 역임하였다.
1969년에는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문서 상단의 사진에도 나오듯, 그의 경제부총리 재임 시절에 포항제철이 건설되기 시작했고, 이를 필두로 한국의 경제개발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고도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편으로는 1970년 신임 서울특별시장양택식서울 지하철을 건설해야 한다고 하자, 김학렬은 서울로의 인구 집중, 물가 상승 등을 이유로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후락 당시 주일대사가 지하철 건설은 세계적인 추세라고 하면서 양 시장의 손을 들어주자 지하철 건설쪽으로 결정되었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은 그후 4년만인 1974년 개통되었다.
1972년 1월 지병인 췌장암 치료를 위해 부총리 직에서 퇴임하였고, 불과 2개월 만인 3월에 향년 49세로 사망하였다.

3. 이모저모


  • 이름의 학() 때문에 별명이 쓰루였다(鶴을 일본어로 쓰루라고 훈독한다). 마침 꼬챙이처럼 호리호리한 체격이 학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 김수환 추기경과는 태평양 전쟁 말기에 학도병 동기로 징병된 인연으로 생전에 둘은 아주 막역한 사이였다고 한다.
  • 살아생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욕쟁이여서 장관 재임 시절 뭔가 수틀리는 일이 있으면 서슴없이 현란한 육두문자 스킬을 발휘했다고 한다. 그와 같이 일하던 공무원들은 불같지만 뒤끝은 없었던 김학렬의 성격을 이용하여 뭔가 일이 생기면 그의 화가 풀릴 때까지 잠적하거나 만약 붙잡혔더라도 온갖 욕설을 뒤집어 쓸 지언정 평온한 태도로 듣고만 있으면, 김학렬은 제풀에 지쳐 잠잠해 졌다고... 후일 장관까지 지낸 어느 관료의 회고에 따르면 재무부 간부들이 모인 회의에서 열받은 김학렬이 자신에게 마구 쌍욕을 퍼붓는데도 개의치 않고 싱글벙글 미소만 짓자, 김학렬은 어이가 없었는지 자리에 앉더니 뜬금없이 볼펜으로 탁자를 두들기며 남진의 '가슴 아프게'를 불렀다고 한다.
  • 김학렬의 3남이 김영수 이스트우드 컴퍼니 CEO다. 이 사람이 방용훈 부인 자살 사건의 피해자 이미란씨의 형부로 처제의 억울한 죽음을 풀기 위해 방씨 일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